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마음을 노래로-447화 (447/502)

00447  2019  =========================================================================

#447

“회사가 그런 상황인데... 왜 말씀 안하셨어요.”

딸의 서슬 퍼런 눈빛에 그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그의 큰 딸은 똑같았다. 그의 아내와.

특히 딸의 눈빛과 차가운 말투는, 젊은 시절 지금의 아내와 연애를 했을 때, 바로 그때를 절로 연상시키게끔 했다. 그래서 이렇게 그 눈빛을 마주할 때면 지금의 아내 모습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자신의 큰 딸 또한 엄마를 닮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아마 똑같은 전철을 밟게 될 거라는 것도 믿기 힘들었고.

“하하! 우리 큰 딸이 아빠 걱정돼서 그러는 거구나?”

“아빠!”

“하하. 이제 다 잘 마무리 되었으니까, 우리 큰 딸 걱정하지 말고 얼른 먹어. 음식 다 식겠다.”

딸에게 복잡한 걱정거리를 남겨두고 싶지 않았고 이미 해결된 일을 다시금 꺼내 딸에게 타박을 받고 싶지 않았기에 그는 애써 화제를 돌리려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의도는, 그의 옆에서 생각에 잠겨있던 아내 박주현으로 인해 현실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그 미스터 강이라는 사람... 흐음...”

“엄마 그게 무슨 소리에요? 미스터 강?”

딸인 유지연이 아랍어를 하지 못했기에 미스터 강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와 아내만 알고 있는 상태였다. 헌데 이를 언급한 그의 아내 박주현 덕에, 결국 ‘회사가 겪었던 위기’와 관련된 얘기를 꺼내야만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아! 그 얘길 안했구나. 사실 그 사람이......”

아내 박주현이 그녀답지 않은 수다스러움을 드러내며, 딸인 유지연에게 자초지종을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회사의 위기와 더불어 일이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미스터 강이라는 사람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그런데 그때였다.

딸과 대화를 나누던 그의 아내 박주현의 입에서 놀람이 흘러나온 것은.

“왕자랑 사적인 친분이 있는 한국 사람이... 어머!”

“응? 왜, 여보?”

“혹시... 강지혁.”

아내를 놀라게 했던 것은 전혀 뜻밖의 사람이었다.

“에? 그 우리 지연이랑 같이 드라마 찍었던 그 청년 말이야?”

따라서 그 또한 그의 아내와 마찬가지로 얼굴 가득 놀람을 담고 있었다.

“하긴... 그 사람 두바이 왕자랑 친분 있다고 했어. 그런데 그 사람 지금 한국에 있지 않아?”

처음엔 ‘말도 안 돼’라는 생각이 우선 찾아왔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그는 아내 박주현의 생각이 맞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바이 왕가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한국사람. 흔해빠진 방계의 왕가사람이 아닌 실제 왕자라고 불릴 만한 사람과 친분을 나눈 사람은 그가 알기로도 유일했다.

“어머. 그 사람 어제 자정에 출국했다는데요? 미국으로.”

하지만 이내 이어진 아내 박주현의 말에 잔뜩 달아올랐던 그의 마음이 일순간 식어버렸다.

“그럼 그렇지. 그런 사람이 뭐하려고 그런 부탁까지 하면서 도와줬겠어? 허허... 그나저나, 그 미스터 강이라는 사람한테 고마워서 어쩌나... 얼굴이나 이름이라도 알면...”

잔뜩 놀란 표정으로 그들 부부를 쳐다보고 있는 누군가와는 다르게.

*

사막 위에서 이뤄낸 기적.

두바이를 일컫는 말이다.

솔직히 공항에서 내려서 헬기를 타고 이곳까지 오는 길에 이 말이 어째서 두바이를 일컫게 됐는지 이미 알 수 있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사막의 끝자락에 해변과 어우러지는 최첨단의 도시. 헬기 밖 창가는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던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높은 곳에서 뻥 뚫린 창문을 통해 두바이 전체를 조망하다보니, 이를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바로 밑 두바이 몰 앞에는 세계 최고의 분수 쇼라고 명명된 두바이 몰 분수 쇼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고 수많은 고층 빌딩은 두바이의 밤하늘을 빛내고 있었다.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았다. 별천지의 세상이 바로 이를 뜻함을 깨달았다.

물론 고층 빌딩과 불빛, 유동인구로만 따지면 LA 할리우드, 뉴욕 맨해튼 등 수많은 도시들이 더 뛰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도시의 화려함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어둠 천지의 사막이 두바이의 화려함을 더욱 빛내주고 있었는지라 다른 도시들보다 더욱 큰 감명을 받을 수 있었다.

“후우...”

숨 쉬는 걸 깜빡한 것일까. 숨을 내뱉는 게 무척이나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정도로 이곳 스위트룸이 품고 있는 야경은 어마어마했다.

