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29 2019 =========================================================================
#429
[고양시 한류월드와 꿈 아레나가 후원, 개최하는 제 1회 HMA의 막이 올랐습니다!]
“치... 작년에 해외 활동에 집중하는 바람에... 이럴 줄 알았으면 국내 활동도 좀 할 걸 그랬어!”
가족끼리 밥 먹을 때 TV를 보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었다. 엄마인 박현주가 이를 허락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동생인 재연과 자신이 연예계에 뛰어들면서, 자신들이 성인이 되면서 그녀의 엄마 또한 이를 적극적으로 제지하지는 않았다.
“쟤네 둘은 사귄다고 그러던데?”
“응? 아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한 때 한국 뉴스 보면 죄다 그것만 나오던데? 그리고 그... 배우식당? 그거 엄마랑 아빠랑 엄청 자주 봤었거든.”
“저 여자애는 소문이 막 안 좋다고 하던데, 사실이니?”
“응? 아니야. 엄마. 나도 잘은 모르는데, 기자들한테 찍히고 소속사랑 계약 때문에 문제 있어서 발목 잡으려고 흠집낸거래.”
뭐, 딸들 덕에 연예계에 관심이 많아진 터라, 이렇게 TV를 볼 때면 그동안 모아놨던 궁금증을 풀 수 있어서 그런 것도 있는 것 같지만.
어쨌든 이때만큼은 그녀의 엄마도 제법 말을 많이 했고 또한 그런 엄마의 모습에 동생 재연도 신나했기에 몇 년 만에 함께 식사를 하는 가족의 분위기는 더욱 밝게 변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TV 화면이 낯익은 얼굴을 담아내면서 상황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강지혁입니다.”
“안녕하세요. 배우 이수나입니다.”
[와아아아!]
[갓지혁!] [갓지혁!]
신인상 수상 도우미로 강지혁과 배우 이수나가 화면에 나오자 그녀의 아빠가 마치 반갑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강지혁 저 배우는 참 잘 생겼어? 우리 지연이랑도 드라마 같이 하고. 그리고 저 이수나라는 배우도 이번에 지연이 너 드라마 같이 했지? 악역으로 나오긴 했어도 인터넷 기사 보니까, 아주 참한 것 같더라. 똑 부러지고.”
드라마에 관심이 없는 엄마와는 달리 그녀의 아빠는 딸인 유지연의 드라마뿐만 아니라 각종 아침 드라마를 섭렵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아는 배우가 TV에서 나왔다는 점, 그 배우들이 딸인 유지연과 관계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아빠인 유승재의 얼굴은 더욱 밝아져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오늘 지혁 선배님을 실제로 처음 뵙게 되었는데요. 정말 멋있으세요.]
[아... 감사합니다. 이수나씨도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잠자코 이를 지켜보던 그녀의 엄마 박현주의 입에서 날선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이.
“재연이 너. 저런 애는 조심해야 된다. 알지?”
“응?”
“하는 꼴을 보니 딱 여우네. 여우.”
“에?”
“여보 그게 무슨?”
갑작스럽게 엄마인 박현주의 입에서 흘러나온 심상치 않은 단어가 유재연과 아빠 유승재의 얼굴에 놀라움을 맺히게 만들었다.
“지연이는 알아서 잘 하니까, 상관없는데, 저런 여우는 조심해야 돼. 알겠어?”
“엄마, 어떻게 알았어? 언니가 저 여자 때문에 엄청 스트레스 받아했었는데! 대박!”
“뭐? 재연아 그게 정말이냐?”
물론 그 의미는 상반되었다. 이미 언니인 유지연 덕에 이수나의 성격과 행실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던 유재연으로서는 단번에 이를 알아챈 엄마에 대한 점이, 아빠인 유승재로서는 자신이 좋게 보고 있던 배우가 딸을 힘들게 했다는 점이 놀라움의 원천이었으니까.
[제가 정말 지혁 선배님 팬인데, 이 자리를 빌어서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네?]
[지혁 오빠는 이상형이 어떻게 되시나요?]
[이...상형이요?]
따라서 TV화면이 보여주는 모습에 가족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했다. 이어진 엄마 박주현의 발언이 좀 더 거세진 것 또한 당연했고.
“처음 본 남자한테 오빠라고 막 저러고 남자가 곤란해 하는 게 딱 보이는 데, 쯧쯧. 아무튼 조심해. 네 아빠처럼 남자들은 저런 년한테 홀려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여보.”
그런데 그때였다. 그녀의 엄마가 아빠인 유승재의 여보란 말 한 마디에 순간 입을 닫은 것이.
그동안 엄마 박주현에게 쩔쩔매던 사람은 어디 갔는지.
낮게 깔린 목소리는 집안의 실세인 엄마 박주현을 빗겨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아빠 유승재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엄마 박주현의 얼굴이 미세하게 떨렸다.
“여보. 애들도 있고 그런데, 꼭 그렇게 말해야겠소?”
무척이나 드문 이런 광경이지만, 종종 있어왔던 일이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두 자매 또한 엄마 박주현과 마찬가지로 숨을 죽이고 있을 뿐.
