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28 2019 =========================================================================
#428
“유나야 집에 가는 데 뭘 그렇게 챙겨 입어?”
“으, 응?”
은지의 지적에 뜨끔한 듯 유나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춰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당연했다. 멤버들 모두가 부모님을 만나러가기 위해 가벼운 옷차림 그리고 두터운 선물들을 준비하고 있을 진데, 그녀는 그렇다고 보기엔 지나치게 차려입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나 집에는 내일 가려구.”
“아! 오늘 친구 만나러 가는 거야?”
“응...”
다행히 그녀의 수상쩍은 행동에도 은지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원체 밝은 성격이기도 하거니와, 은지 그녀도 오랜만에 보는 부모님 생각에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변장 안 하고 가도 되겠어?”
“응?”
“그렇게 갔다간 바로 사람들한테 들킬 텐데?”
“친구 차타고 다니려구... 그리고 사람 많은 데는 안 갈 거라...”
“뭐, 그럼 다행이네. 히히. 재밌게 놀다 와!”
그렇게 은지라는 관문을 넘게 되자 다른 멤버들의 의아함 또한 그다지 어려운 관문이 아니게 되었다. 다른 멤버들 또한 은지와 마찬가지로 부모님에게 드릴 선물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언니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어?”
“응?”
“맞아. 안 하던 화장도 하고... 원피스도 잘 안 입으면서?”
그래서 멤버들의 의아함 섞인 질문에도 유나의 얼굴은 밝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유나야 우리 뒤풀이 언제 할까? 대표님이 우리 알아서 날짜 정하라고 하시던데.”
“뒤풀이? 음... 오늘은 조금...”
“오늘은 당연히 안 되지. 애들이랑 언니도 오늘 부모님 뵈러 고향가니까, 음... 그럼 다음 주 중으로 해야겠네. 부모님 뵙고 와서 다시 얘기 나눠보자.”
“응, 언니.”
“친구들이랑 잘 놀고 오고. 무슨 일 있으면 전화 해. 알겠지?”
리더인 소진 또한 철저했지만 앞선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유나에게서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았다.
해외 일정 때문에 오랜만에 한국에 왔다는 점 그래서 부모님이 그녀 자신이 언제 고향으로 내려올지 기다리고 있다는 점 그리고 어제 받은 시상식 대상의 뒤풀이를 하기로 했다는 점 등 수많은 기쁜 일을 앞두고 있었기에 제 아무리 책임감 강하고 철저한 소진일지라도 들뜰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언니, 이거 써.”
“응?”
그런데 그런 그녀가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먼저 집밖을 나서려던 그때였다.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그녀에게 별 관심을 쏟지 않던 시나가 문득 무엇인가를 건넸다.
“향수야.”
“향수? 어! 이거... 시나 네가 엄청 아끼는 향수 아니야?”
“남자들이 그 향수 향기 좋아해.”
평소 향수를 쓰지 않던 유나로서는 시나가 건넨 향수가 무척이나 낯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무척이나 익숙하게 향수를 몸 곳곳에 뿌렸다. 무엇 때문에 자신에게 향수를 건넸는지는 모르겠으나, 시나가 향수를 건네면서 했던 말이 유나 그녀로 하여금 이를 가볍게 지나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나가 건넨 것은 향수뿐만이 아니었다.
“언니.”
“응? 아! 시나야 향수 잘 썼어. 고마워. 이거 비싼 거라고... 정말 고마워!”
“유나, 아니 유진 언니.”
“응?”
약간이나마 의아함을 표출하던 다른 멤버들과 달리 자기 할 일에만 몰두해있던 시나의 연이은 부름이 유나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가명이 아닌 본명으로 자신을 불렀고 또한 그 부름에 이어진 말이 영문 모를 것들로 가득 차 있었으니 오죽할까.
“집에 들어올 때 연락해. 나 오늘 집에 있을 거니까.”
“응? 오늘 집에 안 가?”
“내일 점심 이후에 갈거야. 그러니까... 언니가 기분 좋은 날에 먹는 와인 먹어도 되고... 아니면... 소주 먹어도 돼.”
멤버들 모두가 오랜 해외 활동 끝에 귀국한 만큼, 오늘부터 며칠 동안 저마다 고향에 내려간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던 터라, 시나의 이런 말은 확실히 뜻밖이었다. 게다가 갑작스럽게 와인과 소주 타령을 해대는 시나였기에, 유나의 눈빛은 한층 깊어진 의아함을 담기 시작했다.
“애가 갑자기 왜 이래? 무슨 소리야? 나 소주 못 먹는 거 알면서. 게다가 너도 소주 기분 안 좋을 때만 먹고 평소에는 잘 안 먹잖아? 아! 그나저나 언니 오늘 저녁 먹고 들어 올 건데 그렇게 되면 시나 너 혼자 밥...”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언니 파이팅!”
