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마음을 노래로-399화 (399/502)

00399  2019  =========================================================================

#399

“지혁아 미안하다. 삼촌이... 오늘 스케줄이 많아서...”

“아니에요. 다녀오세요. 4시쯤에 오신다고 하셨죠?”

“그래. 내가 최대한 빨리 와 볼게.”

리허설 직전에 도착한 순한 삼촌은, 리허설이 끝나자마자 다시 모습을 감췄다. 오늘 스케줄이 세 개라나 뭐라나.

어쨌든 졸지에 혼자 대기실에 남겨지게 됐다. 넓디넓은 대기실을 배정받았기도 받았거니와, 스태프들과 김태훈 PD님조차 장비들을 놔둔 채 편집실로 떠났기 때문이다.

물론 혼자인 게 싫은 것은 아니었다. 혼자 있는 것 치고는 무척이나 넓고 좋은 시설의 대기실을 배정받아서 어색하긴 했지만, 3집 활동 때부터 줄곧 이런 대기실을 써왔던 사람이 나란 사람이니까. 뭐, 그때는 석현 형도 그리고 스타일리스트 누나들도 있어서 이렇게까지 적막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한 시간쯤 뒤에 석현 형이 와서 그 넓은 대기실을 혼자 쓰지 않아도 됐다. 오랜만에 하는 음악방송 출연이라며 음료수 박스며 팬들의 각종 선물을 끊임없이 들고 들어오는 형덕에 졸지에 노동을 하게 되었다는 게 불만이라면 불만이랄까.

“뭐가 이렇게 많아? 이걸 다 누가 먹는다고.”

“팬들이 너 오랜만에 음악방송 출연한다고 보낸 거야. 저기 스티커랑 일일이 다 붙여서. 너무 많아서 나머지들은 회사에 있어. 이거 많게 보이지만, 절반에 절반도 안 되는,”

“이게 절반이라고?”

도대체 이게 절반의 절반이면 나머지들은 얼마나 많다는 것인지.

각종 음료수며 유명 제과점의 과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는지라, 손을 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더욱이 그 음료수와 과자들 하나, 하나에 ‘아시아의 별이 세계를 비추다.’, ‘세계의 빛과 희망이 된 가수 강지혁.’, ‘월드스타 잘 부탁드립니다. 뮤직코어 감독님.’ 과 같이 낯 뜨거운 멘트가 새겨진 스티커가 붙어있었으니 오죽할까.

“너가 워낙 오랜만에 음악방송 출연하는 거니까, 팬들이 더 특별히 신경썼나봐. 지금은 배우로서의 네 모습을 보고 팬이 된 사람들도 꽤 있을 테지만, 뭐니, 뭐니 해도 팬들 대다수는 네 가수로서의 모습을 보고 팬이 된 사람들 일 테니까.”

“흠...”

후우. 정성이 너무나도 짙고 깊게 느껴져 그에 비례에 팬들이 가수로서의 내 모습을 무척이나 고대하고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정규 1집 12년 06월

정규 2집 12년 12월

정규 3집 14년 01월.

정규 4집 16년 07월.

지금 현재 19년 04월.

무척이나 활발하게 음악 활동을 했었던 초반 때와 달리, 점점 관련 활동이 드물어지게 되었다. 단순히 정규 앨범 발매 때만 보더라도 1집에서 2집까지는 단 6개월이었던 발매일 차이가 2집에서 3집까지는 1년 조금 넘는 기간이, 3집에서 4집까지는 2년 6개월가량 되는 기간의 차이가 존재했으니까.

“너 모자란 녀석들 가요제 참가한다할 때 팬들이 너무 좋아했잖아. 그런데 그것 못지않게 아쉬워하더라고.”

“생각해보니까, 3년 가까이 됐네. 앨범 발매 안 한지가.”

“응? 어, 그렇지. 네 정규 4집이 16년도 중반에 발매 됐으니까.”

물론 음원만 공개했던 ‘중얼중얼’이나 아미가, TRENDY 그리고 프로젝트 데뷔 시즌 2에 참가하면서 나름 바쁜 와중에 열심히 음악 활동을 해오긴 해왔었다. 이번에 생방송 무대에 설 수 있게 만들어준 ‘천재였지’도 그 활동의 범주 안에 들었고 말이다.

다만 그 음악 활동 가운데 내가 전면에 나선 경우는 ‘중얼중얼’, ‘천재였지’ 뿐이라는 게 중요했다.

음원만 내고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않았던 ‘중얼중얼’ 활동과 모자란 녀석들 가요제의 포맷을 빌려 오늘 생방송 무대가 있기 전까지, 딱 한번 콘서트 무대에서 선보였던 게 전부인 ‘천재였지’ 활동까지 전부 팬들의 내 음악에 대한 갈증을 적셔주기엔 무리가 있는 활동들이었으니까.