“오빠... 그, 그게...”
“우리 예쁜 마누라 입에서 거친 말 나오는 거 난 싫은데. 앞으로 또 그러진 않겠지?”
“오빠...”
“안 그럴 거지?”
“응, 오빠...”
마치 20대의 젊은 남녀처럼,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을 무릎위에 앉힌 남편 유승재의 행동에 엄마 박주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져버렸다. 그러자 이를 본 두 자매의 고개 숙인 얼굴에서 이내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순간에 순종적인 여자가 되어버린 엄마. 머리를 쓰다듬는 아빠의 행동에 소녀처럼 부끄러워하는 엄마.
종종 봐왔던 모습이지만, 차갑기 그지없는 평소 때의 엄마를 생각해볼 때 이는 매번 새로울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그래서일까. 막내 유재연의 눈빛은 무척이나 불만에 차 있었다.
“치... 엄마는 주변 사람들한테! 심지어 딸들한테까지 차가우면서 아빠 앞에서는!”
“유재연. 조용히 하고 밥 먹어. 아빠 식사하시는 데 방해하지 말고.”
“치! 엄마는 너무해!”
반면 유지연으로서는 그런 엄마의 행동이 전보다 훨씬 익숙해졌다는 점에서 조금은 낯선 두려움을 느꼈다. 엄마 박주현의 속내가 너무나도 이해되어, 사랑에 빠진 엄마의 모습에서 자신 또한 그렇게 될 것만 같은,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어쨌든 저마다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찬 시선이었지만, 두 딸의 눈빛이 무척이나 뜨거워서인지, 아니면 평소 단둘이 있었을 때의 모습을 딸들에게 보여줘서인지 엄마 박주현의 입에서 괜스레 타박 섞인 말이 흘러나왔다.
“흣, 흠... 저런 녀... 아니 애한테 홀린 남자는 쓰 잘 데 없으니까. 상종도 하지 말아. 뭐, 네 아빠 같은 남자면 좋겠지만, 그런 남자가 어디 흔하니?”
“암, 그렇고말고! 우리 딸들은 아무 남자한테나 못 주지!”
그런 그녀의 아빠 또한 엄마 박주현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분위기를 바꾸려 했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부부의 노력은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잠시 외면하고 있었던 TV화면에서 이내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모두의 시선을 한 데 모으는 데 성공했으니까.
[남들한테는 차가워도 저한테는 따뜻한 여자. 그리고 얼굴도 몸매도 마음씨도 예쁜 그런 여자가 이상형입니다! 아! 그리고 장어 요리와 추어탕을 잘 끓여야 합니다!]
[에이, 너무 욕심쟁이신데요?]
[원래 이상형은 욕심을 부려야지, 이상형 아닌가요? 하하.]
모두의 눈빛이 동일한 감정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시선을 집중적으로 받게 된 이는 마냥 태연스럽게 이를 넘길 수가 없었다. 제 아무리 연기자라 할지라도, 차가움을 얼굴에 가득 담고 있다 할지라도 이는 명백히 허용한계 이상의 상황이었으니까.
*
유나와 함께 서울 근교를 드라이브하는 것으로 하루의 문을 열었다.
“오빠 차 샀어요?”
“응?”
“아니... 전에 차랑 다르길래요...”
마음은 복잡하기 그지없었지만, 겉으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나와 창밖 주변 풍경을 바라보는 유나의 표정이 너무나도 밝았으니까.
“아! 삼촌한테 차 빌렸어. 사고 싶어도 해외에서 지낼 시간이 더 많아서 지금 사기도 조금 뭐하더라고. 많이 불편하진 않지?”
“네? 아니에요. 불편하긴요.”
그래서 잠시 복잡한 생각을 미뤄두는, 비겁한 선택을 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어차피 저녁을 같이 먹고 기회를 봐서 내 마음을 전달하려 했기에, 지금부터 이를 신경 쓰다 하루 전체를 찝찝하게 보내고 싶진 않았다.
“배고프진 않아?”
“아니요. 별로.”
날씨는 무척이나 화창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코앞으로 다가온 여름을 증명하듯 푸르고 또 푸르렀다.
“해외 활동 많이 힘들었지?”
“네? 네... 조금. 그래도 중간, 중간에 잠깐씩 한국 다녀와서 괜찮아요.”
“정말 대단하더라. 걸 그룹이 대상 타기 정말 힘든데. 어제 정말 축하해. 시간도 늦었고 그래서, 직접 축하를 못해줬네?”
다행히 대화가 끊긴다거나, 복잡한 속내가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만큼 ‘동생’과 나눌만한 얘깃거리는 나름 무궁무진했고 무엇보다 유나는 어제 대상을 받은 아미가였으니까.
“괜찮아요. 지금 축하해줬잖아요. 히히...”
“그런데 아직도 숙소 생활 하는 거야? 독립했다고 들었었던 것 같은데.”
“숙소는 그대로 있어요. 예전처럼 계속 같이 있는 건 아니구... 일주일에 2, 3일 정도는 집이나 개인 집에서 지내고요.”
