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14 2019 =========================================================================
#414
“좋았어! 컷!”
사전 제작 드라마가 아닌 이상, 대한민국 드라마 촬영장은 언제나 강행군을 친구로 삼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촬영장의 분위기는 활기찼다.
시청률.
강행군을 펼치며 드라마를 제작하는 게 일상과도 같은 드라마 판에서 시청률이야말로 이 모든 노고를 보상받을 수 있는 직접적인 대가였다. 시청률이라는 단순 수치 하나가 드라마 관련 수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광고 수익을 결정했고 이는 더 나아가 해외 시장 개척에 있어 경쟁 작들에 비해 한발 더 앞설 수 있는 혜택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이곳 촬영 세트장의 분위기는 결코 과하거나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채널이 다양화되어 있어 20%만 넘어도 대박이라고 말하는 요즘 드라마 시장에서 가뿐히 30%를 돌파, 이제는 40%의 시청률을 돌파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선 상태는 그야말로 대박 아닌 초대박을 의미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각종 보너스에 해외 휴양지 단체 포상 휴가까지 고려되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는지라, 줄줄 흐르는 땀방울에도 스태프들의 얼굴은 밝았다.
“지연씨?”
“네? 감독님.”
그런 분위기 속에서 방금 전 신을 단 번에 끝낸 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유지연에게 감독이 찾아왔다. 그런 감독의 갑작스러운 발걸음에 유지연은 물론이고 그녀의 곁에 있던 스타일리스트들까지 모두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심지어 함께 있던 매니저의 얼굴에는 약간의 불쾌감 또한 자리 잡고 있었다.
이는 당연했다. 다른 때도 아니고 연이어서 촬영이 진행된 가운데, 몇 시간 만에 겨우 갖게 된 톱 여배우의 휴식을 방해한다는 것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행동이었으니까. 심지어 그게 감독일 지라도 말이다.
“감독님 무슨 일로...?”
톱의 자리에 오른 배우들은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다. 톱의 자리에 오른 순간부터 흥행이 유력한 질 좋은 대본들이 그들의 소속사 사무실에 차곡차곡 쌓여갔고 해당 배우들은 이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또한 각종 광고주들은 그들을 선점하기 위해 애를 태웠다.
따라서 톱의 자리에 오른 순간부터 감독이란 존재는 그다지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톱의 자리에 오른 배우는 촬영의 끝과 시작 그리고 대본 일부의 수정조차 요구할 수 있었고 해당 감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다른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오늘 연기가 아주 좋아? 원래 지연씨가 NG 안내기로 유명한 배우긴 하지만 그래도 최근에는 많이 피곤해보였거든. 그래서 하루 쉰 것도 별 효과가 없나 싶었어. 오늘 보니까, 눈도 살짝 부어있는 것 같고 눈도 조금 충혈 돼 있는 것 같아서.”
“아...”
하지만 그녀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감독의 행보에 메이크업 수정을 멈췄다.
“어쨌든 밤새 촬영하고 그날 휴식 준거라, 하루라고 하긴 뭐하지만... 그래도 하루 쉬고 오니까, 연기가 너무 부드럽고 그런 것 같아. 아무튼 고마워? 지연씨?”
물론 이는 눈앞 감독이 엄청나게 유명한 감독이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이번 작품이 있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시청률 5%대의 드라마 서너 편을 찍어본 게 전부인, 작품성 대비 대중성이 형편없는 감독이었으니까.
“아니에요. 감독님. 전부 감독님이 잘 이끌어주셔서 그래요.”
“하하! 그럼 나도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될까?”
“네?”
“하하! 농담! 농담! 그럼 우리 마지막 혼을 한번 불태워보자고? 40% 시청률 돌파 한 번 해봐야지? 하하!”
톱의 자리에 있을 때의 처신이 앞으로 자신이 걸어갈 길의 험난함을 결정한다,
톱의 자리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한순간이 될 수 있다.
나이를 먹어도 충분히 주연 배우로서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는 남자 배우들과는 달리, 여자 배우들은 연기력과 상관없이 나이를 먹어감에 자연스럽게 주연의 자리에서 멀어져야 한다.
그녀는 지금의 편함과 자기만족을 위해 미래를 희생할 정도로 어리석은 인간이 아니었고 과거와 현재에 존재했던 수많은 톱 여배우들의 몰락이 주는 교훈 아닌 교훈을 무시할 정도로 학습효과가 없는 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언니, 오늘 기분 너무 좋아 보여요. 한류월드 백제 호텔이 그렇게 좋았어요? 부러워요.”
“맞아. 지연이 오늘 기분 좋아 보이네? 하루 휴식 갖길 정말 잘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실장님, 아니 이제는 대표님이지. 어쨌든 대표님한테 진즉에 부탁해볼걸 그랬네. 그나저나 저 감독은 이런 말을 왜 지금 하는 거야? 안 그래도 너 힘든 데, 쉬지도 못하게. 칭찬이어서 가만히 있었지, 연기 가지고 뭐라 했으면 내가 확!”
