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57 2019 =========================================================================
#457
[네 년의 나이는 어떻게 되느냐! 하! 엘프 년이고 이 자리에 온 만큼 3천 년 쯤 묵었을 테지. 어쩐지 쉰내가 나더라니.]
[그러는 그대는 천 년도 살지 못했겠군요. 짜리몽땅하고 탐욕스럽기 그지없는 종족이니까.]
[뭐, 뭐라! 위대한 드워프의 도끼가 위선 가득한 너희 엘프년놈들에게는 유난히도 매섭다는 것을 네 정녕 모른단 말인가!]
[엘프의 활과 화살은 썩어문드러질 필멸자의 도끼보다 훨씬 더 매섭다는 것을 명심하길.]
마주치기만 하면 서로 물고 뜯지 못해서 안달이라는 엘프와 드워프답게 분위기는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당장에라도 활시위를 놓을 것만 같은 엘프, 도끼로 단번에 사지를 갈라버릴 듯한 기세를 내보이고 있는 드워프.
서로가 지닌 자존심이 대단했기에 상황은 좀처럼 마무리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도끼를 들고 있던 드워프의 입에 비웃음이 가득 담김으로서 상황은 종료되고 말았다.
[풋! 그래봤자 인간의 카린에게는,]
[다, 닥치세요! 그런 꾸며낸 이야기는!]
[오호라... 네 년은 아직 천 년도 살지 못한 풋내기구나. 풋.]
역린(逆鱗)
용은 성질이 유순하므로 길들이면 탈 수도 있다. 그러나 턱 밑에 길이가 한 자나 되는 ‘거꾸로 솟은 비늘이 있으니, 용을 길들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만약 이것을 건드리면 반드시 그를 죽인다.
뛰어난 활솜씨에 정령을 다룰 수 있고 영생을 살 수 있는 축복받은 신체를 지닌, 엘프족에게 역린이 있다는 것을 드워프인 그는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리 어렵지 않게 엘프와의 기세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다.
[이미 멸족한 자들과 관련된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아직까지 믿다니, 필멸자들의 허무맹랑함은 도무지가,]
그런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엘프의 행동에도 그는 태연자약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는 굳이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자신이 기세싸움에서 승리했다는 것을 증명해줄 이가 이곳에 존재했으니까.
[엘라인!]
원정대가 조직한 이래, 알게 모르게 원정대의 리더로서 자리 잡고 있는 이의 강한 외침에 장내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카린은 분명히 존재했소.]
서로 다른 종족들이 하나의 목표아래 모인만큼, 서로간의 충돌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차라리 원정 초기에 곪은 감정들을 터트려버리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원정대 리더 아리신은 방금 전 엘프와 드워프의 기세싸움을 방조했었다.
[우리 인간의 역사에도 드워프의 역사에도. 그리고 그대 같은 영원불멸자의 역사에도.]
하지만 드워프가 엘프의 역린을 건들면서, 그는 이를 방조할 수가 없었다. 원정대 전체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그 자신이 인간이기에 더더욱.
[진위를 알고 싶다면 그대의 형제자매들에게 물어보면 될 것이오. 천 년 전 일이라고는 하나, 중간 계 그 어떤 종족들보다 그대의 형제자매들은 머나먼 동쪽 대륙의 빛을 생생히 또한 정확히 기억하고 있을 테니.]
그런 그의 행동에 당황한 듯 엘프는 얼굴을 붉힌 채,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하하...”
순간 너무나도 리얼하게 엘프 역을 소화해내는 유지연 때문에 집중력이 흐트러져 버렸다.
“왜? 이상했어?”
그래, 많이 이상했지. 이상해도 너무.
“뭐, 뭐가?”
“언제 영어 스피치를 그렇게 준비했어?”
“응?”
유지연이 영어에 꽤나 힘쓰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녀 스스로도 영어 공부에 힘쓰고 있다는 것을 내게 알려준 것도 준거지만, 예전 테일러와의 만남에서 그녀가 듣기 실력을 뽐냈기 때문이다.
“왜 식은땀을 흘려?”
“어? 하하... 아니야.”
그때 생각이 나서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났나보다. 하하.
“왜 그래. 많이 이상했어?”
“이상하긴 무슨. 하나도 안 이상했어.”
“응? 진짜?”
“너무 잘해서 깜짝 놀라서 그랬었어. 이거 조만간 유지연 할리우드 진출하는 건가?”
“뭐래.”
부끄러워하며 내게 안겨오는 그녀를 부드럽게 껴안은 채,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괜찮았다. 유지연의 영어 실력은.
비록 약간은 어색한 감이 없지는 않았고 대본 그 자체를 읽는 것인지라 단순 영어 실력으로 치환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영어 발음 측면에서는 이상한 점이 없었다.
꽤나 많은 곳에서 사용되는 언어인 만큼 발음의 지역적인 차이가 꽤 있는 것이 영어임을 고려한다면 이 정도면 수준급이었다. 대사를 소화함에 있어 전혀 지장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네가 맡은 역은 이 원정대? 무리? 아무튼 원정대 리더나 드워프는 아닌 거지?”
“응. 이건 다른 사람 역이야. 아까 말했잖아. 나 그냥 길잡이야. 한마디로 쩌리...”
괜히 배우가 아니라는 듯 그저 심심풀이로 대본의 한 장면을 재연해본 것인데, 유지연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어 뿌듯했다.
소피 마르소가 프랑스어로 연기할 때, 유럽 남자들이 그렇게 녹아났다는데, 바로 이걸 말함일까? 아무튼 대단한 여자야. 유지연. 참 나.
