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91 2019 =========================================================================
#391
[당신이 오늘 맡을 역할은 기자 강기자입니다. 강기자는 이번 슈퍼모델 선발대회의 출입기자로서......]
오랜만에 서너 장 가까이 되는 명탐정 K의 역할 카드를 보게 되었다. 처음 맡았던 ‘오타쿠’ 겸 ‘스토커’ 역이 워낙 임팩트가 강했는지라, 이번 화에서 비교적 편한 역을 맡게 되길 나름 간절히 바랐었다. 그런데 지금 그 역할을 확인한 순간, ‘이번 화 또한 마냥 만만치는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확 들었다.
하지만 정작 나를 당혹시킨 것은 난해한 역할보다는 다른 부분이었다.
움찔.
옆에서 날 쳐다보는 시선이 왠지 모르게 나를 위축시켰다. 물론 그 시선이 강렬하다거나, 대놓고 날 훑는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이의 의도가 너무나도 노골적이었는지라 부담스러웠을 뿐.
아무래도 프로그램 초기다보니 여러 가지를 보완하고 또 시도해보는 과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번 화부터는 1화에서의 아쉬웠던 점인, 추리할만한 증거를 찾는 시간이 2배 가량 늘어났다.
그런데 문제의 시작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2배 가까이 늘어난 증거 찾기 시간이기에 이전 방식대로 녹화를 진행할 경우, 안 그래도 장시간인 촬영 소요시간이 더욱 부담스럽게 바뀔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제작진은 해결책의 또 다른 문제점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 지금 나를 곤혹스럽게 만든 주된 원인이 만들어졌고 말이다.
“크흠... 김미녀 양은 왜 자꾸 날 쳐다보나? 그런다고 따로 기사 안 써주니까, 김칫국 마시지 말라고?”
나를 의심스럽다는 듯 쳐다보는 김미녀 역할의 김여정으로 인해 좀처럼 증거 찾기에 몰두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런 힐끔거리는 시선이 단지 나 자신을 범인으로 의심한다는, 심증에 대한 일종의 표현이었다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강기자님은 저한테 뭐 찔리는 게 있으신가 봐요?”
“찔리기는 무슨! 난 지금 억울하게 여기 와 있는 거라고? 난 어디까지나 정직하게 기사 써서 대중들한테 관련된 진실을 전달하는 게 천직인 사람인데, 오호라! 김미녀 양은 증거도 안 찾고 그러는 거 보니, 다 이유가 있나보군?”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그런 부류의 심증만을 담고 있지 않았기에 남몰래 흘린 진땀을 숨겨야만 했던 것이다.
“그게 무슨?”
“범인이 누군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증거도 안 찾고 있는 거겠지?”
“무슨 소리 하시.... 어? 아니에요!”
“크흠... 수상해. 정말.”
다행히 그런 그녀를 꾀어 다른 곳을 화제를 돌림과 동시에, 끈적끈적한 시선을 어느 정도 떼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그게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명탐정 K 시즌 1의 촬영이 끝날 때까지는, 어찌됐든 그녀와 마주치고 싶지 않아도 마주쳐야만 하는 상황을 감내해야 했으니까.
*
“이 음료가 무엇인가 역할을 한 것 같긴 한데... 흠...”
“저도 그거 발견했는데... 아무래도 죽이기 전에 그 음료가 무슨 역할을 한 거겠죠?”
중간 타임 때 서로 가진 증거를 공유할 수 있었는데, 이번 화에서는 장심사 역을 맡은 장현성 감독님과 눈이 맞아 증거뿐만 아니라 상당부분의 추리까지 공유하게 되었다.
“아마 그럴 거야. 여기 음료수 병 보면 아래에 하얀색이 남아 있잖아.”
이제 겨우 두 번째 촬영이기는 하지만, 촬영에 임할 때마다 느낀 것은 ‘이 프로그램 진짜 아귀가 잘 맞는 톱니바퀴인 것 같다.’였다.
