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54 2019 =========================================================================
#454
“감사합니다!”
“뭘요. 다음에도 또 와요.”
“네!”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해야하는지라, 피로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기쁨을 준다 해도 말이다.
하지만 팬 사인회 겸 팬 미팅을 하는 것이 그녀는 좋았다.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무대에 대한 갈증, 그 그리움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녀에게는 팬 행사뿐이었으니까.
무대에서 수많은 이들의 환호를 받았던 그 순간,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또 다른 이들을 만나는 것은, 비록 그 사람들이 나와 같은 자리가 아닌, 맞은편에서 이를 기억하고 있을 지라도 그녀에겐 충분한 위로가 되었다.
“나를 잊었더라도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아도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도 생각날 거 에요. 내 노래가 들릴 때면.”
오늘 팬 미팅을 기념해 틀어놓았던 노래들 가운데 하나가 그녀의 이런 복잡한 생각들에 힘을 불어넣었다.
그때는 막연히, 막연히 생각했던 것이 현실이 된 지금.
“나를 잊었더라도 이제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아도 Good Bye. 나와의 사랑을 어린 시절의 치기로 여겨도 행복을 빌어줄게요. 나를 잊었더라도 이제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아도 Good Bye. 나와의 사랑을 어린 시절의 치기로 여겨도 행복을 빌어줄게요. 이젠 안녕. 이젠 안녕.”
그래서 그녀는 이런 팬 행사 때가 아니면 자신의 노래를 좀처럼 들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노래들 가운데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곡은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는 감정들을 너무나도 북돋아, 좀처럼 감정조절을 하기가 힘들게 만들었다. 팬들이 그 노래들을 듣고, 지나간 추억들과 감정들을 되새길 수 있는 것과 달리, 그녀는 이 조차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포근했던 봄바람이 지나가. 하나둘 꽃향기에서 멀어질 때면 너의 따스한 사랑 식어갈 까 걱정 돼. 순간 지나가버릴 너와 나의 봄이 영원할 순 없는 걸까.”
처음엔 다른 멤버들이 하나, 둘 다른 길을 걸어가는 게 이렇게 크게 다가오진 않았다. 프리티 스타 그룹 활동을 할 때부터 이미 몇 명의 멤버들은 개별 활동을 하고 있었고, 이것이 그룹 해체 후 멤버들이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을 그다지 낯설지 않게 만들어줬으니까.
물론 본인 스스로도 연기자로서의 길을 걸어갈 생각이었기에 그런 점도 없진 않았다.
애당초 프로젝트 데뷔 시즌 2에 지원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녀는 춤, 노래에 있어 이렇다 할 교육을 받아본 적도, 가수를 꿈꿔본 적도 없었다. 연기자로서 준비를 하는 와중에, 소속사의 권유에, 인지도를 향상시키기 위해 프로젝트 데뷔 시즌 2에 참가한 것이다.
“해바라기도 마냥 해만을 보진 않죠. 그래서 걱정돼요. 그대가 나를 잊을까. 봄비가 내릴 때면 우리 사랑은 새싹처럼 언제나 푸르러 질 수 있나요. 우리의 사랑이 포근했다면 이제는 더욱 뜨겁게 날 사랑해줘요.”
따라서 지금 그녀가 준비하는 길은, 애초에 그녀가 가고자 했던 길이었다.
인지도를 쌓자는 의도는 달성하다 못해 넘칠 정도로 확보한 상태였고 이는 그 어떤 대형 기획사 소속 신인 연기자도 갖기 힘든 이점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마음은 점점 복잡해져만 갔다. 남들보다 훨씬 앞선 곳에서 경주를 시작하려함에도 마냥 기쁘지가 않았다.
“따로따로 떨어지더라도 봄비는 하나가 되어 그대에게 기억되길 바라나봐. 하나둘 여름을 바랄 때면 새싹이 되어 포근한 그대의 사랑을 기다리나봐. 네 마음을 여름 바다가 빼앗아갈까 걱정 돼. Step by Step. I miss you more and more. 순간 지나가버릴 너와 나의 봄이 영원할 순 없는 걸까. 봄비가 내릴 때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무대가 주는 행복, 기쁨, 슬픔 등의 복합적인 감정들을 지우질 못했다는 것.
“그대가 내 곁에 다가왔을 때부터 수많은 기억들을 함께했어요. 그 순간들을 붙잡고 있을게요. 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지 않도록. 이 비가 그칠 때, 내 눈가에 빗물이 흐르지 않을 때,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수많은 기억들을 다시금 되새길 수 있을까요.”
