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24 2019 =========================================================================
#424
“잘 지내지? 오빠가 노크를 하긴 했는데... 조금 급하다보니까, 실례했네.”
숨 막힐 것 같은 분위기속에서 꺼낸 말이라고는 지나치게 형식적이었지만 이마저도 감지덕지였다. 그 정도로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볼 수 있었던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단순히 남녀가 입을 마주대고 있었더라도 당황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정도를 넘어선, 남녀의 입술 사이로 무엇인가가 분주히 움직이는 것조차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농밀한 키스를 그것도 마냥 어린 애로만 봤던 녀석이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머리가 하얗게 변해버렸다.
“사귀는 거야? 같은 가수인 가봐? 오늘 여기 온 거 보면.”
“어.”
“오빠가 눈치가 없었네. 오랜만인데 갑자기 와서 방해나 하고.”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내게는 퉁명스러운 단 답만을 건네는 시나였기에 익숙하긴 했다. 다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 익숙함조차 도움이 안 되었을 뿐.
“그래도 조심해야겠더라. 아무리 그래도 대기실에서...”
“멤버들은 아직 숍에 있어. 매니저 오빠도 멤버들 데리러 가느라, 방금 전에 나갔고.”
“멤버들도 알고 있고?”
“어.”
시나는 아미가 멤버들 가운데서도 좀처럼 편하게 대하기 힘든 녀석이었다. 방송에서나 사석에서나 털털하기로 유명한 녀석이건만, 내게만은 그런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괜스레 시비를 걸어오기도 했고 때로는 춥다며 담요를 내게 내던졌으며, 어떤 때는 한없이 약한 모습을 내보이는.
그래서 녀석의 마음을 알아차리기가 상대적으로 쉬웠다. 선을 긋고 난 후에 시나가 가장 대하기 어려운 녀석이 된 것도 바로 이 이유 때문이었고.
“오빠는?”
“어?”
“오빠는 잘 지내냐고.”
“나야 뭐, 주변이 워낙... 그래도 최근에는 정리돼가는 느낌이라.”
어쨌든 무척이나 오랜만에 만났는데 낯부끄러운 상황을 방해하고 난 뒤의 만남인지라 무척이나 목이 탔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될 것 같은 그런 불안함이 계속해서 나를 감돌았다.
“그나저나 대단하네? 난 네가 연애할 만큼... 음...”
그러다보니, 말이 허투루 나와 버렸다.
“그러니까, 넌 호탕 아니... 왈가닥 아니, 이게 아니지. 음... 털털해서 남자친구는 웬만하면... 음...”
뭔가 눈빛이 날카로웠다. 어떤 말을 잇든 간에 저 따가운 눈빛을 없애지 못할 것 같아 한심해졌다. 이런 말을 꺼낸 내 자신이.
그런데 그때였다. 따가운 눈빛을 쏘아대던 시나가 이런 난감한 상황을 해소시켜준 것이. 그리고 또 다른 난감함을 불러 모은 것이.
“풋... 여전하네. 오빠라는 사람은.”
“응?”
여전하다는 말이 긍정적인 의미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만큼 시나의 피식 웃음과 이어진 말은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으니까.
“오빠가 아예 선 그어버렸을 때 많이 힘들더라고.”
“어, 어?”
“오빠 잘했던 거 희망고문. 틈 줄 듯 말 듯 하는 거. 희망고문 실컷 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선 그러버렸잖아. 여동생, 오빠 사이로.”
이런 얘기를 시나와 나눌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하긴, 이 장소에서 시나와 단 둘이 있는 것부터가, 시나가 어떤 놈이랑 농밀한 스킨십을 나누고 있는 것을 목격한 것부터가 예상 밖이었지만.
“내가 오빠 좋아했던 거 알고 있었잖아. 아니야?”
“시나야.”
“그래도 어느 순간부터는 희망고문 안 해줬던 거 그게 고맙더라고. 그때 당시에는 미워죽을 뻔 했어도.”
뭔가 시나와 이렇게 단둘이 얘기를 나눠본 게 무척이나 오랜만인지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대화주제 자체도 내가 다루기가 힘든 것이어서 더더욱.
