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65 2019 =========================================================================
#465
“엄청 친한가보다?”
“어?”
목적지에 거의 도착한 것인지, 자고 있던 나를 깨워준 석현 형의 목소리에 창문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잠시. 이내 건네받은 석현 형의 질문에 자연스레 반문하고 말았다. 아니, 주어를 빼먹는 건 도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거야?
“이렇게 직접 찾아가서 밥까지 같이 먹을 정도면 명탐정 K에서 진짜 잘 맞았나보네.”
“아. 장현성 감독님?”
“그래. 게다가 네가 OST까지 선물했다면서?”
“뭐, 그랬지.”
형식적인 이유로 장현성 감독님에게 인사를 드리러 간다는 걸 들었을 뿐인데, 왠지 모르게 톱니바퀴가 잘 맞아떨어진 듯 했다. 그래서 석현 형으로부터 이런 소리까지 듣게 되었고 말이다.
“거의 도착했으니까, 준비해. 근데 오늘은 뭐 준비 안 해도 되냐?”
“어?”
“너 뭐 촬영장 갈 때나 그럴 땐 항상 뭐 사들고 갔잖아.”
“아! 이번엔 그냥 식사나 같이 하려고 간 거라서.”
유지연을 보기위해 장현성 감독님을 이용한다는 것이 조금 찔리긴 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마음은 편했다. 크리스마스이브 기운이 물씬 풍기는 거리의 풍경에 절로 옆구리가 시렸기에, 그녀에게로 향하는 이 길이 더욱 좋았다.
“형 미안. 나 때문에 데이트 시간 늦춰졌겠네?”
“미안은 무슨. 저녁 때 맞춰서 보기로 했어.”
“그래? 좋겠네. 여자 친구랑 같이 보내고.”
“자식이. 너도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잖냐? 네가 마음을 안 먹어서 그렇지.”
아니 이 사람이 누굴 놀리는 건가? 마음을 안 먹긴 뭘 안 먹어? 지금 마음가는대로 했으면, 막 유지연 데려다가 막, 찢고 빨고 물고 뭐 할 건 다했겠구만. 크흠.
하아. 말을 말자. 말을.
*
“감독님.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하하! 이게 누구야! 이거, 이거 얼굴 좋아진 거 보니까, 이번 영화도 대박 나는 거 아니야? 하하!”
볼일을 볼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석현 형을 택시 태워서 억지로 보낸 뒤, 나 홀로 세트장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런 나를 장현성 감독님은 무척이나 반갑게 맞아줬다.
“갑자기 연락 와서 놀랐어? 한국에 쉬러 들어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제가 드린 노래 OST로 선정됐다는 거 들었어요. 감사해요. 그래서 인사 겸 연락드린 거에요.”
“감사는 무슨. 감사는 내가 해야지. 스태프들 몇몇한테도 들려줬더니, 아주 좋다고 난리야. 난리! 하하!”
이곳을 직접적으로 찾은 이유의 100%는 유지연 때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장현성 감독님의 영화에 관심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나 또한 미스터 지 후속작과 운명의 전쟁이 아니었다면 무조건 출연을 결심했을 정도로 플롯도 괜찮았고 장현성 감독님의 연출력도 신뢰했기 때문이다.
“영화 촬영 일정이 강행군이긴 한데, 배우들도 그렇고 촬영 팀들이 전부 호흡이 잘 맞아. 그래서......”
그래서인지, 꽤나 흥미로웠다. 세트장의 모습부터 장현성 감독님과의 대화 자체가.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하지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촬영장에 왔으면 굳이 찾으러 가지 않아도 볼 수 있을 줄 알았던 그녀가 안 보인다는 점이.
응? 아니 그런데 유지연은 그렇다 쳐도 사람이 왜 이렇게 없는 거야?
“아! 지금 밥 먹으러 갔지.”
“그럼 배우들도...?”
“응?”
아차. 실수하고 말았다.
지금이 밥 때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길.
보아하니, 스태프들을 물론이거니와 무엇보다 중요한 유지연이 이미 밥을 먹으러 간 것 같아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 지연씨랑 친분 있다고 했지? 아이고. 이럴 줄 알았으면 지연씨도 부를 걸 그랬네.”
