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64 2019 =========================================================================
#464
“왜 안 나왔어요. 기다렸는데. 꼬박 3시간을 기다렸는데...”
오래된 전화기에서 들려온 전화벨 소리. 그로부터 비롯된 인연이 직접적인 만남으로 발전되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그녀는 그를 만나지 못했다. 학교 앞 동상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건만, 전화기는 꺼져있었고 그는 오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이어진 그의 말로 인해.
[무슨 소리에요. 저도 오늘 비 오는데 끝까지 기다렸어요. 지금까지.]
“비가 왔다고요? 오늘? 아니, 무슨 소리에요?”
약속된 장소에서 기다린 것은 자신이라며, 도리어 영문을 묻는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말문을 잇지 못했다.
“동상 앞에서, 아니 전화기를 왜 꺼놨... 아! 죄송합니다.”
순간의 실수가 영화 속의 한 장면에 푹 빠져있던 모두를 현실로 돌아오게끔 만들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톱 여배우라 할지라도 NG앞에서 저자세를 취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톱이라는 자리를 배우로서 차지했다면 이는 당연한 태도일 뿐이었다.
더욱이 NG를 안내기로 유명한 그녀가 벌써 한 장면에서 세 번이나 같은 실수를 했으니 오죽할까. 차가운 마스크를 지닌 그녀일지라도 그저 죄송하다는 마음을 한껏 담아 이를 주변 스태프들에게 표현할 뿐 주저함은 없었다.
“지연씨. 괜찮아. 괜찮아.”
“죄송합니다. 감독님.”
그런 그녀의 흔치 않은 NG 세례에 장현성 감독은 휴식을 선언했다. 밥 때도 됐거니와, 지금 상황에서는 그가 원하는 영상을 건질 수 없을 것이라는, 오랜 감독 생활을 통해 터득한 연륜이 그런 판단을 내린 것이다.
“지연씨 오늘 무슨 일 있어?”
“네?”
“아니, 우리 지연씨 평소에는 엄청 철두철미해서. 오늘 무슨 일 있나 싶어서. 혹시 대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돼서 그래?”
장현성 감독은 이런 그녀의 평소와 다른 행동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상식 때문인 것으로 파악한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상식은 흔히들 여배우들이 대중들에게 자신들을 각인시키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한눈에 받게 되는 무척이나 중요한 자리일 수밖에 없었는지라, 유지연의 연이은 NG를 이와 연결시키는 것은 무척이나 간단하고 또한 아귀가 맞는 추측이었던 것이다.
“지연씨 이번에 엄청 유력하다고 하던데, 걱정하지 말고 잘 하고 와요. 뭐, 내일부터 모레까지 드레스랑 의상 소품 맞추느라 엄청 피곤할 텐데, 가기 전까지 이렇게 강행군 시키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
“아니에요. 감독님.”
“그럼 밥 맛있는 거 먹고 우리 다시 촬영 들어가는 겁니다? 하하.”
특유의 위트 넘치는 표정과 멘트를 유지연에게 건넨 뒤, 그는 다시금 자신의 전용 좌석이라고 할 수 있는 카메라 앞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그때, 유지연이 홀로 남겨지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누군가가 인기척을 내며 다가왔다.
“어? 아! 선배. 안녕하세요.”
인기척을 느낀 유지연이, 다가온 이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잘 안 되나봐?”
최혁준. 톱 배우는 아니지만, 누구나 다 인정하는 실력파 배우로서 유지연과 함께 이번 드라마의 주연을 맡은 이였다.
“아, 네. 뭐... 조금 그렇네요. 그런데 오늘 촬영 없으시지 않나요?”
“나? 나는 없지. 어제부터 오늘 새벽까지 주구장창 찍었으니까.”
“아... 그런데 푹 쉬시지, 또 촬영장 오신 거에요?”
이번 드라마는 특이하게도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실제로 같이 촬영하는 신이 단 하나에 불과했다. 이는 두 주인공이 실제로 촬영장에 만나는 일이 거의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하지만 남자 주인공 배역을 맡은 최혁준의 기이한 행동으로 인해 두 사람은 꽤나 빈번히 마주하고 있었다.
“나한테 이 작품이 중요하거든. 그래서 촬영장에 없으면 꽤 불편하다랄까?”
탄탄한 연기력과 잘생긴 외모를 바탕으로 톱의 자리에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는 그에게 있어 이번 작품 DITTO는 무척이나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연기력으로서는 이미 호평을 받고 있는 그에게 배우로서 주연을 맡은 영화의 흥행은 그 자신의 가치를 한층 업 시킬 수 있는 가장 정석적인 방법이고 또한 가장 효과가 좋은 방법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촬영에 무척이나 열중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지금처럼 자신의 촬영이 없는 시간대에도 굳이 촬영장에 나와 있을 정도로. 그리고 다른 어떤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밥은 먹었어?”
