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마음을 노래로-451화 (451/502)

00451  2019  =========================================================================

#451

[탁]

아프고 싶었다. 몸 관리를 잘하지 못해 촬영에 지장이 생길까 싶어, 내 자신을 한심스럽게 봤던 과거가 후회됐다.

나는 당장 쓰러져야만 했다.

“입!”

지금 내가 먹고 있는 게 죽인 것일까 아니면 사약인 것일까.

서리가 맺혀버릴 정도로 차가운 그녀의 눈빛을 감내하며 목구멍으로 넘기는 죽은,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뜨거움이야 그녀가 손수 입으로 식혀줘서 못 느끼는 것이겠지만.

“저기... 이거 꿈,”

“입!”

무슨 말을 못 꺼내겠다. 혹시나 싶어 ‘꿈일까?’하는 헛된 희망을 품어보았지만 이는 더 큰 절망과 현실을 느끼게 할 뿐이었다.

[흐음... 코는 확실히 안했고.]

[역시 꿈이라서 그런지 볼 살이 확실히 더 많네. 살찐 유지연이 이정도일까?]

[역시나 꿈에서나 현실에서나 여기는 똑같네. 살이 찐 것 같은데, 왜 여긴 똑같지? 여자들은 살찌면 여기부터 찐다는 데. 흐음... 유지연은 살이 찌면 볼 살이랑 뱃살부터 찌는 걸까? 아닌데, 유재연은 안 그러던데... 이건 유지연만 그러는 걸까?]

[유재연보다 언니인데 왜 여긴 더 작지? 그러고 보니, 키도 약간이나마 더 작은 것 같고... 흐음...]

내가 했던 말들이 어찌나 선명하게 떠오르던지, 아파서 쓰러졌을 때보다 더 몸이 뜨거워졌다.

정말로 그게 꿈이 아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 상황을 해쳐나갈 자신이 없었다.

아니, 도대체 그녀가 지금 여기에 어떻게, 왜 있는 것일까. 아직 개장도 안한 버즈 두바이 타워에 그것도 내 방에.

“여기는 어떻게,”

“입!”

무슨 말만 하려고 하면 죽을 한 움큼 떠 입으러 가져다 대는 유지연 덕에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아. 망했다.

*

화내야할 때 화를 내지 않을 때. 우리들은 흔히 이를 개꿀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막상 이를 겪어본다면 그런 생각을 다시는 하지 못할 것이다.

“저기...”

내 품안에 안겨있는 유지연.

화를 낼거라 생각했다. 내가 꿈이라 생각했던 곳이 사실은 현실이었다는 것, 그녀에게 살이 쪘다느니, 가슴이 작다느니, 동생보다 못하다느니 와 같은 말들을 해버렸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당연히.

그런데 유지연은 내게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내게 죽을 먹였고 이내 수액을 다 맞은 걸 확인한 뒤 의사를 다시금 불렀으며, 모두가 물러난 뒤에는 나를 직접 씻겨주기까지 했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세상 편하다는 표정으로 내 품에 안겨있기까지 했다. 더욱이 알몸으로.

“미안해... 꿈속에서라도 그런 말 하면 안 됐는데... 나도 모르게. 약 기운이 심했... 하아. 나 뭐래니.”

화를 내야할 상황인데 화를 내지 않는다. 그 덕에 나는 유지연의 행동 하나, 하나에 모든 신경이 집중해야만 했다.

“미안... 그리고 고마워. 간호해줘서.”

나름 억울하긴 했으나, 내가 못난 놈은 못난 놈이기에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사과하고 싶었다. 마음은 이럴 진데 그러지 못해 제발까지 계속 저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부러웠었어.”

“어?”

전혀 뜻밖의, 예상 밖의 말이 들려와 자연스레 반문하게 되었다.

부럽다니, 지금이 부럽다는 말이 나올 상황인가? 답은 전혀 ‘아니다’이다.

뭐가 부럽다는 것일까. 당장 화를 내도, 삐져도 단단히 삐질 상황일진데 말이다.

“친구들도 많이 있고 또 애교도 많고. 아빠, 엄마도 동생을 더 많이 귀여워하셨기도 하고. 아니, 아빠는 아니었나? 어쨌든 그랬어. 나랑은 다르게 두루두루 친해지고 사랑받는 동생이 부러웠거든.”

우리 관계의 시작부터가 ‘나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유지연 뿐이다’였다. 그래서인지, 나와 관련된 얘기는 그녀와의 대화에서 단골 주제이자, 거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녀와 관련된 얘기를 나눠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지금 마주하게 된 뜻밖의 상황이 굉장히 어색하고 또한 색달라보였을 정도로.

“나는 그러질 못했거든. 내 나이에 어울리는 그런 모습을 가지는 게 어려웠어. 뭐 원래 성격이 그렇기도 했지만. 정작 동생을 돌볼 사람은 나뿐이고 또 동생도 나를 잘 따라서 그런 면도 있는 것 같긴 해. 아주 가끔, 아주 가끔 어리광 피우고도 싶고 막 안겨서 울고 싶기도 했는데 그럴 사람이 없었거든.”

지금 상황에서 그녀가 왜 자신의 과거 얘기를 꺼냈는지, 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를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던 눈은 어느새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는 실타래를 풀 듯 하나, 하나 자신의 얘기를 꺼내놓았다.

“내가 자꾸 재연이 얘기만 하면... 발끈하는 거. 아마 열등감 인가봐.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하는 모습들을 재연이는 해왔고 또 가지고 있거든.”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뭉클해졌다. 그녀가 자신의 속 얘기를 내게 건네고 있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섹스할 때... 왠지 모르게 몽롱해졌을 때... 네가 재연이랑 비교하면 더 흥분하고 그러는 거... 그것도 이것 때문에 그런 것 같고...”

