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55 2019 =========================================================================
#455
“야. 꿈 깨라. 꿈 깨.”
“오빠는... 왜!”
국내 예능계의 히트 시리즈가 된 하루세끼의 촬영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촬영장의 분위기는 화목했다. 터줏대감 이새진은 익숙한 듯 촬영을 이끌어가고 있었으며 깜짝 게스트로 초청된 배우 한여정은 이 분위기에 어느새 적응한 듯 했으니까.
“걔가 앨범 한 번씩 내면 수천만장씩 팔아재끼는 애야. 그런데 무슨 여길 나와? 저번에는 쟤가 엄청 졸라서 의리상 몇 번 나와 준거지. 걔 한번 출연시키려면 이 촬영 접어야 돼. 제작비 없어서.”
배우 한여정과 작품에서 두세 번 상대역으로 나왔던 적이 있었기에 두 사람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꽤나 흥미진진하게 흘러갔다. 근처 섬으로 낚시를 떠난 또 다른 터줏대감 이준혁이 돌아온다 해도 별반 달라질 게 없을 정도로 또한 순조롭게.
“오빠 강지혁 씨랑 친해?”
“친하지 그럼. 저번 LA에서 시사회 있을 때 초대해줘서 갔잖아.”
“정말로?”
“원래 나는 뉴욕에서 하는 시사회에 초청받았어. 스케줄 때문에 LA에서 하는 거 가긴 했지만.”
“오오오!”
하루세끼 촬영과 더불어 사적인 자리에서도 술잔을 기울인 사이인지라, 강지혁과의 친분을 자랑하는 이새진의 어깨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비록 그는 이런 기색을 내보이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었지만 말이다.
“영화 촬영하다가 일주일 겨우 휴가 받아온 애한테 집적거리는 건 완전 민폐지. 설마... 너 여기 출연 가능하냐고 전화해본 건 아니지?”
“어, 어?”
“와... 설마? 너 진짜 양심 없는 애구나?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나 참.”
갑작스럽게 이새진의 화살이 자신에게로 쏟아지자, 한여정과 이새진의 ‘케미’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김형식이 당황한 듯 엉덩방아를 찧었다.
“진짜 너도... 전화를 하고 싶디? 꼴랑 일주일 한국에 있는 다는데 가족끼리도 좀 보내고 쉬게끔 해줘야지. 어떻게 된 게 자본주의에 애가 미쳐가지고.”
“아니, 그게...”
“오빠. 그럼 나 전화통화 한번만 시켜주면 안 돼?”
“어? 전화통화?”
그런 김형식을 살려준 것은 한여정이었다.
“나 진짜 팬이란 말이야.”
“팬은 멀리서 그저 지켜보고 응원해주는 게 팬이지. 사적으로 전화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아, 진짜!”
강지혁의 열렬한 팬이라는 것으로부터 이 대화가 시작된 만큼 한여정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뭐야? 팬으로서야, 아니면 사적으로 뭐 좀 해보려고 그러는 거야?”
마치 강지혁의 여자 친구, 아니 회사 관계자인 마냥 철벽을 치는 이새진의 행동은 그녀에게 있어 무척이나 얄밉게 다가왔던 것이다.
“남자답고 멋있잖아. 주변 사람들 말 들어보니까, 좋은 소리밖에 안 나오던데.”
“어?”
그런데 상황이 순식간에 반전되고 말았다. 한여정 그녀의 너무나도 솔직한 면모 덕에.
“저기 여정씨 그... 방금 전 발언은 조금 문제될 수 있는,”
뒤늦게 김형식이 이런 한여정의 발언을 제지해보려 했지만, 그녀는 별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아니에요. 뭘. 대한민국에서 강지혁 씨 싫어하는 여자 있나요?”
그녀를 걱정해서 상황을 끊어보려 했던 김형식이었기에, 이런 그녀의 행동은 꽤나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김형식의 얼굴은 어느새 밝아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담겨 있을 지는 무척이나 뻔한 일이었다.
“나중에 밥 한번 같이 먹으면 안 돼? 오빠?”
“아니, 얘가 진짜. 아주 나이 들더니 더 저돌적으로 바뀌었어?”
