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마음을 노래로-448화 (448/502)

00448  2019  =========================================================================

#448

[손님. 주문하신 데이츠(Dates) 20 상자. 선물 포장 완료되었습니다. 주문하신 데이츠 맞으... 손님?]

그녀의 시선은 좀처럼 진동하지 않는 스마트 폰에 꽂혀있었다.

[손님?]

[아! 예! 아, 얼마라고 했죠?]

[네, 손님 데이츠(Dates) 20개 주문하신 것 맞죠?]

얼마나 한눈을 팔고 있었을까. 가게 점원의 안색이 미약하게나마 찌푸려진 것을 확인한 그녀가 서둘러 지갑을 꺼내들었다.

[다해서 900 AED입니다. 손님.]

[가진 게 달러밖에 없는데, 달러는,]

[달러로는 280달러입니다.]

온 신경이 스마트 폰에 팔린 것은 어제 저녁부터였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그는 그 이후로 연락을 취해오지 않았다. 단순히 비행기 안이기에, 편하게 누워있다 해도 피곤해질 수밖에 없는 비행기 안이기에 잠이 들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을 그녀 또한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연락이 오지 않았다는 점을 내내 신경 쓰고 있었다.

혹시나 자신이 전화를 끊어버려, 그가 화라도 난 것일까. 그가 자신이 진짜 바람을 핀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 같은 생각들이, 상식적으로 과하다고, 말이 되지 않는다고 이성이 계속해서 속삭였지만, 그녀의 마음을 안정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근처 카페에서 지인들을 주기 위해 산 데이츠 상자들을 캐리어에 집어넣던 와중에, 그녀의 귀에 낯익은 한국말이 들려온 것은.

“어쩜 그렇게 멋있는지 모르겠어요. 기장님.”

“진짜 노래도 얼마나 잘 부르는지. 게다가 이번에는 수십억을 그냥!”

“돈도 많아 노래도 잘 불러, 연기도 잘 해. 진짜 세상 불공평하다고 느낀 게 한 두 번이 아니라니까요?”

“게다가...”

단순히 한국 관광객일 수도 있었다. 두바이는 세계적인 관광지인 만큼 한국인을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본능이, 직감이 그녀의 온 신경을 방금 전 목소리의 주인공들에게로 향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도시마다 잠깐씩 체류할 때, 숙소까지 마련해주잖아요. 이런 거 보면 진짜 주변 사람들이 다 좋아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해요.”

“넌 그것 때문이 아니더라도 좋아하잖아.”

“어? 뭐야, 그럼 넌 아니고?”

“자, 자! 그만들 하고 슬슬 밥이나 먹으러 가게, 맛 집들 좀 찾아보지 그러나? 요즘 젊은 사람들은 핸드폰으로 쓱쓱 찾으면 된다면서?”

“어머! 기장님도 그렇고 부기장님도 너무해요. 스마트 폰 쓰면서 아직까지 전화랑 메시지만 보내는 사람은 두 분 뿐 일거에요.”

들리는 대화소리로, 그들 일행이 비행기와 관련된 일을 업으로 삼는 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하게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때 제주도 갔을 때 같이 갔던 그 사람이... 여자 친구 맞겠죠?”

“흐음... 우리가 그 부분에 대해서 얘기 나누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네.”

“아! 기장님. 저, 저도 마찬가지에요!”

“저, 저도요!”

어째서 저들의 대화에 누군가가 자꾸만 떠오르는 지가 그녀의 신경을 자꾸만 자극시켰다.

“진짜 그때 회사 때려치고 여기 지원한 게 신의 한수였어요. 제 인생에서.”

“저도요. 솔직히... 전용기 승무원은, 특히 여자 승무원 같은 경우 생명이 짧잖아요. 보통 전용기 가진 사람들은 젊고 예쁜 승무원들만 뽑으니까. 뭐, 그래도 후회는 안 해요. 안 그럴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사람을 가장 곁에서 볼 수 있었잖아요?”

