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08 2019 =========================================================================
#408
“너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하아... 그때 말했잖아. 나 남자친구 있어. 이러는 거 성빈이한테 너무 미안해. 내 자신이 혐오스러울 정도로. 그러니까, 제발,”
“진짜?”
“뭐?”
결국 발끈하고 말았다.
사실 오늘 촬영 후 따로 자리를 만들어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유지연이 내게 거짓말을 한 이유. 거짓말을 할 정도로 내가 싫은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나에 대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건지를 말이다.
“물어볼 게 있어.”
“갑자기 무슨,”
“내가 그렇게 싫어?”
“뭐?”
그래서 그 대답이 내가 원치 않은 대답, 정말로 내가 싫어 거짓말을 해서라도 날 떨쳐내려고 했다면 더 이상 찝쩍거리지 않으려 했다. 그런 답을 듣고도 지금과 같은 행동을 한다면 이는 범죄이고 이로 인해 내가 좋아하는 그녀에게 가장 최악의 남자로 기억될 테니까.
“없는 남자친구까지 꾸며내서 거절할 만큼?”
“무, 무슨 소리야! 꾸며내다니!”
홍성빈과 사귄다는 말이 거짓임을 그날 홍성빈과의 술자리에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트렌디에 유재연 씨 정말 팬이라서, 지연 누나한테 사정사정해서 번호를 받긴 받았는데... 아무래도 실수한 것...]
[지연 누나요? 아! 그 열애설은 정말 오해에요. 그때 재연씨하고 친분 얻고 싶어서... 그리고 지연 누나는 사귀기엔 너무 차가워서... 연기할 때랑 평소 때랑 너무 달라서 조금 무섭다 랄까... 하하... 예쁘긴 진짜 장난 아니게 예쁘긴 하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내 표정과 확신 섞인 목소리에 그녀 또한 더 이상 이와 관련해 거짓을 우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와는 상관없이 나는 그저 내 할 말을 털어놓을 뿐이었다. 그때 이후로 못난 짓이란 못난 짓은 주구장창 해댄 내 자신의 속내가 그녀 앞에선 순간 약간의 억울함으로 다가온 면도 없진 않았다.
“너랑 홍성빈이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거 알았을 때, 처음엔 기분이 너무 좋더라.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까, 더 처참해지더라고. 그렇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날 거절할 정도로 내가 싫었나... 싶었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그녀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며 진심을 다해 말했다. 이런 장소, 이런 상황, 이런 때에 말하게 될 줄은 몰랐으나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었다.
“유지연. 내가 그렇게 싫어? 진짜? 그렇게 없는 남자친구까지 끌어들여서 거짓말까지 할 정도로?”
그리고 그런 그녀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흔들리고 있었다. 단순히 내 착각이 일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믿고 싶었다.
*
“제주도 야외 촬영이 메인이고 실내 촬영은 맛보기니까, 자연스럽게만 해주시면 됩니다. 아셨죠? 자! 그럼 슛 들어갑니다, 하이! 큐!”
결국 점심도 먹지 못한 채 촬영에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허기를 느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두 분 다 표정도 그렇고 포즈도 너무 딱딱해요! 좀 더 자연스럽게!”
그녀는 끝내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좋아해.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내가 착각하는 게 아님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틀림없이 흔들렸었다. 눈동자 그리고 행동, 표정 모든 부분에서. 하지만 내가 원하는 답도, 원치 않은 답도, 그 어떤 답도 듣지 못한 채 상황은 마무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선남선녀네! 진짜! 이거 사람들이 천손 커플 생각 물씬 나겠는데요? 화보 판매량 아주 난리 나겠네. 난리 나겠어! 옳지! 좋아요! 그 포즈! 그렇지! 지연씨 좀 더 도도하게! 나이스!”
사람 마음이란 게 참으로 간사했다. 그녀와의 접점을 만들기 위해 이 화보 촬영의 기회를 붙잡았을 때는 한없이 기뻤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선택을 후회했으니까.
“지혁씨 왼쪽 어깨에 팔을 살짝 기대고. 도도하게! 고개를 약간 들고! 그렇지! 좋아요! 지연씨! 나이스!”
아무 의미가 없었다. 차라리 아무런 안면 없는 배우와 이런 복장, 이런 포즈를 취했다면 오히려 나았을 것이다.
