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92 2019 =========================================================================
#392
[기둥 윗부분은 이오니아식, 실내는 로코코풍으로 장식한... 흠... 18세기 신고전주의 유럽 궁전건축양식이군요. 그리고 본채와 다르게 정원과 누각 그리고 공사 중인 별채는 한국의 아름다운 미를 가득 담고 있는... 정말이지 저택이... 아주 멋집니다. 정말. 제 자신이 절로 동양의 왕이 된 것 같군요.]
[감사합니다. 그... 건축에 관해서 관심이 많으신가보네요. 하하...]
[대학 시절에 부전공으로 건축사를 조금 다뤘는지라... 본채와 달리 정원과 제가 너무 경망스럽게 보이셨다면 사죄의 말씀을...]
[아, 아니에요. 전혀 그런 뜻으로 말씀 드린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담벼락 부근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검은 양복 사내들 그리고 나의 바로 옆에 있는 롤프 마피엘 주한 독일 대사관 영사.
그들과 1시간 쯤 뒤에 한국에 도착한다는 마이켈 총리 내외 덕에 우리 집에 헬기장이 있었음을 두 눈으로 처음 확인할 수 있었다.
[경호에 차질이 없게끔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대한 입장에서 당연히 해드려야 하는 거죠. 하하...]
한 나라의 총리가 일개 개인의 집에 방문한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음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내 자신의 위치와 그동안 만나봤던 수많은 명사들로 인해 이 같은 사실이 조금은 무뎌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새벽부터 집 주위를 장악한 기자들과 각종 미디어 매체들의 관련 소식 보도가 무뎌진 것들을 다시금 민감하게 만든 것 같았다.
[독일 마이켈 총리와 그의 남편 자후어 교수 전격 방한! 개인 일정으로서 가수이자 배우로서 월드스타의 반열에 오른 강지혁의 초청으로 이번 방한이 성사된 것으로......]
[유럽 연합 측이 현재 한국과의 FTA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독일 마이켈 총리의 방한이 어떤 의미를 지닐지......]
기존에 내가 개인적으로 고용한 경호 인력도 결코 부족한 수준이 아니었다. 민재 삼촌의 의견도 그렇고 재성 삼촌 또한 나의 경호에 조금 지나치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신경을 썼는지라, 저택과 신변 보호에 서른 명 가량 되는 보디가드들을 고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그 인력들을 저택 경호에 투입하자 서른 명이라는 숫자가 그다지 많은 수가 아님을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고생 많으시죠? 주한 독일 대사관 측에서 경호 인력도 따로 구했다니까, 오후부터는 평소처럼 3교대로 업무 보시면 될 것 같아요. 그쪽에서 구한 경호 인력이랑은 서로 충돌 같은 거 없게끔 조정했으니까요.”
“고생이라니요. 당연히 해야 되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경비 초소 안에 시설도 잘 되어 있고 휴게실도 좋아서 오히려 집 말고 이곳에서 지내고 싶은 대원들이 많습니다. 하하!”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휴게실이나 경비초소에 부족한 점 있으시면 저한테 말씀하셔도 되고 관리해주시는 분이 구해지면 그 분한테 따로 말씀하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지혁 씨. 저희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켜드리겠습니다.”
2만평.
말이 2만평이지, 실제 2만평 규모의 대지에 자리 잡은 저택은 한눈에 담기에도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했다. 서른 명이나 고용한 경비인력들이 열 명씩 3교대로 저택을 경호하고 있지만, 일정한 주기로 순찰을 도는 것도 버거울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일까. 서른 명 가량 되는 경비 인력이 저택을 경호하고 있다는 것으로는 독일 대사관 측을 만족시킬 수가 없다는 게 지금 내게 보다 또렷한 현실을 보여줬다. 대사관 측에서 별도로 고용한 것인지 기존 서른 명에 달하는 경비인력 외에 쉰 명이나 되는 추가 인력이 담벼락과 본채 옥상에서 주변을 살피고 있었으니까.
[그냥 인사치레로 한국에 오면 안내하겠다고 한 건데, 일이 이렇게...]
[총리 정도 되면 아무리 개인 휴가라도 정치적인 도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게 이번처럼 한창 한국이랑 그쪽이랑 시끄러울 때면 더더욱.]
어제 저녁 관리사님이 내게 건넸던 말마따나, 마냥 상황을 그저 가볍게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는지라, 조금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들을 애써 머리 밖으로 치워버렸다.
내 자신이 중심을 잡고 있으면 된다.
가수이자, 배우로서 내 자신의 지위가 올라가면 갈수록 본연의 영역에서만 활동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빈번하게 마주했던 현실이었다.
