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05 2019 =========================================================================
#405
“뭐야? 지혁씨랑 장감독님 저번에 정답 맞춘 게 전부...”
“여기 롤 카드에 범인 다 적혀 있네! 와... 선배님이랑 감독님... 그렇게 안 봤는데.”
오늘 롤 카드에 적힌 나의 역할은 나 자신이었다.
모든 출연자들이 본인 자신의 분신이 되어 명탐정 K의 작가를 죽인 범인을 찾는, 그런 소재가 이번화의 콘텐츠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보다 편하게 자신의 역할에 몰입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추리를 하는 과정에서 조금 곤혹스러운 면이 많을 수밖에 없었지만.
“장 감독님이 첫 화부터 범인 계속 맞춰왔던 것도 지혁씨가 저번 화에서 장감독님이랑 신들린 추리 보여줬던 것도 이미 작가가 롤 카드로 해당 역할을 알려줬던 거네. 와... 너무하네. 너무해.”
어쨌든 오늘 촬영은 촬영시간을 줄이고 보다 출연진들의 소통과 추리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모두가 함께 현장을 둘러보았는지라 그런 면은 확실히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런 것들 보다는 다른 곳에 신경이 쓰여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지만.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홍성빈입니다.]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넨 저 자식, 아니 저 사람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정말 팬입니다. 선배님. 조금 있다가 사인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천손, 후계자들도 그렇고 미스터 지 같은 경우는 DVD로 구입해서 잘 봤습니다. 이번에 한국에서 개봉하면 꼭 영화관 가서도 보겠습니다. 선배님.]
제길. 키도 나랑 얼추 비슷한 게 얼굴은 또 어찌나 잘 생겼는지. 거기다 나이도 어리고 한국, 아시아 지역에서 한류스타로 이름을 드높이고 있다하니 괜스레 패배감이 들었다. 물론 그런 점들 때문에 패배감을 느낀 것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홍성빈 씨는 요즘 아주 난리던데. 협박을 당해서 이 프로그램 게스트로 참가한 거네요? 과거 열애설을 덮어주는 조건으로?”
“하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제가 사람을 죽일 생각을 하지는... 그러는 연무 선배님은 아나운서 프리 선언 할 때 맺은 노예계약 때문에 작가님한테 불만이 많아 보이시던데...”
열등감과 패배감을 이다지도 느껴본 적은 성인이 된 후 처음이라고 봐도 무방했기에, 낯선 감정들로 인해 프로그램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오늘 그러고 보니까, 지혁씨 말이 없네. 오늘 촬영 역할 카드에 범인이랑 트릭이 안 적혀 있어서 그러나?”
“왜 지혁씨한테 갑자기 범인도 안 알려주고 트릭도 안 알려줬을까?”
“무슨 연결고리가 있는 것 같아요. 그것부터 알아봐야......”
덕분에 괜히 범인으로 몰려 다른 출연진들의 의심을 받게 되었다. 활발히 증거들을 모으며 제때, 제때 의문점을 해소하려는 다른 출연진들과는 다르게 나는 묵묵부답인 채 프로그램에 임하고 있었으니까.
“오늘의 범인 장현성 감독님입니다. 강지혁 씨와 범인 역을 맡은 장현성 씨를 제외한 모든 출연자분들이 추리에 성공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처참한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만 빼고 모든 출연진들이 범인을 맞췄다는 점에서 허탈하기 까지 했다. 저번 화에서 꽤나 큰 활약을 펼쳐 장현성 감독님과 함께 추리 브레인으로 거듭나려던 찰나에 생긴 일이라 더욱 뼈아팠다.
“오늘 지혁씨 무슨 일 있어? 촬영 전에 엄청 좋은 일 있던 것 같아서 오늘도 활약하나했더니, 결과가 신통치 않네?”
이거 방송에 나가면 조금 타격이 크겠는데? 나 원 참. 저 자식은 오늘 처음 출연이면서 추리까지 성공해? 끄응...
*
“성빈씨 요즘 드라마 너무 재밌게 보고 있어요. 글쎄 내 주변 사람들도 전부 월요일, 화요일에는 성빈씨 나오는 드라마만 보더라니까?”
“하하! 감사합니다. 선배님.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난 척 하기는. 참 나.
“요즘 한창 드라마 촬영하느라 바쁘지 않아요? 그런데 어떻게 우리 프로에 나올 생각을 했어요?”
“그게... 5월 달에 결방인 주가 있어서요. 촬영 일정에 틈도 있고 제가 이 프로그램 엄청 팬이거든요.”
“이제 고작 1화 밖에 방송 안 됐는데? 에이, 성빈씨 우리 듣기 좋으라고 너무 그런다. 호호.”
