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21 2019 =========================================================================
#421
댐은 튼튼하다. 막대한 수량을 버터내야 했기에 더더욱.
하지만 그러한 댐에 엄지손톱만큼의 구멍이 뚫린다면, 그 댐은 거대한 규모와 튼튼한 재질이 우스울 정도로 빠르게 균열이 가고 결국엔 무너진다.
마치 지금 상황처럼.
“수고하셨습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 인터뷰를 하지 않으려했다. 최대한 내가 가지고 있는 패를 숨긴 채, 한 번에 터트리려 했다. 그런데 상황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엄지손톱만큼의 구멍이 아니라, 집채만 한 구멍이 생겨 대세에 자연스레 편승하게 되었다.
“응. 지금 인터뷰 끝나고 가고 있어. 어, 어. 석현 형이랑 같이.”
진짜 알다가도 모르는 게 인생인 것 같다.
[소설 같은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다! 국정을 농단...... 허수아비...]
[...... 최측근으로부터 입수된 영상과 녹음 파일이 너무나도 충격적! 보도 전 내용 파악을 위해 해당 재보자료들을 살펴보고 있는 KTBS 보도국 직원들 모두가 혀를 내두르......]
[강지혁의 말이 사실이었다! 강지혁의 발언을 선두로 봇물이 터지기 시작하는......]
마음을 억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을 던져버린 듯 했다.
“응. 알겠어. 삼촌. 오늘은 좀 쉴게. 본가? 어차피 내일 명탐정 K 마지막 녹화도 있고 모레 바로 시상식도 있잖아. 그래서 그냥 잠실 아니면 한남 동에서 자려고. 재성삼촌한테 전화 왔다고? 어, 어. 알겠어. 내가 따로 재성삼촌한테 전화할게. 응.”
어깨가 너무나도 가벼웠다. 이 상황이 더욱 진전되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좋았다.
[호호. 그리 비싼 건 아니니 부담 가지실 필요 없답니다? 그리고... 그 만년필이 지혁씨의 앞길에 작게나마 도움이 된다면 저야말로 영광이지요. 받아주시겠어요?]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누군가가 내게 건넸던 말마따나, 내가 터트린 것보다 더한 것들이 권력의 꽃을 지게끔 만들 것이기에,
[십년도 못한 오년뿐인데, 그걸 못 버티고 떠나는 걸 보면 권력이라는 게 무섭긴 무섭네요.]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믿고 싶네요. 그럼 이만.]
그리고 무척이나 이기적인 마음이지만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그 오년이라는 시간동안 그들의 공격대상에서 내 차례는 당도하지 않을 테니까.
*
“Fly to the moon. 밤하늘에 자유롭게 누워있도록. 수많은 별들 사이를 오가며 그대를 볼 수 있도록.”
잠실 타워 집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선율을 느낄 수 있었다.
“플라이 투 더 문. 음음음. 자유롭게. 음으음.”
더불어 낯익은 이가 그 선율에 맞춰 흥얼거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고.
“To tell the truth, 그대의 손을 잡고 함께 있을래요. To tell the truth, 나와 같이 밤하늘을 거닐어요.”
그런 유지연의 모습이 나로 하여금 입가에 절로 미소가 맺히게 만들었다.
“이렇게?”
“어머!”
서둘러 한 걸음에 다가가 유지연을 뒤에서 껴안았다. 음식을 만들려고 했던 모양인지, 그녀의 손에는 칼이 잡혀 있었지만 이내 마주잡아오는 내 손에 자리를 내줘야만 했다.
“이, 이거 놔! 왜 이래?”
“나랑 손잡고 싶다며?”
갑작스러운 내 등장에 놀란 탓인지, 아니면 본연의 냉정함을 되찾으려고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품안에서 몸부림치는 그녀를 그저 꼭 껴안았다.
그리고 리듬에 맞춰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Fill my heart with song. 내 마음을 노래로 채워주세요. 그대의 마음이 듬뿍 담긴 선율로. 내 마음이 녹아들어있는 가사말로.”
음원이 아닌 생생한 내 목소리로 그녀에게 불러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몸부림이 이내 잠잠해졌다.
“이 밤하늘이 아름다운 이유. 그대가 있어서에요. 당신만을 원해요. 내 곁에 있어요."
등을 돌리고 있던 그녀를 돌이켜 세워, 나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체온을 한껏 느끼기 위해 허리를 바짝 잡아당겼다.
“Fly to the moon. 밤하늘에 거닐며 그대를 노래할 수 있도록. 그대의 사랑스러운 눈동자를 보면서 함께 할 수 있도록.”
몸을 가볍게 좌우로 흔들면서 선율에 몸을 맡겼다. 목을 부드럽게 휘감아오는 두 팔의 감촉을 느끼며 한없이 밝은 얼굴로 유지연을 바라보았다.
“To tell the truth, 그대에게 키스하고 싶어요. To tell the truth, 밤하늘을 사랑으로 채우고 싶어요.”
이내 끝내고 싶지 않던 노래가, 흘러나오던 선율이 마무리됨에 따라 끝을 맺었다. 하지만 간직하고 있던 감정만큼은 사라지지 않은 채, 우리 둘 사이를 휘감아 돌았다.