“으, 응? 어, 어! 파이팅! 그럼 언니 다녀올게!”
그래도 오늘이 무슨 날인지가 유나 그녀에게 더욱 와 닿았기에, 그녀는 그런 시나의 배웅을 받으며 숙소 문 밖으로 나섰다. 무척이나 화창한 날씨를 맞으며.
*
“유승재씨. 날씨도 더운데 얼른 이동하시죠?”
“어. 어? 어, 그래야지. 하하...”
“엄마. 아빠한테 또 왜 그래? 기분 안 좋은 일 있어? 응? 응?”
오랜만에 모인 가족의 모습.
엄마에게 꼼짝달싹 못하는 아빠 그리고 그런 엄마에게 애교 섞인 말을 건네는 동생. 거의 몇 년 만에 함께 모였지만 일말의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는, 그저 반가움만 가득 느껴지는 것을 보며 유지연 또한 ‘이것이 가족이구나.’를 새삼 느꼈다.
“우리 딸. 이리 줘. 엄마랑 아빠 짐 무겁지? 하하! 이런 건 예쁜 우리 딸 말고 아빠가 들어야지.”
어느새 자신의 곁으로 다가온 아빠를 보며 유지연의 얼굴이 밝아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제 아무리 그녀라 할지라도 가족이 몇 년 만에 한 자리에 모였다는 점은 무척이나 기쁘고 또한 따뜻한 일이었으니까.
“엄마한테 또 뭐 잘못하셨어요?”
“어, 어? 하하. 아, 그게 말이지...”
함께 살 때는 으레 볼 수 있어 무척이나 익숙했던, 하지만 가족이 따로 살게 되면서 무척이나 오랜만에 보게 된 ‘엄마에게 쩔쩔매는 아빠의 모습’이 그녀에게 조금은 색다르게 다가왔다.
오늘은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일까.
재연은 아빠를, 자신은 엄마를 닮았기에 아빠는 종종 그녀 자신에게 엄마와 관련된 질문을 하곤 했었다. 그러면 그녀는 상황에 적절한 답을 아빠에게 건넸었고 또한 ‘자신이 엄마와 무척이나 닮았구나.’를 다시금 새삼 느꼈었다.
“사실 오늘 아침에 뽀뽀해주는 걸 깜빡해서 말이지. 하하. 비행기 안이라서 깜빡했었는데, 네 엄마가 아빠 뽀뽀 받기 전까진 절대 안 일어나는 거 너도 알,”
“유승재씨. 유승재 씨 눈에는 큰 딸만 보이나 봐요?”
“어, 어? 아니지. 나한테는 우리 박여사뿐이지! 암 그렇고말고!”
“흥!”
엄마가 아빠를 쩔쩔매게 만들지만, 사실 그건 엄마가 아빠를 너무 좋아해서 라는 것을 그녀는 모르지 않았다. 방금 전 일화처럼 그녀의 엄마는 아빠가 딸에게 신경을 쓰는 것조차, 심지어 귓속말을 하는 것조차 질투할 정도로 아빠를 사랑했고 또한 아빠와 단 둘이 있을 때면 갖은 아양과 애교조차 서슴없이 하는 것이 바로 그녀의 엄마였으니까.
“집에 가는 길에 밥 먹고 가요.”
“됐다. 집에 가서 먹자. 너희들 어떻게 먹고 사는 지도 좀 보게.”
“응? 엄마! 언니가 맛있는 데 예약 했단 말이야! 우리 먹고 가자! 응? 응?”
“알겠어요.”
다소 쌀쌀맞다 생각할 수 있는 모녀간의 대화였지만 으레 그래왔기에 그녀는 자연스럽게 운전대를 잡았다. 그녀의 아빠 성격대로라면 자신이 운전을 하겠다고 말했겠지만, 뭐, 조금 특별한 상황이었으니까.
*
“응? 여보 먹지 그래?”
어느새 서운한 게 풀렸는지, 맛있게 구워진 장어구이를 한 점, 한 점 집어 아빠의 수저에 올려주는 엄마의 행동에도 가족들은 별다른 놀람이 없었다.
“엄마도 참. 엄마는 아빠를 너무 좋아해. 나는 그렇게 챙겨준 적도 없으면서!”
“쓰읍!”
“치이... 아빠만... 나도 꼬리 좋아하는데! 꼬리는 다 아빠만 주고!”
차가운 인상에 어울리게 주변 사람들을 조금은 불편하게 만들 정도의 성격이지만 그녀의 엄마는 항상 이랬다. 아빠 앞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어렸을 때는 그런 엄마의 행동이 신기해 아빠에게 자주 물었었다. 엄마는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을 테고 실제로도 그랬으니까.
[엄마가 아빠를 너무 좋아해서 그러는 거야. 엄마는 아빠 없인 못 살아요. 하하!]