아무리 사회생활이라고는 하지만 저런 아부를 하다니. 진짜 인성하고는. 쯧쯧.
잘 봐보려고 해도 도무지 그게 잘 안됐다. 그래서 그저 고개 푹 숙이고 젓가락질만 열심히 했다. 시선 따위는 일체 보내지 않고 그저 눈앞에 있는 음식에만 전념하는 게 차라리 속이 편할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저 얄미운 놈이 날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그리고... 제가 강지혁 선배님 정말 팬이라서요. 한번 직접 뵙고 싶어서 조금 무리해서 출연하게 됐습니다.”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안 그래도 드라마가 시청률이 40%가 될지, 안 될지가 결정되는 중요한 순간에 주연 배우라는 놈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할 생각을 하다니, 참 꼴 보기가 싫었다. 아주 많이.
그런데 그런 결정을 한 게, 나 때문이라고 말하는 놈 때문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제 1화 밖에 방영 안 된, 물론 1화 시청률이 엄청 높을 정도로 큰 화제를 불러 모으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1회 차 방송만 보고 열혈 팬이네 뭐네 하는 것보다는 그 뒤에 나온 이유라는 게 주된 이유일 수밖에 없는 게 당연했으니까.
“하하... 감사합니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내를 그대로 표출할까봐 입을 닫고 있었던 건데, 이렇게까지 나를 언급하다보니, 마냥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게 저 자식이 계속해서 내게 말을 걸 도화선이 될 것 같다는 불안한 감정까지 감내해야할 테지만 말이다.
“선배님 미스터 지 영화 정말 잘 봤습니다. 저도 액션 영화 정말 좋아하고 언젠가는 꼭 도전해보고 싶은 장르라서 그런지 10번도 넘게 봤습니다. 물론 선배님 노래도 정말 좋아하고요.”
“감사합니다. 하하...”
“그... 선배님이 미스터 지 영화에서 선보이셨던 무술이 칼리 아르니스......”
그 불안함이 이내 현실이 되었는지라, 저 자식이 눈에 띄게 적극적으로 내게 말을 건넸는지라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녀석과 내게 쏠렸는지라 연기자로서의 경험과 노하우를 한껏 끌어올리게 되었다.
물론 속내를 숨기는 데 내 모든 연기 인생을 걸어야 할 정도로 속이 말이 아니었는지라, 쉽지만은 않았다.
다른 후배 연기자들이 이런 말을 했다면, 정말 기쁜 마음으로, 무엇이라도 조언을 해주고 싶어 안달이 났겠지만, 녀석이 저런 행동을 한다는 점에서 열등감과 패배감을 떨쳐내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여정이 내 맞은편에 앉아 놈의 방패 아닌 방패가 되어주었다는 것이다.
“저번에 뮤직코어에서 말씀하셨던 거 정말 사실이에요?”
“응?”
나도 참.
지금까지 여정이 시크릿 심사위원과 관련해 줄곧 의심쩍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자백 아닌 자백을 유도했던 게 오늘따라 유난히도 반갑게 느껴졌는지라 나도 몰래 헛웃음이 흘러나와버렸다.
“어? 왜 웃어요? 혹시... 그때?”
“어머! 지혁씨 며칠 전에 뮤직코어 출연했을 때 여정이랑도 인사 나눴겠네요? 여정이도 요즘 한창...”
“아! 그래서 제가 실수를 조금 했어요.”
“실수?”
“제가 해외 일정도 있고 그래서 최근 아이 돌 그룹들을 잘 모르거든요. 그래서 나인 테일? 그... 여정이 그룹에서 여정이 빼고 이름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인사 나눌 때 조금 실수를 했어요... 여정아 미안해.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놓고 있는 줄은 몰랐네.”
여정이에게는 미안할 따름이지만 그래도 그때만큼은 끓어오르던 속내가 조금이나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나의 노력을 자꾸만 저 놈이 방해했다. 그것도 아주 적극적으로.
“선배님 혹시 번호 좀 알려주실 수는...”
이게 진짜. 가만히 있으니까 내가 무슨 가마니로 보이나.
부글거리는 속내를 숨긴 채 사진도 찍어주고 사인도 해줬건만 초면에 번호까지 달라는 녀석의 심보가 고약해보여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물론 순식간에 다시금 표정관리를 하긴 했지만.
아니 다른 사람들도 매니저 차타고 다들 제 갈길 갔는데, 왜 자꾸 나를 따라오는 거야? 미치겠네. 진짜.
“그건 좀... 미안합니다. 제가 번호를...”
“아! 아닙니다! 선배님! 제가 조금 경우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저기 이만 여기서 갈라,”
“선배님. 저 잠시만...”
