00470 2020 =========================================================================
#470
[사실... 전에 일 때문에... 내가 조금 아니, 많이 민감해 하는 것 같아... 별 일 아닌데... 믿으면, 널 믿으면... 아무리 의심스럽고 질투 나도 이해해줘야 하는데... 바보같이 그러질 못하는 것 같아. 나 속 많이 좁지? 미안... 이런 남자라서.]
믿음을 쌓아 서로를 신뢰하는 것은 어렵지만, 이것이 무너지는 것은 너무나도 쉽다.
한번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믿음을 배반당했기에, 그래서 더욱 이에 민감하다는 그의 자조 섞인 사과에 그녀는 가슴이 아팠다. 그 누구보다 그런 그의 마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 본의 아니게 그에게 상처를 줬다는 점이 그녀의 뇌리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을 정도로.
“다녀왔습니다.”
때마침 들려온 동생 유재연의 목소리에 그녀는 상념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어? 언니. 집에 있었어?”
“집에 아무도 없는데, 인사는 왜 했어?”
“습관. 오늘은 촬영 빨리 끝났나봐? 언니 대상 받아서 오늘은 쉬는 거?”
“조금 전까지 촬영했어. 새벽에 나가야해서, 오늘 저녁은 집에 있는 거고.”
“아... 그렇구나.”
새벽 촬영이 있기에 저녁 시간에 맞춰 끝난 촬영 덕에 간만에 저녁 시간에 맞춰 집에 들어오는 동생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동생 유재연의 얼굴엔 놀람과 의아함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 저녁 시간에 맞춰 얼굴을 마주한 게 얼추 떠올려 봐도 수개월 전이었으니까.
“작품 하나 끝내보니까, 어때?”
“응? 응... 그냥 조금 아쉽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고... 그냥 그래.”
유재연 또한 연기에 도전하여 제법 괜찮은 성적을 거뒀었다. 시트콤이긴 하지만, 특유의 보이시한 매력을 마음껏 뽐내,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첫 작품 같은 경우 성적 여부와 상관없이 많은 것을 남기게 되기에, 언니인 유지연의 얼굴엔 일말의 걱정이 담겨 있었다.
“배역에 애정이 많을수록, 많이 몰입할수록 그리고 최선을 다하면 다할수록 빠져나오기 힘든 법이야. 다른 배우들이랑 호흡이 잘 맞고 또 성적이 좋으면 좋을수록 더 그럴 테고.”
“응...”
“다음 작품 대본 들어온 건 있어?”
“어? 응. 서너 개 정도 들어왔어.”
“너무 성적에 신경 쓰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연기, 배역에 신경 써 봐. 아직 성적에 연연할 그런 커리어가 있는 게 아니니까, 지금은 네 연기 폭을 넓히는 게 중요해.”
“응. 언니. 고마워. 걱정해줘서.”
“연기 학원에서는? 어려운 점은 없어?”
“그냥... 어렵긴 한데, 계속 해보는 거지. 그리고 시트콤이랑 정극은 다른 거니까, 괜히 욕먹기 싫어서 더 포기 안하려고 하는 것두 있구...”
그녀 자신이 배우라서 좋은 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먼저 걸어갔던 길이기에, 뒤따라오고 있는 동생 유재연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제법 적절한 조언을 건넬 수 있다는 점이 유지연 그녀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음... 저번에 그 남자는 어떻게 됐어?”
“어?”
하지만 그 외적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이러한 그녀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큰 효과를 지니지 못한 듯 했다.
“저번에 너 시트콤 종방연 끝나고 데려다 줬던... 민식씨라고 했나?”
“민식 오빠가 왜?”
“회식 할 때마다 너 데려다주는 것 같던데... 종방연 때도 그렇게 너 챙겨주는 거 보면 너 마음에 들어 하는,”
“됐어. 그런 거 아니니까, 그런 말 하지 마.”
시트콤을 하면서 상대역으로 출연해 많은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었던 배우와, 사적으로도 꽤나 친해진 듯한 모습을 보여줬기에 꺼낸 말이거늘, 생각이상으로 민감하게 대응하는 유재연으로 인해 저녁 식사를 앞둔 집안의 분위기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방송에서도 몇 번 네가 이상형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예 마음에 안 드는 거야?”
“그냥 아는 오빠야. 오빠가 내가 이상형이라고 말했던 건 그냥 장난으로 말했던 거고. 아, 배고파. 나 씻고 올게.”
서둘러 말을 돌려버린 채, 욕실로 들어가는 동생 유재연을 보며 유지연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동생의 속내를 모르지 않기에 그리고 자신의 마음과 현실을 모르지 않기에 그녀는 죄책감을 느껴야만 했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좋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제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속 편한 소리일 뿐이었다.
“그래, 얼른 씻고 와. 밥 차려놓을게.”