[치... 거짓말! 엄마는 완전 예쁜데?]
[에? 지연아 아빠는? 아빠는 안 멋있어?]
그렇다고 해서 아빠의 대답이 이해가 됐다는 것은 아니었다. 도대체 얼마나 좋아하면 저런 행동을 할 수 있을지 유지연 그녀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동생인 유재연은 나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 것 같았지만.
아마 그녀 자신이 엄마 박주현을 무척이나 닮아서였던 것 같다.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까지 판박이라 할 수 있는 그녀와 엄마였기에 어렸을 때부터 불편함이 없었다. 동생인 유재연은 차가운 엄마의 말과 행동에 상처를 입었던 적도 많았지만, 유지연은 으레 그러려니 했다. 그녀의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닌, 원래 성격이 그런 것임을 그녀 자신을 보고서 알게 됐으니까.
“우리 딸이 장어구이에 추어탕까지 이렇게 맛있게 끓이네? 엄마가 해준 것보다... 아, 아! 엄마가 해준 것보다는 살짝 맛이 없지만! 그래, 그래도 이정도면 아주 맛있지. 암, 엄마 것보다 맛이 없고말고. 하하...”
“치... 아빠 방금 거짓말 한 거지? 엄마 요리 못하잖아?”
“무, 무슨 소리! 재연이 너! 엄마가 요리 얼마나 잘하는 데? 엄마한테 그런 소리하면 아빠한테 혼난다?”
“유재연. 잔말 말고 밥 먹어. 아빠 식사하시는 데 방해하지 말고.”
“치... 엄마는 맨날 아빠만 좋아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엄마의 행동이 희한하게 이해되었다. 50대임에도 날씬한 몸매와 동안을 자랑하는 터라 과장 조금 보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녀의 엄마가 왜 저렇게 아빠에게 목을 매는지.
“언니가 며칠 전에도 엄청 맛있게 해줬어! 미꾸라지랑 장어 사와서! 나 진짜 징그러웠는데, 언니는 막! 이렇게, 이렇게 해서 만들더라고! 살아있는 거라서 엄청 꿈틀대서 무서웠는데. 막, 막 미꾸라지들을 믹서기에 갈아버렸다니까? 히히.”
“정말? 우리 큰 딸이 그렇게까지 했단 말이야?”
물론 이것 또한 그녀 자신을 보고서 알게 되었다. 그녀의 엄마가 그녀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녀의 아빠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에 빠진 엄마에게 그런 행동들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을.
“그렇다니까, 아빠? 언니가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슉! 갈아버렸어!”
“하하! 우리 딸이 아빠랑 엄마 온다니까, 미리 연습해놨구나? 하하! 우리 딸이 벌써 이렇게 커서! 으구으구 우리 예쁜 딸!”
“아빠! 아빠! 나는!”
“우리 작은 딸은 말하면 입 아프지! 우리 작은 딸도 엄청, 엄청 예쁘지!”
“헤헤. 아빠 최고!”
그런데 그때였다. 며칠 전 만들다 남은 장어구이와 추어탕으로 간단히 저녁을 먹던 와중에 재연이 덧붙인 말이 불씨가 되어서일까.
유지연은 꽤나 익숙한 시선을 받게 되었다.
“너 요즘 연애하니?”
그녀 자신이 줄곧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던 눈빛을 자신이 받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똑 닮은 엄마의 차가운 눈빛, 그 눈빛 속에 담긴, 다른 사람들은 좀처럼 알아차리기 힘든 감정 때문이었다.
“예?”
그래서 그녀 또한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여보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지연이가 연애라니?”
뜬금없이 연애를 하냐는 엄마의 말에 옆에 있던 아빠가 화들짝 놀랐지만 그녀로서는 그저 놀람을 가라앉히는 데 전념했다.
그녀와 엄마는 판박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닮았다. 겉모습이나 성격까지 전부.
이에 그녀가 엄마를 잘 아는 만큼 그녀의 엄마 또한 그녀를 잘 알았다. 그래서 조금의 동요도 해서는 안 됐다. 그랬다가는, 모든 것이 들통 나 버릴 테니까.
“재연이 요즘 시트콤 촬영 준비하느라 밥도 잘 못 챙겨먹어요. 저도 드라마 끝난 지 얼마 안 됐고요. 그래서 시간도 있고 해서 만들어 본거에요. 재연이는 요리 못하니까.”
“치! 나도 요리 하면 잘 하거든? 안 해서 그렇지!”
“그렇지! 우리 작은 딸도 하면 잘 하지! 암 그렇고말고!”
“히히! 아빠 최고!”
그래도 다행인 것은 때마침 동생 재연과 아빠가 재빨리 화제를 돌려줬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녀 자신의 연기에 엄마 또한 별다른 의아함 없이 넘어간 듯 했는지라 유지연으로서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마냥 그녀가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