“오빠! 나이 얘기는 금지!”
이새진은 한여정 그녀가 겉모습과는 달리 꽤나 솔직하고 털털한 성격이라는 것을 지난 두 번의 드라마 촬영에서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당황스러움에서 빠져나오는 게 상대적으로 빠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스태프들에 비해서.
“오빠 전화번호 모르는 거 아니야?”
“뭐?”
“오빠 지혁 씨랑 마지막으로 전화한 게 언제야?”
“한 6개월 됐나?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에 전화 와서 통화하고,”
“에이. 그게 무슨 친한 거야.”
“뭐?”
그렇게 그는 못이기는 척 한여정에게 결국 져주었다. 생각해보니, 전화 정도는 지혁에게 큰 부담을 줄 것 같지 않았고 무엇보다, 꽤나 친한 동생인 한여정이 이렇게 조를 때면, 그로서는 피할 방법이 그다지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여보세요?”
잠시 후, 익숙한 목소리가 촬영장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는 누군가에게는 환한 미소를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난처한 웃음을 가져다 줄 전화 통화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
“넌?”
“운명의 전쟁은 1월 말쯤에 할 것 같아. 자세한 건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녀와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던 와중이었다. 목소리로 하는 대화와,
“하아...”
몸으로 하는 대화 둘 다를 하느라 굳이 받지 않아도 됐었다.
[지이잉]
그래서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진동음을 무시하려 했다. 이내 내 무릎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가 전화를 받으라고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받아봐.”
“응? 어, 응.”
아쉬움이 잔뜩 묻어날 수밖에 없었지만, 이내 그녀가 나를 꼭 껴안자, 비교적 머뭇거림 없이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아니, 도대체 누구야.
“여보세요?”
[아! 지혁아. 형이야. 새진이 형.]
뜻밖의 목소리 그리고 갑작스럽게 핸드폰을 스피커모드로 전환시킨 유지연. 이 두 가지 사안 덕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통화에 다시금 집중했다. 아니, 갑자기 스피커 모드는 왜 하는 거야? 그리고 새진 형이 갑자기 전화는 왜?
“아! 안녕하세요. 형.”
하루세끼를 계기로 인연을 맺어 한국에 있을 때면 종종 술잔을 기울이던 사이인지라, 어색함은 없었다. 하지만 형이 먼저 내게 전화를 걸었던 적은 없었기에 확실히 의외인 감이 없지는 않았다. 형은 자신이 피해를 받고 싶지 않은 만큼 남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 또한 강한 사람인지라, 방송 상에서 보여 지는 이미지보다 훨씬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었으니까.
“그게... 지혁아 지금 통화 괜찮아?”
그래서 예상하기 쉬웠다. 형의 왠지 모를 미안함이 담겨져 있는 목소리와 약간이나마 잡음이 섞여있는 통화음 그리고 무엇보다 며칠 전 걸려온 형식 삼촌의 전화까지 모두 이 상황을 예측할 수 있게끔 하는 충분한 증거가 되어주었으니까.
“촬영 중이세요? 며칠 전에 김형식 PD님이 출연해주실 수 있냐고 전화 왔었는데, 그것 때문에 전화하신 건가요?”
“어? 형식이가 진짜로 너한테 전화했어? 이게 진짜. 야! 양심 없는 놈아. 진짜 너는......”
뭔가 내가 말을 잘못한 것인지, 통화가 잠시 중단되었다. 스마트 폰 너머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굉장히 복잡해진 것으로 보아 새진 형과 형식 삼촌이 아마 티격태격하고 있는 듯 했다.
아니, 그나저나 형식 삼촌보다 새진 형이 나이가 많은데, 새진 형은 형이라 부르고 형식 삼촌은 삼촌으로 부르고 있네? 뭐지, 나이가 아니라 액면가 따라서 호칭하는 건가? 흐음.
생각지도 못한 의문이 떠올라 나 또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내 새진 형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전까지.
“그게. 지금 하루세끼 촬영 중이거든.”
“아!”
역시나 새진 형은 하루세끼 촬영 중이었다. 한 마디로 방송 중인 것이다.
