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15 2019 =========================================================================
#415
“하반기에는 아무래도 WMCA가 있으니까, 상반기 시상식 쪽으로 가닥을 바꾼 것 같더라. 당초에는 6월 1일로 잡혀 있었는데, 5월 중순으로......”
유지연의 공백을 느낄 새가 없었다. 정신없을 때 벌여놓은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는지라 그 뒷수습을 생각하기에도 벅찼다.
당장 음반 발매 이전에 개최하기로 했던 청음회는 손도 대지 못한 상태였고 시크릿 심사위원이 올해의 프로듀서 상에 노미네이트된 HBA(한류월드 뮤직 어워드)의 참석 여부조차 결정하지 못한 상황이니 오죽할까.
“그래서 어떡할 건데?”
단순히 삼촌이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라면 이다지도 골치 아프진 않을 텐데, 그럴 수도 없어 쉽사리 답을 낼 수가 없었다. 이런 사안 같은 경우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솔직히 오늘 민재 삼촌이 이를 다시금 읊기 전까지 이를 떠올리지 못했던 터라 당장 답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이게 삼촌 모르게 자꾸 사고만 치니까! 음반 발매도 있고 너 이제 곧 출국인데! 어휴... 내가 너 때문에 늙는다. 늙어.”
그런 내 모습에 삼촌이 한숨을 내쉬자 괜스레 미안해졌다. 근데, 삼촌 나도 잘 모르겠는 걸 어떡해. 에휴. 내가 미친놈이지. 미친놈.
“내일 착공식 있는 거 알지? 이틀 후에?”
“착공식? 이미 공사 시작했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게 끝도 없이 내가 벌려놓은 일들에 관한 민재 삼촌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듣게 되었다.
“공사는 무슨... 착공식도 못했는데 무슨 공사야?”
“그때...”
“테일러도 오고 너 상태도 안 좋아보여서 미뤘지. 네가 당장 착공식에 참가할 만한 상태가 아니니까. 이 녀석아!”
“아...”
당장 공사 중인 줄 알았던 꿈 기숙사가 아직까지 삽조차 뜨지 못했다는 점까지 듣게 되자 정신이 번쩍 뜨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건 너한테 말해줘야 했었는데, 네가 자꾸 상태가 안 좋길래 말을 못했었는데 이제 착공식도 코앞인데 계속,”
“지혁아! 너가 준비하라고 한 밥 차랑 디저트 차... 아! 대표님 계셨네요.”
“밥 차? 디저트 차?”
그런데 때마침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온 석현 형 때문에 이 모든 일과 관련된 생각들을 잠시나마 미룰 수밖에 없게 되었다. 삼촌 미안, 나 또 일 벌렸어. 아니, 일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유지연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우와! 대박!”
“장난 아닌데?”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비교적 조용하던 촬영 스튜디오가 갑작스럽게 시끌벅적해졌기 때문이다.
밤샘 촬영이 끝난 직후. 그것도 주연 배우의 촬영 신이 끝난 직후. 촬영장의 분위기는 고요해야 되는 것이 맞았다. 안 그래도 종영을 얼마 안 앞둔 현 상황에서 계속해서 무리한 촬영 스케줄을 소화해내고 있는 주연배우들이었다. 따라서 이런 휴식 시간에는 그들을 배려해 모두가 조용해줘야 하는 게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그래서일까.
“뭐 때문에 저렇게 소란스러운 거야?”
피곤해 보이는 그녀를 잔뜩 걱정하고 있던 매니저의 언성이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글쎄요. 제가 한번 가볼까요?”
“그래 네가 한번 가보고와. 아니, 주연 배우가 밤 새 촬영하다 다음날 점심 되어서야 겨우 쉬는 데 주변이 이렇게 시끄러우면 어쩌겠다는 거야? 한 시간 후에 바로 촬영 있... 하아... 아니다. 내가 직접 감독한테 가서 말해야겠어. 이거 도대체가...”
