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마음을 노래로-412화 (412/502)

00412  2019  =========================================================================

#412

“여기가 바로 그 공사 현장인가요?”

“예, 각하. 이곳이 바로...... 보시고 계신 전방 지역 대부분이 공사부지로 책정되어 있습니다.”

보좌관 및 경호관들 수십 명을 대동한 이의 얼굴엔 불쾌감이 가득했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지역, 추운 날씨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앞에 있어야할 이들의 부재가 그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미리 각하께서 방문하신다고 알렸습니다만... 아직 착공 전이기도 하거니와... 죄송합니다. 각하.”

이에 따라 그녀의 주변 사람들이 안절부절못하게 된 것은 당연했다. 해외가 아닌 이상 좀처럼 청와대 자택에서 나오지 않는 그녀였다. 따라서 이곳까지 오는 30분 정도의 시간이 무척이나 귀한 발걸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착공이 며칠 후부터 시작된다면 그때 오는 게 나은 선택 아니었나요? 비서실장이라는 사람이 그거 하나 체크를 못하면 어떡하자는 겁니까?”

‘빌어먹을...’

이곳에 직접 오겠다는 말을 꺼낸 것은 비서실장인 자신이 아니었다. 따라서 사내의 얼굴이 일순간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찰칵 찰칵]

연신 터지는 플래시 소리에 자신이 누구 앞에 있는지 그리고 그런 자신들을 카메라 수십 대가 열심히 찍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터라, 사내는 방금 전 불쾌감을 떨쳐버릴 수밖에 없었다.

“공사 전 부지를 직접 살피시는 부분과 더불어 착공식에까지 참석하신다면 각하의 뜻을 백성들이 더욱 잘 알게 될 겁니다. 그러니... 지금 기자들이 각하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표정관리를 하시는 게...”

이내 사내는 너무나도 익숙한 방법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비록 비서실장답지 않은 빈약한 권한만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대통령의 최측근이어야 할 자신이 그 자리를 다른 이에게 내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지라도, 언론에 비춰져야 할 모습까지 그래서는 안 될 테니까.

“부지가 아주 좋군요. 학생들의 꿈이, 나라의 미래가 한층 밝아지는 것 같네요.”

“그렇습니다. 대통령님께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신 덕에 청년들을 위한 기반시설이...... 이제 각하께서 주도적으로 추진하신 한류 문화 진흥 정책의 산물이라고 보실 수 있는 고양시 한류월드로 이동하시......”

그렇게 자신들을 쉴 새 없이 담고 있는 카메라들을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와 표정들을 능숙하게 최적화시켜나갔다. 그것이 누군가의 즉흥적인 행동을 불러올 줄은 생각지도 못한 채.

*

[누구야? 아는 사람?]

멍하니 창문 밖 한류월드 야경을 바라보고 있는 내게 테일러 녀석이 다가왔다.

[흠...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나도 묘하게 낯이 익고. 뭘까나? 뭐길래, 천하의 강지혁이 이렇게 넋을 잃고 있어?]

어느새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 잔뜩 테이블 위에 차려져 있었고 촉촉하게 젖어있던 테일러의 머리카락 또한 말라있었다. 시간이 언제 또 이렇게 흘렀는지.

[아는 사람 맞아. 저번에 같이 드라마 찍었던 상대 배우.]

[응? 상대 배우? 음... 아! 그럼 천손? 그건 가? 아! 그래서 내가 낯이 익었구나! 그런데 그 여자 표정도 그렇고 너도 좀... 이상해진 게. 둘 사이에 뭐라도 있는 거야?]

말을 할까. 말까.

제 아무리 속내를 터놓는 사이일지라도 조금은 고민이 됐다. 좋아한다고 잔뜩 들이댔다가 비참한 결과만 감내해야했을 뿐이라는 말 자체가 내 자존심을 미묘하게 건드렸으니까.

