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04 2019 =========================================================================
#404
널브러진 종이쪼가리들. 그리고 그 종이쪼가리들이 담고 있는 음표와 가사.
어느 것 하나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삼촌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내가 이랬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새끼가 나보다 잘난 게 뭔데. 내가 그 새끼보다 못난 게 도대체 뭐길래, 자꾸 그 새끼 옆에 가려고 하는 건데.....”
“네가 서 있는 그 곳이 내 옆이어야 하는 데 왜 난 이곳에 있고 넌 그곳에 있는 건지. 너의 웃음이 향하는 곳에 내가 있어야 하는 데 왜 너의 얼굴은 날 바라보고 있지 않는 건지......”
“사랑이 왔는데, 사랑인 줄 몰랐어. 그래서 그댄 떠났어. 이제는 더 볼 수가 없대......”
“나였다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매일, 매 순간 간절해지는 이 마음. 나였다면......”
심지어 지금 삼촌이 읊고 있는 가사 말들의 낯설음과 선율의 생경함이 너무나도 선명했으니 오죽할까.
“뭔데?”
이러다보니 부정할 수가 없었다. 가사들이 뜬 구름 잡는 식의 내용만 아니었다면, 아니 종이쪼가리들에 음표가 있지 않았다면 무슨 변명이라도 해봤을 텐데 그마저도 할 수 없는 게 지금의 상황이었으니까.
“뭐가?”
“너 진짜 삼촌 걱정! 하아...”
이전에도 한두 번 무엇인가에 열중하다가 주변 사람들을 걱정시켰던 적이 있었는데, 이를 실제로 처음 목격한 삼촌이기에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삼촌의 눈동자에 걱정이 흘러넘치고 언성까지 자연스럽게 커진 것은.
“조 관리사님이 그러던데, 너한테 무슨 일 생긴 것 같다고. 도대체 무슨 일인데? 삼촌한테까지 말 못할 그런 거야?”
묵묵부답인 내 상태가 답답해서인지 삼촌이 언성을 낮추고 나를 타이르기 시작했다. 내 마음속의 응어리를 어떻게든 끌어내보려는 듯이 말이다.
“일은 무슨. 아무 일 없어. 그냥 스케줄도 그렇고 피곤해서 그래.”
“일주일에 하나 스케줄 있는데, 피곤하다는 게 말이! 지혁아... 삼촌 숨넘어가는 거 보고 싶어서 그러냐? 너 지금 안색도 안 좋고 어? 집에는 요 며칠째 하루도 안 들어오고.”
“집도 새로 지었겠다. 정 붙여야지.”
“별채들 완공될 때까지는 한국에 있을 때 거기서 안 지낸다고 했잖아. 그게 지금 말이 돼?”
“그거야 뭐...”
하지만 그래서 더욱 말할 수가 없었다. 다른 중차대한 일도 아니고 여자 하나 때문에, 나사 빠진 얼간이처럼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도 여자와 관련해 이미 삼촌에게 못 볼꼴을 보여줬던 나였기에 더더욱.
“음반 작업하고 있었어.”
“어?”
“4집 낸지도 너무 오래된 것 같아서 시간 날 때마다 조금, 조금씩 준비하고 있었어. 그런데 오랜만에 하다 보니 조금 스트레스 받아서 그런가봐. 그러니까, 너무 걱정 하지 마.”
“흐음...”
어쨌든 고작 생각해낸 변명이 음반작업이라는 점에서 내 스스로가 한심스러웠지만, 그래도 삼촌이 넘어가줘서 다행이었다. 형편없는 연기에 궁색한 이유인지라 이것이 거짓말임을 나도 알고 삼촌도 알 정도였지만 말이다.
“작업도 중요한데, 오늘부터는 꼬박꼬박 들어와. 집으로.”
“어? 삼촌 나 음반 작업 할 거,”
“애들도 오빠 언제 오냐고 그러고 삼촌도 너 걱정돼서 안 되겠다.”
“삼촌 내가 애야? 무슨...”
“네가 내일 모래 서른이건 마흔이건, 내 눈에 넌 언제나 애야. 그러니까, 말대꾸 하지 말고 꼭 들어와. 저녁은 되도록 집에서 같이 먹고.”
삼촌의 눈엔 내가 아직까지 애로 보이는 것인지. 다소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 거리낌이 조금 들었지만 그래도 이내 수긍하고 말았다.
“너 잘못되면 삼촌 눈에 피눈물 나는 거 알지? 누나 아들 떠나서 넌 삼촌한테 조카 이상이야. 아니 이제 누나 아들 아니고 넌 삼촌 아들이야. 그러니까, 삼촌 걱정 좀 안 하게 응? 삼촌은 너 잘못되면 삼촌 모든 걸 걸어서라도......”
이번 경우는 확실히 삼촌의 이런 행동이 지나친 게 아닐 테니까.
*
혼자 청승을 떨어도 유분수지 정도를 벗어났다.