“그럼 범인은 여자일까요?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힘이 부족한 여성이...”
“그럴 확률이 높지. 그런데 이 음료수가 진짜 범행도구 일 지가 확실하지 않단 말이야? 사체 쪽 봐봤어?”
“아! 거기 머리 뒤쪽에... 혹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그쪽 부분이... 마냥 약으로만 뭐를 했다고 보기엔... 의심쩍단 말이야?”
모든 출연진들이 살인사건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되어있었다. 따라서 추리의 방향을 조금이라도 잘 못 틀었다가는, 애먼 사람을 범인으로 몰 수 있을 정도의 복잡한 연결 고리로 인해 전혀 의외의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할 수 있었기에 방심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그렇고 너무 의심쩍은 게 많네요. 아! 그리고 갑자기 등장한 이 김미남이라는 존재가... 너무 뜬금없지 않아요? 박미용이랑 내연 관계라는 설정도 그렇고...”
“나도 그쪽 관련해서는 증거가 안 나오더라고.”
“일단 그러면 후반전에는 그쪽 부분이랑......”
물론 그런 부분을 통해서, 실제 범죄현장이 아니기에 가능할 방법을 발견할 수는 있었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살인사건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명탐정 K에서만 통용되는 일종의 법칙 아닌 법칙이 도리어 전혀 의심할 만한 것들이 나오지 않은 인물에게 추리의 화살촉을 돌리게끔 만들었으니까.
[잠시 뒤 후반 증거 찾기 시간이 시작되겠습니다. 출연자분들은 중간 타임을 마무리해주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이 프로그램이 전파를 탔을 때의 온, 오프라인 상의 반응이 더욱 기대됐다. 내 자신이 흥미진진해져 프로그램에 흠뻑 빠졌는지라, 시청자들 또한 이와 같은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길 바랐으니까. 뭐, 그러려면 편집 작업이 그만큼 정교해야 할 테지만.
“추리는 어느 정도 하셨나요? 강기자님?”
“아, 뭐 어느 정도는. 그나저나 김미녀 씨는 중간 타임 때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셨대? 뭐 좀 물어보려고 그랬는데 말이지.”
“제가 워낙 바빠서요. 뭐, 저도 강기자님한테 물어볼 게 있는데... 우리 서로 질문 하나 씩 해볼래요?”
후반 증거 찾기 시간에도 여전히 내 옆에는 김여정이 있었다. 아니, 중간 타임 때는 그렇게 찾아도 안 보이더니, 시간 딱 되니까, 내 옆에 등장하는 걸 보니 어떻게 보면 신기했다. 그 몸놀림과 눈치가.
“크흠... 그렇게 되면 내가 당연히 손해지. 난 김미녀 씨 행동이 아주 의심쩍은 사람이라서. 뭐, 범인이랑 괜히 증거 교환했다가 나만 손해 보는,”
“진짜 나 범인 아니라니까요?”
“어디보자. 김미남에 관한 증거가 어디 있으려나?”
‘시크릿 심사위원’ 건과 관련해 나를 의뭉스럽게 쳐다보던 눈빛과는 별개로, 이번 화에서 내가 가장 의심하는 인물이 김미녀였는지라,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참가자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대답을 하지 않거나 진실을 말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단, 범인에게는 거짓말과 진실 두 가지 모두가 허용된다.’
명탐정 K의 몇 안 되는 룰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기에 자칫 잘못했다가는 나의 추리 방향이 아예 흐트러질 수 있었다. 범인은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조항이 사상누각 같은 추리바탕에 금이라도 냈다간 1화와도 같은 실패를 맞이하게 될 테니 말이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김여정이 맡은 김미녀가 아니었다. 다만 가장 의심스러운 이가 김미녀의 동생 김미남이었기에, 궁극적으로 그녀가 가장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미리 조심하는 것일 뿐.
“근데 지갑에 본인 카드는 없고 왜 동생 이름 카드만 가지고 있어요?”