“뭐, 어쩔 수 없지. 너 이번에 영화 촬영도 쭉 잡혀있고. 걱정 마. 사람들은 네가 가수로서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배우로서 활동하거나,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도 못지않게 좋아하니까.”

관련된 생각을 하다 보니, 꽤나 심각해진 속내가 겉으로 드러나서일까. 석현 형이 그런 나를 위해 다급히 말을 바꾸는 듯 했지만, 이미 복잡해진 속내가 바뀌진 않았다.

가수로서의 내 자신만큼 배우로서의 내 자신도 내 자신의 동등한 아이덴티티라고 여겨왔었다. 그래서 최근 몇 년간 음악 활동보다 배우로서의 활동이 빈번해지고 또 내 자신도 이에 보다 신경을 썼을 때, 그다지 거리낌은 없었다.

그런데 그게 조금 과했던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가수 출신 배우, 가수로서의 인지도를 무기 삼아 배우로 활동하는 연기자라는 수식어를 벗어 던지기 위해 가수로서의 내 모습에 지나치게 소홀했던 적은 아니었을까.

뮤지션으로서 나름 꾸준히 작곡, 작사 활동을 해왔다고 생각했었는데, 정작 내 팬들의 내 노래에 대한 갈증은 더욱 깊어져 있었음을 느꼈는지라 약간의 부끄러움이 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후우.

당장 이번해만 보더라도 지금까지 팬들을 위한답시고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나름 활발히 참가해왔고 남은 국내 활동도 그 선을 크게 넘지 않을 것이 자명했다. 하반기 때는 미스터 지 후속 작 촬영에 돌입해야 했으니 말해 입이 아팠고 말이다.

더욱이 내년부터는 최소 2년 동안, 물론 촬영 기간이 굉장히 드문, 드문 배치될 예정인지라 실제 촬영 기간은 그 절반도 되지 않을 테지만, 어쨌든 최소 2년, 최대 4년 동안 또 다른 영화 촬영에 임해야 했으니 오죽할까.

후우, 충분히 반성할 만한 일이다. 내 자신이 게으르고 나태하게 생활했기 때문에 반성하자는 생각이 든 것은 아니다.

다만 가수로서의 어떠한 내 영향력과 인지도가 배우로서의 활동에 영향을 주는 것을 지나치게 경계한 것이 조금 지나치게 됐다는 점 그리고 내 본업이라고 부정할 수 없는 ‘가수’로서의 활동을 끊임없이 기다려준 팬들의 마음을 이제야 새삼 깨닫게 되었다는 점 등에서 나름 바쁘게 살아왔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테니까.

균형이라는 게 중요하구나. 균형.

“그런데 왜 혼자 있어? 제작진들 있다고 하지 않았어?”

표정이 어둡다거나 굳어있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말을 잇지 않고 생각에 잠겨있는 내 모습에 괜한 말을 꺼냈다는 듯 아차 싶었는지 석현 형이 화제를 돌리려했다. 이 형도 참.

“형한테 연락하지 그랬어. 혼자서 심심하게.”

“됐어. 뭐 하러 그래. 잘 쉬고 있었으니 걱정하지 마. 아니 형도 자꾸 누구 닮아가네? 나 불안해? 자꾸 그러면?”

“닮긴 무슨. 네가 네 위치에 비해서 너무 자유분방하니까, 그렇지. 어디 물가에 애 내다놓은 심정이 뭔지 너 때문에 아주 훤히......”

이미 어느 정도 속내를 정리했고 더 깊숙이 관련된 내용에 빠져들 생각까진 없었는지라, 그런 형의 의도를 모른 척 속아 넘어가줬다. 뭐, 자꾸 누군가를 닮아가는 듯한 형의 모습이 조금 두려워져 나 또한 흐름을 끊을 필요가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그나저나 선배가수들한테 인사하러 갔어? PD님이랑?”

“PD님한테는 가서 인사했고 선배가수들은 아까 보니까, 아직 안 온 거 같아서.”

“지금 다른 가수들 리허설 한창이니까, 다들 있을 거야. 형이 PD님이랑 다른 스태프들한테 음료수랑 컵케이크 돌릴 테니까, 넌 이거 가지고 선배들 대기실 가서 인사해.”

석현 형의 말마따나 이제 슬슬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엄청난 인지도와 인기를 가지고 있음과는 별개로, 후배가수가 선배가수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는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선배 가수들끼리도 통용되는 예의이자 관습이었으니까.

“괜히 구설수 생기면 너만 골치 아파. 너 정도 위치면 안 해도 상관은 없겠지만, 괜히 흠 짓나면 너만 곤란하니까. 알지?”