하지만 그런 망설임 따위, 이미 상관없을 정도로 녀석의 표정은 의미심장했다. 하긴 그때 내 모습 아니, 지금 이 모습만 봐도 모르는 게 바보지. 바보.

[내가 내 속내를 완전히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너랑 그 사람이었어.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것 상관없이 보고 싶더라고. 그게 좋아한다는 걸 자각하고 나니까, 한꺼번에 불타오르고 뭐... 아무튼 그런 관계야. 남보다 못한 관계.]

덤덤하게 유지연과 나와의 관계를 테일러에게 말해주었다. 어차피 방금 전 말마따나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되어버렸을 진데, 이렇게 넋 놓고 있는 것도 우습다 여겨졌으니까.

그런데 그런 내 말을 듣고 난 테일러 녀석의 이어진 내 행동이 나를 당황시켜버렸다.

입느니만 못한 가운일지라도, 이를 입고 있는 것과 벗어버린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였다. 이내 새하얀 나신이 되어버린 테일러가 내 무릎위에 앉는 순간 나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그럼 나는 어떤데?]

[어?]

매혹적인 눈빛과 자꾸만 나를 자극하는 그녀의 몸짓.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이내 들려온 그녀의 질문에 묻혀버렸다.

[나 스캔들 난 거, 알고 있지? 그 스캔들 났을 때 기분은 어땠는데?]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테일러 녀석의 질문 아닌 질문에 순간 머리가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리고 이내 그 차가워진 머리로 녀석을 들어 옆에 있는 흔들의자로 옮겨주었다.

테일러 녀석이 외국의 유명 배우와 스캔들이 났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이를 녀석의 면전에다대고 꺼내놓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럴만한 생각도 없거니와 그럴 권한조차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녀석과 나의 관계가 애당초 그랬다.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이지만, 단순 친구라고 하기엔 애매한, 그렇다고 해서 연인이라고 하기엔 또 부족한 사이.

따라서 녀석이 이어 내게 건넨 말은 우리 사이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나쁜 놈.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에 너 만났을 때... 그때 확 도장 찍어버릴 걸 그랬네?]

[테일러?]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답을 찾지 못한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고작해야 녀석의 이름뿐이었다.

[사귀는 사이에 연연안하는 거. 그냥 네가 좋고 네 품속이 좋다는 거 지금도 변하진 않았어. 넌 음악적으로나 친구로서나 그리고 한 명의 남자로서나 너무 완벽하고 멋진 사람이니까.]

사귈 생각이 있었다면 진즉 사귀었을 것이다. 친구라고 하기엔 녀석과 함께 나눴던 밤이 무척이나 짙고 깊었으니까.

하지만 끝내 우리 둘의 관계가 그런 결과를 자아내지 못한 것은, 녀석과의 섹스마저도 일종의 대화처럼 여겼던 내 자신과 녀석 또한 굳이 이에 연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약 같아. 너.]

[뭐?]

그래서 당황스러웠다. 이런 말을 내게 건네는 테일러와 녀석의 얼굴 표정 그리고 행동들 모두가.

[수면제 없이 푹 잘 수 있게 해주고 그리고 다정하고. 음악적으로야 워낙 빛나고. 그런데 그게 너무 마약 같아. 그래서 네가 없는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졌어. 너를 몰랐던 그때보다 훨씬 외로워질 정도로.]

[테일러? 그게 무슨? 너 설마 다시 수면제...]

[그 정도야. 그 정도로 힘들더라고. 무슨 금단증상이라도 일어나는 것처럼.]

내게 있어 테일러는 무척이나 소중한 사람이다. 미국 진출 당시 곁에서 날 도와줬던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뮤지션으로서 나와 무척이나 잘 맞는 소중한 동료였으며 지금에 와서는 내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래서 녀석이 나 때문에 힘들어했다는 사실에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마약이니, 금단증상이니 같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들만이 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런데 웃긴 게 뭔지 알아? 나도 바쁘고 너도 바빠. 서로가 함께 있기엔 너무. 그래서 같이 있으려면 누군가는 자신의 큰 부분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해. 그런데 난 그게 안 되더라고. 네가 너무 보고 싶고, 네 품속이 너무 그리운데 말이야.]

