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30 2019 =========================================================================
#430
“맛있어?”
“네, 오빠!”
한정식 특유의 잘 차려진 밥상과 더불어 방에서 볼 수 있는 자연환경의 아름다움까지. 북한강 근처의 작은 한식당에서 맞는 점심은 무척이나 아늑했고 포근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또한 지금 내가 미루고 있는 사안과는 동떨어진 것들이었다.
“유진아.”
“네?”
‘오빠가 유진이한테 할 말이 있어서... 지금 말해도 될까?’
“하하... 많이 먹어.”
“아! 네! 여기 진짜 맛있는 것 같아요. 주변 경치도 너무 좋고요. 어? 그런데 오빠는 입맛 없으세요?”
“응?”
“아니... 계속 안 드시는 것 같아서요.”
“아! 아니야. 오빠도 이제 본격적으로 먹으려고.”
속마음에 있는 얘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본론을 꺼내려고 할 때마다,
체할 수도 있으니, 조금 뒤에 얘기하자.
간만에 하는 바깥나들이일 텐데 조금만, 조금만 더 뒤로 미루자.
와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으니까.
따라서 이는 그다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뒤로 미루면 미룰수록 나를 망설이게 만드는 요인은 늘어날 것이고 이로 인한 결과는 오롯이 유진에게로 쏟아질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머리로 안다고 모든 것을 이에 맞춰 실천에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후로도 상황은 이와 비슷하게 흘러갔다.
[공기 너무 좋은 것 같아요! 뭔가 자연스럽게 힐링 되는 것 같은......]
[날씨 너무 좋은 데, 피크닉 갔으면 딱 좋은......]
[아시아 투어 했을 때 기분 너무 좋았어요. 사실 걱정도 많이......]
[팬들이 있어서 그래서 재계약하길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재계약 안 했으면......]
밥을 먹고 나서 근처 숲길을 산책삼아 걸을 때도, 돌아오는 길에 드라이브를 할 때도 끝까지 말을 꺼내지 못했다. 유진은 여전히 밝았고 나와 단둘이 데이트를 한다 생각했는지 아니면 오랜만에 단둘이 만나서인지 그동안의 근황을 얘기하기에 바빴다. 나는 그런 유진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며 속내를 숨기느라 바빴고.
“홍대?”
“네, 오빠.”
그러던 와중에 갑작스럽게 홍대를 가고 싶다는 말이 보조석으로부터 들려왔다.
“지금? 사람들 이렇게 많은 데?”
사람들이 한창 많을 시간. 그 한복판에 가고 싶다는 유나의 말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밖으로 안 나가고 차로 둘러봐도 돼요. 잠깐이면. 안 돼요?”
“후우... 그러자. 차 안에서야 딱히 상관없으니까.”
그래도 밖을 걸어 다니는 게 아닌, 차로 한번쯤 둘러보고 싶다는 유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평소 홍대 내부 거리를 차로 다니는 이들을 비난했던 나여서 조금 찔리긴 했지만.
“갑자기 왜 홍대가 오고 싶은 거야?”
“그냥요.”
왜 이곳을 오고 싶어 했는지에 대해 유나는 묘하게 얼버무렸지만, 그래도 홍대 나름의 정취를 즐기는 듯 했다.
“저기 닭갈비 맛있는데, 먹어봤어요? 오빠?”
“코인 노래방 엄청 많이 갔었는데, 지금은 사라졌네요. 아쉽다.”
“그래도 사람들 길거리 공연도 여전하네요. 우리 잠깐 구경할까요? 저기에 차 살짝 대고요. 아! 차 안에서 구경하자는 뜻이었어요. 밖에 나가는 건 아무래도 힘들 테니까.”
나 또한 꽤나 오랜만에 홍대에 와본 탓에 조금 색다르기도 하고 또한 익숙하기도 했다. 유나의 말마따나, 겉 외양은 사뭇 달라졌어도, 홍대가 지닌 분위기는 여전히 활기차고 또한 역동적이었다.
유나의 요구대로 차를 홍대 놀이터 구석에 잠시 대었다. 마치 우리들을 위한 자리라는 듯, 묘하게 주차하기 알맞은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에서 오빠 처음 봤는데, 기억나요? 오빠?”