물론 야경이 이곳 스위트룸의 진가를 전부 대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휘이익]

절로 휘파람이 나올 정도였다.

잠실 타워 펜트 하우스는 우리나라 최고 호텔인 잠실 타워의 스위트룸과 유사한 구조를 지녔다. 그래서 웬만한 스위트룸에는 솔직히 감흥이 안 왔다. 내 스스로가 최고라고 평가될 만한 집들을 여러 채 가져서 그런 것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이곳은 잠실 타워 펜트 하우스와는 차원이 달랐다.

규모면 규모 시설이면 시설. 잠실 타워 펜트 하우스를 압살하고도 남았다.

[덜컥]

특히 161층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게, 테라스까지 존재해서 깜짝 놀랐다.

말이 되는 가. 단순히 몇 십 층짜리 아파트도 아니고, 161층이다. 161층.

이 정도 높이에 테라스라니, 그것도 정원처럼 꾸며진 테라스였기에 감탄이 그치질 않았다. 얼씨구, 흔들의자까지 있어?

진짜 대단하네. 대단해. 이 방 이름이 GREAT ARTIST KANG이라는 건 더 놀랍고. 나 원 참.

*

앞이 뻥 뚫린 테라스. 바람이 사뭇 차가웠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할 정도로 대단했다. 내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슴 속에 남아있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그 순간만큼은 사라져버린 듯 했다.

그래서 내가 테라스에서 내부로 들어온 것은 한참 뒤, 몸이 꽤나 차가워진 뒤였다.

[풍덩]

수많은 방들 가운데, 거실이라고 할 만한 곳에 마련된 수영장 같은 온천 스파 시설에 몸을 담궜다. 옷을 입은 상태 그대로. 그러자, 차가웠던 몸이 순간 풀어지며 쌓여있던 피로가 모두 해소되는 것 같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쾌락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슬슬 눈이 감겼다. ‘이대로 죽어도 좋아’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노곤함이 날 휩쓸어버릴 듯 해일처럼 다가왔다.

그런데 그때였다.

[지이이잉]

익숙한 어떤 음이 감기던 내 두 눈을 강제로 끌어올린 것은.

처음 든 생각은 ‘무시하자’였다.

하지만 이내 든 생각인, ‘누구지?’라는 호기심에 결국 반신욕조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지이이잉]

[풍덩]

씨익.

선택을 참 잘했다. 이래서 사람은 행동을 하기 전 한 번 더 생각을 해야하나보다. 무시를 하면 안 됐었다. 하면 정말 후회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머, 이게 누구야? 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 전화한 유지연 아니야?”

그녀는 지금 내가 미국으로 바로 가지 않고 이곳 두바이에 들르게 만든 장본인이자, 지금 가장 그리운 품을 지닌 이였으니까.

“에? 왜 말을 안 해? 부정은 긍정. 뭐, 굳이 말해 입 아플 정도로 당연한 얘기를 해서 그런 거?”

깜짝 놀라게 해주기 위해 그녀에게 말도 하지 않고 두바이로 왔다. 그래서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그녀의 따뜻한 품이 그리웠던 순간이었기에 더더욱.

[어딘데?]

그런데 그녀가 건네 온 첫 마디가 의외의 말이었는지라, 순간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냈다.

아니, 뜬금없이 어딘데? 뭐야, 설마 내가 두바이에 있는 거 아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어디긴 어디야? 비행기 안이지. 뭐야, 내가 어디 있는 지도 몰랐단 말이야? 이거, 이거. 또 혼나야겠네.”

[혼은 무슨. 진짜 비행기 안 인거... 확실해?]

여자의 직감인 것일까. 아니다. 솔직히 이게 여자의 직감으로 예측할 수 있는 사안이면 지구상의 모든 여자들은 예언가와 점술가가 되었어야만 했다.

말이 안 됐다. 그래서 더 어이가 없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건너온 목소리를 듣자니, 확실히 내게서 무엇인가를 알아챈 듯 했으니까.

“무슨 소리야? 비행기 안이 아니면, 내가 벌써 LA에 도착했게? 뭐야, 수상해?”

[뭐, 뭐가?]

화제를 돌려야했다. 굳이 이제 와서 두바이에 있다는 사실을 숨길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그녀가 깜짝 놀라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너 왜 자꾸 나 어디냐고 물어보는 거야. 너 설마... 이런 거 TV에서 보면 바람난 마누라가 남편한테...”

[뚝]

“여, 여보세요?”

그런데 그 ‘화제를 돌리려는 행위’에 대한 그녀의 대처가 워낙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혀버렸다. 쏟아졌던 잠은 어느새 달아난 지 오래였다. 그저 끊겨버린 전화에 어이없어 스마트 폰만 바라보고 있을 뿐.

하여튼 유지연. 종잡을 수 없는 여자다. 나 원 참.