“뭐, 저도 후회는 안하는 것 같네요. 그러니까, 만약에 저희 짤리면... 기장님이랑 부기장님은 저희 잊으시면 안 돼요. 아셨죠! 가끔씩 지혁,”

“영미씨!”

“헉.”

주변을 둘러보며 주의 시선을 신경 쓰는 일행. 그리고 자신이 무척 큰 실수를 했다는 듯 입을 두 손으로 막은 채 얼굴까지 하얗게 질린 어느 한 여자.

“지금 뭣들 하는 건가!”

“기, 기장님. 언성을 조금...”

“크흠...”

“죄, 죄송해요.”

“우리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쪽 관련해서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도록 조심하게.”

어느새 난해하기 그지없던 퍼즐은 모두 맞춰져 있었다. 더욱이 그들 일행의 얼굴이 묘하게 낯이 익다는 점까지 더해진 터라 그녀의 행동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이윽고 그녀가 간신히 집어넣었던 핸드폰을 다시금 꺼내들었다.

그리고 때마침 그녀가 핸드폰을 꺼내자마자, 기다리고 기다리던 진동음이 울려 퍼졌다.

*

“으으윽... 엣취!”

깜빡하고 반신욕조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단순히 스파 풀에서 잠이 들었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것이다. 임시로 뜨거운 물을 받은 반신욕조로 자리를 옮겨 몸을 담근 게 지금 일의 단초가 되었다. 그 덕에 졸지에 차가워진 물속에서 잠이 들고만 나는 으스스 떨린 몸을 애써 이불로 감싸는, 그런 처지가 되고 말았고.

이거 굉장히 큰일이다. 그저 유지연과의 연락을 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 아니었다.

당장 계획된 촬영이 걱정되었다.

내가 이곳 두바이에 올 수 있었던 이유는 6월 둘 째 주부터 잡힌 촬영 스케줄 덕분이었다. 첫 촬영까지는 시간상으로 일주일이 조금 넘게 남아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당장 이곳에서 삼사일 정도 보낼 생각이라는 점 그리고 시차 적응, 액션 신을 위해 다시금 합을 맞춰보는 과정, 대본 점검 등을 고려한다면 이는 결코 넉넉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감기에 걸려버린 내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스러운 것이고.

“미리 말씀해주신 아침 식사입니다. 예정대로 지금 가져다 드릴까요?”

감기약을 부탁하기 위해 프런트에 연락을 취했다. 그러자, 담당 직원이 너무나도 밝은 목소리로 미리 부탁했던 아침과 관련된 사안을 내게 전달했다.

하지만 미리 부탁했고 자시고 이미 소용이 없었다. 머리가 제법 뜨겁기도 하거니와 입맛도 없었다. 이제 보니 살짝, 아니 머리가 많이 어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

“감기약, 죽...”

내가 지금 한국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챈 뒤, 아차 싶어 다시금 영어로 말을 하려 했다.

이내 들려온 응답과 프런트 직원이 내게 건넨 첫 응답이 영어가 아니라는 점에 혼동이 와서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몸이 안 좋으신가요? 즉시 의사를 불러드리겠습니다.”

지금 내가 많이 아프긴 아픈가보다. 다른 곳도 아니고 두바이 한복판에서,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걸었더니, 담당 직원이 나와 한국말로 대화를 하고 의사까지 불러준다는 것을 보니 말이다.

“하아...”

입에서 단내가 풍겨져 나왔다. 영어로 다시금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질 않았다.

“YOooooo......"

제대로 말을 했는지조차 몰랐다. 그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침대인지 바닥인지 모를 곳에.

*

땀을 많이 흘려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눈을 떴을 때 전체적으로 몸이 가볍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감기증세가 나아졌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물컹물컹]

내 앞에 있을 수 없는 이가 내 앞에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하하.