이거, 새진 형이 직접 내게 전화를 걸었을 정도면 형식 삼촌이 무척이나 새진 형을 닦달했나보다. 새진 형 성격에 웬만하면, 진짜 웬만하면 방송 상에서 내게 전화를 걸거나, 출연 요청을 이유로 직접 콘택트를 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죄송해요. 제가 이번에 휴식기가 얼마 안 돼서 출연은 못,”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런데 새진 형이 전화를 건 것은 내가 예상했던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지혁아, 절대 여기 나오지 마라. 형식이 얘가 진짜 양심이 없어도 아니,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네. 아예 인연을 끊어버려. 전화번호 삭제하고 수신 거부,”
“아! 형! 지금 무슨 소리,”
“아, 조용히 좀 해!”
잠시 형식 삼촌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것도 잠시, 이내 들을 수 있었다. 새진 형이 내게 전화를 건 본 목적을.
“그게 전화를 안 하려고 했는데, 여기 게스트로 온 애가 너 너무 팬이라고 해서. 그래서 하게 됐네. 괜찮지?”
“네? 아! 물론이죠. 그런데 누구... 신데요?”
“그 혹시 배우 한여정이라고 알아?”
한여정이라는 이름이 들려오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알죠. 그런데 그분이 왜, 아! 이번 게스트가 그 분이세요?”
“응. 그래서 걔가 너 엄청 팬이라고, 전화 걸어달라고 졸라서 그래서 전화 건거야.”
국내 톱 여배우들 가운데 한명인 그녀의 이름을 지금 이 순간에, 그것도 새진 형으로부터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욱이 그녀가 나의 팬이라고, 그래서 새진 형이 내게 전화를 걸었다고 하니 오죽할까.
와아. 하루세끼가 잘나가긴 잘 나가네. 다른 여배우도 아니고 한여정이 게스트로? 대박.
“안녕하세요.”
전화기 너머로부터 무척이나 깨끗하고 청순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제야 내 무릎에 앉아있는 누군가가 무척이나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하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떨려왔지만, 애써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여기서 떨리는 목소리를 드러냈다간, 수화기 너머의 누군가에게도, 그리고 이곳에 있는 누군가에게도 무척이나 까다로운 오해를 사고 말 테니까.
“제가 정말 팬이에요. 그... 시간 되시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 이번에 한국에 계실 때...”
“네?”
하지만 이내 들려온 목소리에 애써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던 내 의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뭐가 이렇게 단호박인지. 인사를 나누자마자, 밥이라도 먹자는 수화기 너머 속 목소리에 움찔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싫지는 않았다. 한여정은 귀엽고 청순한 이미지로 대중들로부터 꾸준히 사랑받아온 여배우이기도 하거니와, 그런 겉모습과는 달리 꽤나 털털하고 솔직한 진면목으로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배우였으니까.
하지만 얼굴을 뚫어버릴 듯이 빤히 쳐다보고 있는 누군가의 시선에 아쉬움과 미안함 가득 담긴 말로 이 제안을 거절하려 했다. 나한테는 실질적인 명분뿐만 아니라, 오랜만에 맞이한 짧은 휴가라는, 형식적인 명분 또한 있었기에 그리 어려운 선택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선택을 새진 형이 어렵게 만들어버렸다.
“지혁아. 형도 가니까,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는 말고. 한국에 있을 때 시간되면 같이 밥 먹자. 형이 맛있는 데로 가서 사줄 테니까.”
“네? 아... 예. 시간 되면... 그럼 미리 전화 드릴게요.”
단 둘이 만나는 것도 아니고, 새진 형까지 같이? 흐음.
식사 제안이 으레 하는 인사말이 아닌, 진짜 말 그대로 식사 제안이라는 것을 알게 돼,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했다. 그저 답을 뭉뚱그려, 간접적으로 거절 의사를 내뱉었을 뿐.
“그래, 그럼 잘 쉬고, 이거 방송 촬영 끝나고 형이 따로 다시 전화할게. 쉬어라.”
그렇게 통화는 끝났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통화 이전의 분위기를 느낄 수가 없었다.
[찌릿]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어느새 식은땀이 흐르는 듯 했다.
“미리... 전화를... 드린다고?”
아니,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야? 미치겠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