순진했던 여자가 섹스를 할 때면 확 변한다든지, 대장부 같던 여자가 섹스를 할 때면 조신해진다든지.

섹스란 인간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무엇인가를 끄집어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게끔 만드는 마력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듯이, 너무나도 수월하게.

그래서일까. 정식으로 사귀기 전에 종종 유재연과 관련된 얘기를 꺼냈었다. 물론 다른 이유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우연치 않은 기회로 유재연과 관련된 얘기가 튀어나왔고 때마침, 너무나도 흥분해 적극적으로 섹스에 임하는 유지연을 발견했다는 점. 그 이유 단 하나 때문이었다.

어쨌든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사안을 그녀의 입을 통해서 전해 듣자, 지금 그녀가 내게 건네는 얘기가 그리 가벼운 얘기가 아님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이내 그녀가 건넨 얘기에서도 또한 증명되었다.

“아직 재연이는 널 좋아하는 것 같아. 고백도 많이 받고 그 중 몇 번은 받아들여서 너 잊고 다른 사람 만나보려고 하는 것 같긴 하던데... 결과적으로 잘 안 되는 것 같더라고.”

유재연이 날 아직도 좋아한다? 10년 전에 있었던 이별이다. 그만큼 이 얘기를 믿기가 꽤나 힘들었다.

더욱이 서로간의 접점이 꾸준히 존재해왔다면 모를까, 수년에 한번 우연치 않게 가뭄에 콩 나 듯 얼굴을 마주했으니 오죽할까.

“그래서 지금 재연이한테 많이 미안해. 나... 양보하기도 싫고 너랑 떨어져있는 것도 싫어서...”

하지만 이내 나를 더욱 꼭 껴안는 유지연으로 인해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하기 싫었다. 복잡한 생각 없이 그냥 유지연을 바라보고 싶었다.

“나 살쪄서... 싫어?”

‘살쪄서 싫냐’는 마음에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절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치만... 가슴은 안찌고 볼이랑 뱃살,”

“아니야.”

그리고 확언을 했다. 꿈이라고 여겨 생각 없이 내뱉었던 말이 유지연의 마음을 어지럽힌 것 같아 망설임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다행이야.”

[쪽]

“좋아해. 아니... 사랑해. 많이.”

상처 줄 말을 그렇게 해놓고서 이렇게 달콤한 말을 들어도 될지, 양심의 가책마저 느껴졌지만 이내 사랑스러운 그녀의 속삭임에 굴복하고 말았다.

입을 마주해오는 그녀의 입술은 뜨거웠다. 때마침 느껴지기 시작하는 그녀의 몸처럼.

*

“여기서 잠들었다고?”

아직 내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끓어오르는 혈기를 구체적인 행위로 해소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녀를 품안에 껴안은 채, 스파 풀에 몸을 담그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나는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아니. 여기 있다가 네 전화 받고. 저기 반신욕조로 옮겼어. 그때 네가 전화 갑자기 끊었을 때, 그때 깜빡 잠들어버렸고.”

혼자였을 때와는 또 다른 감정이, 그것도 같이 있는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유지연이라는 사실이 내게 벅찬 감동을 선사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이 느낌은 결코 스파 풀의 따뜻한 물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 그녀가 주는 정신적인 안도감이 그만큼 거대했다.

“바보...”

그녀가 이내 내게 바보라고 말을 건넨 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나 또한 따라 일어선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떨어지기 싫었다. 계속 품안에 가둬두고 싶었다.

유지연을 내게 완전히 구속시켜버리고 싶다는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너무 아름답다. 높은 곳을 좋아하진 않는데, 여긴... 너무 높아서 실감이 안나나 봐. 무섭지도 않은 게.”

바깥 테라스에서 두바이의 야경을 바라보는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어제가 특별한 날이었던 듯 바람은 차갑지 않았고 시원하기만 했는지라 굳이 이럴 필요까진 없었으나, 추울까봐 이런 행동을 하지는 않았기에 딱히 상관은 없었다.

“여기 10개 스위트룸 중에 하나가 GREAT ARTIST KANG이라며?”

“어? 뭐, 그렇게 됐어. 언론에 한번 조명되긴 했는데, 개장되면 또 난리겠지.”

“이렇게나 잘난 남자가 지금은 내 뒤에서 날 안고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네. 의식 잃고 쓰러질 때 날 찾았다는 건 더 믿기 힘들고.”

그녀가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 내가 쓰러지면서 그녀를 불렀다는 사실이 지금의 분위기에 편승해 더욱 로맨틱하게 들렸다. 물론 나는 기억이 나지 않은 부분이지만.

“고마워. 사실... 나한테 내색하지 않으시려고 일부로 대수롭지 않게 구셨지만 큰일이라는 거, 아빠가 평생 일궈온 회사 정말 위험했다는 거 잘 알고 있거든. 네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큰 일 났을 거야. 아빠도 엄마도... 많이 상심하셨을 거고.”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베풀었던 너스레가 결과적으로 무척 큰 이점이 되어 내게 다가왔다는 점 그리고,

“영화 촬영 열심히 하고... 너 시간 날 때 그때 갈게. 그러니까, 힘내 알겠지?”

치열한 영화 촬영 기간 동안 비타민 같은 기회를 종종 갖게 될 것이라는 기쁜 소식까지.

모든 게 다 좋았다. 저 밤하늘과 사막의 어둠을 밀어내고 화려하게 빛을 뿜어내는 두바이의 야경처럼.

“그럼 나 장인어른, 장모님한테 점수 좀 딴 건가?”

“뭐어?”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그녀가 계속 옆에 있기를 바랐다. 그녀 또한 나와 같은 마음이기를 또한 바랐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