새로 들어온 신참 매니저에게 상황을 파악해 오라는 것으로는 부족해서일까. 신참 매니저를 제쳐두고 지시를 내린 그가 직접 대기실을 벗어나려 했다.
유지연은 최고의 대우를 받아야만 했다. 이런 대우들을 이해심만으로 넘겨버린다면 추후 피곤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그는 모르지 않았다. 따라서 이런 행동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조치일 수밖에 없었다.
일개 실장의 자리에서 유지연 하나로 대표의 자리까지 오른 현 소속사 대표처럼 그 또한 유지연 덕에 일개 로드 매니저에서 총괄 매니저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는지라, 유지연은 그에게 무척이나 큰 의미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는 대기실을 벗어날 수도 없었다.
“오빠. 난 괜찮으니까, 그런 말 하지 마.”
당사자인 유지연의 그런 그를 말렸으니까.
“그치만 지연이 네 급이 있는데,”
당연히 그로서는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호의가 지속되면 너무나도 당연한 사안으로 여겨버리는 것이 이 바닥의 상식이고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을 그는 모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는 끝내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오빠.”
“어, 어. 그래, 그래. 오빠가 다, 다시는 안 그럴게. 하하...”
제 아무리 매니저들을 총괄하는 자리에 그 자신이 위치해 있다 할지라도 데뷔 초기 때부터 지켜봐왔던 유지연의 차가운 눈빛은 파블로프 실험의 개를 군침 돌게 만들었던 종소리와 같이 그를 움찔하게 만들었으니까.
*
“진짜 클라스 미쳤네. 미쳤어.”
“유지연은 어디 있는 거야? 빨리 나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주변이 시끄럽다지만 워낙에 피곤했기에 눈만 감아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유지연 그녀가 소란스러움을 묵과했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소란스러움이 점점 커지고 그 소란스러움 가운데 자신의 이름까지 언급된다는 점에 그녀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대기실을 나서자마자 그녀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물론 이 찌푸려짐이 부정적인 감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기실 안이라서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대기실을 나서자마자 느껴지는 각종 음식들의 냄새에 잠들어있던 그녀의 허기짐 또한 깨어나는 듯 했다.
“대박 저거 로브스터 아니야? 미쳤다. 미쳤어.”
“저거 무슨 초콜릿이 분수처럼 올라와!”
“파스타에 볶음밥, 갈비 그리고 튀김에 탕수육, 깐풍기, 치킨 거기다 스테이크까지... 와... 음식이 몇 개야? 도대체? 헉! 저기는 삼계탕까지 있어? 1인 1뚝배기? 뚝배기 하나씩 다 먹으면 나머지는 도대체 어떻게 먹으라는 거야? 와...”
오죽 피곤했으면 어제 저녁도 먹지 않은 채 휴식을 취해야 했고 아침도 거른 밤샘 촬영의 끝에 맞이한 점심때도 식사를 거르려고 했던 것일까. 밥 보다는 수면이 먼저였기에 지금의 소란스러움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이미 꿈나라에 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의 왁자지껄함과 느껴지는 맛있는 냄새가 믿기지 않게도 그녀의 수면욕을 모조리 날려버렸다. 이내 들려온 누군가의 이름이 그런 현상을 더욱 북돋았고 말이다.
“내가 이 바닥 경력 30년이지만 밥 차가 한번에 5개나 온 건 처음이라고?”
“듣기로는 강지혁 재산이 몇 천억이라던데...”
“몇 천억이 아니라 거의 1조 가까이 된다던데?”
“진짜? 그게 말이 돼? 1조가 동네 개 이름도 아니고. 데뷔한 지 10년도 안 됐는데, 1조를 어떻게 벌어?”
“집들만 따져도 수천억이잖아. 그리고 꿈 아레나, 꿈 기숙사 포함해서 다른 부동산들이랑 주식......”