그래서 이 자리에 차를 대고 구경하자고 했던 것일까. 아니면 홍대 자체를 오자고 한 주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어서일까.
가만 보니, 지금 우리가 자리 잡은 이곳은 내가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내 노래와 감정을 건넸던 장소였다. 길거리 공연의 메인 로드와는 다소 떨어져있는, 변두리 지역에 불과했지만 나름 사람들의 호응을 받았고 또한 위로도 받았던 그곳 말이다.
“안녕하세요. 많은 분들이 호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와 지금 이 곳은 여전했다. 나 혼자만이 길거리 공연을 할 정도로 변두리인 이 곳에서 어여쁜 소녀 한명이 자리를 채우며 공연을 하고 있었다.
“많은 분들이 지난 한 주 동안 제 SNS에 많은 곡들을 신청해주셨는데요.”
시대가 흘러가며 길거리 공연 또한 새로운 옷을 어느 정도 입은 듯 했다. 변두리에서 공연을 하고 있지만 제법 인지도가 있는 뮤지션인 듯, SNS를 통해서 신청곡까지 받는 다는 점에서 나름의 신선한 충격이 느껴졌다.
이곳에 오자고 한 것은 유나였지만, 정작 더 몰입한 것은 나였다. 그래서 알지 못했다. 옆에 있던 유나의 얼굴표정과 그 시선이 내게 쏠려있었다는 것을.
“오빠.”
“어, 어? 아! 미안 유나야. 오빠가 정신을 놓고 있었네. 기억나지. 저기서 널...”
유나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다시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가려지지 않은 유나의 얼굴을.
“유나야?”
“저한테 오늘 할 얘기란 게 뭐에요?”
“으, 응?”
약간의 불안감 그리고 두려움.
덤덤한 목소리였지만, 무표정의 얼굴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들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그런 감정들이 마치 ‘예견된 사안에 대한 예견된 감정’들처럼 느껴졌다는 것이었다.
“할 얘기 있으신 거 아니였어요? 오늘 하루 종일.”
하지만 그런 놀라움은 이내 효력을 잃고 사라져야만 했다. 마치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는 듯 유나의 시선은 오롯이 내게 그 ‘할 말’이라는 것을 요구하고 있었으니까.
“그럼 다음 곡으로 강지혁의 정규 1집 앨범에 수록된 곡이죠? 웃는 네 얼굴 들려드릴게요!”
나를 몰입시켰던 길거리 공연도 익숙하고도 색다른 정취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유나의 눈빛만이 내 머릿속에 오롯이 자리를 잡았다.
“웃는 네 얼굴. 그 얼굴 때문에 얘기하지 못했어.”
달콤하고 부드러운, 그러면서 산뜻한 분위기를 내뿜는 노랫소리에도 그저 나는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유나의 눈빛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 고요 아닌 고요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말을 이을 수 없는 그런 상황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유나였다.
“나빠요. 오빠.”
나쁘다는 말이 들려왔음에 심장이 턱하니 가라앉아버렸다.
“오빠 한국에 있을 때 한 번도, 단 한 번도 저한테 먼저 연락 안주신거... 알아요?”
많이는 아니더라도 종종 전화 통화를 했었던 것 같은데, 그 중에 내가 먼저 전화를 걸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점에 새삼 놀랐다.
“첫사랑은 안 이뤄진다는데. 난 그 말 안 믿었거든요. 아니 믿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 말... 그래서 오늘 오빠가 보자고 해서 너무 기뻤어요. 아시아 투어도 성공적으로 마무리 됐고 어제 대상도 타서 그런지, 앞으로는 정말 좋은 일만 일어날 줄 알았거든요.”
막연한 불안감이 이제는 확신으로 다가왔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오늘 이 자리를 마련했는지 유나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비겁하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내가 더욱 한심스러울 정도로.
“그런데... 그런데 웃긴 게 뭔지 알아요? 후우... 마음 한편으로는 불안하더라고요. 오빠가 먼저 저한테 만나자고 한 게 마지막이 될까봐.”
가슴이 아팠다. 내가 아끼는 소중한 사람이 나로 인해 이런 감정을 느꼈다는 것이. 그리고
“왜 항상 슬픈 예감은 꼭 들어맞는 걸까요?”
