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66 2019 =========================================================================
#466
차에 타서 두 눈을 감은 채, 감정을 다스려보려 했다. 내 자신이 속이 너무 좁은 것 같아 한심했다. 홧김에 자리를 벗어난 것도 후회가 되었고.
지금이라도 다시 갈까.
멍청한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며 이를 떨쳐버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두 눈을 감은 채, 좌석 시트에 기대고 있던 내게 낯익은 소리가 들려온 것은.
[덜컥]
머릿속을 가득 메우던 그녀가 보조석 차문을 열며 모습을 드러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음한편에 가득 차 있었던 질투와 서운함, 섭섭함 그리고 한심함 등이 일순간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등장은 확실히 뜻밖이었으니까.
“하아... 누구는 좋겠네.”
바보같이 그런 그녀를 두고 퉁명스러운 말을 내뱉어버렸다. 나 자신의 속 좁음에 대한 한심함도 한심함이지만, 그보다 더한 서운함과 섭섭함이 내게 그런 말을 내뱉도록 만들어버렸다.
“나는 보고 싶어서 촬영장까지 찾아왔는데, 누구는 잘생긴 남자랑 단둘이 밥도 먹고. 하아... 내 님은 어디 있는지. 크리스마스이브인데 너무 외롭네.”
따라서 그런 내 행동은 시작부터가 후회스러움을 달고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내 이어진 그녀의 행동에 즉각적인 행동을 취하지 못한 것 또한 바로 그 때문이었고.
“어?”
이를 앙다물고 있는 유지연의 모습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흘리다 못해 넘칠 정도로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모습이 중요했다.
“어... 어...”
나를 바라보며 눈물이란 눈물을 모조리 쏟아낼 기세로 울고 있는 유지연의 모습에 당황한 나머지 바보같이 말을 잇지 못했다.
“흑흑...”
뒤늦게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려 했지만, 때맞춰 내게 덮치듯 안겨오는 유지연으로 인해 그마저도 하지 못했다.
“미안... 미안... 흑흑...”
촬영을 앞두고 있을 진데, 이렇게나 눈물을 흘리면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 건지. 우는 유지연도 그리고 울게 만든 나도 참 대책이 없었다.
“뚝.”
두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두 눈에 가득 담긴 눈물을 훔쳐냈다. 벌써부터 부어오른 듯한 두 눈과 코를 보자니, 미안했다. 속상했던 마음과 서운했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져버려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저 유지연을 울리게 했다는 점에 마음이 쓰였을 뿐.
“흑흑...”
이렇게나 눈물을 펑펑 흘리는 그녀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나의 손길에 어느 정도 끓어오르던 감정을 진정시킨 듯 했지만 눈물만은 여전히 흘려 내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한동안 눈물을 쏟아냈다. 나의 가슴팍에 기대어 계속해서.
*
그녀의 흐느낌이 느껴지지 않았을 때, 그녀는 거짓말처럼 잠들어있었다.
우는 것은 굉장히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행위.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좀처럼 일어날 기색 없이 내 품에서 고른 숨소리를 내쉬고 있었다.
“어...”
어쨌든 그래서 지금의 상황을 맞이하게 됐다.
“지연이가 잠들어버려서 그런데, 지금 당장 촬영 들어가야 하나요?”
“그, 그게... 가... 강지혁씨?”
잠들어 있는 그녀를 계속해서 내 품안에 두고 싶었지만, 오늘 촬영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잠들어 있는 그녀를 깨우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손수 그녀를 안아든 채, 대기실을 찾았다.
코트로 그녀를 감싸 안았기도 하거니와, 스태프들이 아직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지 않아서인지 촬영장이 전체적으로 한산했다. 그래서 다행히 그녀의 대기실까지 다른 사람과 마주치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문제는 대기실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어디 눕힐만한... 저기 소파 위에 짐들 좀 치워주실래요?”
“지연이가 어째서 지혁씨... 네? 아, 네. 자, 잠시만.”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이 서둘러 소파 위를 치우는 사이, 스타일리스트들로 보이는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아야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유지연을 깨우지 않은 상태에서 편하게 눕히는 데 온 신경을 쏟았을 뿐.
“으응...”
하지만 유지연을 소파에 내려놓고 그 위에 내 코트를 이불처럼 덮어주고 나니, 그러한 시선들을 마냥 무시할 수가 없었다.
“감독님한테 말해서 촬영 시작을 조금만 늦춰달라고 전하시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잠들어 있기도 하고 메이크업이랑 머리 수정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테니까요.”
마치 동물원 원숭이 보듯, 아니 동물원의 무척이나 희귀한 동물을 보는 듯한 주변 이들의 반응에 진땀이 나긴 했지만 차라리 사람들의 그런 반응이 나았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듯, 그들이 말을 잇지 못한 덕에 나로서는 일일이 지금 상황을 해명해야하는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휴우. 나도 모르겠다. 이젠.
*
눈을 뜨기도 전에 그녀는 자신이 느끼고 있었던 따뜻함과 포근함이 사라졌다는 것을 먼저 느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자리에서 번뜩 일어났다.
“어? 지연아.”
“지연아 깼어? ...... 지금 감독님한테 말씀드려서 30분쯤 뒤에 촬영 재개하셔도 된다고 전해드려. 죄송하다고 다시 말씀드리고.”
매니저 오빠와 스타일리스트 언니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존재하는 대기실. 그런 그녀의 두 눈엔 너무나도 익숙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익숙한 광경을 보고 있음에도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떠올릴 수 있는 마지막 기억의 조각에서 그녀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리고 누굴 눈앞에 두고 있었는지 모르지 않았기에 더더욱.
