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11 2019 =========================================================================
#411
[이거 내가 할래.]
노래를 들어 본 녀석의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바로 이와 같았다.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뭔 소리야. 이 노래 영어 아니라고?]
혹시나 잘 못 들었나 싶어서 녀석에게 다시금 주지시켰다. 이 노래를 영어 노래가 아닌 한국어 노래라고. 뭐, 영어 말이 꽤나 많이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상관없어. 이 곡 무조건 내가 하고 싶어. 후크 부분.]
그런데 녀석은 그런 내 말을 듣고서도 고집을 꺾지 않으려는 듯 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이 노래 무조건 내가 해야 해. 날 위한 곡이야.]
[뭐?]
그리고 이는 다음날 아침이 될 때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진짜 사기야. 사기. 하아... 이래서 자꾸 미련이...]
[응?]
[하여튼 마약 같아. 진짜. 너란 사람.]
[뭐래.]
이놈의 똥고집을 어떻게 해야 할지. 해당 노래의 후크 부분을 자신이 꼭 해야 한다는 말과 더불어 이해 안 될 중얼거림까지 덧붙인 테일러의 행동에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내 목소리랑 어울리지 않은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물론 방금 전 녀석의 말마따나, 이 노래와 녀석의 목소리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좀 더 파워풀한 목소리를 원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테일러 노우웰이라는 걸출한 보컬을 외면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테일러일지라도 이 노래가 한국어 노래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머뭇거림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하안쿡어도 이종도며언 음... 갠찬고.”
“뭐, 그 정도면 괜찮... 응? 어? 너!”
순간 귀를 의심하게 되었다.
[깔깔깔깔]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이 웃긴지 테일러는 녀석 특유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보였다.
[그럼 문제없지? 나 이곡 할래! 할래! 녹음은 언제 할까?]
[너 언제 한국어...?]
도대체 언제 한국어를 배운 것일까. 물론 종종 한국어를 배울 거라며 내게 호언장담을 하긴 했었지만, 실제로 이를 행동에 옮길 줄은 꿈에도 몰랐는지라 말문이 턱하니 막혀 버렸다.
[너도 영어 하면서 왜 그렇게 놀라? 나 이래봬도 머리 완전 좋았다고? 공부도 잘했었고. 게다가 이거 뭐 한국어 가사 몇 줄 외우는 게 전부인데 뭐가 문제야? 아니, 좋아해야 되는 거 아니야? 내가 직접 후크 부분 불러준다는 데!]
정작 녀석은 그런 내 모습이 웃긴 것인지, 아니면 해당 곡을 부르는 것에 대한 장애물이 사라져 기쁜 것인지 연신 신이 나 있었지만 말이다.
에라 모르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것도 한국말 할 줄 아는 테일러가 도와준다는 데, 여기서 더 빼면 병신인거지. 암, 그렇고말고.
*
“Goyang.”
이미 내가 허락할 것을 알았던 것일까. 첫 번째 후크 파트의 첫 번째 단어 ‘고양’이 녀석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나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고야 말았다.
내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들 그대로에 녀석 특유의 음색이 더해지자, 속된 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이해영 고양시장의 부탁으로 만들었던 고양 시 홍보 음악이 이번 내 앨범의 타이틀곡이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 정도로 말이다.
“네가 모탈 거언 단 하나도 업써. 모두의 꾸미 하나로우 이뤄지는 고옷. 이고시 너의 New York, 이고시 네 꾸므 시작, 종차악지. Fantastic Goyang will make you feel dream. Let's hear it for the dreamer. Let's hear it for the Goyang.”
물론 한국말 가사가 조금 어색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못 들어줄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Goyang. Goyang. Goyang.”
오늘 이 자리가 녹음을 하기 위해서가 아닌, 노래의 감을 익히기 위해서 마련된 자리인 만큼 이는 큰 흠이 되질 않았고 무엇보다 중독성 있는 후렴구가 매력적인 녀석의 목소리와 너무나도 어울려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이젠 이 곡을 부를 다른 가수가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어때? 어젯밤에 나름 연습하긴 했는데.]