“네? 아뇨. 아직.”
“그럼 같이 먹을까?”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유지연과 최혁준 두 사람의 대화는 꽤나 자연스러웠다. 한 신을 제외하고 영화상에서 실제로 마주하는 장면이 없음에도 그들은 여느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대화를 이어갔던 것이다.
“그럼 감독님한테도,”
“감독님은 오늘 무슨 손님 오신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네?”
“그래서 저기 혼자 계시잖아. 다른 스태프들 밥 먹으러 갔는데.”
친분을 꽤나 쌓았다고는 해도 같이 밥을 먹어본 적은 없었기에, 유지연이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할 장면이 거의 없는 상대역이지만, 극중에서의 호흡을 위해 그리고 영화의 성공을 위해 쉬는 시간에도 촬영장에 올 정도로 노력하고 있는 선배 배우와의 식사는 개인적으로도 공적으로도 그녀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으니까.
“뭐, 먹을까?”
“글쎄요.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나? 나야 뭐. 이렇게 미인이랑 같이 점심 먹는데, 메뉴가 중요할까?”
“네?”
어깨를 으쓱하면서 농담을 건네는 최혁준의 모습에는 그의 인간적인 매력을 가득 담겨 있었다. 그래서인지 유지연 또한 입가에 미소를 띠운 채 한숨을 내쉬었다.
“뭐에요. 그게.”
“하하. 일단 나가자고. 차는 내 차 타고 가는 게 편하겠지?”
“네. 뭐... 저 잠깐 매니저 오빠한테 말하고 올게요. 매니저 오빠랑 스타일리스트 언니들도 식사해야 돼서.”
“응? 같이 가게?”
“네?”
“흐음... 알겠어. 그럼 주차장에 있을 테니까, 같이 와.”
“네. 선배.”
그렇게 그녀는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들에게 가기 위해 그에게서 등을 돌려 대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이의 얼굴엔 기쁨과 더불어 약간의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 있었다.
*
“어?”
“매니저랑 스타일리스트들은 따로 방 잡아줬어. 메뉴는 알아서 시키라고 했고.”
손을 씻고 방에 들어와 보니, 같이 왔던 동행들이 사라져 있어 당황하는 유지연을 향해 최혁준이 오른쪽을 가리키며 안심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아... 죄송해요. 아무래도 다른 연예인들이랑 이런 자리가 없어서 그랬을 거에요.”
그런 그의 행동이,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들의 행동에서 비롯된 꽤나 사려 깊은 배려였다는 점에서 유지연이 고맙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작품들도 많이 했는데, 이런 적 없었어? 동료 배우들이랑 같이 식사하는 거?”
“제가 낯을 조금 많이 가리기도 하고... 여럿이서 같이 먹었던 적은 있었어도 이렇게 둘이 먹었던 적은 없었거든요.”
“어? 그럼 내가 조금 특별한 건가?”
“네?”
“하하. 기본 정식 미리 시켰는데, 괜찮지?”
뭔가 급하게 화제를 돌리는 듯한 그의 행동에서 무엇인가를 캐치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그저 전과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번 작품 어떨 것 같아?”
“좋은 성적 나올 것 같아요. 근데, 딱히 좋은 성적 안 나와도 저는 만족할 것 같아요.”
“에?”
“뭔가 성적에 연연할 그런 작품은 아닌 것 같아요. 처음 찍어본 영화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요.”
음식이 준비되는 시간이 꽤나 걸리는 메뉴를 시킨 것인지, 유지연과 최혁준의 대화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꽤나 유쾌하고 넉살좋은 성격의 최혁준이었기에, 대화의 소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자연스럽게 이어져나갔고 이는 몇 시간에 걸친 촬영으로 지쳐있는 유지연을 알게 모르게 굉장히 편하게 만들어줬다.
“부끄럽네. 나 이번 영화 성적에 꽤나 목매달고 있었는데.”
“아! 선배 생각해서 그런 말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
“하아...”
“저기... 선배.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었어요.”
“푸훗...”
“그게 그러니까... 에?”
누가 봐도 예쁘다고 말할 수 있는 미모. 누구라도 시선을 빼앗길 만한 몸매. 그리고 남자들로 하여금 쉽게 다가갈 수 없게 만드는 도도하고 차가운 인상.