시끌벅적한 촬영장 분위기 속에서 강지혁이 심심치 않게 언급된다는 점에 유지연의 얼굴에 걱정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평범한 사람이 보기엔 여전히 차가웠고 도도해 보였지만 곁에 있던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들은 그런 그녀의 얼굴에 담긴 걱정을 알아채 이에 상당히 의아해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이내 왁자지껄함의 근원에 도착했을 때, 좀 전까지 유지연의 얼굴에 담겨 있던 걱정은 단숨에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이는 그녀의 매니저들과 스타일리스트들의 의아함 또한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움직임에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길을 터주었고 유지연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촬영장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주범 앞에 설 수 있었다.
[군인 남편 버리고 새 사랑 찾아간 의사 유미연을 찾습니다!]
[맛있게 드시고 시청률 40% 돌파! 구 군인 남편 소령 강세진.]
트럭 5대. 그 트럭 5대에 걸린 현수막에는 그녀가 모를 수 없는 이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를 발견한 유지연의 얼굴은 그녀 자신도 모르게 차가움을 지운 상태였다.
촬영장에 팬클럽이나 과거 드라마에서 합을 맞췄던 동료 연예인이 밥 차를 보내주는 것은 그리 어색한 풍경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반응을 이끌어냈던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모든 스태프들이 유지연 그녀를 쳐다보았고 감독은 그 선두에서 그녀를 맞이했다.
“지연씨! 얼른 와서 사진 찍어요! 주인공이 와서 인증 샷 찍어줘야지! 언제까지 우릴 군침만 흘리게 할 생각이야? 하하!”
밥 차를 개시하기 전에 밥 차의 주인공이 인증 샷을 찍고 SNS를 통해 보내준 팬들 또는 동료 연예인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는 것이 밥 차 문화의 관례 아닌 관례였다. 그래서 모두들 연신 군침만 흘린 채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찰칵]
[찰칵]
밤샘 촬영으로 인해 어제 저녁부터 오늘 점심때까지 끼니를 챙겨먹은 이가 없다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 그녀가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서둘러 인증 샷을 찍었다.
“역시 월드스타라니까. 밥 차도 아주 월드스타야! 월드스타! 하하! 아주 통이 크네. 통이 커! 하하! 지연씨 전에 천손 찍고 나서도 지혁씨랑 계속해서 연락하고 지냈나봐? 아니 이정도면 아주 돈독하네. 돈독해! 이렇게 밥 차들까지 보내주고. 하하! 지연씨 덕에 오늘 아주 포식하겠어? 하하!”
이 상황이 너무나도 뜻밖이어서 일까.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붉어져 있었다.
“맛있게들 드세요.”
“지연씨 고마워요! 지혁씨한테도 잘 먹겠다고 전해줘요!”
“많이들 드세요.”
“지연씨 덕분에 간만에 맛있는 것 좀 먹어보네요. 지혁씨한테 잘 먹겠다고 전해줘요.”
밥 차의 주인공으로서 스태프들과 동료, 선, 후배 배우들이 뷔페접시를 가져갈 때마다 인사를 해야 했다. 밤샘 촬영을 한 끝에 겨우 휴식 시간을 맞이한 그녀로서는 이것 또한 고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피로한 기색은 전혀 살펴볼 수가 없었다.
“이거 지혁 형한테 감사하다고 따로 연락드려야 겠어요.”
“형?”
“아! 누나는 잘 모르시구나. 저 저번에 휴식기 있었잖아요. 그때 지혁 형 출연하는 명탐정 K에 깜짝 게스트로 출연했어요. 그때 지혁 형이랑 촬영 끝나고 호프 가서 맥주도 한 잔 했고요. 아무튼 이렇게까지 해주셨는데 엄청 분발해야겠는데요?”
그렇게 유지연은 10여분 가량 세트장 내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이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유지연의 손은 접시를 집지 않았다.
“오빠. 밥 먹기 전에... 나 메이크업 다시 받아야 할 것 같은데. 머리랑 손질도... 5분... 아니 10분이면 되는데...”