“아! 그렇구나.”
“국내보다는 해외 활동이 많아서 어차피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요. 국내에서 있을 때도 되도록 숙소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고요. 음... 어렸을 때부터 같이 지내서 그런 것 같아요. 혼자인 게 편할 때도 있는데, 그냥... 익숙하고 더 편해요. 같이 있는 게.”
평일. 그것도 점심때가 막 지난 시간대의 서울 근교.
차들도 없는 한적한 국도를 따라 북한강과 산들을 배경삼아 얘기를 나누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하지만, 굳이 속도를 올릴 필요도, 조급하게 어딜 가야된다는 생각도 없었기에 비교적 여유로울 만도 하건만 시간은 너무나도 빨리 나를 지나쳐갔다. 굳이 붙잡고 싶을 정도로.
“오빠 노래 너무 좋아요.”
“정말?”
“네, 정말 좋아서 음반 예약도 벌써 했는걸요?”
“에? 뭐하러 그랬어. 오빠한테 말하면 그냥 줄 텐데.”
결과적으로 실패다. 복잡한 생각을 잠시나마 지워버리려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날 보며 웃는 유나의 얼굴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머뭇거리게 되었다.
“이제 그럼 미국으로 바로 가시는 거에요?”
“응. 아무래도 그래야 될 것 같아. 미스터 지 후속편 일정 때문에 6월부터 내년 하반기까지는 미국 세트장이랑 유럽 로케 촬영에 신경 써야 되거든.”
유나의 말에 맞장구를 쳤고 또 질문 아닌 질문에 답변을 해주는 와중에도 정신은 온통 다른 데에 팔려있었다.
내가 제대로 유나의 말에 답변을 해주고 있는지, 내 표정이 어떤지조차 살필 수가 없었다.
“아. 그렇구나. 그럼 그때... 다른 작품도 하신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건...?”
“그건 3부작 촬영인데... 오빠가 1부작에서는 비중이 별로 없어서 내년 2월? 3월? 그때 잠깐 촬영 합류해야 돼서 그때는 뉴질랜드에 잠깐 가야될 것 같아. 내년 6월부터는 2부작 촬영 본격적으로 들어가서 그때부터는...”
“엄청 바빠지시겠네요?”
“아무래도 그렇지? 아직 정확한 건 아니지만, 오빠가 맡은 배역이 2부작부터 비중이 많이 높아진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걱정이긴 해. 내년 하반기에는 미스터 지 촬영이랑 다른 작품 촬영도 병행해야 되고 또 미스터 지 촬영 끝나면 프로모션 행사도 해야 하는데, 그것도 만만치 않으니까.”
죄책감 비슷한 이 감정을 느끼고 있는 이유가 뭘까.
유나와 사귀는 사이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나에게서 확실한 사랑을 느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적극적으로 내게 대시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약간의 호감을 느꼈던 것 뿐이다.
연민인 것일까. 유나를 동정하는 것일까.
거의 10년 가까이 날 짝 사랑해왔다는 유나의 감정에 몰입한 것일까. 유나의 입장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았기에 내가 오늘 털어놓을 말들이 유나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될지, 이를 상상하고 있어 그런 것일까.
아니면...
군대 가기 전 길거리 공연 때부터 이어져온 인연의 연결고리가 오늘 그녀에게 건네질 나의 진심으로 인해 끊어질까봐, 그걸 걱정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 것 같다. 문득 떠오르는 최근의 기억.
[다른 애들처럼 애인이 있어도 또 다른 누구랑 사랑을 나누는 게 어색하진 않을 것 같아. 그런데 네가 그 또 다른 누구라서, 네가 내 첫 남자라서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이게 맞는 거지? 그런데 말이야... 우리 친구로 지낼 수 있는 거지? 내가 이런 말 해서... 나 피하는 거 아니지?]
내가 누구보다 이기적이라는 것을, 더럽고 추악한 나의 마음에 토악질마저 나올 지경이었던 그때의 기억이 지금의 내 상태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날 내게 계속해서 친구로 지낼 수 있는 지를 물어보던 테일러 녀석의 말이 크나큰 위안을 주기 전, 바로 그때 느꼈던 감정과 너무나도 똑같았다. 지금 내가 느끼는 불안함과 복잡함이.
유나가 상처를 받을까봐, 그게 두려워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다 거짓이었다. 유나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본다는 그런 말 따위 자기변명, 자기 합리화에 불과했다.
그저 누군가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을 숨기기 위해, 이런 비겁한 변명을 앞세웠다. 나란 놈은.
푸른 하늘, 강렬한 태양, 한껏 기분 좋아 보이는 유나. 모든 게 너무나도 눈부시고 아름다워 내 자신의 모습이 더욱 더러웠다.
“오빠?”
하아...
“오빠?”
“어, 어? 어, 왜 유나야.”
보다 돋보였다. 밝음 속에서 압도적으로 어둠을 뿌리고 있는 내 자신이, 그리고 그 어둠을 이내 그녀에게 옮길 나의 마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