“지혁씨도 그렇고 지연씨도 어쩜 이렇게 몸매가 좋은지! 이번에 남자, 여자 팬들 심정이 복잡하겠어요! 호호!”
하지만 유지연 그녀였기에, 그녀의 이런 행동이 아무런 감정도, 진심도 담겨져 있지 않은, 그저 ‘비즈니스’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지금 너무나도 허무했다. 그녀가 옆에 있음에도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았고 위안도 얻을 수 없었다.
“오늘 촬영 너무 수고하셨어요! 자! 우리 제주도 야외 촬영 때 봅시다! 아주 기가 막힌 해변 섭외했으니까, 기대해도 좋아요!”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그렇게 저녁때가 되어서야 모든 촬영이 끝났다. 맛보기 치고는 꽤나 강행군으로 치러진 촬영이었지만 힘듦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뒤통수를 세차게 얻어맞은 것처럼 흐리멍덩한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마음은 그저 내 한 몸 누일 푹신한 침대 또는 소파만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우리 뒤풀이하자! 내일 나랑 서린이 스케줄 없어!”
“그래요. 오빠. 저기... 지연 선배님도 같이 하시는 거 어떠세요? 저, 서, 선배님 팬인데, 친해지고 싶습니다!”
어느 누구 먼저랄 것 없이 매니저들이 대기 중인 주차장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이내 성준 녀석과 서린이 뒤풀이 자리를 만들려는 듯 나와 유지연을 붙잡았다.
“미안해요. 제가 오늘 조금 피곤해서 아무래도 조금 힘들,”
“다음에 하자. 그럼 나 먼저 간다.”
“어, 어?”
하지만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덤덤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이별을 고한 뒤, 석현 형에게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야! 진짜 가게? 야! 내가 오늘 쏜다니까! 진짜 갈 꺼야? 비싼 거 사줄게! 야!”
뒤에서 성준 녀석의 외침이 그리고 당장이라도 뒤돌아보고 싶게끔 만드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차라리 거짓말인줄 몰랐다면, 그랬다면 이런 감정까지 느끼지는 않았을 텐데.
[쏴아아]
마치 누가 준비라도 한 듯, 하늘에서 비가 쏟아 내리기 시작했다. 석현 형을 마주할 때 전혀 어색하지 않게끔 참으로 고마운 봄비가.
*
[지혁아 왜 비를 맞고 그래? 형한테 연락했으면 바로 우산 들고 갔을 텐데! 어휴. 진짜!]
회사로 가는 도중, 집으로 길을 틀었다. 잠실 집이 그나마 가까웠기에 한남동 저택으로 또는 본가로 가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침대가 필요했다. 누군가가 옆에 없어야만 했다. 그렇다고 너무나도 넓은 곳에 혼자 있기는 싫었다.
그래서 그나마 가깝고 그나마 좁은 곳 그리고 푹신한 침대가 있는 곳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털썩]
침대를 보자마자 그대로 쓰러지듯 몸을 뉘였다.
[지혁아 오늘 비 맞았으니까. 꼭 씻고 자! 봄답지 않게 날이 더워도 안 씻고 자면 바로 감기 걸린다! 알겠지?]
방금 전 들었던 석현 형의 말이 다시금 오버랩 되었지만 이미 안락함을 얻은 몸이 다시 일어나길 격렬히 거부했다.
[쏴아아]
좀처럼 오지 않던 비가 한 번에 제 분량을 채우려는 듯, 빗방울은 봄비답지 않게 굵었고 오랫동안 흘러내렸다.
[쏴아아]
불꽃처럼 타올랐는지라, 너무나도 뜨겁게 그리고 순식간에 외면했던 내 감정을 자각했었다. 그래서 너무나도 뜨겁게 불타오르던 마음이, 평온함을 되찾기 전 꺾어버려 그로 인한 공허함을 감내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희한하게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저 멍하니 침대의 안락함을 갈구할 뿐, 허무하지도 허망하지도 그렇다고 아쉽거나 화가 나지도 않았다.
잠이 오지 않았지만, 그저 두 눈을 감았다. 분명 두 눈을 감았지만, 여전히 무엇인가가 떠올라 신기해서 두 눈을 뜨기가 싫을 정도였다.
[쏴아아]
그렇게 한동안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여러 장면들을 되새겼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상관없이 그 장면들이 스스로 떠오를 때까지 계속.
“지혁아! 지혁아!”
