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13 2019 =========================================================================
#413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가운과 촉촉이 젖어있는 머리카락. 그리고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 사람도 자신을 의아하게 보던 여성도 눈앞에 없었다. 그저 침대에 쓰러지듯 드러누워 눈물이며 콧물이며 죄다 쏟아내고 있는 자신만 있었을 뿐.
그동안 애써 억눌렀던 것들이 방금 전 순간을 기점으로 모두 소용없게 되어버렸다는 것을 유지연 그녀는 인정해야만 했다.
물론 그가 자신의 모질기 그지없는 말들로 인해, 체념한 듯 자신을 덤덤하게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무엇인가 상황이 이상해졌음을 유지연 그녀 또한 모르지 않았다.
그의 덤덤한 눈빛이 그리고 그가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까지 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생각뿐이었다. 다른 복잡한 생각들은 이미 존재감을 감춰버린 뒤였다. 오로지 그에 대한 생각만이 그녀의 머릿속을 온통 헤집고 다닐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져버렸다. 이미 주체할 수 없는 감정들이 다른 제약들을, 그녀가 애써 견고히 유지하려했던 것들을 모조리 부셔버렸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의 곁에 이미 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그의 곁에 있음을, 그것도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으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 조금은 진정이 된 듯한 감정 상태에 애써 허물어졌던 장벽들을 다시금 세워보려 했지만, 그의 빈자리가, 그동안 그를 대했던 차가운 행동들이 그녀를 끝없이 후회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쾅쾅쾅]
“유지연! 유지연!”
그녀가 어떻게 지나쳐왔는지 모를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
[쾅쾅쾅]
단 4개의 스위트룸만이 자리 잡은 최고층은 때 아닌 소란스러움을 맞이해야만 했다. 하루를 묵는 데만 천만 원 이상의 비용이 소모되는 만큼, 이날 저녁 해당 층의 스위트룸은 C실과 D실만이 주인을 맞이한 상태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쾅쾅쾅]
십여 차례 문을 두드린 끝에 열린 문, 그 공간에서 서로 눈을 마주친 이들의 표정은 극과 극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문을 두드리며 해당 층을 소란스럽게 만드는 이가 누구인지 모르지 않아, 마지못해 문을 열기 전까지 철저히 무시로 대응했던 이의 얼굴엔 복잡한 감정이.
“뭐, 뭐하는!”
문이 열리자마자 모습을 드러낸 이를 거칠게 껴안는 사내의 얼굴엔 그저 무엇인가에 대한 갈증이 가득했다.
“다, 당장! 읍!”
이내 이어진 사내의 행동에 유지연의 입에서 당장 꺼지라는 말이 나오려 했으나, 이는 본래의 형태를 갖추기도 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는 그녀의 이성 또한 날려버렸다.
문을 닫고 온전히 실내로 들어서자마자 사내의 행동은 더욱 거침없어졌고 서로의 입을 오가는 것들은 그녀가 애써 억눌러놓았던 것들을 철저히 부셔버렸다.
*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나는 낯선 침대에서 익숙한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오해야.”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내 품안에서 말없이 안겨있는 유지연을 보면서.
“오해라고.”
유지연이 말하는 것을 듣고 싶었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님을, 내가 느끼고 있는 체온과 감촉들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오해라라니까?”
하지만 유지연은 좀처럼 입을 열 생각이 없는 듯 했다.
불안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날 밀어낸다고? 또?
“왜 날 자꾸 밀어내는 건데. 너도 나 좋아하는 거 맞잖아.”
가슴팍에 고개를 묻은 채 얼굴을 숨기고 있는 그녀의 행동이 마치 지금 상황을 부정하는 것 같아, 서둘러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마주했다. 그녀의 두 눈동자를.
현관에서부터 이어진 키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함께했던 격렬한 몸놀림. 미처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눈은 미약하게나마 부어있었고 눈동자는 충혈되어 있었다.
테일러의 룸 현관문 앞에서 흘렸던 눈물이 끝이 아니었던 것일까. 아무튼 그런 모습조차도 아름다웠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그리고 그런 내 행동에 그녀 또한 응해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그녀는 이렇다 할 말을 꺼내지 않았다.
“유재연 때문에 그래? 10년도 더 됐어. 그리고 내가 찬 게 아니라, 걔가 찬 거라고. 날.”
자꾸만 날 애태우려는 듯 했다. 모든 부분에서 날 사랑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으면서 정작 입을 열지 않았다. 키스할 때는 잘도 열리는 그 입이.
“... 차고 싶어서 찬 게 아니라면?”
“뭐?”
그런 내 집요함에 그녀의 입이 결국 열렸다. 그런데 그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라는 게 전혀 이해되지 않을 말이었는지라 자연스레 반문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이 끝이라는 듯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다만, 입술을 깨물며 한없이 복잡한 눈동자를 내게 보였을 뿐.
“안 놓쳐. 이젠 못 벗어나. 유지연.”
어쨌든 그녀가 날 싫어하는 게 아님이 확실해졌다. 그리고 그동안의 행동들 모두가 유재연 또는 이에 상응하는 다른 이유들에서 비롯된 것임이 마찬가지로 확실해졌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는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만 있을 뿐이었다.
좋다. 그런 것 따위, 지금 당장 듣지 않아도 좋다.
그저 이제는 내게 먼저 입술을 마주해오는 그녀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나도 컸다. 그래서 그 대답 듣는 것쯤이야 충분히 미룰 의향이 있었다. 그녀만 내 옆에 있는 다면.
*
[우리 사귀자.]
사귀자는 말에 대한 답변을 직접 입으로 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품속에 얼굴을 묻고 있던 그녀가 미약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그 순간 내 가슴이 눈물과 콧물들로 적셔지고 있었다는 점은 대답보다 확실한 대답을 내게 선사해주었다.
