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32 2019 =========================================================================
#432
빗방울이 조금씩 그칠 기미가 보이고 때마침 유빈 녀석도 도착했는지라, 슬슬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여행이라는 것이 주는 설렘과 흥겨움 그리고 유지연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제의 괴로움은 한결 가벼워졌다.
“야, 저런 헬기는 얼마나 하냐?”
“저 헬기 운전사 분이랑 다 고용한 거냐?”
“기름 값은 얼마 정도 드냐? 많이 드냐?”
헬기로 공항까지 이동했다는 점이 가져다 준 인상이 제법 강력했는지, 녀석들의 수다스러운 입이 나를 향했지만 내 시선은 다른 곳에 닿아있었다.
“비행기 타는 데 왜 그렇게 입었어? 불편할 텐데.”
조금은 가볍게 입어도 될 것 같은데, 누가 봐도 차려입은 것 같은 옷차림이 조금 신경 쓰였다. 물론 예쁘지 않다거나, 마음에 들지 않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됐어. 안 불편해.”
“흐음... 굽이 낮아도 힐은 힐인데 안 불편하다고? 그건 좀 벗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운동화 줄까? 아니, 슬리퍼 줄까? 기내에 슬리퍼 구비되어 있을 거야.”
“됐어.”
그런데 가만 보니, 꽤나 차려입은 것은 유지연 뿐만이 아닌 듯 했다.
“야! 기내식 먹어도 돼?”
“기내식도 주냐? 제주도 가는 데? 뭐, 뭐 있는데?”
“네, 손님. 기내식은 해산물 코스와 소고기 코스가 있으며 각 메뉴는......”
“아! 그럼 저는......”
물론 기내를 살펴보느라 분주한 녀석들은 나와 비슷한 트레이닝 복 또는 간편한 차림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자들만 차려입었네?”
“뭐가.”
“흐음...”
여자들의 기세 싸움, 뭐 그런 것일까. 옷차림도 옷차림이거니와, 자세히 보니 화장도 꽤나 공들여서 한 듯한 세 사람을 보자니 저절로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신경 쓰였나봐? 옷도 그렇고 화장도.”
나의 귓속말에 이렇다 할 반박도, 하물며 평소의 퉁명스러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는 유지연의 행동에 추측이 확신이 되었다.
“너가 제일 예뻐. 어깨가 우쭐할 만큼.”
요즘 들어 귀여운 모습들을 자주 보여주는 것 같아, 나름 면역이 되었다 생각했지만, 방금 전 내말에 볼이 터져라 붉어진 유지연을 보자니 그마저도 소용이 없는 듯 했다.
하아. 깨물어주고 싶다.
*
“진짜 좋네. 여기도 네꺼?”
“내꺼는 아니고. 외할아버지가 엄마랑 삼촌한테 물려주신 거야.”
제주도의 하늘은 서울과는 달랐다. 구름 때문에 햇살이 밝지는 않았으나, 빗방울이 떨어지지는 않았으니까.
어쨌든 별장의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일행의 얼굴이 밝았는지라, 나 또한 나름 어깨를 으쓱하게 되었다. 뭐, 조금 불편한 점이 없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휴양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은 대단한 메리트일 테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반응일 텐데도 말이다.
그렇게 모두가 저마다 거실 의자를 한 개씩 차지하고 앉는 사이, 나는 벽난로와 화로 각각에 장작을 놓아 불을 붙일 준비를 하였다.
“불붙이게?”
“오늘 날씨도 그렇고 여기 밤은 여름에도 제법 추워. 그리고 뭐라도 해먹으려면 불이 필요하기도 하고.”
오랜만에 해봐서인지 불을 붙이는 데 제법 애를 먹었지만, 이내 활활 타오르는 불씨에 나 또한 근처 의자에 몸을 기댈 수 있었다.
후우. 벌써부터 땀이 나네. 땀이 나.
“리 모델링을 최근에 하긴 했는데, 그냥 보수하는 수준이라서 불편한 게 조금 있을 거야. 그래도 뭐 그게 또 나름 분위기가 있으니까.”
최근 리 모델링을 해서 약간의 구조 변경이 있긴 했지만,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화장실이나 냉방시설을 조금 손질하고 낡은 부분을 보수하는 수준에 그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녀석들에게 방을 배정하는 데 장애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다른 곳에서 머뭇거림이 발생했을 뿐.
“방은 흠... 어떻게 할래?”
방은 3개인지라 딱히 부족하진 않았다. 하지만 각각의 방에 침대가 1개씩 있다는 점 그리고 지금 우리 일행의 남녀성비가 조금의 문제를 가져왔다.
“흠...”
“크흠...”