동생을 위해 버틸 만큼 버티고 또한 자신의 감정을 속여 왔지만, 결국 자신을 먼저 생각해버린 언니로서 이런 감정들을 그녀는 좀처럼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저 피곤한 몸으로 들어온 동생을 위해 맛있는 밥상을 차려주는 게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일 뿐.
*
[수많은 엘프들이 중간 대륙을 떠났소! 그들의 의무를 져버린 채 또다시! 또다시! 자신들의 안위만을 위해 서부대륙으로 떠났단 말이오!]
[의무를 져버렸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너무 무례하군요. 당신이 아무리 아르센의 마음을 사로잡은,]
서로 간의 호흡은 거의 완벽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별도의 컴퓨터 영상처리작업을 위해 실내의 스튜디오에서 진행 중인 터라, 해당 신이 지니고 있는 배경에 대한 지각이 어려울 텐데도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엘라인!]
두네달인의 지도자이자, 인간 나라 고르단의 잊혀진 왕인 아리신 조차 격앙된 감정을 숨기지 못할 정도로 대표단의 갈등이 치닫는 부분인지라, 촬영장의 분위기는 절로 심각해져있었다.
[아리신 그냥 상대하지 말게. 어차피 엘프란 족속들은 겉으론 고고한 척이란 고고한 척은 다하는 종족 아니던가? 그러면서 적이 닥치면,]
[닥쳐요! 짜리몽땅한 필멸자 주제에!]
[뭐, 뭣이! 감히!]
더욱이 사사건건 엘프족 엘라인을 걸고넘어지는 드워프 팔만까지 이 상황에 기름을 끼얹자, 대표단의 분위기는 거센 화염과도 같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만들 두게!]
중간계에 내려온 신으로서 본신의 능력이 한없이 제한된,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마법실력과 지혜를 지닌 마법사 가르드가 아니었다면 상황은 좀처럼 끝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두네달인과 카린. 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네. 특히 카린에게는 더욱 큰. 그러니, 서로간의 분쟁은 여기서 그만두게.]
[흥. 상상속의 카린 따위.]
[영원불멸할 이여. 더 이상 분란을 만들지 말게나. 그대가 그리 말한다 해도, 있었던 사실이 없던 것이 되지는 않으니.]
[흥!]
카린은 중간계 대륙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단순한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그런 존재였다.
머나먼 동쪽 대륙으로부터 건너온 이방인으로서, 용맹하기 그지없는 드워프에게는 부끄러움의 역사를, 두네달인에게는 자신들이 이룩한 영광의 시대를, 엘프에게는 드워프와 마찬가지의 부끄러움과 거기서 더 나아간 열등감의 기억까지 상기시키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그 역사가 어떤 역사인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까지는 아직까지 대본에 나와 있지 않았다. 2부 대본을 받아든 지금까지도 어째서 각 종족들이 저러한 감정들을 카린이라는 종족에게 느끼고 있는지가 나와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저나, 안내자가 따로 있다고 하지 않았소? 마법사여.]
[아! 바라밀. 고르단의 용감한 전사여. 잠시만 기다려보게. 여기 어딘가에서...]
[사우스 팔라스, 로단, 지르단, 소노린... 고르단과 혈맹을 맺은 용감한 형제들에게 어서 이 소식을 알려야하오. 게다가 다른 종족들까지 찾아가려면... 안내자는 무조건 필수요.]
[걱정하지 말게나. 바라밀. 그는 내가 알고 있는 한 중간대륙에서 가장 길눈이 밝은 사람이니 말일세.]
[컷! 아주 좋네! 아주! 나이스!]
어쨌든 내가 등장하기 직전의 신을 촬영하는 배우들을 보니, 절로 몸이 들떴다. 무척이나 익숙한 호흡을 자랑하는 배우들의 열연 속에 나 또한 포함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가슴속 깊이부터 샘솟았다.
[오늘 컨디션 좋은데?]
[그러게?]
어제 대부분의 배우들에게 인사를 나누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먼저 그들에게 다가갔다. 앞으로 꽤나 오랫동안 연기 호흡을 맞춰야 할 이들이고 또한 상대적으로 늦게 촬영에 합류했기에 이는 필수사항이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어제 인사를 나눠서인지 아니면 내 복장이 그들과는 꽤나 차별 점을 두고 있는 옷차림이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어제 강렬한 인상을 내게 남겼던 엘라인 역의 스테파니 팔빈이었다.
[어?]
[휘이이익!]
[와우!]
그런 그녀의 꽤나 큰 목소리에 같이 있던 배우들의 시선이 모조리 내게로 쏠렸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운명의 전쟁 ‘리’ 역할을 맡게 된 강지혁입니다. 반갑습니다.]
[오! 마이... 갓!]
[맙소사!]
그런데 생각 이상으로 반응이 뜨거워 더 이상 다가갈 수가 없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그 정도로 저들의 환대는 조금 과한 감이 없지 않았다.