“동생이 제 뒷바라지를 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이렇다 할 일을 하고 있지 않았고요. 그래서 이번 슈퍼모델 선발대회를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준비했었어요. 살인 사건 때문에 슈퍼모델 선발대회고 뭐고 다 물거품이 되어버렸지만.”
“흠... 김미녀 씨는 죽은 이도도랑 고등학교 동창이었는데, 이번 대회 있기 전까지 연락도 자주 하고 뭐 그런 사이였나요?”
“아니요. 고등학교 다닐 때도 그냥 얼굴만 아는 사이여서 졸업하고 나서는 연락한 적 없... 아! 지금 중간 타임 때도 아닌데 자꾸 질문하시네요! 강기자님? 이거 너무 불공평 한데요? 저만 계속 대답하고.”
어쨌든 내게 시크릿 심사위원과 관련해 묻고 싶어 안달 난 김여정을 적당히 자극하며 원하는 답을 조금이나마 들을 수 있었다. 그래봤자, 김미남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고 살해 도구에 대한 수수께끼도 풀리지 않았지만.
*
“명탐정 K 2화의 범인은 김미녀입니다!”
성우 분의 목소리가 범인의 정체를 말하는 순간 장내에 복잡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그만큼 이번 화는 저번 화보다 추리를 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증거를 찾는 시간이 더 늘어났다는 점을 제작진 측이 고려해서인지, 추리의 난이도가 한층 높아진 것이다.
“범인을 맞춘 사람은 강지혁, 장현성 씨 두 분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번 화에서 아무도 범인을 찾지 못했던 것과 달리, 이번 화에서는 범인을 찾은 이가 무려 ‘두 명’이나 되었다는 점에서 모두의 얼굴엔 놀라움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들의 놀라움을 담은 시선들을 한 가득 받고 있는 나와 장현성 감독님은 서로 기뻐하며 포옹을 나눴고 말이다.
“나이스!”
“뭐야, 두 사람 아까 중간 타임 때부터 찰떡같이 붙어있더니, 너무 하네. 증거 찾았으면 공개 좀 해주지.”
“그게... 신연무 선배님은 다른 분들이랑 증거 나눔하고 계신 것 같아서...”
제작진이 꼬고 또 꼰 추리의 실마리를 용케 비집고 들어간 덕에, 그리고 그 실마리인 김미남을 우연치 않게 중간타임 때 한번 집고 들어간 덕에 처음으로 추리에 성공할 수 있어 기분이 너무 좋았다. 추리가 어려웠던 만큼 성취감이 말 그대로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날의 촬영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저는 며칠 뒤에 귀한 손님이 오시기로 해서요. 그거 준비해봐야 해서 오늘은 뒤풀이를 같이 하지 못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아! 뉴스 봤어요. 그래요. 얼른 가 봐요. 준비할 것 많을 텐데.”
“그럼 다음 주에 봐요. 지혁 씨.”
“네, 그럼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첫 화 촬영을 마쳤을 때처럼 가볍게 점심이나 함께하자는 얘기가 있었고 나 또한 어느 정도는 그 제안이 끌렸지만, 괜한 수고스러움을 감내하기 싫어 핑계를 대며 서둘러 녹화 장에서 빠져나왔다.
하아. 그때 음식평론회에서 마카롱 얘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아이돌 핫스타에서 프로젝트 데뷔 시즌 2와 관련된 안무를 제법 능숙하게 추지 않았어야 했다.
괜히 주위의 시선을 끌까봐 숨겼던 사실이, 어중간하게 공개되는 바람에 더한 주위를 끌 게 되었으니 말이다.
에라 모르겠다. 후우.
*
“공사는 모래부터 10일 정도 잠시 중단해주시고요. 공사 자재들이랑 그런 것들은,”
“공사 자재들은 흉물스럽게 보이지 않게 잘 정리해두도록 하겠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비록 점심 자리에서 실례되지 않게 빠져나오기 위해 마이켈 총리를 변명으로 사용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이것이 거짓말은 아니었다.