“오늘 아침에 눈도 부었고 그래서 별로 못 쉬었나 싶었는데, 그게 잘 쉬어서 그런 거였네? 어쩐지 화장도 잘 받고 그러더라. 후후. 역시 지연이 너는 메이크업 해줄 맛이 난다니까?”
물론 그동안 가슴앓이를 했던 일이 말끔히 해결됐다는 점이 지금 이 순간을 보다 좋게 바라보게 만들긴 했지만.
*
“귀찮을지 몰라도 가서,”
“안 귀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저씨.”
내 표정이 굳어져있어서일까. 석현 형이 나를 어르고 달래려는 듯 잠시 차를 길가에 세웠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요즘 들어 종잡을 수 없는 행동들을, 감정기복의 끝을 보여주고 있는 나였기에 형 입장에서는 혹여나 내가 실수를 할까봐 여간 걱정이 될 테니까.
“이번 무대인사가 배급사 요청이기도 하지만, 관객들 전부가 너 팬클럽 회원들 중에 추첨 선정돼서 온 거니까 너무 피곤하게 여기지는 말라 이 말이야. 뭐, 너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만, 너 요즘에 피곤해 보이기도 하고,”
“안 피곤해. 기분도 여기서 더 좋을 수가 없을 정도로 좋고.”
하지만 이는 오해였다. 내가 지금 표정이 굳어있는 이유는 당초 예정보다 두 세배 가량 행사 규모가 커져버린 미스터 지 무대인사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아니, 내가 아무리 요즘 이상해졌다고는 하지만, 팬 행사와 관련된 부분에서까지 이렇게 걱정 가득 담긴 눈빛을 받아야 하나? 이건 좀 오버인 것 같은데.
“흐음...”
괜찮다는 내 말에 아직까지도 의심쩍은 눈빛을 거두지 않는 석현 형 때문에, 무척이나 억울했다. 아니, 내가 지금 누굴 내 여자로 만들고 왔는데, 기분이 나쁠 처지야? 뭐, 계속 옆에 있고 싶은데, 끌려 나와서 기분이 조금 언짢았던 건 사실이지만.
“그리고 무대 인사한 다음에 바로 그... JJ E&M측이랑 자리 있는 거 알지?”
“어, 알고 있어. 형.”
어쨌든 오늘 스케줄을 다시 한 번 읊어주는 석현 형의 말을 듣다보니, 어느새 오늘 무대인사 행사가 이뤄질 강남 JJ E&M 멀티플렉스에 도착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오빠!]
[갓지혁! 갓지혁! 우유빛깔 강지혁!]
전 세계 최초 개봉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마치 시상식 레드카펫 때처럼 줄지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갓지혁이니 우유빛깔 강지혁이니와 같은 낯부끄러운 함성들부터 명탐정 갓지혁과 같이 최근 방영되고 있는 프로그램 연관 함성들을 질러대면서 말이다.
하아. 아무리 그래도 명탐정 갓지혁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나 저번 촬영에서 혼자 죽 쒔는데, 이거 방송으로 나가면...
“한국에서 미스터 지가 이렇게 극장 상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감회가 새롭네요.”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안 그래도 좋았던 기분이 훨씬, 더더욱, 무척이나.
“이런 기회를 만들어주신 배급사 JJ E&M의 관계자 분들과 오늘 이 자리를 찾아주신 팬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상영관들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상영관이라는 안내해준 관계자분의 말마따나, 셀 수없이 많은 팬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행사는 무사히 진행되었고,
“영화 잘 보시고요. 여기 준비한 선물은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 약소하게나마 준비한 건데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또한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개봉한지 한참 된 영화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벌써 300만 명이 넘는 관객들이 내 영화를 봐주었고 또한 그 기세가 수그러들 기미가 안 보인다고 했었을 땐 그냥 그런가보다 싶었는데 오늘 이 무대 인사 행사 덕분에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뭐, 그런 팬들에게 미안하게도 마음속에는 여전히 누군가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하긴 했지만.
*
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아쉽게도 그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종영을 얼마 안 앞둔 대세드라마의 주연답게 유지연의 스케줄은 촬영 및 CF광고 등으로 가득 차있었고 나 또한 무대 인사만이 오늘 스케줄의 전부가 아니었으니까.
“안녕하세요.”
고풍스러운 일식집에 들어서자마자 직원이 나를 내부 깊은 곳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그 종착지에는 오늘 이 자리의 주선자이자 이번 미스터 지 한국 배급 계획을 주도했다는 이가 먼저 와 있었다.
“이렇게 직접 한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겨우 보게 됐네요. 반가워요. JJ E&M 사장 이미진이에요.”
직접 얼굴을 마주한 적은 처음.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무척이나 익숙한 인물이 바로 눈앞에서 반가움을 표하며 악수를 건넨 이미진이라는 사람이었다.
