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마음을 노래로-409화 (409/502)

00409  2019  =========================================================================

#409

“어머! 지혁씨 왔네! 지혁씨 몸 괜찮아요? 기사 봤어요. 그날 감기 걸렸다면서요?”

“아, 예... 지금은 괜찮아졌어요. 그냥 단순히 감기 잠깐 걸린 거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단지... 래시가드 화보인데 몸 관리를 통 못해서...”

“에이, 지혁씨 지금 몸이면 여자들 다 넘어가요. 넘어가. 걱정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더 쉬어요. 병에서 나은지 얼마 안 됐으니까, 무리하지 말고요.”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내렸는지라, 야외 촬영을 잠시 미루게 되었다. 아무래도 래시가드 화보이다 보니, 화창한 날씨 또한 무척이나 중요했기 때문이다.

“야! 그날 너 몸 안 좋아서 그냥 간 거였냐? 난 또. 그나저나 몸은 괜찮냐?”

제작진 측에서 준비한 숙소에 짐을 풀고 있던 중, 예고 없이 방을 찾아온 녀석이 걱정 아닌 걱정을 드러낼 정도로 언론의 보도가 대단했던가.

단순 감기로 입원을 하지 않아도 되었건만, 삼촌들의 성화에 건강검진 겸 휴식 목적으로 입원을 했던 게 이런 결과를 낳은 듯 했다.

“넌 어째 얼굴이 홀쭉해졌냐? 뭐, 힘든 일 있었냐?”

“어, 어? 그게... 하하! 뭐, 운동을 좀 열심히 하느라. 하하!”

자식아. 거울로 네 얼굴 좀 보고 다녀라. 사람들이 내가 아픈 걸로 알겠냐, 아니면 네가 아픈 걸로 알겠냐? 아주 진이란 진은 다 빠진 놈처럼 홀쭉해져서는. 어휴, 말해 뭐하겠냐. 후우.

“서린은?”

“이제 곧 올 거야. 5분? 10분? 그 정도 남았다니까. 흐흐. 서린이 보고 싶네.”

“나쁜 남자 양성준은 어디 갔냐? 솔로 염장 지르는 게 아주 시도 때도 없다?”

“인마! 서린이가 보통 여자냐? 그리고 내가 무슨 나쁜 남자냐? 내가 여자 사귀었던 거 박주현 빼고는 알지도 못한 놈이. 게다가 난 걔가 처음에 그렇게 연연하는 줄 몰랐,”

“예, 예. 아주 달콤한 연애 잘 하시고요. 그러니까, 내 방에서 좀 사라지실래요?

나쁜 남자인 척은 혼자서 다하더니, 서린 얘기만 나오면 헤벌레해져 침까지 흘릴 기세인 녀석을 외면한 채 마저 짐을 풀었다. 자식아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사람이 그렇게 갑자기 바뀌면 죽어, 죽는다고 인마.

더 이상 녀석과 서린 생각을 하다가는, 그날 보았던 친구 녀석 여자 친구의 은밀한 모습까지 떠올릴 것 같았는지라 다른 집중할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거참 이것도 곤욕이다. 곤욕.

[쏴아아]

서린이 오자마자 녀석은 내 방에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사라지라고 할 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이럴 땐 또 빨라요. 빨라.

[쏴아아]

어쨌든 계속해서 내리는 비를 보아하니, 오늘 촬영은 쉽지 않을 듯 했다. 빽빽하게 들어선 검은 먹구름이 어떻게 보면 여름의 풍경을 적합하게 표현해주었으나, 사진작가가 원하는 그림은 장마가 아닐 테니 말이다.

“명탐정 K 첫 화 범인은 장현성 씨입니다! 모든 출연자 분들이 추리에 성공하지 못하셨으므로 범인 역을 훌륭히 소화하신 장현성 씨는......”

졸지에 예상에도 없는 휴식시간을 맞이했는지라, 마음이 편할 만도 하건만. 오히려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사실이 권태감을 안겨다주었다.

그렇게 케이블 TV로 내가 출연했던 프로그램들을 모니터링 하는 것도 서너 시간. 좀이 쑤시기도 하고 비 오는 날 제주 바닷가의 풍경이 좋기도 해 산책이라도 할 겸 방을 나섰다.

[쏴아아]

[철썩철썩]

검은 먹구름들이 잔뜩 깔려있는 하늘과는 달리 빗방울이 생각보다 굵지는 않았다. 하지만 비를 맞아 감기에 걸린 지 이틀밖에 되지 않은 주제에, 또다시 비를 맞으며 산책을 할 깜냥까지는 되지 않았는지라 펜션 현관에 걸린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아니 나서려했다.

막 펜션으로 들어서는 이가 아니었다면.

[덜커덕]

짜증이 났다. 세련된 외양과 어울리지 않게 삐꺼덕 거리는 문 때문이 아니었다. 담담하게, 아무렇지 않게 반응하려는 내 자신의 행동이 너무나도 인위적으로 느껴져 그러했다.

[쏴아아]

[찰싹찰싹]

잠시 눈이 마주친 그 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는 지.

순간 들려오는 파도소리 그리고 비 내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면 또다시 그녀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저기... 몸은,”

“어? 지연 선배님 오셨네요? 비 오는 데 오느라 고생하셨죠? 방 안내해드릴 테니까, 얼른 들어오세요.”

“네, 아, 네. 안녕하세요. 서린씨.”

