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86 2019 =========================================================================
#386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분명히 알아서 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시중을 들던 이들이 사라지자마자 언성을 높이는 이로 인해 사내는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이것 좀 보세요. 이것 좀!”
지금 이곳은 밀폐된 공간. 그 누구도 사내와 눈앞에 있는 이의 대화를 엿들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일까. 사내를 향한 거친 분노표현은 좀처럼 누그러질 생각이 없는 듯 했다.
[박아진 대통령의 국빈 초청으로 인해 방한할 것으로 예측됐던 마이켈 총리 내외의 방한이 사실은 강지혁의 초청에 의한 것임이 밝혀져 온, 오프라인 상으로 뜨거운 관심......]
[국내외 일정으로 박아진 대통령의 국빈 초청에 난색을 표하던 마이켈 독일 총리가 개인 휴가를 써서까지 강지혁의 초청을 받아들이다? 문화대통령으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낸 강지혁! 전 세계적 영향력의 위엄이 이 정도까지?]
대통령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가 이다지도 중년인에게 언성을 높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는 그만큼 그녀가 이번 사안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 딴따라랑 비교를 당해야겠어요? 이 나라의 대통령인 내가?”
“크흠...”
지금껏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자라왔던 이였기에 더욱 지금의 기사들에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지금 그녀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확실히 자각하고 있었으니 오죽 할까.
“관련 기사들에 관해선 이미 상응하는 조치를 내려놨으니, 곧 정리될 겁니다. 그러니,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지금 나랑 장난하세요?”
그래서인지, 사내가 그런 대통령의 언짢은 마음을 풀어보려 나름의 애를 썼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당사자는 다시 담을 마음이 없는 듯 했다.
“어떻게든 자리를 마련하세요.”
“예? 그게 무슨?”
“독일 총리가 공항에 도착한 순간 국빈 방문 형식으로,”
“대통령님!”
그런 마음을 여실히 겉으로 드러내는 대통령으로 인해 중년인의 인상이 이내 눈에 띄게 찌푸려졌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고나 내뱉은 것인지.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생겨버렸다는 점에서 중년인은 눈앞이 아찔해짐을 느꼈던 것이다.
“개인 휴가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것 인만큼 정치 쪽 접촉은 원치 않는다는 주한 독일 대사관 측의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국빈 방문 형식으로 마이켈 총리를 맞이한다는 것은...”
“그럼 나보고 지금 이걸 참고 버티라는 건가요? 이걸 보고도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유럽 연합 측과의 FTA가 눈에 띄게 갈등을 빚고 있는 현 시국에 고작해야 자존심 때문에 저런 행동을 내보인다는 점에서 중년인의 입술은 바짝바짝 타들어가기만 했다. 물론 이런 사람인줄 몰랐던 것은 아니다. 눈앞에 있는 대통령을 이렇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니라 그녀를 어렸을 때부터 측근에서 보좌했던 자신이었으니까.
“현재 유럽 연합 측에서 FTA와 관련해서 저희 측에 지속적으로 공식 서한을 보내고 있으며, 관련 공식 발언의 수위가 점점 세지고 있는,”
“누가 그걸 몰라요? 그러니까, 내가 이러는 거 아니에요!”
자신이 그녀를 이용하기 편하게. 그래서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그녀를 프리패스라 칭하고 있는 현재에 들어서 빛을 발했다. 법이든 관례든 모든 장애물은 그녀의 이름 아래 무용지물이 되었고 이에 대한 결과물은 고스란히 그의 주머니로 들어왔으니까.
하지만 지금처럼 복잡한 상황이 되자, 이는 역설적이게도 그의 발목을 잡아버렸다. 상황파악과 더불어 이에 따른 해결책까지 자신이 강구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머물고 있는 독일인 유학생들과의 오찬 그리고 주한독일 대사관 직원들과의 간담회가 공식 일정을 잡혀있다 합니다.”
“그런데요?”
“이런 행사들과 더불어, 마이켈 총리 내외의 경호 관련해 저희 측에서 편의를 제공하기로 했으니 이것으로 접점을 만들어보도록 외교부에 지시했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시면 대통령님께서 원하는 그림으로 최대한 만들어보겠습니다.”
외교부 장관, 기재부 장관 하다못해 정부의 요직을 맡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는 자연스레 대응을 대통령에게 건넸다.
“그렇게만 된다면 대통령님의 국빈초청으로 한국에 왔지만, 개인 휴가를 명분으로 방한한 만큼 강지혁을 빌미로 삼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 될 것입니다.”
자신의 말이 아니고서는 대통령을 독대할 수조차 없는 무늬만 장관들의 대책보다는 지금 상황에서 그가 건넨 말 한마디, 한마디가 곧 그녀의 뜻이자 의도가 될 테니까.