모레 오전 즈음 일본과 중국에서의 공식일정을 마칠 마이켈 총리가 초대한 적 없는 초대를 받고 한국에 도착할, 그것도 나의 집에 올 예정인 만큼 부족하게 준비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다행이고요.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그리고 이거.”
“예? 이건...?”
“본채 보니까, 마음에 들더라고요. 정원도 그렇고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는 의미로... 많지는 않고요. 공사하시는 인부 분들 다 같이 해서 회식 한번 하시라고 준비했어요.”
“이렇게까지 해주시지 않아도...”
“제 마음 편하자고 드리는 거니까. 회식 한번 거하게 하시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이, 이렇게나 많이! 감사합니다. 지혁 씨.”
어쨌든 인부들에게 혹시나 생길지 모를, 별채 공사자재들로 비롯될 문제들의 예방을 부탁한 뒤, 본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할 건데? 오늘 회사에 기자들 엄청 몰려든 거 알아?”
그런데 본채로 들어서기도 전에 들려온 목소리 때문에, 몇 시간동안 노동을 한 탓에 쌓인 두뇌 피로를 해소하려던 의도를 접어야 했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그냥 이대로 있을 거야. 그게 최선이잖아.”
“어휴... 그러게 왜 삼촌 몰래 그런 걸 해서는. 삼촌한테 말 했으면 어련히 알아서...”
내가 시크릿 심사위원으로서 프로젝트 데뷔 시즌 2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점이 언론에 대서특필되자마자 수많은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었다.
당장 내게 해당 기사가 떴음을 알려준 재성 삼촌부터가 내게 섭섭함을 담아 잔소리를 했으니 말이다.
“프로젝트 데뷔 측에서 정식으로 정체 밝힐 의사 있으면 자리 따로 마련해준단다.”
“내가 밝히고 싶을 때 밝혀진 게 아니니까. 그냥 대응 안하는 걸로 하자. 삼촌. 어차피 나 곧 미국 가잖아.”
“말은 쉽지.”
하지만 그 어떤 잔소리도 민재 삼촌과 비교할 수 없었다. 때마침 그 기사가 터지기 전, 아이돌 핫스타에서 내가 시크릿 심사위원이다는 사실을 몰랐었기에 막대한 피해를 본 민재 삼촌이었기에 그 잔소리의 강도가 사뭇 달랐던 것이다. 뭐, 물론 삼촌 몰래 내가 스케줄을 소화했다는 점이 더 큰 이유가 될 수도 있겠지만.
“네가 밝힐 의사 있으면 그동안 편집했던 너와 관련된 영상 같은 것도 다시 편집해서 홈페이지에 게시할 거고 프리티 스타 멤버들이랑 자리도 주선해준다니까, 다시 한 번 생각해봐. 네 말대로 미국 가면 잠잠해질 수 있겠지만. 그래도 생각이 바뀔 수 있는 거니까.
어쨌든 프로젝트 데뷔 측에서도 이와 관련된 연락을 취해 왔다하니, 그 파장을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연예 면을 가득 채운 내 기사에, 핸드폰을 외면하면서 까지 이를 떠오르지 않으려 했던 내 노력은 수포가 되어버렸고 말이다.
“아 몰라. 생각은 해볼게. 그러니까, 그 얘긴 이제 그만. 오케이?”
“어휴. 내가 못산다.”
“삼촌 그런데 아직 집에 안 갔어? 동혁 삼촌은 집에 간 것 같은데?”
그나저나 저녁때가 다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집에 갈 생각이 없는 듯한 민재 삼촌의 모습이 뭔가 지나치게 홀가분해보였다. 아니, 동혁 삼촌도 집에 갔는데, 아직까지 뭐 하는 거야?
하아. 이거 또 내 핑계대고 무슨 일을 벌인 것 같아 불안했다. 안되겠다. 사모님한테 전화를 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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