주변을 자꾸만 두리번거리는 그녀의 행동은 이내 들려온 매니저의 목소리로 인해 중단될 수 있었다.
“갔어. 아까 너 거기에 눕히고.”
“어, 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알고 있는 듯한 매니저의 말로 인해 그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나중에 쉴 때, 연락하라고 하던데...”
연락. 연락. 연락.
그녀의 머릿속은 이내 연락이라는 단어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단어들이 가리키는 행동을 그녀는 끝내 실천으로 옮기지 못했다. 혼란스럽기 그지없던 속내가 어느 정도 정리되어 가는 가운데, 매니저와의 대화는 그녀가 그동안 숨기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나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까.
“지연아. 그... 그 사람 강지혁 맞지?”
“어?”
“일단 촬영준비하고. 그... 대표님한테 말씀드렸더니, 모레 협찬사 드레스 살펴볼 때 직접 오신다네. 그러니까, 일단은......”
하지만 그런 그녀의 혼란스러움은 이내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살펴본 그녀 자신으로 인해 사그라들 수 있었다. 서둘러 그녀의 메이크업과 헤어를 정리하려는 스타일리스트들의 분주함 또한 크게 한 몫 했고.
*
돌이켜보면 단순히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를 함께하지 못하게 됐다는 점에서 비롯된 미안함이 그때의 눈물을 유발시킨 모든 원인은 아니었다.
솔직히 눈물을 흘릴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촬영 때문에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점에서는, 그녀의 책임 아닌 책임이 조금은 포함되어 있었을 지라도 그게 눈물을 펑펑 흘려 잠들 정도로 잘못된 사안은 아니었으니까.
[흐음... 남자친구 없나봐?]
[네?]
[아니. 남자친구 있으면 휴식기도 길게 가질 텐데. 배우들은 보통 그러잖아. 근데 지연이 너는 작품 활동 꾸준히 계속하고 있는 것 같아서. 하하. 내가 너무 실례되는 질문을 던졌나?]
미안함과 더불어 함께하지 못한다는 아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과 달리, 주변 사람들에게 남자친구가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자신이 한심스러워서였다.
사실 관계는 중요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여기고 있다는 게 이상하게도 크게 다가왔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위해 촬영장까지 찾아와준 그가, 자신에게 실망했다는 듯이, 섭섭함과 서운함을 한껏 담아 건넸을 때. 그녀는 그 말과 행동에 담긴 감정들이 마치 가시와도 같은 아픔으로 다가옴을 느꼈다.
이런 현상에는 촬영이고 뭐고 그가 속상해하는 게 너무나도 싫어서, 그런 자신이 너무나도 어색해서 그런 것도 큰 몫을 했다. 낯선 자신의 모습에서 비롯된 어색함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지연아?”
겁이 났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래서 쉴 때 전화를 하라는 그의 말을 건네받았음에도 그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두려웠다. 그의 혹시 모를 반응이 그리고 남들이 보기엔 별 거 아닌 일에도 과민 반응하는 자신이.
“지연?”
“아... 네. 대표님.”
그런 상황에서 이수덕 대표의 방문은 정리되지 않은 방에 손님을 초대한 것만 같은 기분을 그녀에게 선사했다.
“어떻게 된 거야?”
자초지종을 묻는 이수덕 대표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상황을 어물쩍거리며 넘길 수 있을 거라 생각지는 않았다.
“그...”
“둘이 사귀고 있는 거야?”
평소 때라면 차가운 얼굴로 대수롭지 않게 이수덕 대표를 마주했을 테지만, 지금 그녀는 무척이나 초조한 상태였다.
“하하... 일만 하는 줄 알았더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지혁을?”
그가 매니저 오빠와 스타일리스트 언니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안은 채 데려왔다는 사실. 그 사실만으로 자신과 그의 관계를 자신의 입으로 떠벌리는 게 괜찮은 것일까.
그런 고민이 들었지만, 이내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거, 이거. 그런데, 어제 눈 탱탱 부었던 건 무슨 일인데? 싸웠어?”
“그건...”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우리 유지연이 연애를 하다니. 하하...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강지혁을? 이야. 역시 우리 유지연이......”
다행인 것은 이수덕 대표의 얼굴이 무척이나 밝았다는 것이었다. 평소 연애 좀 하라고 성화를 부린 게, 결코 가식은 아니었다는 듯 그의 얼굴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을 뿐 부정적인 면모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강지혁은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건데? 사람들 볼지 모르는 촬영장에서 너 안고 대기실까지 왔다며. 거기다 매니저랑 스타일리스트들 전부 있는 곳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마냥 동네 아저씨처럼 허허 웃으며 감탄만 내뱉은 것은 아니었다. 뭐, 애당초 그럴 예정이었으면 한 회사의 대표인 그가 직접 이곳에 오지 않았을 테지만.
“그게...”
그녀답지 않게 명확하지 않은 대답만, 말을 흐리며 대답을 회피하는 유지연 때문에 이수덕 대표는 이렇다 할 만족할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그다지 불만이나, 못마땅한 기색이 없었다.
“뭐, 당사자한테 물어보는 게 빠르겠네.”
“네... 네?”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이수덕 대표의 말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이를 유지연이 깨닫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저기. 대표님.”
[똑똑똑]
그리고 그런 이수덕 대표의 말을 듣고 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때마침 들려온 문 두드리는 소리는 그녀에게 어떠한 예감을 여지없이 건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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