모두가 나의 질문에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는지라 조금 난감했다. 마음 같아선 그냥 커플끼리 방을 배정하고 싶었고 또 그렇게 하면 별 문제도 없을 테지만 눈치라는 게 마냥 이를 도와주지 않았다. 더욱이 딱히 각 커플끼리 자주 만나 제법 친밀한 상태인 것도 아니었는지라 모두의 입은 좀처럼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빈이는 2층 왼쪽 방, 성준이는 2층 오른쪽 방 쓰면 돼. 화장실은 각 방마다 있으니까, 거기 쓰면 되고.”
“어, 어?”
“크흠...”
계속 이곳에서 죽치고 앉아있을 수만은 없다 생각해, 총대를 멨다. 어차피 모두의 입이 좀처럼 열리지 않는 이유가 내 말에 대한 반대 때문이 아니었기에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우리 방은 3층이니까, 먼저 가서 방 문 좀 열어줘. 내가 짐 들고 갈게.”
서로 눈치를 보는 이 분위기가 껄끄러워 우리 짐들을 든 채, 유지연을 앞장세웠다.
“껄끄러우면 둘, 둘 나눠서 써. 나랑 지연인 같이 쓸게. 그러면 되지?”
“크흠...”
“흐흠...”
자식들이 좋으면서 머뭇거리고 있어. 쯧.
*
“경치 좋네.”
방에 들어서자마자 창문을 열어젖힌 유지연의 얼굴은 무척이나 밝아보였다.
“구름 없이 맑은 날에는 더 예뻐. 뭐, 지금처럼 구름 낀 밤에도 예쁜 건 마찬가지지만.”
이내 테라스까지 나가 난간에 기대면서까지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유지연의 모습은 마치 CF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내가 옆에 끼기 차마 민망할 정도로. 뭐, 그렇다고 해서 옆에 가지 않을 것은 아니지만.
“어때. 마음에 들어?”
“어.”
“그래? 어디가? 코? 눈? 아니면 전부?”
“뭐?”
괜히 옆에 끼어들어 장난을 치다, 그녀의 차가운 눈빛을 받아내야 했지만 그래도 다 좋았다. 마음에 남아있던 찝찝함과 거리낌 그리고 약간의 미안함과 한심함까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왜 이래? 갑자기.”
“쓰읍.”
유지연을 뒤에서 껴안은 채, 이곳 테라스에서 바깥 풍경을 보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아니, 애당초 그녀와 연인이 되었다는 점, 겉으로는 퉁명스러워도 이내 내 품속에서 가만히 바깥 풍경을 응시하는 그녀의 모습자체를 상상하지 못했다는 게 정확했다. 그 정도로 우리의 인연은 예견된 것이 아니었으니까.
“여기서 해 뜨는 거, 해 지는 거 진짜 아름답다?”
“진짜?”
“근데 내 생각에는 해 지는 게 더 아름다운 것 같아. 그러니까, 내일 같이 보자. 알겠지?”
“응...”
그렇게 그 순간만큼은 밑에 층에 있는 다른 일행을 머릿속에서 떠올리지 못했다. 오로지 같은 공간, 같은 시간, 같은 하늘 아래서 함께 자리하고 있는 그녀만을 바라보고 떠올렸다.
[쪽]
그리고 이는 그녀 또한 마찬가지인 듯 했다.
*
“그럼 다음 주 주말? 그때쯤 출국하겠네. 맞지?”
“어, 촬영일자가 6월 초로 바로 잡혀서.”
“그럼 1년 정도? 1년 반? 그 정도 해외에 있는 건가?”
남자들이 바로 1층으로 내려온 것과 다르게 여자들은 시간이 꽤나 흘렀음에도 각자의 방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뭐, 유지연도 씻고 몸을 단장하는 데 꽤나 정성인 듯싶었으니 다른 여자들도 아마 마찬가지일 테지.
“길면 3년? 짧으면 2년 좀 넘게 머물러야 돼. 다른 촬영도 있어서.”
“다른 촬영?”
“그때 얘기했잖아. 다른 영화 할 수도 있다고.”
“아! 그거? 그거 하기로 했나보네?”
“뭔데, 뭔데?”
성준, 유빈 녀석과 같이 화로 앞에 앉아있다 보니, 자연스레 평소처럼 대화를 주고받게 되었다. 아무래도 옆에 연인을 낀 상태로 있을 때는 알게 모르게 조금 서먹서먹했었는데, 그 변수가 없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계약서에 비밀 유지 칼 같이 박혀있어. 인마. 위약금이 얼만데.”
“야, 우리 사이에 그러기냐?”
“다른 영화 찍는 다는 것만으로도 많이 알려준 거야. 멍청아.”