[쪽]
그대에게 키스하고 싶다는 가사 말마따나, 가벼운 입맞춤으로 시작된 키스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잘하네? 의외야, 아주?”
잠시 열풍이 불어 본래 하던 일을 멈추긴 했지만, 이내 그녀는 자신이 만들던 음식을 뚝딱 완성해냈다. 그것도 무척이나 맛있게.
“그런 말 좀 하지마. 애도 아니고.
“응? 난 이 찌개 말하는 건데?”
“뭐, 뭐?”
“맛있어. 간이 딱 맞네.”
“그럼 먹어. 말 좀 그만하고.”
부끄러워서인지 맛있다는 말에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그녀였지만 그래도 속내를 다 알고 있었기에 귀엽게만 보일 뿐이었다.
“이거, 이거 아주 응큼해? 안 그런 척 하면서? 음... 나이가 있어서인가?”
“뭐?”
“확실히 삼십대가 다르긴 다르네. 찌개도 잘 끓이고. 역시 연륜은 무시할 수,”
[탁]
그래서 장난 끼가 동해 유지연이 민감해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를 끄집어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좋아하는 여자애 고무줄을 끊어가며 좋아하는 감정을 서툴게 표현하듯이.
“이게 연상인가? 이래서 연상, 연상.”
[탁]
[드르륵]
수저와 젓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를 보며 나 또한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내 차가운 눈빛을 내게 내보이며 등을 돌리는 그녀를 뒤따라갔다.
“놔.”
장난이 조금 지나쳤다. 예전만 하더라도 나이얘기에 제법 민감해하긴 했어도, 지금처럼 민감해하지는 않았었는데 말이다.
30대라는 말이 그만큼 신경이 써서일까. 여느 여자들이 토라지는 것과 달리, 차가움이 물씬 풍겨져 나오는 유지연의 모습에 서둘러 그녀를 안아들었다.
“읏차!”
“야! 놔!”
어차피 밥도 다 먹어가던 찰나였기에, 그녀를 공주님안기 자세 그대로 안은 채 거실 흔들의자로 데려갔다. 물론 그녀 혼자 내팽개쳐놓는 게 아닌 흔들의자에 앉은 내 무릎위로.
“이거 놔. 하아...”
이미 내 품안에 있는 상태고 내가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것임을 알아서일까. 유지연은 이내 몸부림을 멈추었다. 나를 바라보는 차가운 눈빛은 여전했지만.
“삼십대라서 무척. 무척 서운하겠네.”
대한민국 최고의 반열에 오른 여배우인데 30대라는 것에 왜 이렇게 민감해하는 것일까. 고작해야 한 살 차이. 나 또한 이제 반년만 있으면 삼십대인데 말이다.
“연상인데, 이렇게 귀여우면 반칙 아닌가?”
“뭐?”
“나이 많다고 하니까. 신경 쓰였나봐?”
볼을 살짝 꼬집은 채 흔들었다. 눈에 콩깍지가 끼여도 너무 낀 듯, 그 모습마저도 아름다워 보여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 내 행동과 자기 자신을 보는 눈빛에서 달콤함을 느껴서인지, 유지연의 얼굴과 눈빛이 이내 한층 풀어졌다.
“어린 것도 좋긴 하지만. 뭐, 나는 연상도 좋아서 말이야. 그것도 이렇게 귀여운 연상은 더더욱.”
“뭐, 뭐래.”
당황해하며 고개를 나의 가슴팍으로 묻는 유지연을 보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기분 또한 풀어진 것 같아 마음도 내심 안도할 수 있었다.
“뭐, 가슴으로 못해서 조금 아쉽긴... 악!”
“꺼져버려. 멍청아.”
아, 아닌가?
*
“너가 시크릿 심사위원이야?”
“어?”
갑작스럽게 들려온 단어에 그녀의 가슴에서 고개를 살짝 때었다.
“그게 궁금해?”
‘내가 말 안했었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순간 떠올랐다. 그 정도로 내가 시크릿 심사위원이라는 사실은 내 주변 사람들에게 있어 상식 범주 안에 드는 것이었다.
“뭐, 궁금하면 알려줄 수도 있는데?”
하지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를 보자니, 쉽게 가르쳐주기가 싫었다. 방금 전까지 장난 뒤처리로 꽤나 곤란했다는 사실이 희한하게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다.
“너 맞아?”
“흐음...”
“알려준다며.”
“오빠 소리 한번 들어보고 싶네. 갑자기?”
오빠라는 소리에 유지연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렇게 연하가 좋아?”
“뭐?”
“오빠, 오빠. 자꾸 오빠 타령하는 거. 연하가 좋아서 그런 거잖아. 아니야?”
‘본인이 연상이라는 것에 내가 예상한 것보다 더 많이 신경 쓰고 있구나.’를 다시금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후우. 아쉽지만 오늘 이후로 오빠 타령은 그만 해야 될 것 같았다. 연상답지 않게 귀여운, 나만 볼 수 있는 모습들이 너무나도 좋아 그랬던 것인데, 유지연은 이것에 꽤나 신경이 가는 모양이니까.