[그 새끼가 나보다 잘난 게 뭔데. 내가 그 새끼보다 못난 게 도대체 뭐길래, 자꾸 그 새끼 옆에 가려고 하는 건데.....]
[네가 서 있는 그 곳이 내 옆이어야 하는 데 왜 난 이곳에 있고 넌 그곳에 있는 건지. 너의 웃음이 향하는 곳에 내가 있어야 하는 데 왜 너의 얼굴은 날 바라보고 있지 않는 건지......]
[사랑이 왔는데, 사랑인 줄 몰랐어. 그래서 그댄 떠났어. 이제는 더 볼 수가 없대......]
[나였다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매일, 매 순간 간절해지는 이 마음. 나였다면......]
이렇게 간절한 것이었으면 옆에 있을 때나 잘할 것이지. 강지혁 너 일상생활은 가능하냐?
가사 내용과 선율이 담고 있는 것들이 절절하다 못해 애처롭기까지 했는지라 헛웃음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작업실에 들어온 지 고작 한 시간. 그 사이에 네 곡이나 되는 선율과 멜로디가 여러 종이쪼가리에 나눠져 적혀있는 것을 보니 다시금 내 감정을 자각하게 됐다.
많이 좋아하고 있었구나. 너.
[공개열애 할 생각 없어요. 모른 척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 정도쯤은 내가 충분히 강지혁 씨한테 부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내가 강지혁씨한테 할 말은 이게 다에요.]
[성빈이한테 미안할 짓 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더 이상 그쪽 이미지 망치지 않게 해줘요. 그나마 남아있던 강지혁씨에 대한 좋은 기억들... 그런 것들 다 빛바래게 하지 말고.]
외면하고 다른 것들로 치부했던 감정이 한번 자각된 순간부터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나를 괴롭혔다. 이미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옆에 둔 그녀일진데, 이런 생각들과 행동 모두 하등 쓸모없고 영양가 없는 것들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더더욱.
“지혁아 오늘 녹화 정말 괜찮겠어? 너 지금 안색도 조금 안 좋고...”
또 혼자 청승을 떨고 있었나보다. 잠시 차가 신호에 멈춘 틈을 타 나를 본 석현 형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으니까.
“뭔 소리야. 어제 잠을 좀 못 자서 그래. 삼촌들도 그렇고 형까지 왜 그래? 내가 환자도 아니고.”
그런 형에게 괜찮다는 듯 말 같지 않은 변명을 건네며 걱정스러움을 덜어주려 했지만, 엎드려 절 받기가 되고 말았다. 마치 알면서도 당해준다는 듯한 뉘앙스가 형의 눈빛에 추가되어 내게 비춰졌으니까.
아니 그래도 잠 못 잔 건 사실인데 나 원 참.
“1시간 정도 걸릴 거야. 잠 못 잤으면 눈이라도 조금 붙여. 다른 촬영도 아니고 명탐정 K는 기본 네다섯 시간이잖아. 저번 화 같은 경우는 6시간까지 걸렸고.”
“괜찮아. 형 나 지금 역할 카드 보고 있던 거 몰라? 진짜 나 괜찮으니까,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 할 일을 하는 것이 형의 걱정을 덜어주는 것이라 생각되어 형에게 보란 듯이 역할 카드를 흔들었다. 이 사람이 말이야. 아까부터 역할 카드 보느라 바쁜 사람한테 자꾸 걱정이니 뭐니 하면 김이 빠져 안 빠져? 참 나.
“지혁아.”
“어?”
“역할 카드 보려면 제대로 펼쳐서 봐. 거꾸로 들고선 보고 있었다고 하지 말고.”
“응? 무슨 소리... 아...”
크흠. 오해하지 마. 역할 카드 보고 있었어. 거꾸로 들고 있으면 뭔가 숨겨져 있는 트릭 같은 게 보일 것도 같아서... 하아. 뭐래. 멍청아.
*
논스톱으로 진행되는 촬영이다 보니, 휴식이랄 게 없었다. 끊임없이 증거를 찾아다녀야 했고 세트장 각각으로 이동되기 전마다 조금씩 주어지는 휴식은 말만 휴식일 뿐 증거들을 조합하여 추리를 해나갈 시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럼 형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필요할 땐 언제든 불러. 계속 촬영하는 거 아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그래서 촬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는 석현 형의 행동에 혀를 내두르게 되었다. 좋게 말하면 우직한, 그냥 보면 멍청할 정도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형의 행동은 사서 고생의 표본이었으니까.
어차피 내가 회사에 가서 기다리라해도 들어먹을 인간이 아니었기에 한숨을 푹 내쉬며 세트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내 마주친 이의 익숙한 목소리 그리고 겉모습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어머나! 지혁씨!”
굉장히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기에, 익숙한 목소리, 겉모습에도 나를 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이의 정체가 확 떠오르지 않았다.
“아... 안녕하세요. 작가님. 오랜만에 뵙네요.”
“어머나, 세상에. 여기서 지혁씨를 다 보네요!”