때마침 부엌으로 향하던 서린이 유지연을 발견한 것인지, 현관으로 오는 듯 하자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비가 오는 데 매니저란 놈은 자기가 관리하는 스타 우산 하나 안 씌우고 뭘 하는 지. 저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저러는 건지. 자기에게 배정된 방을 알고는 있는 건지. 오늘 촬영은 못할 것 같다는 사진작가의 전달사안을 듣기는 한 건지.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다시금 복잡하게 만들었지만 이내 등장한 서린으로 인해 자연스레 안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내 자신이 해변을 거니는 내 발걸음에 씁쓸함을 더했다.

그래, 겨우 며칠인데 그 사이에 속까지 괜찮은 거면 어쩔 수 없는 거지. 그건 사람이 아닌 거지.

*

“좋아요! 좀 더 자연스럽게! 그렇지! 나이스!”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다음날 제주도 날씨는 화창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런 날씨에 힘입어 화보 촬영은 무척이나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어머! 지연씨도 그렇고 지혁씨도 어쩜 그렇게 몸매가 좋아요? 정말 선남선녀네. 자! 좋아요! 그대로! 서핑보드 들고 있는 상태에서 시선은 45도 각도로! 나이스!”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말을 걸거나 나누지 않았다. 시선 맞춤 또한 어제 현관에서의 마주침 그때를 제외하고는 화보 촬영에 의한 것이 전부였다.

속내가 어떻든 간에, 더 이상의 접근은 할 짓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갖은 애를 썼다. 겉으론 덤덤하게 그리고 아무런 감정도 내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오전 촬영만 하면 될 것 같네요!”

그날의 촬영이 끝나고 다음날 오전 화보 촬영이 끝날 때까지 그녀와는 단 한 마디의 대화도 눈 마주침도 없었다. 같은 펜션에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나는 그녀를 피했다.

그런 면에서 며칠 전에 감기로 몸이 아팠다는 사실은 꽤나 큰 도움이 되었다. 귀찮게 달라붙을 법한 성준 녀석이 서린이라는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점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커플 화보 촬영은 끝을 맺었다. 그리고 나는 서울로 되돌아왔다.

*

“하하하하하!”

“아, 뭐야! 진짜!”

포이보스 휴게실로 들어선 유민재의 귀에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평소 때라면 이런 웃음소리는 그다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TV 소리, 음악 소리, 웃음소리들이야말로 포이보스 휴게실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상징과도 같았으니까.

하지만 정승현을 선두로 차례차례 음반 발매를 앞두고 있는 요즘 때에 이 같은 소리들은 확실히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젊은 층의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는 뮤지션답게 음반 발매를 앞두고 있을 때면 나름 진중한 모습으로 이에 임하고 또한 주위에서 도와주는 것이 포이보스 오남매들의 암묵적인 룰이었기 때문이다.

막 포이보스에 들어왔을 때라면, 그때라면 유민재 또한 이런 분위기를 보며 한소리 했을 지도 모른다. 포이보스 뮤직에 소속된 뮤지션으로서 본인의 음악을 할 수 있게 전적으로 지원을 받는 만큼 최소한의 의무라고 여겨지는 것이 음반 발매였고 따라서 이는 무척이나 중요하고 진중하게 다뤄져야 할 작업이었으니까.

“삼촌 음반 작업 다 마쳤어요. 방금 전에. 하아... 하얗게 불태웠다.”

“뭐? 벌써?”

그런데 이런 분위기의 원인이 전혀 다른 부분이었다는 점에서 이 같은 생각은 순식간에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일단 음반 작업을 모두 끝마쳤다는, 그리고 지금의 왁자지껄함이 음반작업을 끝낸 직후의 노곤함과 피곤함을 풀기 위한, 당연한 과정의 일부분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언짢음이 서 있을 자리 자체를 빼앗겨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예상보다 빨리 끝난 음반 작업에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이유는 명백히 존재했다.

“지혁이 형이 전부 다 맡아줬어요.”

“뭐? 지혁이가?”

“저 죽다 살았다고요. 삼촌. 삼촌도 아시잖아요. 지혁 형이 디렉팅 해주는 거 얼마나 빡센지.”

자신이 담당하기로 했던 제법 고된 일을 누군가가 대신 해줬다는 점, 그 누군가가 자신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감각적인 면이나 대중성 측면에서 보다 훌륭한 솜씨를 지닌 지혁이라는 점을 유민재는 쉽게 넘길 수가 없었다.

“아직 5곡정도 남아있는 걸로 아는 데 그걸 다 했다고? 일주일 사이에?”

“그거랑 크리스 작업도 형이 해주기로 해서 지금 녹음실에 있어요. 수아 누나는 피쳐링 때문에 같이 들어가 있고요.”

“뭐?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고?”

음반 작업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5곡을 녹음하는 데 채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엄청난 강행군.

포이보스 소속 뮤지션이라는 점이 가져다주는 인지도와 유명세답게 대중들이 그들에게 가지는 기대감은 상상을 초월했기에 평소 그들 작업 기간을 5분지 1가량 줄여버린 성과에 유민재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더욱이 그 작업을 끝내자마자 크리스의 작업까지 자신이 모두 도맡을 기세로 작업을 이어갔으니 오죽할까.

“삼촌 지혁 형 한남동 집 가봤어요? 흐흐... 어? 그러면 지금 휴게실에 있는 사람들 중에 지혁 형 한남동 집 안 가본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이네?”

“야! 아 진짜! 지혁 오빠 뭐야! 아 짜증나!”

유민재가 서둘러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를 언제나처럼 정승현과 권수아의 왁자지껄함이 채워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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