나를 잊었더라도, 내 노래가 들릴 때면.
봄비가 내릴 때면.
여우비.
그녀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 세 개의 노래가 끝이 나자, 그녀 또한 마냥 자리에서 계속 앉아있을 수 없었다. 지금 일어나지 못한다면 아무래도 한동안 계속해서 이곳에 앉아 과거를 추억해야만 할 테니까.
오늘 오후에 잡혀있는 연기 수업에 가야한다는, 보다 현실적인 생각이 그녀가 의자에서 보다 쉽게 일어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그 덕에 그녀는 이내 팬들이 준 여러 물품들을 챙긴 채, 비교적 빨리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영아?”
때맞춰 들려온 엄마의 목소리 또한 큰 역할을 한 것은 당연했다. 엄마가 자신의 이런 모습 때문에 꽤나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아, 그녀는 다시금 자신의 얼굴 표정을 점검했다.
“어? 어, 엄마.”
개인 소속사를 차려주신 엄마, 아빠에게 괜한 걱정을 더 이상 끼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짐은 엄마가 챙길 테니까. 얼른 내려가 봐.”
“응?”
그런데 그런 그녀의 노력은 의미 없는 행동이 되고 말았다. 굳이 표정관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
“너 찾아온 손님 있으셔서 지금 아빠랑 같이 있어.”
갑작스런 손님 얘기에 그녀의 얼굴엔 의아함이 가득해졌다. 하지만 이내 자신을 재촉하는 엄마의 성화에 그녀는 한 아름 품에 안고 있던 팬들의 선물을 잠시 내려놓은 뒤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얼굴에 가득 담긴 의아함을 지우지 않은 채.
*
“그래서 분위기는 어떤데?”
차 밖을 나서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이는 그녀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이자, 상식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옷차림은 상식을 벗어난, 그런 옷차림이었다.
“괜찮은 것 같아. 감독님도 그렇고.”
편한 옷을 입고 오라고 했다. 어차피 차안에서만 있을 것이기에, 굳이 차려 입고 만나는 것보다 서로가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불편함을 최소한으로 줄여보고자 한 까닭이다.
그런데 그녀의 옷차림은 편안함과는 꽤나 거리가 먼 차림새였다. 굉장히 편한 옷차림으로 나온 내 자신이 미안해질 정도로.
아니, 며칠 뒤면 크리스마스인데 치마는 무슨 치마란 말인가.
물론 롱 코트를 입고 나와, 차안에서 이를 벗었기에 비교적 가벼운 옷차림으로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걸 떠나서 너무 신경 쓴 티가 났다. 치마는 그렇다 쳐도 눈 쌓인 이 겨울에 누구 죽여도 될 것 같은 하이힐은 이를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개인 신이 대부분이잖아. 이 영화가. 그래서 처음엔 꽤 쉽게 봤어. 상대 배우 호흡 상관없다는 게... 그렇게 느껴졌거든. 그런데... 오히려 그러니까, 더 숨 막히는 것 같... 내 말 듣고 있어?”
그녀의 옷차림에 너무 신경을 쓰고 있어서일까. 순간 대화에서 이탈해버렸다.
“그만 쳐다봐. 이 바보야.”
그녀 또한 자신을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낀 듯 했다. 아니 모르는 게 이상했다. 그 정도로 뚫어지게 쳐다봤으니까.
“왜 그렇게 차려입고 왔어. 편하게 입고 오라니까.”
괜스레 대충 차려입고 나온 내가 한심스럽기도 하고 그녀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분명 편하게 입고 오라고, 그녀에게 미리 여러 번 말해줬음에도.
“그래서 싫어?”
“뭐?”
“내가 이렇게 입고 와서 싫냐고.”
뭐, 저렇게 물어본다면 내가 할 말은 없겠지만.
누가 나 때문에 이러나? 본인 불편할까봐, 그런 거지.
“이게 더 편해.”
“어?”
“이게. 더. 편해.”
“어,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하하...”
왜 그녀가 이렇게 차려입고 나온 것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내게 잘 보이고 싶어서.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이유는 간단했다. 그 이유와 의도에 어울리게 그녀는 무지하게 예뻤고 아름다웠다. 이 점에서 보자면 그녀의 의도는 성공했다. 하지만 마음에 걸렸다. 눈치 없이 진짜로 편하게 입고 나온 내 자신이.
“넌 뭘 입어도 괜찮아.”
저렇게 챙겨 입고 나온 주제에, 청바지에 패딩 차림인 나한테는 괜찮다고 말하는 거. 그거 농락이나 조롱은 아니지? 참 나.