“오빠는 바쁜 사람이잖아. 그래서 그 빈자리가 너무 컸는데, 시간 지나니까 빈자리를 채워줄 사람이 나타나더라고.”
“방금 그 사람...”
“아니, 방금 그 사람은 사귄지 얼마 안 됐어.”
“아... 그래?”
나라는 존재가 뭐라고 선을 긋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원망을 받고 또 고마움을 받는 지.
스타가 되면서. 내가 가진 것들이 많아지면서. 점점 더 나라는 사람 그 자체만을 바라보는 이와 친분을 쌓는 게 어려워졌다. 그래서 녀석을 비롯해 다른 아미가 멤버들에게 선을 긋는 게 무척이나 어려웠었다. 선을 긋는 행위 자체만으로 내가 가진 얼마 되지 않은 인연이 사라지게 될 까봐, 그게 너무 두려웠었다.
“미련하게 오빠만 계속 좋아하는 사람 또 있는 거 알지? 오빠가 선 긋기 이전에도, 선 그었을 때도 그리고 지금까지.”
“어? 어...”
“선 그어버렸을 때. 그때 많이 원망했어도 지나고 보니까, 오빠한테 고마웠었어. 그러니까, 더 이상 외롭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오빠가 언니를 좋아하든, 아니면 다른 사람을 좋아하든.”
그런데 녀석의 입에서 이제는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 있게 되어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망설이다가 누군가에게 또 다른 상처를 줄 수도 있는 갈림길에서 머뭇거리지 않을 용기도 얻게 되었다.
그렇게 무른 결심을 다시금 굳게 만들 수 있었다.
*
[시나야! 도시락 가져왔어! 밥 먹... 어? 오빠?]
때마침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온 은지 덕에 무겁게 가라앉았던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속내까지 방금 전 시나의 말을 완전히 떨쳐낸 것은 아니었다. 녀석의 말이 꽤나 진솔하게 내게 다가왔고 또한 내가 이곳 아미가 녀석들의 대기실을 찾아온 이유가 녀석이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유나야 내일 정도에 잠깐 시간 있을까? 잠깐이면 되는데.]
[네? 내일이요?]
내가 대기실에 찾아왔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좋아하던 유나가, 이내 오늘 시상식 후 시간을 내달라는 내 말에 더욱 얼굴이 밝아졌다. 처음의 놀람과 의아함을 덮어버릴 정도로.
그래서 알게 모르게 죄책감이 들었다.
스케줄도 스케줄이거니와 주변 환경 자체가 너무나도 복잡해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는 유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모든 멤버가 재계약을 한 덕에 올 초부터 아시아 투어로 바빴던 아미가였으니까.
그래도 종종 유나는 내게 연락을 취해왔었다. 대놓고 내게 마음을 드러냈던 것이 결코 장난이 아니라는 듯, 바쁜 와중에도 ‘보고 싶다.’,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와 같은 말들을 건넸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지금의 나는 또다시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이미 답이 나와 있는 선택일 뿐이었다.
“야!”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걸었나보다. 목적지 없이 그저 계속.
“뭘 그렇게 멍을 때리고 있어?”
다행히 때마침 그런 나를 발견한 성준 녀석이 아니었다면 또다시 동물원 원숭이 신세가 될 뻔했는지라 안도의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야 보자마자 무슨 한숨이냐? 내가 잡아 먹냐? 나 참. 야, 일단 이리 와봐.”
“어, 어? 야, 어디가.”
녀석은 이번에 가수로서 뿐만 아니라 HMA의 MC로서도 이곳에 자리했다. 그래서 꽤나 바쁠 텐데도 녀석은 다짜고짜 나를 구석으로 데려가 지금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질문을 건넸다. 너도 참 어떻게 보면 대단하다. 대단해.
“주말에 놀러가자는 거 진짜임?”
“뭐?”
그 질문이라는 게 어처구니없어 말문이 턱하니 막혔다. 내가 평소에 한 입가지고 두말하는 사람도 아니고 뭘 저렇게 진심을 담아서 저런 질문을 하는 지. 나 원 참.
“아니, 서린이까지 같이 가자길래. 너는 혼자잖아. 유빈이야 뭐... 걔도 제 짝이 있으니까.”