이내 표정관리를 하긴 했지만, 속이 쓰렸다. 멍청한 자식. 이런 타이밍 하나도 못 맞춰서. 어휴.
속으로 자책을 하는 가운데, 이를 티내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했다.
그런데 이내 이어진 장현성 감독님의 말에 그런 노력이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아... 따로 밥 먹으러 갔나 봐요?”
“아까 보니까. 혁준 씨랑 둘이 밥 먹으러 간 것 같던데?”
“네?”
내가 잘못들은 것일까?
뭔가 심히 옳지 않은, 신경을 거스르게 만드는 말을 들었는지라 절로 반문하게 되었다.
“혁준씨면... 상대 배우역이요?”
“그래. 그래. 상대 배우 역에 최혁준이라고 요즘 잘나가는 배우 있는데 지혁씨도 알고 있나봐? 뭐, 그 친구 연기도 제법 잘하고 말이야. 이대로만 가면 톱스타는 따 놓은 당상......”
“그런데 저한테 주셨던 플롯 보면 주인공들이 겹치는 씬이...”
“아! 혁준씨가 촬영 없을 때도 자주 오거든. 오늘도 새벽까지 촬영 있었는데, 몇 시간 뒤에 바로 촬영장 와서 지연씨 촬영하는 것까지 지켜보더라니까? 아주 이번 영화에 엄청 열정적이라서 스태프들도 덩달아 열심히 하더라고. 하하! 그나저나 어쩌나? 아까 보니까, 지연씨가 혁준씨랑 같이 밥 먹으러 간 것 같던데?”
다행이라면 장현성 감독님이 일그러진 나의 얼굴 표정을 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혹시 모르니까, 지금 내가 전화해 볼까?”
“네? 아니, 아니에요. 뭐, 나중에 인사하면 되죠. 그럼 식사하러 가실까요?”
“어? 그래. 그래. 조금 있다가 인사들 해. 그럼 밥 먹으러 가볼까?”
서둘러 티를 내지 않기 위해 화제를 돌리는 것으로 나의 모든 노력을 쏟아 부어야 했다. 무엇을 먹을지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장현성 감독님과 달리, 내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그러다보니, 음식의 맛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갈치조림을 먹었는데 맹물에 밥을 말아먹은 것처럼 느껴졌다. 제법 자극적인 양념이 물처럼 느껴질 정도로 신경의 대부분이 유지연과 그 빌어먹을 놈에게로 쏠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장현성 감독님으로 하여금 내가 다른 곳에 신경이 쏠려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끔 처신할 정도의 이성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는 점이었다.
후우.
물론 조금 오버하는 감이 없지는 않았다. 배우로서 같은 작품의 상대배우와 식사 한 끼 나누는 건 전혀 이상한 행동이 아니었다. 하지만 보고 싶은 마음과 더불어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라는 점이 내 마음을 서운하게 만들었다.
종교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날도 아니고 크리스마스이브에 다른 남자와 있는 유지연의 모습이 질투심과 더불어 여기까지 찾아온 내 자신의 행동이 보잘것없게 느껴지게 했기 때문이다.
“후우...”
깊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스렸다. 속 좁은 남자로 유지연에게 비춰지고 싶지 않았다. 이런 상황쯤은 여배우를 사랑한 순간 충분히 예상한 것이었다.
“어?”
그런데 그때였다.
차를 주차한 뒤, 촬영장까지 걸어가던 와중에 들려온 장현성 감독님의 갑작스러운, 반가움이 물씬 풍겨져 나오는 목소리에 나 또한 그의 시선이 꽂힌 곳을 바라보게 되었다.
“어? 우리 주연배우들 아니야? 같이 식사한 건가?”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무척이나 가깝게 붙어있는 한 쌍의 남녀를.
*
“안녕하세요. 팬입니다. 지혁씨. 최혁준입니다.”
악수를 청해오는 그의 얼굴처럼 강지혁의 얼굴 또한 밝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눈은 결코 그의 얼굴처럼 밝지 못했다.
“반갑습니다. 강지혁입니다. 선배님.”
무엇이 거짓인 것일까.
차갑기 그지없는 눈. 반가움을 표현하는 상대방에게 자신 또한 반가움을 표현하겠다는 듯한 얼굴 표정.