[하하! 이렇게 만나게 되는 군! 나는 이번 영화에서 가르드 역을 맡은 조나나 맥컬린일세. 이거, 실물이 훨 낫구만!]
할리우드에서의 동양인 차별은 무척이나 흔한 편이었다. 나야 운이 좋아, 단독 주연에 영화 자체가 온통 주연에게 초점을 맞춘 그런 영화여서 그런 점이 덜했지만, 이는 꽤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차별이라는 것은 꼭 대놓고 그 대상을 비난하는 것뿐만이 아닌, 자신이 지닌 선입견을 바탕으로 그 대상의 능력을 추측하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름 걱정을 했었다. 일단 복장부터가 저들과는 꽤나 어울리지 않는, 북유럽 쪽 신화를 바탕으로 한 운명의 전쟁에서 나 혼자 패랭이에 보부상 한복을 입고 있었는지라 더더욱.
[아리신 역을 맡은 소린 모르텐이네. 반갑네!]
[숀 스턴. 바라밀 역을 맡았네. 하하!]
괜한 걱정이었나 보다. 다들 하나 같이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이해줬으니까.
[복장부터가 아주 대단한데? 하하!]
혼자서만 사극 포스를 뿜어내고 있는 내가 저들 사이에서 조화를 이뤄낼 수 있을까? 싶었지만, 자신감이 생겼다. 안 그래도 열심히 해보겠다는 의지와 저들 사이에서 호흡을 맞춰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었는데 반겨주는 이들에게서 이렇다 할 텃세나 거리낌이 느껴지지 않아서 심장이 더욱 두근두근 거렸다.
하아. 이 영화 왠지 예감이 좋다. 그것도 엄청.
*
“아니 이게 말이 돼요?”
오클랜드 국제공항에서 귀국 비행기를 타기위해 버스에 올라타는 이들의 얼굴이 무척이나 어두워졌다. 특히 그런 그들을 대표해서 앞장선 대한민국 올림픽 여자 배구팀 주장 김유경의 얼굴은 어둡다 못해 불만이 한 가득이었다.
“여기 올 때도 그렇고 경기장 이동할 때도 그렇고. 이게 말이 되냐고요! 통역사도 없어, 경기장 출입 카드도 부족해. 도대체가!”
한 나라의 대표로서 이곳 뉴질랜드에서 열린 도쿄 올림픽 최종예선에 참가한 여자 배구팀은 서러움과 불만을 느껴야만 했다. 바로 자신들을 지원해줘야 할 대한민국배구협회 때문에.
“적어도 비행 편은 비즈니스로 이동해야죠. 선수들 컨디션도 있는데. 누가 제대로 된 회식이나 그런 걸 바랍니까? 통역부터 시작해서 지금 협회에서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하다못해 엔트리도,”
“유경아. 저기 소리 좀 낮추고. 그게...”
“아니 진짜. 씨발. 못 해먹겠네.”
“뭐? 너 지금.”
“왜요? 열 받아요? 지금 나 아무것도 눈에 안 보이니까. 알아서 기어요. 더 이상 짜증나게 하면 협회고 뭐고 그냥 언론에 지랄해버릴 테니까.”
자연스럽게 말이 거칠어지고 언성이 높아지자, 협회를 대표해서 이번 대표님 여정에 동행한 이의 얼굴은 절로 붉어졌다. 하지만 그는 이런 감정들을 속으로 삭힐 수밖에 없었다.
다른 대표님 선수들과는 달리, 눈앞에 있는 김유경은 한국에서는 나올 수 없는, 세계 최고의 여자 배구 선수이자 수틀리면 협회고 뭐고 다 받아버릴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으니까.
“선수는 이코노미에서 다리도 못 펴고, 감독, 코치, 협회 사람들은 비즈니스에서 발 뻗고 편하게 간다? 지금 장난해요? 아니 씨발. 진짜.”
“유, 유경아. 그만 하면 됐다. 나도 여기까지만 하면 없던 일로,”
“아이 씨발. 뭘 없던 일로 해. 아니, 없던 일로 하지 마. 하지 마라니까?”
더욱이 그가 생각해도 협회 측의 대표님에 대한 지원 자체가 워낙 부실했는지라, 그는 명백히 을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가 을이 된다고 해서 지금 상황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언니. 그만하면 됐어요. 그냥 가요.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요. 더러워서 피하지.”
“언니. 저희 괜찮아요. 한두 번인가요.”
선수들이 잡아끄는 손길을 김유경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 또한 모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 이는 협회 측 인사들 가운데서도 가장 직위가 낮은 이이고 나머지 인사들은 이미 리무진을 타고 공항으로 먼저 떠났다는 것을.
하지만 그런 그녀일지라도 모르는 것은 있었다. 그런 그녀들을 누군가가 무척이나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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