두고 보자. 울고불고 난리칠 때까지, 아주 엄청 혼내줄 테니까.

*

“우리 큰 딸?”

“예, 예? 아! 아빠.”

전화를 끊자마자 후끈거리는, 그러면서도 왠지 모르게 울컥해진 마음에 표정을 찌푸리던 유지연이 이내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응? 우리 큰 딸 뭘 그렇게 놀래?”

그런 유지연의 얼굴엔, 혹시나 그의 아빠가 좀 전의 통화내용을 들었을까 싶은 조마조마함이 가득했다. 물론 평범한 사람이 보았다면 그저 차갑고 도도한 얼굴이라 평했을 테지만.

“그런데 왜요? 하실 말씀 있으세요?”

“그게... 우리 큰 딸이 간만에 왔는데, 아빠가 내일부터는... 우리 큰 딸이랑 같이 못 있어줄 것 같아서. 엄마도 그렇고.”

다행히 그녀의 아빠는 그녀의 통화내용을 듣지 못한 듯 했다. 이에 그녀의 알게 모르게 경직되어있던 몸이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괜찮아요. 아빠. 엄마랑 아빠 일 바쁘신 거 다 아는 데요. 뭘.”

“그래도 아빠는 너무 서운하네? 우리 큰 딸이랑 데이트도 해보고 싶었는데. 재연이랑은 그래도 그럴 기회가 많았는데, 유독 우리 큰딸이랑은.”

그의 아빠는 항상 따뜻했고 포근했다. 어렸을 때는 예쁘고 몸매도 좋은 엄마가 왜 아빠를 만났지 싶었지만, 이는 그녀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바뀌어만 갔다. 어떻게 엄마가 아빠를 사로잡을 수 있었는지로.

그 정도로 그녀의 아빠는 그녀가 지금껏 본 아빠들 가운데 최고의 아빠였다. 친구들의 아빠든, 동료의 아버지이든, 주변에 널려있는 흔한 아빠가 아니었다. 최고의 남편이자 최고의 아빠 그 자체였다.

그래서였을까. 장점이 큰 만큼 부작용이 컸다.

“엄마는 어쩌고요.”

“하하...”

그녀의 엄마가 딸들에게 아빠를 양보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너무나도 닮은 큰 딸인 자신에게는 이런 경향이 특히 더하다는 것을 가족 모두가 모르지 않았다.

“회사 안 좋은 일도 마무리되고 그랬으니까, 더 바쁘실 거 잘 알아요. 저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저도 이제 한국으로 가봐야 되고,”

“그래? 그럼 아빠가 어떻게든 시간 내서,”

“아니에요. 아빠. 그냥 쇼핑 조금 한 다음에 바로 가려고요. 그러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리고 당분간 쉴 거라서 아빠, 엄마 일 여유 생기시면 언제든 다시 올게요.”

“응, 그래? 음... 그래도 우리 큰 딸이랑 이렇게 헤어지는 건 너무 아쉬운데...”

그래도 그녀는 지금의 가족이 너무 좋았다.

뭐, 그래서 같이 있는 시간보다 떨어져있는 시간이 더욱 길었던 과거가 더욱 아쉽고, 함께 있는 시간이 더욱 소중해졌지만.

“우리 큰 딸. 아빠랑 오랜만에 같이 잘까?”

“네?”

“우리 큰 딸이 어렸을 때는 애교도 많고 맨날 아빠만 찾고 그랬는데...”

“아빠...”

간만에 큰 딸인 자신과 같이 자고 싶다는 아빠 유승재의 말이 그녀 또한 끌렸다. 아빠의 품은 언제나 따뜻했고 포근했던 만큼 누군가의 빈자리가 강하게 느껴지는 요즘, 꽤나 큰 안도감을 그녀 자신에게 선사해줄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이내 그 마음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여보.”

그녀의 엄마가 이를 두고 볼 사람이 아님을 그녀도 알고 그녀의 아빠 또한 알았다. 그녀의 엄마는 아빠가 그렇게 행동할 시, 기어코 자신과 아빠의 사이에 껴서 같이 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어, 어?”

“자리 펴놨어요. 얼른 오세요.”

“어, 어? 그게 오늘은...”

“오세요. 얼른.”

엄마의 최종통보.

이를 거부하지 못할 그녀의 아빠이기에, 그녀는 웃으며 아빠의 등을 떠밀었다.

“가보세요. 아빠. 엄마 저러다가 엄청... 삐지는 면... 알죠?”

“하하... 그래. 흠... 우리 큰 딸이 언제 이렇게 컸을까. 아주 엄마 어렸을 때랑 판박이야. 판박이. 예쁘고 마음씨도 곱고. 하하!”

그렇게 그녀는 다시금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는 여전히 빛을 뿜고 있는 스마트 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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