“아니, 그게 아니라,”
“네, 네. 연락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출연진들 모두가 함께하는 저녁 식사도 끝났겠다. 그만 갈라지면 그만인 것을 갑작스럽게 울려퍼진 전화벨 소리에 녀석이 내게 잠시만이라는 말을 건넸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갈라질래야 갈라질 수가 없었다.
제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놈이고 재수 없는 놈이지만 형식상 작별인사도 건네지 않고 헤어지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였으니까.
“연락주셨네요. 재연씨. 네, 네. 감사합니다. 제가 정말 팬이라서... 실례하게 됐네요. 아... 죄송합니다. 네, 네.”
이 새끼 목소리도 좋네. 그래 다 가져라. 다 가져. 더러운 놈. 응?
순간 들려오는 낯익은 단어에 한껏 찌푸리고 있던 인상이 단숨에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뭐? 재연? 내가 알고 있는 그 재연?
*
“선배님 감사합니다. 사실 오늘 제가 무슨 실수라도 한 것 같아서... 그런데 이렇게 따뜻하게 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어쩌다가 이 녀석과 추억이 서려있는 호프집에서 맥주잔을 같이 들고 있는지. 나 원 참.
“하하... 제가 낯을 조금 가리는 편이라서요.”
순간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내 본능이 무엇인가 이대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속삭이는 바람에 근처 호프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전 클라우드 형과 같이 왔던 그곳으로.
“선배님!”
“에? 예. 성빈씨.”
“제가 나이도 어리고 배우로서도 후배인데, 말 편하게 놓아주십시오!”
얼씨구. 지금 나이 어리다고 내 앞에서 자랑 하는 거?
그래 나 이제 서른이다. 서른. 그러는 너는 네 인기도 많고 돈도 많고 거기다 어리기까지 하면서 네 나이 또래 여자나 만나지 서른 넘은 여자나 꼬시고 그러냐? 양심 없냐? 그리고 배우가 드라마 찍을 때는 드라마에 전념해야지 상대배우랑 연애를 해? 연애를? 이게 아주 빠져가지고. 하아... 나 뭐라니.
“선배님 액션 연기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감명 깊었습니다.”
내게 금칠을 잔뜩 칠하는 녀석의 말 하나, 하나가 마음에 안 들었다.
[그 새끼가 나보다 잘난 게 뭔데. 내가 그 새끼보다 못난 게 도대체 뭐길래, 자꾸 그 새끼 옆에 가려고 하는 건데.....]
며칠 전 썼던 가사가 어떤 감정에서 비롯되었는지 절실히 느껴졌다. 그리고 이것이 내 자신을 더욱 초라하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너무 그렇게 비행기 태우지 말아요. 나도 이제 영화 한 편 찍은, 어떻게 보면 초짜 영화배우니까.”
‘그 새끼가 나보다 잘난 게 뭔데’라는 가사 말이 무색할 정도로 잘난 것 투성인 놈을 보자니 내가 놈에게 느끼고 있는 열등감과 패배감이 무의식의 어딘가까지 침투할 정도로 대단했구나를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재연이랑도 인연이 있나 봐요?”
놈과 친분을 쌓고 싶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순간의 충동 때문에 이 자리를 만든 내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녀석이 내 앞에서 유재연과 통화를 하든 말든 솔직히 내 알 바 아니었고 그저 녀석과 유지연의 관계에 관해 무엇인가 캐내보려는 찝찝한 의도가 그 모든 충동의 원인이어서 더더욱.
“예, 예? 아! 선배님도 JS 출신이시니... 그게... 인연이라고 할 것 까진 없고 연락 한 두 번 정도 한 사이입니다. 제가 트렌디 팬이라서요. 그런데... 직접 번호를 얻은 게 아니라 조금... 경우가 없다라고나 할까요? 결과가 영 좋지 않네요. 번호 얻으려고... 지출이 꽤 큰데... 소속사에서도 엄청 쿠사리 먹었... 아!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처음 뵙는데 별 소리를 다...”
제법 말이 많은 성격인건지 아니면 쉽게 마음의 벽을 허물어버리는 게 녀석의 특징인건지 잡다한 얘기를 내게 털어놓는 것을 보니 한숨만 흘러나왔다. 그래, 유지연 네가 이런 성격을 좋아한단 말이지? 참 나. 남자 보는 눈이 형편없네. 형편없어.
질투.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으로 인한 충동적인 행동으로 또다시 열등감, 패배감을 물씬 느껴야한다는 것 그리고 자존심 때문에 이를 애써 머리 한편으로 치워버리는 과정을 다시금 해야 한다는 점에서 비참해졌다.
하지만 그런 속내에도 불구하고 그날 놈과의 술자리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을 내게 안겨다주었다.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다면 후회할 정도로 큰 것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