“굳이 그런 말까지 왜 해? 당연히 하려고 했어. 아까 말했잖아. 둘러봤는데, 아무도 없어서 여기 있는 거라고.”

뭐, 굳이 ‘뜨고 나서 변했다’, ‘예의가 없다.’, ‘언제까지 잘 나가는 지 두고 보자’와 같은 말들을 동료, 선, 후배 가수들에게 듣고 싶지 않아서, 그 얘기들이 또다시 귀찮은 언론들에 퍼지길 원치 않아서라는 게 주된 이유들 가운데 하나이긴 했지만.

“지혁아 형 먼저 간다.”

어쨌든 팬들이 준비해준 고풍스러운 과자들과 음료를 들고 먼저 대기실을 떠나는 석현 형의 뒤를 이어 나 또한 종류별로 음료와 과자 몇 개씩이 담겨있는 종이 백 서너 개를 들고 발걸음을 옮기려했다.

[똑똑똑]

“실례하겠습니다!”

때마침 들려온 노크소리와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

주시청자가 10대이기에 대한민국의 음악생방송은 그들 라인업의 대부분을 아이 돌 가수로 채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대중음악의 주 소비층이 10대, 20대이다 보니 자연스레 해당 세대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호응을 받고 있는 아이 돌 가수의 공급이 많아졌고 이는 어느새 대중음악의 중심 트렌드로 자리 잡은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똑똑똑]

“실례하겠습니다!”

아무튼 그래서인지 대기실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저희 앨범입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사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강지혁 선배님!”

“커피랑 쿠키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저희는......”

“사진 찍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는......”

뮤지션 입장에서 8년차라는 점은 결코 선배 급이라 할 수 없었다. 민재 삼촌과 송현 삼촌 그리고 윤성 삼촌 정도는 되어야 뮤지션 계에서 그래도 선배 급이라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곳에 있는 가수들, 그러니까, 아이 돌 그룹 입장에서 보자면 이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띠었다.

7년차의 고비.

제 아무리 인기를 끌고 정상을 밟아본 아이 돌 그룹 일지라도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대중들의 관심에서 벗어나게 되는 필연적인 현상. 그리고 그들의 태반이 재계약이라는 선택을 하지 않은 채, 아이 돌 가수로서의 면모를 벗어던지고 연기자 또는 예능인 그것도 아니면 뮤지션으로의 변모를 꽤하는 시기.

이런 필연적인 시기를 거치게 되는 아이 돌 계에서 8년차는 충분히 선배 급이라 할 수 있는 연차였으니 말이다.

“벌써 다녀왔어? 하긴, 선배들이라고 해봤자, 별로 없을 테니까.”

어쨌든 셀 수도 없는 많은 아이 돌 그룹들이 내게 인사를 하러 찾아왔고 그런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다 보니, PD와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러 갔던 석현 형이 어느새 대기실 문을 열고 있었다.

“다녀오긴 뭘 다녀와. 꼼짝없이 여기 있었구만.”

“응?”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흐른 것인지. 얼추 보니 1시간 가까이 시간이 지나있었는지라 목과 어깨가 절로 뻐근했다.

“계속 인사 왔었어. 앨범 받고 간단히 대화 나누고 음료랑 과자 주고. 이것만 1시간 동안 했네. 후우.”

내가 권위적이고 차가운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 성격 또한 그런 쪽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막상 후배들이 인사를 하러 오다보니, 마냥 편하고 실없는 모습을 보이기 힘들었는지라 나도 몰래 어깨와 목에 힘을 팍 주고 있었나보다.

다시 볼 수 있을지, 아니면 이번이 마지막 만남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첫인상이 중요한 만큼 나름 신경을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인해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음료랑 과자가 많이 줄어들긴 들었네.”

어쨌든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러 가는 걸 더는 미룰 생각까진 없었는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아. 다녀올게.”

“형이 같이 가줄까?”

“내가 무슨 애야? 됐어. 나머지 과자랑 음료들 좀 다시 박스에 챙겨줘. 밖에 팬들 왔다며.”

“팬들 주게?”

“그럼 그걸 다 어떻게 먹어. 나눠 먹으라고 갖다 준거 아니었어?”

“그건 그렇지. 아무튼 준비하고 있을 게.”

그런데 얼마 되지도 않는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러 가는 게 왜 이리도 힘이 드는 건지.

[똑똑똑]

또다시 들려오는 노크 소리 그리고

“하나, 둘, 셋!”

“당신에게 행복을!”

“안녕하세요. 나인 테일입니다!”

힘찬 인사 구호 덕에 다시금 자리에 앉아 들고 있던 종이 백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이거 오늘 내로 움직일 수는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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