신기했다. 꿈인 듯 했다. 눈앞에서 유지연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래서 굉장히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감기 따위는 이미 해소해버린 듯 몸이 가벼워 눈앞에 있는 그녀를 만지는 행위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물컹물컹]

꿈이 이렇게도 현실감 있어도 되는 것일까. 이런 걸 보면 가상현실이라는 게 실존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가상현실이라는 것이 뇌를 이용하는 것이고, 꿈도 뭐, 자세히는 모르지만 뇌의 어떤 작용에 의해서 꾸게 되는 것일 테니까. 아니면 말고.

어쨌든 이런 꿈은 언제든 환영할 만 하다.

베개대신 베고 있는 무릎. 그리고 서슴없이 만지고 있는 가슴.

모두가 실제와 너무나도 비슷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감탄하게 만든 것은 얼굴이었다.

꿈에서 이렇게나 정교하고 구체적인 형상을 본 게 처음이라, 놀고 있던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흐음... 코는 확실히 안했고.”

현실의 유지연과 꿈속의 유지연을 서로 비교하는 것이 꽤나 재밌었다.

“역시 꿈이라서 그런지 볼 살이 확실히 더 많네. 살찐 유지연이 이정도일까?”

현실에서 이런 말을 하면서 이런 행동을 했다? 뒷감당을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엄청나게 상회하는 것이었다.

뭐, 어쨌든 이건 꿈이니까. 지금에 충실하자.

“역시나 꿈에서나 현실에서나 여기는 똑같네. 살이 찐 것 같은데, 왜 여긴 똑같지? 여자들은 살찌면 여기부터 찐다는 데. 흐음... 유지연은 살이 찌면 볼 살이랑 뱃살부터 찌는 걸까? 아닌데, 유재연은 안 그러던데... 이건 유지연만 그러는 걸까?”

그런데 이 꿈이라는 게 인지하면 할수록 대단했다. 내가 마지막을 봤던 유지연과 꿈속의 유지연은 너무나도 비슷했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꿈속의 유지연이 지금껏 봐왔던 유지연보다 살이 조금 찐 듯한 감촉을 내게 가져다주었으니까.

“유재연보다 언니인데 왜 여긴 더 작지? 그러고 보니, 키도 약간이나마 더 작은 것 같고... 흐음...”

물론 내가 대단하다고 말한 것은 이것 때문이 아니었다.

“어? 꿈인데, 움찔하네? 와... 진짜 같다. 하하. 대박.”

내가 말을 할 때면 움찔해하는, 실시간으로 내 말에 반응을 하는 꿈속 유지연이 너무나도 신기했다. 와아. 이거 진짜 가상현실에서 판타지며 무협이며 전부 구현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던데, 그게 개발되면 바로 이런 기분인 걸까?

그런데 이렇게까지 사고가 확장되다보니 조금 섬뜩해졌다.

꿈임을 확신하고 있음에도, 꿈속 유지연이 현실의 유지연과 너무나도 비슷하다보니 지금 내 행동이 얼마나 대담한 것이지가 배가 되어 실감되었던 것이다.

“걱정 마. 내가 많이 만져주면 커질 거야. 그리고 난 지금 유지연의 모습이 제일 좋으니까. 뭐, 애교가 없는 게 조금 아쉽지만?”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아부성 짙은 멘트를 꿈속 유지연에게 건넸다. 너도 참, 어지간하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말을 해서 마음이 편하긴 했다. 꿈속 유지연의 리얼함에 알게 모르게 서늘했던 감정이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하아... 유지연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했는데... 감기에 걸려버렸네? 쩝. 안 되겠다. 나 이만 잘래. 꿈속 유지연 안녕. 다음에 또 다시 보자. 안녕!”

그렇게 나는 다시금 잠을 청했다. 깨어났을 때도 지금 이 꿈이 기억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후우. 감기 걸린 것 치곤 꽤나 좋은 걸 얻어가는 걸? 뭐, 기억이 계속 났을 때의 일이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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