후크 파트 1을 부르고 난 뒤,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얼굴에는 불만스러움이 잔뜩 담겨 있었다. 녀석 또한 모르지 않았던 것이다. 영어로 노래를 부를 때와, 미숙한 한국어로 노래를 부를 때의 차이점은 매우 크다는 것을. 뭐, 언어가 다른 만큼 감정 몰입부터가 확실히 어려웠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녀석에게 내가 건네줄 수 있는 답은 단 하나 뿐이었다.
[최고.]
[응? 진짜?]
그런 내 대답이 꽤나 의외여서일까. 녀석의 안 그래도 큰 두 눈이 더욱 커졌다.
[이 노래 후크 부분이랑 네 목소리랑 너무 잘 어울려.]
[그치만... 한국어가... 감정 몰입도 잘 안 되고...]
[오늘 녹음할 것도 아닌데 뭘 그래?]
[응?]
[콘서트 끝나고 한국에서 쉬면서 차츰, 차츰 연습하면서 녹음해보자. 가사도 얼마 안 길고 너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야. 무엇보다 넌 테일러 노우웰이니까. 안 그래?]
그런 녀석에게 내가 건넨 방금 전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녀석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 그런 것도 없진 않지만, 빌보드 차트를 심심하면 점령하고 최고의 팝스타로서 전 세계 팬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테일러 노우웰이라면 이 정도 관문쯤이야 어렵지 않게 극복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양, 고양, 고양~]
그런 내 말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어서일까.
확실히 녀석의 기분은 좋아보였다. 호텔에서 같이 저녁을 먹기로 하여 내 차로 이동하는 와중에도 테일러의 입에서는 ‘고양’이라는 가사 말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그것도 너무나도 즐거운 표정으로.
[래퍼들이 흑인 할렘에서 살다가 성공해서 지금은 뉴욕 어디어디에서 살고 있다. 뭐, 이런 희망 반, 자랑 반노래 있잖아? 그런 흔해빠진 스토리의 한국판 버전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뭔가 달라.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좀 더 희망을 노래하고 있는 것 같다 랄까?]
[아무튼 노래가 너무나 좋아! 이 노래 공개되면 아주 난리 날 걸? 이 테일러 노우웰이 장담하건대 이 노래 바로 빌보드... 아 참! 그나저나 랩은 또 어느새 그렇게 잘하게 된 거야? 반년 전에도 나한테 자꾸 비밀로 하고 랩 안 들려줘서 혹시 잘 안됐을까 걱정했는데! 완전 쓸데없는 걱정이었어.]
[한국어 랩이라 호불호가 갈렸을 거야. 근데 멜로디가 너무 좋아. 그래서 사람들이 가사를 몰라도 자꾸 흥얼거리게 될 걸? 나 봐, 자꾸 고양, 고양, 고양 거리잖아. 난 처음에 이게 한국말 배울 때 외웠던 고양이 인 줄 알았다니까?]
나 또한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홍보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노래이다 보니, 아무래도 중독성 있는 후크를 처음 곡을 만들 때부터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는데, 녀석의 이런 반응들을 보아하니 자신감이 절로 생겨났으니까.
*
[나 샤워 좀 할게. 뭐라도 미리 시켜둬.]
사람들 보는 눈도 있고 해서 바깥이 아닌, 호텔 방 안에서 룸서비스를 시켜먹기로 했다. 사실 내가 이곳에서 룸서비스를 시키는 게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었다, 같은 호텔 방에 젊은 남녀가 룸서비스를 시켜먹는다는 것 자체가 주변 사람들에게 상당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충분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동물원 원숭이 신세가 아닌 상태에서 저녁을 먹고 싶다는 테일러의 말을 존중했기에 결과적으로 룸서비스를 내가 시키게 되었다. 뭐, 하루 묵는 데만 천만 원이 넘는 비용이 드는 스위트룸을 전담하고 있는 직원들 자체가 이런 쪽으로 특별한 교육을 받을 테니, 이를 믿어보는 수밖에.
그런데 그게 실수였다.
생각보다 이르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의아해하며 문을 연 순간, 내가 맞이한 이는 직원이 아닌 다른 이였으니까.