어쨌든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는지라 슬슬 배가고파 왔다. 점심때쯤 일어나 오후 5시가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유지연만 먹었지, 다른 건 먹지 못했으니까.
“그나저나 배는 안 고파?”
“안 고파.”
깨어난 지 몇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배가 안 고프다는 거야?
어제 저녁이 마지막 식사였다. 그 후로 꽤나 격렬한 운동을 하느라, 제대로 뭘 먹을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먹는 것보다는 지쳐 잠드는 게 우선순위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다이어트 해?”
“아니.”
다이어트를 하지도 않는데, 상식적으로 이게 말이 되나 싶었다. 아니, 혹시 내가 전에 살 쪘다고 해서 저러나?
내가 전에 했던 말실수 때문에 그녀가 저러는 것 같아, 자연스레 그녀의 눈치를 살피게 됐다. 이내 이게 전혀 의미 없는 행동임을 깨닫게 되었지만.
“네가 계속 먹였잖아. 배불러.”
[콜록콜록]
“짐승.”
예상치 못한 그녀의 답변에 사레가 걸려버렸다.
아니 이 여자가 못하는 말이 없어. 진짜. 크흠. 생각해보니, 죄다 입으로 크흠.
*
속내가 복잡해졌다. 당연했다.
“내일부터 촬영이라고 했지?”
“응? 응...”
거의 5개월 만에 서로를 마주한 것일 진데, 우리에게 허용된 시간이 너무나도 짧았다.
물론 이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그녀가 말했듯, 촬영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은 만큼 나름 강행군을 펼치고 있었을 것이기에 이렇게 유지연이 나를 위해 이틀을 꼬박 같이 있어준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었다.
다만 이를 알고 있음에도 어쩌지 못할 마음이 문제였을 뿐.
“괜히 영화 찍으라고 했나?”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아니었다. 진짜 괜한 소리를 했나 싶었다. 이렇게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만을 함께할 수 있다는 점이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다.
“뭐래.”
후우. 괜한 소리는 영화를 찍으라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방금 전에 내가 했던 말이 괜한 소리였다.
“가기 전까지 막 못보고 그러는 건 아니지?”
“응. 크리스마스 때는... 어떻게든 빼서 올게.”
“요거, 요거 아주 나한테 푹 빠졌어? 배우가 촬영 빼서 온다고까지 하고?”
그녀 또한 아쉬울 진데, 자칫 내 말이 그녀를 탓한 게 될까봐, 서둘러 화제를 바꿔버렸다.
“드라이브하러 나갈까?”
“응...”
아직 남아있는 아쉬움을 애써 털어버린 채 지금 이 순간이 더욱 소중함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리고 이 시간을 후회와 아쉬움으로 채우기엔 너무나도 아깝다는 것도 깨달았고.
*
“꿈 기획에서...”
“아! 새연씨 미리 연락받았습니다. 어서 들어가시죠. 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익숙하지만 낯선 공간. 한 건물의 지하 주차장에서 자신을 마중 나온 이를 바라보는 김새연 그녀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복잡함이 가득했다.
아마 자신을 이곳까지 직접 데려다준 매니저 오빠와 코디 언니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그런 면도 없지는 않은 듯 했다.
[대표님?]
[계약 기간 아직 2년 남은 거 알지? 그런데도 보내주는 거니까. 지금 마음 변하지 않아야 한다? 꼭?]
[진수한테 말해뒀으니까, 거기까지 데려다 줄 거야. 진수도 그렇고 미연이도 많이 아쉬워하던데 작별인사 잘하고.]
믿기지 않은 현실.
지금 그녀가 맞이하고 있는 현실이 바로 그러했다.
“새연씨 정말 예쁘시네요. 프로젝트 데뷔 때부터 정말 팬이었습니다. 하하!”
“네? 아, 네... 감사합니다.”
자신을 마중 나온 직원에게 사인을 해주면서도 그녀는 끊임없이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인지, 아니면 꿈인 것인지를.
하지만 이내 등장한 이로 인해 그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님을.
“언니?”
“어? 민지야.”
끊임없이 TV에 얼굴을 비추는 그러나 아직 자신처럼 무대에 설 기회를 갖지 못한 프리티 스타 멤버 민지. 그렇기에 종종 얼굴을 보며 수다를 떨었었다. 자신과는 달리 빵빵한 소속사 출신이지만, 묘하게 비슷한 처지인 그녀를 보고 있자니, 알게 모르게 자신이 처한 상황에 위안을 얻는 듯 했으니까.
“아! 민지씨도 같이 가시면 되겠네요.”
“안녕하세요. 기획실장님... 그런데... 어디를요?”
“지금 새연씨랑 대표님 뵈러 가는 중이거든요.”
“네? 대표님, 우리... 회사 대표님이요?”
새연이 자신이 소속된 기획사 대표님을 만난다는 것도 의외일진데, 그 자리에 자신까지 데려가려는 기획실장의 행동에 주민지의 얼굴에는 어느새 의아함이 한 가득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답을 구할 수가 없었다. 답을 얻기 위해 새연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는 듯 했으니까.
“민지씨도 제 3자가 아니니까, 같이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새연씨가 저희 회사 처음이라서 많이 어색해하시는 것 같은데 조언도 좀 해주시고요.”
더욱이, 자기 자신이 그 자리에 있어 제 3자가 아니라는 기획실장의 말까지 더해졌는지라, 그녀는 자연스레 새연과 같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무슨 영문인지를 알지는 못했으나, 그녀는 그저 그렇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