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59 2019 =========================================================================
#459
[저번에 다녀오셨던 스위스에 다녀오세요. 이번 겨울내로요. 가족들이랑 가셔도 되고 사모님이랑 가셔도 돼요.]
[저기 지혁씨 그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보름 정도 휴가를 다녀오시라고 말씀드렸더니, 관리사님은 역시나 이를 거절했다. 맡은 일이 많다는 이유로 인해 다시금 가슴이 찔렸지만, 물러날 수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지혁씨. 이렇게까지 해주셔서... 여름에 가족들끼리 하와이로 여행가라고 비행기며 숙박까지 전부 챙겨주신 지 6개월 밖에 안 됐는데, 이렇게 또...]
결국 관리사님은 나의 생떼에 항복하고 말았다.
[관리사님이 보름동안 휴가 안가시면 저 진짜 아무것도 안 할 거에요. 사업도 막 다 취소하고 라이브 카페도 안하고 꿈 기숙사도 꿈 술집으로 바꾸고 막 그렇게 할 거에요.]
낼 모레 서른인데, 이런 막무가내 생떼를 쓰다니. 크흠. 쑥스럽구만.
어쨌든 목적은 달성했으니, 상관없었다. 맡은 일들이 걱정된다는 관리사님의 말이 있긴 했지만, 아니, 직원이 몇 명인데 그게 말이 되는 가. 이 기회에 관리사님이 너무 일일이 담당하지 않으시도록 밑에 직원들의 능력을 살펴봐야겠다.
“저거 맛있겠네.”
“그럼 저거 하나 먹을까?”
“하나?”
“나눠먹으면 되지. 오빠랑. 나랑.”
“그래, 그러자.”
나름 뿌듯했었는데, 옆에서 닭살 돋는 ‘짓거리’를 하는 커플 때문에 산통 깨져 버렸다.
“오빠 한입. 나 한입. 히히. 맛있어?”
“으음. 난 별론데?”
“응? 정말? 난 맛있는데?”
“난 네가 제일 맛있거든.”
“에에? 으! 저질! 몰라 오빠!”
[으드득]
이가 갈렸다. 이것들이 지금 공공장소에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이래서 커플들이 안 된다. 아주 사회의 악이다. 악. 물론 나랑 유지연 빼고.
하아. 뭐래니.
내 님이 있을 진데, 왠지 모르게 솔로인 것만 같은 허전함이 옆구리를 시리게 만들었다.
괜히 홍대에 왔나?
할 일도 없거니와, 집에 틀어박혀 있고 싶지 않아 홍대 거리를 거닐기로 했다. 여름도 아니고 겨울이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마스크를 써도, 두꺼운 옷을 입어도 전혀 이상해보이지 않는 계절이기에 이때만큼은 나도 일반인들처럼 거리를 마음껏 다닐 수 있었다. 다만,
[쪽]
“오, 오빠... 여기서 말고. 아, 안으로 들어가자.”
“그, 그래. 미리 방 잡아놨으니까...”
“오빠...”
“응? 왜? 오빠가 이미 다,”
“오, 오늘... 위험한 날이라서... 콘돔...”
크리스마스가 코앞으로 다가온 터라, 거리가 온통 커플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이거, 이거 조만간 살인나겠는데? 뭐, 안으로 들어가? 미리 방을 잡아놨어? 허! 잘하는 짓이다. 잘하는 짓이야. 쳇.
계속 한곳에 머물다간, 못 볼꼴을 계속해서 지켜보며 열등감을 폭발하게 될까봐, 서둘러 발을 놀렸다.
그렇게 정처 없이 걷던 나의 발걸음은 어느 순간, 멈춰져있었다.
“종이에 스며들었던 잉크가 다시금 펜으로 흡수되고 있어. 후회가 설렘으로 바뀌고 있어.”
익숙한 멜로디와 노래 가사가 들려오는 곳. 그곳에서 나는 서있었다. 추위가 느껴지지 않은 것인지 노래를 부르고 있는 이를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는 대중들 사이에서 마찬가지로.
“드라마 같은 첫 만남 허무한 결말. 다시 쓰는 이 소설의 엔딩. 그 상황에서 너는 그녀에게 소홀히 하면 안됐어. 그녀가 눈물 흘리게 하면 안 돼. 그게 맞아.”
10대 후반? 20대 초반?
그쯤으로 보이는 남자 한명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너무나도 추운 날씨. 이런 날씨에 길거리 공연을 하는 게 마냥 쉽지만은 않을 텐데도 마이크를 손에 든 남자의 온기는 굉장했다. 얼핏 봐도 스무 명이 넘어 보이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말이다.