한 시간 쯤 지나서일까.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상념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지혁이 이 자식 여기 있을 거면 전화를 받......”
“지혁이 거기 있......”
“예, 대표님! 어? 대표님, 지혁이 몸 완전 불덩......”
“뭐? 어디 봐봐. 어디...... 이 자식이... 석현아 얼른 이 자식 업......”
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는지라 적잖이 당황하게 되었다. 고작해야 1시간 누워있었을 뿐인데 온몸이 물 먹은 스펀지 마냥 축 쳐져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 몸이 도대체 왜 이러지?
잠시 후, 누군가가 나를 업은 듯 몸이 붕 뜬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다만 누군가와의 접촉으로 내 몸이 무엇인가로 흠뻑 젖어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 순간에도 흑백영화처럼 계속되던 상념의 존재감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오롯이 텅비어버린 머릿속이 어색한 것도 잠시 이내 잠이 들어버렸다. 순식간에, 그리고 좀처럼 깨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주 깊이.
*
[강지혁 S 대학 병원에 입원하다? 오늘 오후 5시 경...... 강지혁의 국내 매니지먼트를 담당하고 있는 포이보스 측의 말에 따르면 “이번 입원은 단순 몸살감기에 의한 것이며,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다. 다만 입원한 김에 건강검진 또한 병행해서 받고 있어 이틀 정도 입원할 계획이다. 본사 소속 아티스트 강지혁 군을 사랑해주시는 팬 분들에게 걱정을 끼쳐 죄송하다... 강지혁 군은 건강검진을 받으며 휴식을 취한 뒤, 제주도 화보 촬영에 임할 것......”..... 한편 강지혁은 현재 명탐정 K, 배우식당 등에 출연하고 있으며 오는 6월 미스터 지의 촬영을 위해 출국할 예정이다.]
“그래서? 괜찮데?”
기사들을 보고 있던 유민재가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스마트 폰을 내려놓았다.
“이 녀석 비 맞고 그대로 잠든 모양입니다. 그렇게 씻고 자라했는데... 의사 말로는 단순 감기 기운이라니까, 걱정하지 말랍니다.”
“하아...”
“죄송합니다. 대표님. 제가 좀 더 챙겼어야 했는데...”
“네가 뭘 죄송해. 제 몸 하나 간수 못한 저 자식이 문제지.”
갑작스럽게 연락이 되지 않은 강지혁 때문에 오늘 하루 종일 애를 태웠던 유민재의 입에서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흘러 나왔다.
“그래도 석현이 네 덕에 그때라도 잠실 집에 찾아가서 다행이지. 안 찾아갔으면 녀석 지금까지도 혼자서 끙끙 앓고 있었을 거 아니야? 이 미련한 녀석. 아프면 연락을 하던가. 후우...”
최근 들어 급격한 감정 기복을 보여준 녀석의 속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는지. 그리고 갑자기 왜 화보 촬영을 하겠다고 한 것인지.
녀석이 감기에 걸린 것이 단순히 비에 맞아서인 것 같지 않은 유민재의 머리에 수많은 의문들이 떠올랐다.
“네 생각엔 뭐 같은 데?”
“예?”
“이 녀석 요즘에 왜 이렇게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은데?”
“그게 저도 잘...”
그런 답답함에 눈앞에 있는 석현에게 이를 물었지만, 그 또한 알고 있었다. 석현도 그리고 자신도 그 답답함을 풀만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하아...”
어느새 이렇게 컸는지.
단순히 체격이 커졌다는 뜻을 말함이 아니었다.
사회적으로 그리고 음악적인 부분 더 나아가 연기자로서의 지혁은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사람이 되었다. 녹음실에서의 첫 만남 그리고 그로부터 2년 후 전역한 지혁의 모습을 떠올리며 지금과 비교한다면 이는 가히 상전벽해와도 같은 변화였다.
이에 유민재는 흘러간 세월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눈앞에 누워있는, 틈 만나면 자신의 속을 썩이는 녀석이 이제는 너무나 큰 의미가 되어버렸다는 것 또한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지, 지혁아! 지혁아! 우리 지혁이!”
이내 병원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박재성을 보며, 그날만큼은 그 또한 박재성의 행동을 마냥 조카바보짓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아니 앞으로도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당장 그 자신부터가 박재성의 조카바보짓을 똑같이 되풀이 할 것만 같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