“어, 어?”
“가만있어.”
“이거 왜 이래?”
나 만난다고 예쁘게 차려입고 나온 것도 그렇고 오랜만에 만났다는 점도 있고 해서인지 고작 몇 십cm 거리도 용납이 안 됐다.
“내가 추워서 그래.”
더울 정도로 히터를 틀어놔서, 롱 코트도 벗고 패딩도 벗은 상태이건만 변명할 게 그것 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그런 형편없는 변명에 대놓고 핀잔을 주진 않았다. 그저 못이기는 척 내 품 안에 안길 분.
“왜? 그 여자랑 영화 찍을 때 이런 것도 했나봐?”
어라. 못 이기는 척 안긴 게 아니라, 비수를 꽂으려고 안긴 건가? 크흠...
*
“개봉은 언제쯤 할 것 같아?”
“빠르면 4월이나 5월? 늦으면 7월 그쯤에 할 것 같아.”
작년 6월 두바이에서의 만남 이후, 유지연과의 만남은 좀처럼 성사되질 못했다. 고작해야 7월에 1번. 그게 전부였다.
휴식기인 그녀가 LA로와 종종 오겠다는 말을, 그것도 먼저 건넸었기에 이다지도 서로 만나는 게 어려울 줄, 그때에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생각보다 일찍 하네. 촬영기간이 그럼 실질적으로,”
“8월에 촬영 들어가서 3월까지 촬영이니까, 8개월 꽉 채우는 거지.”
그녀에게 들어온 영화, 드라마 대본들 가운데 내가 무척이나 눈여겨보고 있었던 대본이 있음을 알게 된 까닭이었다. 그녀와 나의 만남이 어렵게 된 것은.
“밤샘 촬영도 많이 하고... 뭐 그러는데 매니저 오빠 말로는 드문 일은 아닌가봐.”
“응?”
“제작비도 있고 그러니까, 최대한 몰아서 찍는 거지. 할리우드에서는 안 그러지?”
“음... 나도 이제 두 편째니까. 전체는 모르겠는데, 미스터 지는 안 그래. 계약서가 워낙 구체적이어서.”
“역시... 그렇구나. 그래도 첫 영화니까, 더 애착이 가는 것 같아. 강행군하는 것 치고는 촬영장 분위기도 엄청 좋고.”
장현성 감독님으로부터 주연 제안을 받았던 DITTO의 여자 주인공역을 그녀가 맡게 되었다. 순전히 나의 권유로. 그래서 이는 내가 자초하게 된 것이라 이제와 만남의 어려움을 다른 누군가에게 탓할 수는 없었다.
“힘들진, 아니 안 힘들어?”
“네가 하라고 했잖아.”
“흐음... 그래서 싫어? 혹시 작품이 마음에 안 들어?”
그때 당시에 유지연은 휴식기, 말 그대로 반년 이상을 쉬려고 했었다. 직전에 주연으로 열연했던 드라마가 워낙에 높은 시청률을 받았기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꽤나 많은 기력을 쏟아 부어야 했고 또한 막대한 부담감을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에게 DITTO 여자 주인공역 제안이 들어왔다는 점을 알게 된 내가 막 우겼다. 무조건 그 작품 하라고.
그만큼 예감이 너무 좋았다. 내가 OST를 만들어서 불렀다는, 그런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 대본이 지닌 가슴 먹먹함이 강한 인상을 내게 새겼었다. 쉬고 싶다던 유지연에게 이 작품 참여를 강권했을 정도로.
“마음에 들어. 어려운데, 촬영하면 할수록 빠져들 정도야.”
“그런데?”
그런 나의 태도에 꽤나 의아했던 그녀였지만 이내 그녀는 그 작품 참가를 결정했다. 당연히, 내가 그녀의 그런 결정에 큰 역할을 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결정은 오로지 그녀의 선택이었다. 대본이 마음에 든다며 뒤늦게 좋아했던 것도 전화할 때면 고맙다고 수줍은 듯 말하던 것도 그녀였고.
“너 못 봤잖아. 촬영 들어가기 직전에 한번 보고...”
안본 사이에 더 예뻐진 줄로만 알았더니, 더 귀여워지기까지 한 것일까. 이거 인내는 쓰다, 그러나 열매는 달다. 뭐 이런 말이 현실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많이 보고 싶었나봐? 이렇게 예쁘게... 입고 오고?”
그녀를 보지 못한 몇 개월의 세월이 만난 지 삼십분도 되지 않아 보상이 되는 듯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