“네가 나를 떠나 횡단보도 너머로 사라지는 그 장면은 말이 안 돼. 다시 써야 돼.”
[짝짝짝]
[잘 부른다!]
[호우우우!]
노래가 끝을 맺자, 주변에서 환호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 또한 추운 날씨에도 길거리 공연을 나름 훌륭히 해준 청년에게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뭐, 내 노래를 불러줘서 고마운 마음과 뿌듯한 마음이 들어서이기도 했고.
“강지혁의 정규 5집 앨범에 수록된 다시 쓰는 이 소설의 엔딩이었습니다.”
음, 이 노래 제목이 다시 쓰는 이 소설의 엔딩? 진짜 누가 만든 노래이고 제목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똥차네. 기똥차. 크흠.
정신 차리자, 정신. 나 참. 커플 공격에 머리가 살짝 어떻게 됐나보다.
“사실 이 곡은 엄청 예전에 쓰인 곡이라고 하더라고요.”
엥?
“프리티 스타 멤버로 활동하다 이제는 나인 테일로 활동하고 있는 김여정 아시죠?”
그런데 이어진 브레이크 타임에서 길거리 공연을 하던 청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나의 흥미를 돋게 했다. 분명 내 노래일진데, 전혀 알지 못하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흘러나오는 듯 했으니 말이다. 뭐야, 이거 내 노랜데?
관객들 또한 흥미가 돋았는지, 웅성거림을 멈춘 뒤 나와 마찬가지로 청년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기가 연습생일 때, 강지혁이 피쉬앤칩스 연습실에 왔다네요? 그런데 그때 운 좋게도 강지혁이 노래를 해줬는데 그게 이 곡이라고 하더라고요.”
[아하!]
[맞아. 예전에 방송에서......]
[나도 본 것 같아 그때. 그거 그거 맞지? 그......]
아니, 이걸 방송에서 말했다고? 김여정 아주 날 완전 팔아먹고 다니는구만? 허허.
뭐, 보아하니 알만 한 사람들은 아는 에피소드인 듯 했다. 나처럼 TV를 잘 보지 않는 사람들이 아닌 이상 대부분이 알만한 그런 사안인 듯, 길거리 공연을 지켜보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놀라기보다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참 대단한 것 같아요. 이렇게 좋은 노래를 그때 이미 만들어놓고 있었다는 게요.”
어쨌든 뭔가 어깨가 으쓱해지면서도 찔렸다.
사실 이 노래를 정규 5집이 되어서야 수록한 이유는, 저들이 생각한 이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저는 요즘에 곡을 만드는 게 너무 힘들어서, 저한테 재능이 없는 걸까? 하고 좌절할 때가 많거든요.”
실을 수 없었기에 싣지 못했고, 그 후 앨범을 내기까지 꽤나 오랜 공백기가 있었기에 이 노래를 대중들에게 뒤늦게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음이 조금 안타까웠다. 이를 설명해줄 수 없어서 그리고 앞에 있는 청년이 좌절까지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답답하기도 했고.
“그런데 이런 곡들을 몇 년 동안이나 묵혀둘 정도인 강지혁을 볼 때면 마냥 부러워요. 시기나 질투도 정도껏 해야 나지, 이건 뭐... 하하!”
[하하!]
[하하!]
분위기가 무거워졌음을 깨달은 것인지, 이내 청년은 재치 있는 멘트로 상황을 반전시켰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방금 전 좌절을 언급할 때와 다르지 않았는지라 마음이 가볍질 못했다.
무슨 조언이라도 건네야 할까?
괜한 오지랖이라는 생각을 떠나, 내가 건네는 조언이 저 사람에게 도움이 될지 약이 될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나설 수가 없었다. 뮤지션의 성장에는 온실 속 화초 누리는 편안함보다는, 저런 고민 하나, 하나가 주는 고통이 더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더더욱.
예전에 승현 녀석이나 다른 녀석들도 이런 고민을 내게 토로했던 적이 있긴 있었는데. 흐음.
에라 모르겠다.
개인적인 친분도 있고 나 또한 조금은 미숙했던 때라 그때는 나름의 조언을 건넸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게 옳은 일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뭐, 그때 신촌에서 사고를 쳤을 때 당황한 모습의 민재 삼촌 얼굴을 봐서인지 후회는 안 됐지만.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강지혁 노래만 계속해서 불러볼까요?”
[네!]
“계속 같이 있어주세요. 혼자서는 많이 외롭거든요. 길거리 공연이. 후훗. 어디보자... 그럼 다음 곡은요... 앞선 곡과 마찬가지로 정규 5집에 수록된 곡 중얼중얼 들려드릴게요!”