어깨에 멘 카메라 가방 그리고 푸석푸석하여 사자갈기처럼 휘날리는 머리 스타일이 아니었다면 끝내 알아차리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뭐, 이것은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만큼 그 모습들이 그때 당시에도 감명 깊었다는 것을 의미할 테지만.
“여긴 어쩐 일로...?”
“아! 지혁씨는 모르겠구나. 저쪽 옆에 있는 스튜디오가 내 개인작업실이에요.”
“개인 작업실이요? 음... 저번에는 여기가 아니었던 걸로...”
“옮긴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동안 모은 돈 싹 다 투자해서 한방에 질렀죠. 호호... 아, 참. 그나저나 지혁씨는 여기에 무슨 일로 온 건 가요?”
“아, 저는 이번에 출연하고 있는 예능프로 촬영이 여기 스튜디오에 있어서요.”
어쨌든 예전 내 앨범의 화보 작업과 ‘프로그램’ 상 커플 화보 그리고 각종 패션매거진 화보를 담당해줬던 이였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오랜만에 만났기에 반갑기는 반가웠다. 여전히 변함없는 사진작가님의 모습에 그때 당시가 아련히 떠올라서 더더욱.
그런데 오늘 사진작가님과의 만남이 단순한 인사로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이번 여름 화보 기획 중이라서요. 성빈씨 대신에 마음 같아선 지혁씨까지 섭외해서 천손 커플 다시... 어머. 내가 주책을! 지혁씨가 얼마나 바쁘고 몸값도 비싼데... 호호! 내가 바쁜 사람 괜히 붙잡고 쓸데없는 소리만 하고 있었네요. 호호. 그럼 지혁씨 항상 응원할게요. 다음에 시간 되시면 저랑도 다시 같이 작업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호호.”
내가 바빠 보여서 일까. 아니면 본인이 바빠서일까. 어쨌든 둘 중 무엇이든지 간에, 이만 갈 길을 가려는 듯 작별 인사를 건네는 사진작가님의 말을 간단히 넘길 수가 없었다.
“작가님 잠시 만요.”
“네? 왜 그러세요. 지혁씨?”
내가 들은 작별 인사의 ‘부가적인 것들이’ 제대로 들은 것인지, 아니면 이것도 내 머릿속에서 흘러나온 망상인지 확인해볼 필요가 분명히 있었으니까.
*
“지혁이 오늘 기분 좋아 보인다? 무슨 좋은 일 있어?”
촬영 세트장 대기실에 들어서자마자 먼저 와있던 연무 삼촌이 인사를 건넸다.
“아니요. 그냥 평소랑 똑같은데요. 삼촌?”
그나저나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말이 왜 이렇게 간만인지 모르겠다. 아주 귀에 딱지가 생길정도로 최근 들어 ‘몸은 괜찮니’, ‘어디 아프진 않냐’, ‘무슨 안 좋은 일 있니’ 등과 같은 걱정 섞인 말들만 들어서인지 더더욱 반가웠다. 연무 삼촌의 말이.
“삼촌 말고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지혁아 너랑 나랑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 데...”
“차이가 많이 안 나긴 뭐가 안나? 40대 중반인 너랑 우리 지혁씨랑 나이 차만 해도 얼만데? 거기다 비주얼은?”
“아, 진짜. 선배. 자꾸 이러기야? 야! 그리고 지혁이 너! 나는 삼촌이고 시윤 선배는 누나야? 내가 시윤 누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시윤 선배는 결혼도 했고 애까지 둘,”
“이게! 우리 지혁씨한테 어디서 큰 소리야?”
그렇게 내가 대기실에 들어선 것을 시작으로 시윤 누나가 들어왔고 이내 대기실은 떠들썩한 대화소리로 가득 차게 되었다. 같은 방송사 아나운서 출신 프리랜서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사적으로도 꽤나 친한 두 선배들은 카메라를 구분하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티격태격 거렸으니까.
뭐, 나도 그 대화에 끼어들어 잠시 뒤에 있을 촬영에 대한 긴장감을 조금씩 갉아먹었고 말이다.
*
“이번 명탐정 K에서는 특별 게스트가 출연합니다. 특별 게스트로는 바로... 지금 한창 배우로서 주가를 올리고 있는 연기자 홍성빈씨입니다!”
“안녕하세요. 연기자 홍성빈입니다. 제가 명탐정 K 1화를 드라마 촬영 중에도 꼭 챙겨봤는데요. 인기프로그램에 애청자로서 참가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뜬금없이 게스트가 녹화에 참가한다는 것까진 이해하겠다. 아직 방송의 초기인 만큼 한 화, 한 화 조금씩 변화를 주겠다고 제작진 측에서 첫 화가 끝날 때 따로 자리를 가져 이를 언급했으니 말이다.
“어머! 요즘 드라마 잘 보고 있어요. 유지연 씨랑 케미가 짝짝 맞던데!”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깜짝 게스트가 저 사람이라는 게 중요했다.
제길. 드라마가 종영된 것도 아니고 무슨 예능이야? 빠져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