“남자들은 오빠 소리 듣는 거 다 좋아해. 상대가 연상이든 연하든. 나는 너한테 오빠라고 불러 달라 할 때 네 모습이 귀여워서 더 그런 거고. 음... 나만 볼 수 있는 모습이잖아. 그건.”
그래서 연하가 아니라 유지연, 그녀 자체를 좋아하는 것임을 말해주었다.
그런데 한발 늦은 듯 했다.
언중유골.
이어진 유지연의 말에 담긴 뼈는 굉장히 날카로웠다.
“하긴 그래서 미국 대통령 딸이 주둥이를 갖다 대도 가만히 있었겠지. 그치 오빠? 아주 좋아 죽겠지?”
그날 이후 이와 관련해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않아 이해해주나 싶었다. 아니 이런 것에 아예 신경 쓰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크흠. 나도 참. 내 무덤을 내가 파는 구나.
*
“나 이제 미국 가는 데 보고 싶어서 어떡할 거야?”
스파 풀 안의 따뜻한 물에 몸을 맡긴 채, 유지연의 어깨를 조금씩, 조금씩 어루만졌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몸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절로 손이 간 것도 있지만, 드라마 촬영으로 고생했을 유지연에게 안마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지연이는 나 없으면 안 되잖아.”
“1절만 해. 1절만. 아... 하아...”
아무래도 전자의 이유가 조금 더 남성으로서의 본능을 자극했는지라, 안마의 범위는 차츰차츰 넓어져만 갔다. 어깨에서 등, 등에서 허리 그리고 그녀가 가장 민감해하는 곳까지 아주 세심하게 안마를 해주었다. 내게 가슴팍에 등을 기대고 있던 유지연이 몸을 돌려 안겨올 정도로.
“그... 만해. 하앙... 이, 이, 짐승아.”
꽤나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혔기에 이내 짐승이라며 내 가슴팍을 때리는 유지연의 행동에 안마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니, 피곤해 보이길래 안마해 준건데, 짐승이라니. 너무 억울하다. 진짜. 크흠.
“먼저 달려들 땐 언제고? 거기다 아까 차려준 밥상도 추어탕에 장어구이에...”
“조금... 있다가 침대에서...”
서로 마음을 확인한 뒤부터 줄곧 적극적으로 섹스에 임했던 유지연이었지만, 서너 번의 섹스 후에는 녹초가 될 정도로 푹 늘어지곤 했다.
“귀엽네. 우리 지연이?”
“뭐, 뭐래. 짐승아.”
그녀 자신이 남자들을 미치게 만드는 매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리고 남들은 모르는 모습들을 거리낌 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나는 유지연이라는 사람에게 더욱 빠져버렸다. 그래서 조금 거칠게 그녀를 대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녀의 성향 자체가 거친 행위를 좋아한다는 점도 물론 있겠지만 말이다.
“오늘 스케줄 있어...?”
어쨌든 아마 함께할 시간이 많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많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 또한 마찬가지인 듯 했다.
“오늘 명탐정 K 마지막 화라... 의외로 녹화시간 길거든. 오늘은 마지막 화니까, 더 길지 않을까... 싶네. 지금 가면 점심때쯤 끝나고 또 마지막 회니까, 사람들끼리 모여서 밥 한 끼라도 먹을 거고.”
“내일은?”
“내일은 시상식... 흠...”
내가 뭐한다고 이렇게 일을 벌였는지 참으로 한심스러웠다.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그런 일들에게 빼앗긴다는 점이 원통하기까지 했다.
“넌? 스케줄 없어?”
“없어. 다음 주에 종방연 있는 것 빼고는 한동안 쭉.”
괜히 이 얘기를 더 꺼냈다가는 좋은 분위기를 우울하게 만들 것 같아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려버렸다.
“우리 주말에 파티 할까? 유빈이랑 성준이 불러서?”
“응? 파티? 나까지?”
“그럼 너까지지. 나 혼자 그 자식들 사이에 끼라고?”
그런데 기껏 돌려버린 화제가 뭔가 에러인 듯 했다. 유지연의 얼굴에 담긴 의아함이 예상보다 더욱 컸기 때문이다.
“싫어? 아직 조금... 부담되나? 어디 가서 떠벌리고 다니는 애들도 아니고 그냥... 자랑도 하고 싶고 그래서 그런 거였어. 너무 신경 쓰지 마. 그 놈들이 공개 연애한다고 얼마나... 크흠... 어쨌든 그럼 주말에 우리 여행이나,”
[쪽]
“응?”
괜히 부담을 줄까봐, 내가 말실수를 한 것 같아 없던 일로 하려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입을 마주대오는 유지연의 행동 그리고 그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두 팔로 내 목을 감아오기까지 한 그녀의 과감함에 숨이 막히는 듯 했다.
“파티해. 주말에.”
“응?”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저 스파를 마친 뒤 침대에서 나누기로 했던 사랑을, 마치 지금 당장 나누려는 듯 나를 덮쳐오는 유지연을 반갑게 맞이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