“인사해. 여기는 테일러. 가장 친한 친구야.”
[인사해 테일러. 여기는... 너도 알다시피...]
아침 해가 밝아오고 어쩌다보니, 테일러 녀석과 유지연 두 사람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게 되었다.
[붙잡고 안 보내주려다가 보내준 거에요. 그러니까, 잘 해봐요. 헤어지면 뭐, 나만 좋은 거니까. 그래주면 고맙고.]
“하하... 테일러가 반갑다네. 천손 드라마 잘 봤고... 그러니까, 또... 어! 너 예쁘데.”
[지혁이 밤마다 날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르지? 지혁이 뒤로 하는 거 엄청 좋아하는데, 그것 까진 안 해봤겠지? 거기다 가슴으로 해주는 거 얼마나 좋아하는데? 푸훗, 뭐, 그쪽은 그것도 못해주겠지만.]
“피부가 너무 좋고 동안이라서 자기보다 동생인 줄 알았데...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는 데?”
[지혁을 제대로 감당할 수나 있을 지 모르겠네? 골반도 작아서. 푸훗. 하긴 작은 게 그것 뿐은 아니지? 그리고 그거 알아? 나 거기다 지혁 이름으로 타투까지 했다구?]
“뭐, 뭐? 뭐라고? 아! 크흠... 나중에 미국 오면 초대하고 싶다는데?”
[걱정 마. 앞으로 제모 안 할 거라서 꼭꼭 숨겨져 있을 테니까. 혹시 모르지. 누드집 찍을 때는 살짝 보일 수도?]
[콜록 콜록]
그런데 분위기가 뭔가 오묘했다.
아침부터 우릴 찾아온 테일러 녀석의 배고프다는 말에, 얼떨결에 식사를 함께하게 되긴 했지만, 역시 이렇게 함께하기엔 조금 일렀던 것일까?
덕분에 나로서는 아침부터 진땀 꽤나 빼게 생겼다.
도대체 테일러 녀석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건지.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지만, 이렇게나 노골적으로 불만 아닌 불만을 털어놓을 줄 꿈에도 몰랐는지라 유지연의 눈치를 절로 보게 되었다.
유지연이 영어를 못해서 다행이지, 하아... 타투라니, 저 녀석도 진짜.
[이제 슬슬 콘서트 준비도 해야 되고 그래서 녹음할 때 빼곤 보기 힘들겠네.]
[응? 그거 해도 저녁쯤은 같이 할 수 있잖아? 혹시 내가 조금 불편해서...]
[깔깔깔! 뭔 소리야.]
[응?]
[남자 친구 오기로 했어.]
[아...]
[누구께서 잡아주지 않으셔서 말이지. 전부터 자꾸 해외 투어 하는 데 오고 싶다고 했는데, 이번에 한국에 오라고 했어. 옆이 워낙 외로워서.]
그렇게 테일러 녀석과의 좌충우돌 아침 식사는 녀석이 내게 프랑스식 인사를 건넨 뒤, 방으로 들어간 것을 기점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시금 유지연과 단둘이 함께 할 수 있었다.
“오늘 스케줄 있어?”
“응.”
여전히 그녀의 입은 단 답만을 건넬 뿐이었다. 하지만 목소리 톤 자체가 달랐다. 예전의 그녀가 차가운 톤으로 나를 밀어내려했다면, 지금의 단 답은 약간은 순종적인, 왠지 모를 부끄러움이 담겨져 있었으니까.
“몇 시까지 가야하는데?”
“1시...”
그런 그녀의 모습들이 낯설었다. 하지만 좋았다. 그런 낯선 모습들이 나로 인해 비롯되었음을, 이제는 마냥 차가운 눈빛만을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내게 충만한 무엇인가를 가져다주었다.
“좋네. 꿈인 것처럼.”
꿈꿔왔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꿈이길 바라지 않았다.
“이렇게 올 거면서 왜 그렇게 속을 썩여?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하아... 미, 미안...”
괜스레 이 행복을 지금에서야 누리게 만든, 지금까지 날 미치게 만들었던 유지연이 원망스러워 그녀의 은밀한 곳을 살짝 꼬집었다.
“너도 너 나름대로 힘들었겠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됐어. 지금 말 안 해줘도 돼. 지금은 그냥 내 옆에 있으면 돼.”
그저 좋았다. 이런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연약해 보이는 모습도. 이런 모습을 이제 나만이 볼 수 있다는 것도.
어느새 내게 입술을 마주대오는 그녀의 적극적인 움직임에 다시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닌지를 의심하게 되었다. 지금껏 볼 수 없었던 그녀의 적극적인 행동은 이내 보다 은밀한 부분들에게까지 미쳤으니까. 그렇게 또다시 우리는 숨겨놓았던 불씨를 다시금 겉으로 드러내려 했다.
“그런데 괜찮아?”
그런데 그때였다. 능숙하게 내 옷을 벗기던 그녀의 움직임이 속도를 늦춘 것이. 그리고 내 얼굴을 끌어당겨 그녀 자신의 코앞으로 다가오게끔 만든 것이.
“응? 뭐가.”
“내가... 가슴으로 못 해도?”
“아쉽긴 하지. 근데 어쩌겠어. 안 되는 건 안 되는... 뭐?”
“됐어.”
그녀의 차가운 눈빛이 존재를 드러내며 내게 다가왔다. 마치 자신의 존재감을 잊지 말라는 듯이.
아니, 어떻게...
테일러와의 대화에서 흘러나왔던 부분을 유지연이 알고 있다는 점이 알려주는 것은 분명했다.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