[테, 테일러...]

[너가 내 곁에 없는 일 년 열두 달 중 열 한 달가량은 미치는 줄 알았어. 그래서 투어 활동도 열심히 하고 봉사 활동도 나름 열심히 다녔어. 내가 널 위해 이것들을 포기할 수 있을까도 고민해봤었고.]

어느새 나신인 상태 그대로 다가와 다시금 내 무릎위에 앉은 테일러의 행동에 말문이 턱하니 막혀버렸다. 이건 누가 봐도 장난인 수준을 넘어섰기에 텅 비어있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와 관련된 수십, 수백 가지의 생각들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사실 너한테 물어보려고 왔어. 아시아 투어니 뭐니 그런 건 부차적인 거고. 그런데 물어볼 필요가 없을 것 같네. 역시.]

하지만 녀석은 그런 나의 대답과는 상관없이 이미 답을 얻은 듯 했다. 그리고 그런 녀석을 보며 나는 아무런 변명도 반박도 하지 않았다.

[열애설... 사실이야.]

문득 두려워졌다. 최근에 보도된 열애설이 사실이라고 말하는 테일러 녀석의 말에 대한 어떤 감정들보다는 그저 두려웠다.

이미 유지연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버렸으니, 마음을 속 시원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테일러뿐인데, 테일러를 붙잡아야 되지 않을까?

사랑하진 않지만, 친구 테일러를 놓치고 싶지 않기에 테일러를 사랑해야 되는 것일까?

그 누구라도 환장할 만한 환상적인 몸매를 가진데다가 돈도 많고 뮤지션으로서의 역량 또한 뛰어난 테일러를 그냥 붙잡으면 될 텐데, 왜 망설이고 있지?

길쭉한 다리, 환상적인 골반라인 그리고 풍성한 볼륨감. 이 모든 게 널 미치게 만들기에 충분하고 지금도 물건은 그녀를 자극하고 있는 데, 이런 그녀를 포기할 수 있겠어? 이미 네게 모든 것들이 길들여져 있는 그녀를? 그 어떤 욕구도 해결해줄 수 있는 그녀를?

보다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의문들이 머리를 사정없이 때려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말을 그녀에게 건네지 못했다.

[그 사람이 데이트 신청을 하더라고. 다른 발정난 놈들이랑은 확실히 달랐어. 뭐, 너랑 비슷한 면이 많은 사람이야. 엄청 유명한 배우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유명한 편이고 앞으로가 기대되는 사람이야. 그 사람... 연기하는 모습 보면 네가 노래 부를 때처럼 빛나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항상 내 곁에 있어줄 수 있다 하더라고.]

하아. 어째서 유지연에게만 사랑, 질투 심지어 집착이라는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테일러와의 섹스는 반가움의 인사, 쌓여있던 욕구의 해소를 한다는 의미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저 그렇게만 여겨졌을 뿐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지도 이를 넘어선 감정을 가져오지도 않았다.

[네가 날 붙잡는다면... 아쉽지만 깔끔히 정리해보려 했는데, 실패네? 치... 그래도 정규 5집 앨범에 내가 참여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고. 너한테서 이런 거 전부 시원하게 털어놓을 수 있어서도 좋았어. 그리고 무엇보다... 네 대답을 확실하게 들을 수 있어서 좋았고. 아니 마지막은 사실 딱히 좋은 것 같진 않아. 솔직히 그냥 이상해. 그것도 많이.]

촉촉하게 젖어있는 녀석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

내가 널 저렇게 바라보고 있구나.