대다수의 사람들은 후자만을 발견했을 테지만, 전자 또한 발견한 이라면 고민이 될 만한 난제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단 한사람만은 이 난제를 무척이나 쉽게 풀어낸 듯 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오랜만에 뵙네요.”
유지연 그녀를 향할 때도 그의 얼굴은 여전했다. 밝은 표정 그리고 차가운 눈동자.
“하하. 아까 사실 밥 먹기 전에 지연씨 찾았는데, 아쉽게도 엇갈렸지 뭐야? 그래, 혁준씨랑 맛있는 거 먹고 왔나? 혁준씨 얼굴 보니까, 맛있는 거 먹은 것 같은데?”
“감독님도. 하하! 맛있는 거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오후 촬영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하하!”
원망, 서운함, 섭섭함.
그녀는 앞선 난제를 수월하게 풀어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차가운 눈동자 속에서 숱한 감정들까지 캐치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들을 발생시킨 대상 또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정말 팬입니다. 지금 미스터 지 촬영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한국에 언제 오셨나요?”
“아, 휴가차 잠시 들렸습니다. 며칠 뒤 출국...”
“아! 요즘에 영화 촬영 때문에 핸드폰을 잘 안 봐서. 아무튼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지혁씨. 하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평소 촬영장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해내던 최혁준이 특유의 넉살과 친근한 이미지로 강지혁에게 다가갔고 이를 장현성 감독이 북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홀로 남겨진 것만 같은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감독님 저...”
“응? 지혁씨 왜?”
“오늘 감독님 봬서 식사도 했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응? 벌써?”
그가 이곳에 온 이유를 그녀는 모르지 않았다. 겨우 일주일 남짓한 휴일 가운데 하루를 이곳에 쓸 이유는 굳이 알아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답을 알 수 있을 만큼 너무나도 쉬운 문제였다.
바로 자신을 보기 위해서. 자신을 보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임을 알기에 그녀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그녀의 동공과 마찬가지인 신세가 되어있었다.
“세트장도 둘러봤고 감독님 얼굴도 뵀으니까, 여기서 할 일은 다 끝난 것 같아서요. 그리고 다른 일정도...”
“아! 그렇지. 그래. 지혁씨 바쁜 사람인데 내가 너무 붙잡아 두고 있었나보네. 그래, 지혁씨 다음에 또 연락하고 그땐 지혁씨가 쏘는 걸로?”
그가 자신을 보았을 때, 자신이 어떤 상태에서 어떤 모습으로 비춰졌는지를 떠올리다보니,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
이틀 동안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점에서 너무나도 미안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을 보기 위해 찾아온 이에게 섭섭함과 서운함, 원망 등의 감정들을 느끼게 했는지라 죄책감마저 들 정도였다.
그녀의 속내가 이럴 진데, 그가 누가 봐도 갑자기 자리를 뜨려고 하자 유지연 그녀의 마음이 더욱 다급해졌다. 그를 이대로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보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만큼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고 또한 한없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싶었다.
“네. 그렇게 할게요. 저, 그리고 최혁준 선배님 오늘 뵙게 되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하하! 나도 정말 영광입니다.”
“유지연 선배님이랑 이번에 같은 작품 하시는 걸로 아는데,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작품에서도 그리고 현실에서도.”
“하하! 그렇게 보이나? 나야 그럼 좋지. 이렇게 미인이랑 잘 어울리면? 하하!”
하지만 그의 마지막 말이 마치 비수처럼 다가와 떠나는 그를 순간 붙잡지 못하게 만들었다. 속이 좁다고, 오해이건 뭐건, 자신을 믿지 못하냐는 그런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볼 뿐.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세트장 안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지연씨. 그럼 20분? 아니 30분 정도 쉬고 다시 촬영 이어가는 걸로, 어?”
“저기, 감독님. 제가 잠깐 놓고 온 물건이 있어서요. 실례할게요.”
“어? 식당에 뭐 놔두고 온 거 있어? 그럼 같이, 어, 어?”
“지연씨?”
최혁준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세트장을 서둘러 벗어나는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도 다급했다. 최혁준과 장현성 감독 두 사람이 차마 말릴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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