개인의 정치적인 발언이 의무적인 사안으로까지 여겨지는 미국에 살고 있는 테일러나 코난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내 자신이 정치인이 아닌 연예인이라는 것만 명심한다면 이 같은 상황은 익숙해져야할 것이지 피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스터 강?]
[흠...]
[미스터 강?]
[에, 에? 아! 저 부르셨나요?]
[지금 총리내외께서 곧 도착하신다는 연락이 당도했습니다.]
시간이 왜 이리도 빨리 흘러갔는지.
정원 분수대 한 편에서 사색에 잠겼을 뿐인데 어느새 시간이 1시간이나 지났다는 점에서 놀랐다. 하지만 그렇게 가만히 놀라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롤프 마피엘 대사의 말마따나, 이제는 초대 아닌 초대를 하게 된 손님을 맞이해야 할 시간이 되었으니까.
*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미스터 강.]
[저와 제 아내를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한 나라의 총리 직을 무려 10년도 넘게 지킨 이라고 보기엔 지극히 소박한 옷차림에 부담감을 보다 쉽게 떨쳐버릴 수 있었다. 뭐, 헬기를 타고 등장했다는 점에서 소박하다는 말을 전체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쨌든 리우 올림픽 개막식에서 봤던 다소 소탈한 모습 또한 머릿속에 비교적 또렷이 남아있었기에 편한 태도로 그들을 맞이했다. 그들 또한 그런 내가 권위적이고 형식적인 행동을 내보이지 않아 훨씬 마음에 들었는지, 얼굴이 밝아보였다.
[정말로 아름다운 곳이군요.]
[다소 실례가 될 수 있겠지만... 본채를 제외하고는 아직 공사 중인지라, 본채에서만 머무르실 수 있어요.]
[아니에요. 저희가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충분히 그러실 수 있어요. 오히려 저희 쪽에서 실례를 저질렀는걸요. 그런데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고 예전에 예의상 했을 수 있는 초대 약속을 지켜주셔서 감사해요.]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저쪽이 진짜 개인적인 휴가를 보내기위해 과거의 그저 지나간 말을 핑계 삼아 한국으로 온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를 노리고 나를 이용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나 또한 이번 기회를 통해 얻게 될 것이 적지 않을 테니까.
[내부가 정말 아름답네요. 인테리어 하나, 하나 정성이 가득 담긴 것 같아요. 동양의 미가 물씬 풍겨져서 겉이랑 완전히 다르네요.]
[조선 왕조 왕궁에서 모티브를 얻은 건물이라서요.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짐 푸시고... 중국이랑 일본 일정이 엄청 강행군이었다고 들었는데, 조금 쉬시다가 저녁 식사 때 뵈어요.]
그렇게 안내된 방에 꽤나 만족해하는 두 사람을 뒤로한 채 나 또한 방으로 돌아왔다. 밝은 얼굴 기색에도 숨길 수 없는 피로감이 느껴졌는지라, 굳이 지금부터 무엇을 하기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에 찾아온 손님이 나 또한 총리부부와 마찬가지로 잠시 휴식을 가지려던 생각을 고치게끔 만들었다.
“관리사님. 이게 무슨?”
“안녕하십니까. 강지혁씨. 잠시 양해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원 누각에 누워있던 내게 갑작스러운 관리사님의 방문은 뜻밖일지언정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내가 또다시 별러놓은 일이 있었고 이를 별개로 두더라도 관리사님은 나의 자산 관리를 종합적으로 담당해주는 이였는지라, 이 같은 갑작스런 방문은 예상치 못한 중요한 일이 발생할 때면 드물지만 종종 있었던 일이었으니까.
“관리사님 이 사람들은?”
“소개가 늦었군요. 청와대 경호실장 박응렬입니다.”
하지만 관리사님과 함께 등장한 이들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리고 자꾸만 관리사님의 대답을 가로채 본인의 입을 여는, 네다섯 명의 불청객들 가운데 가장 선두에 선 중년인은 더욱 문제였고 말이다.
“잠시 저희와 동행해주시죠.”
뜬금없이 등장해 양해를 부탁한 사람. 그런데 동행을 해달라는 단독직입적인 요구에 앞선 양해 부탁이 내가 알고 있던 양해부탁이 아닌 듯 했다.
“관리사님 어떻게 된 일이죠?”
동행이 가능한지, 동행할 의사가 있는지 아니, 이 자리에 집주인 허락도 없이 등장한 타당한 사유를 먼저 읊는 것이 아닌 다소 강압적인 행동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이내 들려온 관리사님의 말에 귀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의심하게 됐고 말이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이번 독일 총리 내외분의 방한과 관련해서... 한시간전에 직접 사무실로 찾아와,”
“그러니까, 그 말씀은 지금 관리사님을 강제로 끌고 왔단 말인가요? 저택에 들어오려고?”