녀석의 젖어있는 눈동자 속에서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고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속내와 달리, 너무나도 덤덤했고 또한 굳어있었다. 끝내 눈물을 흘리는 테일러의 얼굴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다른 애들처럼 애인이 있어도 또 다른 누구랑 사랑을 나누는 게 어색하진 않을 것 같아. 그런데 네가 그 또 다른 누구라서, 네가 내 첫 남자라서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이게 맞는 거지? 그런데 말이야... 우리 친구로 지낼 수 있는 거지? 내가 이런 말 해서... 나 피하는 거 아니지?]

도대체 무슨 말을 내가 들어왔고 방금 전 내가 들은 말은 또 무엇인지. 하지만 정말 너무나도 이기적이게도 녀석의 마지막 말이 나의 일깨웠다. 그런 더럽고 추악한 나의 마음에 토악질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도리어 내게 계속해서 친구로 지낼 수 있는 지를 물어보는 녀석의 말이 내게 크나큰 위안이 되어주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하아. 너 진짜 쓰레기구나. 쓰레기.

내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고 녀석은 이를 부정적인 대답으로 알아들은 듯 했다. 어느새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뜨거운 눈물을 흘려대는 녀석에게 서둘러 그런 뜻이 아님을 말해주었지만, 녀석은 한동안 그런 상태로 내 품을 떠나질 않았다.

[그래도 조금 섭섭하긴 하네. 진짜로 나 스캔들 났을 때 아무런 동요도 없었단 말이야? 이번에는 루머성 기사가 아니라 사진도 그렇고 꽤 그럴 듯 해보였는데도? 난 이번에 네가 나 보자마자 열애설 물어볼 거라 생각했었는데! 와! 이제 보니 조금 섭섭할 게 아닌데?]

다시금 내게 얼굴을 내보인 테일러의 행동은 상당히 어색했다. 본인 특유의 장난 끼 섞인 어투와 더불어, 내 옆구리를 꼬집는 행동까지 모두 다소 과장되었고 무엇보다 녀석의 눈동자는 여전히 빨개져 있었으니까.

[뭐야, 이렇게 꼭 안아준다고 섭섭함이 풀어지진 않는 다구? 그리고 나! 남자친구 있는 몸이라고! 이거 왜 이러셔?]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것뿐이라 미안했다. 너무 이기적이라 더 미안했다.

그런데 녀석은 그런 나를 더욱더 미안하게 만들 작정인 듯 했다.

[그 여자한테 가 봐.]

[뭐?]

갑작스런 녀석의 말, 그것도 너무나도 의외의 말에 안고 있던 녀석의 몸을 떨어뜨려놓았다.

[그 여자한테 가 보라고. 바보야.]

그런 나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마치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버렸다는 내 말은 귓등에도 안 들은 것인지, 게다가 그 여자를 찾아갈 이유도 어디 있는 지도 모를 진데 저런 말이 왜 나온 것일까.

[널 싫어하는 여자가, 나랑 널 보고 그런 눈빛을 보내? 그게 말이 돼? 눈물까지 흘리던데?]

[그럼...]

[아까 보니까, 바로 반대편 룸에 들어간 것 같던데. 얼른 가 봐. 가서 오해 풀고 아니 오해는 풀지 마. 왠지 억울하니까.]

하지만 그 모든 의아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움직였다. 내 자신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녀석의 말이 100% 맞다는 확신조차 없었음에도 그냥 그러했다.

[파이팅!]

그런 나의 뒤에서 테일러가 응원한다는 듯 두 손을 꼭 쥐며 내게 흔들었지만, 그마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옷매무새를 간단히 점검한 뒤, 문을 나섰다. 실낱같은 희망, 확신 없는 추측에도 흔들릴 정도로 정신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내 상태에 내가 끝내 방금 전 테일러를 붙잡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알 수는 있었다.

아까부터 애써 외면하고 억눌렀던 것을.

[하여튼 바보라니까. 가란다고 가냐? 진짜 바보, 멍청이. 하아. 분해... 후우... 원래부터 저런 놈이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좋아한 거고.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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