눈시울이 붉어진 채 덤덤히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는 유나의 모습에도 한없이 무기력한 내 자신이.
“오늘 맛있는 것도 사주시고 함께해서 좋았어요. 오빠 얼굴이 마냥 좋았던 저랑 다르게 어두워졌을 때, 그때만 빼고요.”
“유진아...”
간신히 입을 열고 내뱉을 수 있는 말이라곤 유나의 이름뿐이었다.
“행복했어요. 오빠를 좋아했던 매순간, 순간이.”
덤덤한 말 속에 어떻게 이런 감정들이 녹아들어있을 수 있는지, 듣고 있는 내게 막연한 먹먹함이 해일처럼 다가왔다.
“오빠랑 항상 이렇게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제는... 덧없는 바람이겠지만.”
“유진아 오빠 동생으로,”
“싫어요. 그런 거.”
막말로 내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진데, 애당초 그녀가 나를 짝사랑한다고 해서 그녀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또한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였다.
하지만 한결같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이, 그런 내 마음이 그러질 못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원망스러운 눈빛조차 건네지 못하는 유나를 보면 더더욱.
“오빠 이제 보니 진짜 별로다. 치.”
“유진아...”
“저 그럼 여기서 이만 가볼게요. 오빠.”
“유진아. 오빠가 미안해. 여기 사람들도 많고... 오빠가 집까지 데려다줄게...”
“아니에요. 사실 홍대에서 시나랑 만나기로 했거든요. 그러니까, 가볼게요.”
내가 그녀를 제지하기도 전에 그녀는 차에서 내렸다. 마치 지금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듯이.
정말로 유나가 시나와 만나기로 했는지, 그래서 홍대로 오자고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거짓이라고 할지라도 유나를 말릴 수가 없었다. 유나를 잡고자 차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
“웃는 네 얼굴 그 얼굴 때문에 얘기하지 못했어. 네가 나를 볼 때면, 네가 나를 부를 때면 나는 홀로 상상하곤 해. 내게 속삭이는 너의 귓속말 너만을 사랑한다고. 지금도 웃는 네 얼굴. 그렇지만 오늘만은 말할래. 네가 제일 좋아.”
[와아아아!]
[앙코르! 앙코르!]
“지금 들으신 곡은 강지혁의 정규 1집에 수록된 웃는 네 얼굴...... 한 토크쇼에서 아미가 유나가 지혁과의 인연을 얘기하면서...... 유나가 강지혁의 군대 가기 전 마지막 공연 마지막 곡으로 들었던 곡 그리고 강지혁이 전역하고 1집 앨범을 발매한 뒤에 처음으로 길거리 공연을 했을 때, 우연히 재회하면서 들었던 곡이 바로 이 곡이라는 점을 말하면서 한 때 인터넷상에서 엄청난 화제를 불러 모았죠......”
어느새 노래 선율이 끊기고 사람들의 호응 소리가 그 자리를 메웠지만 나는 그저 멍하니 떠나가는 유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뭐, 저는 그때 이 앨범에 실린 화보집 가운데 웃는 네 얼굴에 실린 사진 컷이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유지연과 강지혁이 서로를 바라보며......”
지난 10년 가까운 인연이 여기서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이 이다지도 무거운 것일까. 차에서 벗어날 때, 차문을 닫을 때 볼 수 있었던 장면이 지금 보이는 유나의 뒷모습과 함께 계속해서 오버 랩 되다시피 했다.
[오빠 안녕.]
짐짓 주변의 노랫소리에 묻힐 뻔 했던 유나의 마지막 목소리 그리고 뒤를 돌아보자마자 볼을 타고 흘러내리던 무엇인가가 너무나도 선명했다.
지금 이 자리에 홀로 남아있는 것이 괴로웠다. 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밖을 나설 수도 지금 이 상태에서 운전을 할 수도 없는 지금의 내 상태가 내 발목을 묶었다.
물론 미안함을 느낄 필요도, 내 자신이 한심스러워질 필요도, 이기적인 내 모습이라 자평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괴로움을 마치 속죄한다는 듯이, 그저 나는 그 자리에 머물렀다. 보조석에 남아있는 체온과 향기 그 모든 것들의 괴롭힘에 둘러싸여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