어째서 관리사님이 이 사람들과 함께 이곳에 왔는지, 이 사람들이 기자들과 마이켈 총리와 관련해 내게 접촉하려는 모든 이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저택 출입문을 통과할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다만 관리사님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온 그 이유라는 게 너무나도 충격적이라 좀처럼 믿기 힘들었을 뿐.
“이게 사실인가요?”
“강제로 끌고 왔다기보다, 협조를 요청했을 뿐입니다.”
“그 협조라는 게 지금처럼 본인 의사도 묻지 않고 동행해달라는... 뭐 그런 걸 말하나요?”
하다못해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하며 미안하다는 기색이라도 내보였으면 이렇게나 어이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나도 당당했다. 듣는 내가 다 화가 날 정도로.
“양해 부탁드립니다. 잠시면 되니, 동행해주시죠.”
“하아...”
더 이상 말해무엇할까.
관리사님이 애당초 이런 사람들을 내게 데려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됐다. 비슷한 목적을 지닌,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일체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기존의 방침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관리사님의 행동이라고 보기엔 이는 지나치다 못해 상식 밖이었으니 말이다.
“죄송합니다. 지혁씨.”
이내 들려온 관리사님의 목소리에 차마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스며들어있음을 알아채자마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화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제가 시간이 없네요. 그만 돌아가세요.”
청와대라는 단어가 이다지도 위압감을 가져다주는지 처음 알았다. 빈번히는 아니더라도 예전에 내가 봤던 청와대 관련 사람들은 이런 식의 행동도 발언도 하지 않는, 양해라는 단어의 진짜 의미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이들이었으니까.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와 동행해주시죠.”
더군다나 그만 돌아가 달라는 나의 말에도 막무가내로 동행을 해 달라는 요구만 반복하는 사내의 행동은 기가 질릴 정도로 말문을 막히게 했으니 오죽할까.
“양해고 뭐고 그럴 여유가 없네요. 이만 가주세요.”
“후회 안하시겠습니까?”
이제는 내게 후회를 들먹이는 사내의 당당함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후회 안하시겠어요?”
같은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자, 시종일관 당당한 태도로 나를 바라보던 사내의 얼굴이 잠시나마 찌푸려졌다.
[삐빅]
“청와대 박응렬 경호실장님. 후회 안하시겠냐고 물어봤습니다만?”
하지만 정작 얼굴을 붉힐 만큼 불쾌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나였다. 말이 아닌 행동을 요구한 질문에서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첫째치고 대답조차 하지 않는 사내의 행동은 내 인내심의 바닥을 드러내게 만들었으니까.
“요 몇 년간 누군지는 몰라도, 아니 그쪽은 잘 알고 계시겠죠. 어쨌든 저를 너무 괴롭히시더라고요.”
“무슨 일이십니까! 지혁씨!”
이런 일을 예상하고 만든 것은 아니지만, 방범 차원에서 설치한 도구를 통해 저택을 경비하고 있던 인원들을 불러 모았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동행과 양해라는 단어를 빌미삼아 나를 끌고 가려는 이들을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끌려가실래요. 아니면 제 발로 가실래요?”
이렇다 할 행동 없이 경비인력들이 누각에 등장한 탓일까. 잠깐 인상을 찌푸린 것을 제외하고 시종일관 당당함으로 나를 분통터지게 만들었던 사내들의 얼굴에 약간의 당황함이 스며든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번만 내 사람들한테 그런 행동해보세요. 궁지에 몰린 쥐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가르쳐 드릴 테니까. 뭐, 국내외적으로 인지도 쌓고 싶으면 말하세요. 할리우드 스타는 못돼도 그 정도 인지도쯤은 충분히 쌓게 해드릴 테니까.”
그런 얼굴들에서 약간의 통쾌함을 느낄 만도 하건만, 영화 속에서나 볼법한 일을 겪었다는 점에서 헛구역질이 몰려왔는지라 관리사님의 손을 붙잡고 서둘러 자리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강지혁씨. 저희는 분명 양해를 부탁드린다고 말씀 드렸,”
“손님들 나가시니까. 배웅 좀 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지혁씨.”
그렇게 그런 나의 행동과 사내들을 보는 눈빛에 가득 담겨 있는 혐오감을 알아챘는지, 경호원분들의 행동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시선을 아예 거둬버렸다.
마음은 복잡해졌고 나 때문인지 아니면 관리사님 때문인지 모를 이유로 관리사님을 붙든 손이 덜덜 떨려왔지만, 그저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시라도 빨리 그 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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