꽤나 밝은 목소리와 함께 이내, 익숙한 선율이 거리에 흘러나오자 나 또한 상념을 멈추었다. 지금은 익숙한 선율과 가사를, 다른 이의 목소리를 통해 듣는 그런 시간에 집중하고 싶었다.
*
“나 혼자 너무 많은 생각에 사로잡혀 나 혼자 이별을 맞이하게 되었어. 네가 떠나고 나서야 깨닫게 됐어. 너무 힘들다는 걸, 머뭇거리게 된 다는 걸. 사랑을 다시 한다는 건.”
여운이 남는 멜로디와 가사.
“강지혁의 정규 3집 14번 트랙에 수록된 사랑을 다시 한다는 건 이었습니다.”
그 여운을 마무리 한 것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방금 전 열창했던 사내의 목소리였다.
아직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듯, 푹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사내의 얼굴은 무척이나 밝아보였다. 그리고 이는 이를 지켜보던 관객들의 얼굴 또한 마찬가지였다.
[쨍그랑]
[쨍그랑]
“감사합니다.”
앞에 놓인 바구니에는 많은 수의 동전들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동전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쌓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간혹 가다 보이는 천 원짜리 지폐까지 고려한다면, 이는 오늘 이렇게 추운 날에 나와 길거리 공연을 한 보람이 충분히 느껴질 액수였다.
한차례 사람들이 앞으로 나와 동전을 건넨 뒤 다시금 제자리로 또는 다른 곳으로 갈 길을 떠나자, 사내는 다시금 마이크를 부여잡았다. 떠난 사람들을 뒤로하고 새롭게 자리를 잡은 이들과 기존에 자리 잡고 있던 이들을 붙잡기 위한 중요한 때가 바로 지금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뒤늦게 한 남자가 사내의 앞으로 나온 것은.
운동복 차림에 패딩을 입은. 거기다 마스크와 모자 그리고 목도리까지 한.
아무리 추운 날씨일지라도 홍대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패션에 사내뿐만 아니라 지켜보던 모두의 시선이 한데 모아졌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사내는 그저 언제나처럼 밝은 웃음으로 고마움을 표현할 뿐이었다.
그런데 사내가 들고 온 것이 동전이 아닌 다른 무엇이었다는 점에 추위로 상기된 사내의 얼굴과 지켜보던 관중들의 얼굴이 놀라움을 가득차기 시작했다.
“가지고 있는 현금이 이게 전부라.”
덕분에 사내가 마스크 속으로 내뱉은 혼탁한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모두에게 들려버렸다. 마치 누가 마법을 부린 것처럼.
“네? 아! 저, 저기. 이렇게 많이...”
무려 5만원 지폐를, 그것도 4장이나 상자에 내려놓은 사내의 행동은, 사내의 옷차림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관객들과 청년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하지만 이는 섣부른 것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재능이 있든 없든, 모든 뮤지션들은 곡을 쓰는 걸 어려워합니다.”
“네?”
이내 이어진 운동복 사내의 말은 확실히 뜻밖이었다.
“좌절이나 절망은 뮤지션들의 친구거든요.”
“네?”
노래를 듣다, 뜬금없이 나와 20만원이라는 거금을 건넸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말, 아니 왠지 모르게 귀담아 들어야할 말을 건네는 사내의 행동은 쉽게 간과할 수 없는 기세로 사내에게 다가왔다. 신기하게도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그런 고통의 시간들이 뮤지션으로서의 삶의 밑거름이 되는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노래 잘 들었습니다. 추운 데서 너무 오래 노래 부르면 목 상하니까, 무리하지 마시고요.”
사내는 이내 자신의 말을 끝맺은 채, 이렇다 할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는 것인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갈 길을 떠났다.
자신이 한 말이 청년에게만 들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사내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듯 했다.
어떻게 보면 이는 당연했다. 사내가 무척이나 비루한 옷차림으로 20만원이나 되는 돈을 길거리 공연을 위해 쓰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이런 고요한 상태는 애당초 만들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사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게 지금 상황에 극적인 변화를 만들어냈다.
“저, 저기요!”
자신에게 건넨 말의 의미를 좀 더 알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20만원이나 건넨 관객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는, 노래라도 한 곡 더 듣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였을까.
이유는 정확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게 중요했을 뿐.
너무나도 세게 잡아당겨서일까. 덕분에 몸이 기우뚱한 운동복 차림새의 사내에게서 무엇인가 떨어져나간 순간 장내는 또다시 숨 막힐 듯 한 고요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폭풍전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