솔직히 이런 자리를 왜 마련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광고 계약처럼 광고주와 해당 모델이 관례상 한두 번 자리를 함께한다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직접적인 접점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이 자리에 참석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덕분에 한국에서도 미스터 지가 개봉할 수 있게 됐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고맙다는 말은 지혁씨가 아니라 도리어 제가 해야 되는 말인데요? 호호.”
“네?”
“참, 더러운 일들이 많더라고요. 한국은.”
JJ 그룹의 대주주들 가운데 하나이자, 오너 일가로서 JJ E&M을 이끌었지만, 이번에 마치 쫓겨나듯 미국으로 떠나게 됐다는 소식을 관리사님으로부터 들었었다. 그래서 이 자리를 마냥 단순하게 볼 수 없었다.
“가기 전에 크게 한방 먹일 수 있어서 너무 좋네요.”
같은 대상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던 이가 결국 그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물러난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스터 지의 한국 개봉 같은 일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다는 점은 나뿐만 아니라 관리사님과 삼촌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던 것이다.
하지만 대놓고 이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초면이기도 하거니와, 왠지 모르게 이미진 그녀 또한 겉으로 내뱉는 말과는 달리 행동 하나, 하나에서 조심스러움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류월드는 자사 본사와 직원들 임대 아파트가 자리 잡은 곳뿐만 아니라, 자사의 비전과 미래가 있는 곳이에요. 그리고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것은 지혁씨가 지니고 있는 문화적인 영향력 덕분이고요.”
그러다보니 식사 자리 주도권은 자연스레 그녀가 가져갔고 의미 없는 내용만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올 뿐이었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무척이나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감사합니다. 과찬이세요.”
그래서 당초 계획과는 달리, 궁금했던 점들을 물어보려고 했었다. 꽤나 여러 번.
“고양시와 경기도가 한류월드에 편입시키기 위해 추가 매입한 주변 부지와 자사 임대아파트 지역 그리고 백제 호텔 직원숙소구역까지 합치면 한류월드는 200만㎡ 규모의 국내 최대 테마파크 단지가 되었어요. 게다가 저희 측이 요즘 추친 하고 있는 한류콘텐츠 융합 연구센터, 백제 호텔 측의 한옥 게스트 하우스 추가 건립 계획 그리고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할 워터파크 계획까지......”
하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한류월드와 관련된 얘기들을 꺼내며 마치 이에 대한 얘기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듯 했다.
“큰 건 아니에요. 노래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게 뭐가 있나 싶어 준비해봤어요.”
“아...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호호. 그리 비싼 건 아니니 부담 가지실 필요 없답니다? 그리고... 그 만년필이 지혁씨의 앞길에 작게나마 도움이 된다면 저야말로 영광이지요. 받아주시겠어요?”
“그게... 후우... 감사합니다. 좋은 노래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이럴 거면 이 자리를 왜 만든 건지 모르겠다. 무척이나 비싸 보이는 만년필을 내게 선물이라며 건네는 그녀의 눈빛을 보니 더더욱.
한 시간 가량의 길지도, 짧지도 않았던 저녁자리는 그렇게 끝이 났다.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네?”
“십년도 못한 오년뿐인데, 그걸 못 버티고 떠나는 걸 보면 권력이라는 게 무섭긴 무섭네요.”
“아...”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믿고 싶네요. 아니 꼭 만나게 될 거에요. 그럼 이만.”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을 자리였는지라 밥이 콧구멍으로 넘어갔는지 입 구멍으로 넘어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종종 그녀가 내게 건네던 눈빛에 담겨있던 묘한 진심어림이 좀처럼 잊혀지지 않았고 또한 내게 선사해주었다.
별 의미 없는 대화인 것이 분명한데, 무엇인가 내가 모를 것들이 담겨져 있을 것 같은 그런 찝찝함을.
*
“네, 네. 팀원들과 함께 십여 차례 검토해보았지만 별다르게 주의할 만한 사안은 없었습니다. 예, 예. 혹시 몰라 계속해서 검토 중입니다.”
허름해 보이는 외양의 봉고차. 하지만 그 안은 외양과는 전혀 다른 기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이의 목소리 또한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타타탁]
[다다탁]
전화를 하고 있는 사내와는 달리, 다른 서너 명의 인원들은 연신 키보드의 자판을 두드리며 헤드셋으로 무엇인가를 분주히 듣고 있었다.
“다소 걸리는 발언들이 약간씩 있었지만, 오히려 없었다면 이상했을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네, 네. 지금 목표대상은 회사가 아닌 본인 자택으로 이동하였고 다른 한쪽은 당초 주시 대상도 아니었고 별다른 지시가 없으셔, 아!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 팀은 계속해서 목표 대상을 주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내의 통화는 이내 오래지 않아 끝을 맺었다. 그리고 이어서 그런 사내의 입에서 짧은 몇 마디의 말이 흘러나왔다.
“가자. 베이스 2로.”
그렇게 사내가 탄 허름한 봉고차는 특유의 배기 음을 내며 강남 도로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변 차들에게 수많은 무시를 당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