그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유지연의 전혀 뜻밖의 모습에서 최혁준은 자신의 방금 전 장난스러운 행동에 무척이나 만족하고 있었다.
“TV에서도 그렇고 실제로 봤을 때도 그렇고... 엄청 차갑게 느껴져서 다가가기 조금 힘들겠구나 싶었는데, 이런 모습도 있었네?”
“네에?”
“귀여웠어. 제법.”
“아...”
그래서일까. 그의 손이 자연스레 유지연의 머리로 향했다. 그 누가, 어떤 남자가 유지연의 귀여운 모습을 볼 수 있었을까. 왠지 모를 뿌듯함이 그로 하여금 보다 과감한 행동을 하게끔 유발했다.
“저 선배 손 좀...”
“아, 미안. 미안. 나도 모르게.”
“이러는 거 조금 불편해서요.”
“미안. 미안. 내가 너무 지나쳤네.”
자신의 행동이 너무 지나쳤다는 것을 이내 깨달은 그가 사과를 건넸지만 유지연의 얼굴은 어느새 그녀가 자랑하는 차가움으로 가득했다. 이내 괜찮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인 것도 진심이 아닌, 그저 이어진 상황에 의한 것이 훤히 드러날 정도였다.
“나도 모르게... 진짜 미안.”
할 말이야 더 있었지만, 그녀는 이내 음식들을 들고 방으로 들어온 직원의 행동도 행동이거니와, 같은 영화를 찍고 있는 이에게 방금 전의 일을 가지고 어떤 트러블을 만들어내는 게 꽤나 꺼려지는 행위임을 인지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을 드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하려 했다.
“정말 미안. 나도 모르게.”
조금 분위기가 무거워졌지만 어쨌든 맛있는 음식과 더불어, 최혁준의 위트 넘치는 멘트들 덕에 분위기는 다시금 원래의 것으로 되돌아갔다.
“드라마 촬영 끝나자마자 바로 영화 촬영 들어간 거지?”
“네? 네. 한 달? 조금 못 쉬고 바로 합류하게 됐어요.”
“흐음... 남자친구 없나봐?”
“네?”
식사를 마치고 커피 한 잔씩을 들고 촬영장으로 걸어가는 와중에, 굉장히 뜻밖의 말을 듣게 된 유지연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아니. 남자친구 있으면 휴식기도 길게 가질 텐데. 배우들은 보통 그러잖아. 근데 지연이 너는 작품 활동 꾸준히 계속하고 있는 것 같아서. 하하. 내가 너무 실례되는 질문을 던졌나?”
대답 없이 그저 얼굴이 어두워진 유지연의 모습에 아차 싶었는지, 최혁준이 미안함을 잔뜩 담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생각에 잠겨 있던 유지연으로서는 그런 최혁준의 얼굴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너무 일만 하는 것 같아서. 조금은 쉬어가는 게 배우 생활하는 데에 도움이 되더라고. 그래서 한 말이었는데, 기분 나빴으면 미안. 오늘 내가 너무 실수를 많이 하네.”
“아. 아니에요.”
뒤늦게 상념에서 빠져나온 유지연이 괜찮다는 듯 그의 말에 부정을 해보였지만 두 사람간의 분위기는 푹 가라앉아 있었다.
“촬영 잘 하고. 흐음... 저기 지연아?”
“네. 선배.”
“아무래도 우리가 전화상으로 주고받는 신이 많다보니까, 연습할 때 힘들 수 있어. 실제 연기할 때도 상대 목소리를 상상하면서 해야 되니까. 그래서 말인데... 대본 연습할 때, 실제로 전화하면서 연기하면 꽤 도움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하지만 최혁준 그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는 남자였다.
“번호 좀 줄 수 있어?”
“네?”
주연 배우로서 번호를 주고받고 친분을 유지하는 것은 비교적 자유로운 사안이었다. 하지만 이번 영화의 특성상, 두 사람은 지금까지도 서로의 번호를 모르고 있었다.
“서로 연기하다가 필요할 때, 아니 네가 대본 보다가 나 필요하면 불러. 나도 촬영 중 아니면 대본 보면서 같이 연습하면 되니까.”
어쨌든 그래서인지 유지연에게로 자신의 핸드폰을 건네는 최혁준의 행동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을 지도 모른다. 유지연 그녀도 얼떨결에 그의 핸드폰을 건네받게 되었으니까.
“어? 우리 주연배우들 아니야? 같이 식사한 건가?”
그런데 그때였다. 때마침 들려온 장현성 감독의 목소리가 유지연과 최혁준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리고 이내 유지연의 동공이 지진이 난 듯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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