“응? 지금?”
갑작스럽게 매니저를 호출한 그녀. 스테이크를 막 받고 있던 매니저가 그런 그녀의 호출에 다급히 달려왔다. 그리고 그녀의 갑작스런 메이크업 타령에 의문을 표했다.
“밤새서 머리도 그렇고 메이크업도 조금... 방금 전에 찍은 거 그대로 SNS에 올리면...”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거의 다 건넸을 때부터 그녀의 머릿속은 갑작스럽게 떠오른 생각으로 인해 복잡해져만 갔다. 밤샘 촬영 때문에 씻지도 못했고 메이크업과 헤어 스타일링 또한 어제 저녁 때 이후 제대로 손보지 못했다는 점이 그녀로서는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아! 미안하다. 지연아. 오빠가 음식들에 정신이 팔려서 그걸 생각 못했네. 음식이야 신입 시켜서 애들 것까지 전부 대기실로 가져오라고 하면 되니까. 잠시만! 오빠가 스타일리스트 애들 불러올게.”
그렇게 자신의 말에 스타일리스트들을 부르러 가는 매니저를 보며 그녀는 서둘러 대기실 내에 마련된 세면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올릴 인증 샷을 볼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 너무나 신경 쓰여 도저히 이를 가만두고 넘길 수 없었으니까.
*
[천손 커플의 재림? 유미연을 찾는 강세진 소령의 질투 섞인 서포트!]
-ㅋㅋㅋㅋㅋㅋ대박이다. 와... 강지혁 센스 봐... ㅎㄷㄷ
-유미연, 강세진. 진짜 오랜만에 듣는다. 하아... 현자타임. 천손 끝나고 나서 현자타임 진짜 지렸었는데.
-군인 남편 버리고래 ㅋㅋㅋㅋㅋㅋ 강지혁 귀여운 면이 있네. 그래놓고 시청률 40% 돌파하라는 건 또 뭐얔ㅋㅋㅋ.
-둘이 계속해서 연락하고 있었구나. 이런 거 보니까, 왠지 천손 드라마 계속 이어진 것 같음.ㅋㅋㅋㅋ
-와... 유지연은 뭔 복이냐? 퍼스트가 강지혁이고 세컨드가 홍성빈... ㅎㄷㄷ
-그 와중에 유지연 미모 실화냐? 미친 계속 날밤세면서 촬영한다는 데 저게 날 밤샌 얼굴? 미친 여신 강림이네... 개 맛있겠다. 아! 물론 밥 차에 있는 음식들이.
[월드스타의 밥 차 클라스! 이것이 바로 월드 클라스 밥 차!]
-미친... 밥 차가 5대 ㅋㅋㅋㅋㅋ
-여보세요? 여기 할리우드 인가요? 무슨 밥 차에 로브스터랑 스테이크가 기본으로 깔려있죠? 이거 실화?
-초콜릿 분수 지렸닼ㅋㅋㅋㅋ
-저거 다 하는 데 돈 얼마나 들었을까?
-확실한 건 강지혁한테는 껌값.
-인정. 씹인정. ㅋㅋㅋㅋ여튼 부럽다. 유지연도. 강지혁도. 저기서 먹고 있는 스태프들도.
밥 차들이 현장에 도착하면 해당 관리자가 그 사실을 내게 알리게 되어있어, 알고는 있었다. 밥 차들이 십여 분 전에 현장에 도착했다는 것을.
하지만 막상 인터넷 상 반응을 보아하니, 절로 뿌듯해졌다. 차가운 이미지는 어디로 갔는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유지연의 인증 샷이 내 마음을 미친 듯이 흔들어놓았고.
이거, 이거 아주 요물이네. 요물. 안 되겠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이런 얼굴 표정하지 말라고 해야겠다. 이런 모습은 나만 봐야 돼. 나만.
근데 그나저나, 아까 삼촌이 착공식 관련해서 무슨 할 말 있었던 것 같은데, 흐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