졸라대는 성준 녀석의 보챔을 외면하자 이내 유빈 녀석이 염려스러운 눈빛을 내게 보냈다.
“힘들진 않겠냐? 한 작품 준비하는 것도 힘든데, 게다가 미스터 지 액션 합만 맞추려 해도...”
“내년 상반기까지 미스터 지 후속편 촬영하고, 음... 다른 작품은 내년 2월? 그쯤부터 시작할 걸. 근데 2월에 시작되는 건 짧아. 한 달? 일단 상반기에는 그 정도만 촬영하니까. 뭐, 하반기는 잘 모르겠다. 내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아, 그래? 그럼 그나마 다행이네. 음... 그래도 촬영 떠나서 하반기에 마냥 쉬기는 힘들겠는데? 프로모션 행사 준비랑 그런 거 고려하면.”
“뭐, 그렇지. 그런 행사들이 의외로 꽤나 신경 써야 될 부분이 많으니까. 그래도 촬영보다는 확실히 낫지. 아! 그리고 미스터 지 촬영이 그렇게 빡빡하진 않아. 저번 촬영은 땜빵 메우느라 조금 그랬지 원래 계약서대로 칼같이 촬영하거든. 주에 하루, 이틀 정도는 쉴 수 있고 여름휴가랑 겨울 휴가기간까지 정해져 있어. 그리고 중간, 중간 길게는 일주일 정도 붕 떠있는 일정도 있고. 뭐, 그런 거 고려하면 한국 심심치 않게 올 수 있을걸.”
“그래? 할리우드는 계약 칼 같다던데, 사실인가보네.”
아무래도 배우이기도 하고 녀석 또한 드라마 스타에서 영화배우로서의 성공적인 변신을 하기 위해 요즘 꽤나 고심하고 있는 만큼, 대화는 자연스레 이와 관련된 쪽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요즘 시나리오들 보고 있긴 한데...”
“네가 하고 싶은 게 뭔데? 장르나 아니면 네가 구축하고 싶은 이미지 같은 거 있을 거 아니야.”
“아무래도 로맨스나 액션 이 두 갈래 중에 하나가 낫겠지. 흠...”
그런 유빈 녀석을 보니, 내가 얼마나 행운아였는지를 새삼 느꼈다. 저게 정상이었다. 자신이 구축하고 싶은 이미지에 맞게 영화에 도전하고 차츰 그 이미지를 넓혀가는 것이.
그런데 나는 드라마 연기의 시작에서부터 내 의지가 약간은 결여되어 있었다. 어영부영 드라마를 하게 되어 이미지를 구축하고 말 것이 없었다. 영화야 내가 정말 하고 싶어, 꽤나 노력을 했었지만 결과적으로 운이 좋아 배역을 쟁취한 것이었고 말이다.
뭐, 과정이 이렇다 해도 결과적으로 녀석이 방금 말한 로맨스와 액션, 남자 배우로서 걸을 수 있는 큰 길을 나는 이미 걸어왔고 또한 굉장한 성공을 맛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녀석이 꽤나 부럽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 테고.
“난 한국에서 영화 안 찍어봤잖아. 그래서 뭐라 말해주기가 애매하네.”
“하긴... 근데 너는 어떻게 된 게 첫 영화가 할리우드 영화냐? 나 참. 어이없어서 웃음밖에 안 나온다. 부러워서 허탈하고. 하하...”
하지만 그래서 조언을 해주기가 애매했다. 남과 다른 시작과 과정을 거쳐 왔다는 점에서 녀석에게 무슨 말을 해주기가 조금은 겁이 났다. 물론 할리우드에서의 촬영 분위기 그리고 계약과 관련된 사안, 동료 배우와의 호흡 등은 충분히 조언을 해줄 수 있었지만.
“음...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떠냐?”
“어?”
그래도 그런 내 경험이라든지, 나의 판단 같은 게 녀석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미지 구축이나 그런 거는 잠깐 제쳐두고, 대본 읽어보고 그냥 네가 끌리는 거 한 번 해봐. 복잡한 셈없이. 어차피 네 인생에서 영화 딱 한번만 찍을 것도 아니고 경험삼아 한번 해보는 거지. 네가 끌리는 영화에, 네가 할 수 있는 최선. 이 두 가지만 딱 고려하고.”
“흐음...”
내 조언 아닌 조언이 녀석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지는 장담하지 못했다. 하지만 잠시 생각에 잠긴 녀석을 보아하니, 썩 쓸데없는 소리는 안 된 것 같아 안도할 수 있었다.
흐음... 뭐, 알아서 잘 하는 놈이니 내가 건넨 말에서 필요한 부분들만 쏙쏙 빼먹을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