설상가상으로,
[뭐야? 벌써 왔어? 나 아직 머리 안 말렸는데?]
테일러 자식이 얇디얇은 목욕가운만 헐렁하게 입은 채 현관으로 달려왔으니 오죽할까.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전혀 만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과 마주하게 돼서. 그리고 그 인물이 전혀 낯선 이가 아니라는 점에서.
*
누군가의 앞에서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드러누워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숙면에 취하기 직전의 노곤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이의 손길이 그녀의 어깨, 등, 허리, 다리뿐만 아니라 허벅지 안쪽, 겨드랑이, 가슴과 같이 은밀한 곳에까지 미쳤음에도 말이다.
“흐윽...”
“몸이 전체적으로 많이 뭉치셨어요. 일단 아로마 오일로......”
새벽까지 촬영을 하다가 와서일까.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피곤함에 짜증이 치솟았던 그녀였지만 이내 마사지가 시작되자마자 그녀의 모든 감정은 기분 좋은 노곤함으로 치환되었다. 그 정도로 전신 마사지가 주는 시원함은 그녀의 상상 그 이상이었던 것이다.
“몸매가 너무 예쁘세요. 남자친구분이 엄청 좋아하시겠네요.”
“그럴 남자친구가 없어서요.”
하지만 전신 마사지가 주는 노곤함에 취하는 것도 잠시, 방금 전 대화로 인해 자신의 몸을 주무르는 여직원의 손길이 굳어졌음을 느껴서일까. 엎드려있던 유지연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 죄송합니다. 손님.”
VIP 전용 직원으로서 해서는 안 될, 손님의 사생활과 관련된 말을 건넸다는 점은 별개로 두고서라도 기분 좋은 손길에 편안하게 잠에 빠지려던 찰나여서 분위기를 깨는 직원의 말이 그녀에게는 더욱 아쉽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내 유지연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녀의 얼굴과는 상반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니에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굳이 이 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의도치 않게 얻은 휴식이지만, 대표님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어 오게 된 이곳 호텔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휴식이 그녀에게 전혀 필요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여직원의 손길이 굳어지기 전, 그녀를 숙면에 빠지게끔 만들었던 노곤함이 그리웠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녀의 의도대로 여직원은 다시금 본연의 마사지 실력을 뽐냈다. 그리고 그런 여직원의 솜씨에 힘입어, 마사지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갈 때쯤의 그녀는 기분 좋은 노곤함에 흠뻑 빠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푹신한 침대에 드러누워 숙면에 취하고 싶을 만큼.
그런데 그게 이런 결과를 자아내고 말았다.
유지연 그녀의 방 스위트 D실. 그런 그녀의 건너편 방 스위트 C실.
피로감, 노곤함 등이 빚어낸 순간의 착각이 그녀의 두 눈으로 하여금 지금 이 광경을 보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광경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뭐야? 벌써 왔어? 나 아직 머리 안 말렸는데?]
가슴골이 노골적으로 드러날 정도로 대충 차려입은 가운. 너무 얇아서 몸매 라인 그리고 심지어 유두까지 보일 정도로 노출이 심한 목욕 가운.
그런 가운을 입고 있는 이의 앞에 그녀가 가장 간과할 수 없는 이가 서있다는 점에서 유지연의 두 눈이 쉴 새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지닌 이미지의 가장 근본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차가운 눈빛은 이미 그 능력을 잃어버린 듯 명백히 당황한 기색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절로 노곤함과 피로감이 사라져버렸다. 주먹을 꽉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으며 그녀는 어느새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빛은 차가움을 회복했으며 그 차가움은 눈앞에 있는 이를 오롯이 향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강력한 눈빛도 이내 그 힘을 잃고 말았다.
“무슨 일이시죠.”
음의 높낮이도 없는, 너무나도 덤덤한 사내의 말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눈빛은 그녀의 정체모를 감정들을 억눌러버렸고 기존에 감춰두고 있던 감정들을 다시금 불러 모았으니까. 애써 참고 또 참아야만 했던 감정들을 용솟음치게끔 만들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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