그런데 녀석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동안 유빈 녀석에 이어 성준 녀석까지 옆구리를 채워버리는 바람에 알게 모르게 녀석들과 같이 만나는 자리를 몇 번 뺐었다. 물론 녀석들과 만나는 자리가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녀석들이 자기 혼자만 그런 자리에 올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그게 싫었을 뿐.
어쨌든 상황이 이렇다보니 자연스레 수긍하게 됐다.
하긴, 녀석 입장에선 이상하긴 하겠지. 여행 가자고 그렇게 말할 때는 빼놓고 이제 와서 여행을 가자고 그것도 여자 친구까지 데리고 오라고 했으니 원.
“걱정 말고 오기나 해. 한남동으로.”
“어? 아! 맞다. 야! 그러고 보니까, 왜 한남동이야? 성남 공항이나 김포 공항으로 바로 모이면 되지?”
그나저나 계속 얘기하다간 호기심 많은 녀석에게 주구장창 붙잡힐 것 같았다. 아니, 너 MC 아니냐? 이제 곧 시상식 시작인데 애당초 여기엔 왜 있는 거야? 도대체.
“헬기 타고 성남으로 바로 갈거야. 괜히 눈에 안 띄게.”
“뭐? 헬기?”
“짐은 미리 보내. 승무원 분들한테 부탁해서 미리 기내에 실어놓을 테니까.”
“야! 진짜 우리 헬기 타?”
이제 HMA가 곧 시작할 테고 나름 할 일도 있었기에 서둘러 자리에서 벗어났다.
“야! 진짜 헬기 타냐니까? 너 헬기도 있어?”
말 많은 놈에게 더 이상 잡혀 있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 크긴 컸지만.
*
“고양시 한류월드와 꿈 아레나가 후원, 개최하는 제 1회 HMA의 막이 올랐습니다!”
[와아아아아!]
[와아아!]
세 명의 MC 가운데 석준 삼촌의 오프닝 멘트를 시작으로 제 1회 HMA의 막이 올랐고 이내 관중석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슬쩍 가수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살펴보니 웬만한 가수들도 10만 명이나 되는 관객들의 함성소리에 꽤나 놀란 듯 했다. 하긴, 웬만한 한류스타라고 해도, 일본 돔 투어나 월드 투어를 해본 톱 아이 돌일지라도 10만 명이나 되는 관객들을 단일 장소에서 보는 것은 사실상 처음일 테니까.
[석준! 석준!]
[서린! 서린!]
[성준! 성준!]
“서린씨 10만 명이나 되는 케이 팝 팬 분들을 이렇게 마주하시니까, 기분이 어떠세요?”
아이 돌 활동뿐만 아니라 연기자로서도 제법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고 있는 성준과 서린 그리고 명실상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민 MC인 석준 삼촌이 MC를 맡아서일까. HMA의 진행은 물 흐르듯 순조롭게 흘러갔고 관객들 또한 이에 어울리는 환호소리로 화답했다.
“사실 저는 꿈 아레나를 실제로 와 본 게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그런데 정말 규모도 엄청 나고 아레나 겉모습도 그리고 내부도 너무 멋있어서 꼭 다시 와보고 싶어요. 콘서트로 그리고... 데이트로도...”
[우우우우]
“하하! 데이트 코스 접수 완료 됐고요. 감사합니다. 석준 선배님 덕에 점수 좀 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마치 만담을 하는 듯한 석준 삼촌과 성준, 서린의 모습들이 HMA의 분위기를 돋우었고 이는 시상식과 축제,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표방하고 있는 HMA의 목표에 꽤나 부합되는 진행이었다.
[커플지옥! 커플지옥!]
“자! 두 분 덕에 HMA가 시작부터 케이 팝 팬 분들의 야유를 받게 되었는데요. 서둘러 이 분위기를 해소시켜야겠죠? 자! 그럼 여러분들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어줄 제 1회 HMA의 오프닝 무대 ......”
나 또한 그러한 분위기에 편승해 복잡한 생각들을 날려버렸다. 이기적이고 굉장히 나쁜 놈이라 할 수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