*
“Oh my gosh!”
계속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여인을 보며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씁쓸함을 애써 삼켜버렸다.
내 정체가 들킨 순간, 재빨리 스태프들에게 눈치를 줘 자리를 빠져나와야만 했다. 자신이 얼마나 놀랐는지를 자랑이라도 하듯 그녀의 놀란 목소리와 표정, 행동은 주변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니까.
어쨌든 내가 이 섬에 있다는 사실이 세어나갈 경우 나는 물론이고 배우 식당 촬영까지도 꽤나 고달 퍼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지금 나의 곁에는 여전히 그녀가 있었다. 현재 내가 이곳에서 촬영 중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갈 경우 촬영에 지장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을 털어놓아 일종의 양해 아닌 양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다행히 그녀는 나의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그런 그녀의 말을 믿든지 안 믿든 지와 상관없이 이는 내게 꽤나 큰 안심을 가져 주었었다. 허나, 내 옆에서 걷고 있는 이가 그녀 혼자가 아니라는 게 나의 예상 밖이 되어버렸다.
[우리 또 보네요?]
그녀가 그 넓은 해변에서 나를 찾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나를 끝내 찾아낸 것이 아니었다. 내가 그녀가 원래 있었던 곳에 있었을 뿐.
[한번쯤 연락할 줄 알았는데, 가기 전날까지 끝내 안하네요. 자존심 상하게?]
내가 스태프들과 음료를 마시기 위해 자리 잡았던 곳이, 본디 그녀가 일행과 함께 자리 잡았던 곳이라는 점이 오늘 사태의 전환점이 되어버렸다. 단순 해프닝으로 지나칠 뻔했던 사건이 이렇게 줄줄이 미녀들을 대동한 채 가게로 돌아오게 만들었으니까.
[그래도 이해는 되네요. 방송 촬영 중이었고 당신이 그 ‘강지혁’이었다니까. 모자랑 선글라스로 잘도 숨기고 다니네요?]
[하하...]
더욱이 그 미녀들이 잠시뿐이지만, 안면이 있는 이들이었으니 오죽할까.
[코룬 섬으로 가는 건가요?]
[아, 네... 그런데 무슨 일로?]
[우리 같이 놀래요? 나랑 내 친구도 코룬 섬으로 가거든요. 다음 배로.]
[아쉽지만, 그게 좀 힘들겠는데요?]
[아시안 남자들은 아시안 여자만 좋아한다는, 뭐 그런 건가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우리가 마음에 안 들어서?]
코룬 섬으로 향하는 배를 타기위해 터미널에서 잠시 대기를 했었다. 그리고 그때 검은색 비키니를 입은 두 명의 여인에게 동행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 아닌 제안을 받았었다.
[아쉽네요. 뭐, 기회가 된다면 다시 볼 수 있겠죠? 여기 내 번호에요. 마음이 동하면 연락해요. 알겠죠? 그럼.]
그때 당시에는 촬영 중이기도 하고 주변에 보는 눈들이 많아, 서린의 도움을 얻어 두 여인을 되돌려 보냈었다. 물론 아쉬운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정도로 그녀들은 매력적인 여자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연락을 해서 따로 만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게 접근하는 이들의 의도를 먼저 생각해야 되는 게 나의 위치였고 이곳에 온 이유자체가 애당초 방송 때문이었는지라 잡음이 나올 만한 일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뭐, 그런 주제에 정체를 들킨 것도 모자라 그런 의도가 무색하게 다시금 그녀들과 마주하게 되어버렸지만.
[하긴 잘 모를 거에요. 크리스탈이야 워낙 당신 팬이니까, 알아본 거지. 솔직히 우리는 당신이 강지혁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나서야 알아봤으니까. 뭐, 저기 당신 찍고 있는 스태프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하...]
[그나저나 영광이네요. 미스터 지 잘 봤어요. 솔직히 가수 강지혁 보다는 배우 강지혁이 더 좋거든요. 난. 뭐, 크리스탈은 당신이 배우 활동하기 전부터 팬이었지만.]
어쨌든 사인과 사진 그리고 ‘잠깐’의 대화가 그들이 입을 다무는 대신 요구한 조건이었는지라, 가게까지 오는 내내 그녀들과 대화 아닌 대화를 나누었다.
[사진 이거 SNS에 올려도 되나요?]
[크리스탈이라고 했죠? 이름이?]
[아, 네.]
[그... 올려도 상관은 없는데. 일주일 쯤 뒤에 올려주세요. 아무래도 촬영 때문에 사람이 너무 몰리면 조금 그렇거든요.]
[아! 그럴게요!]
의외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너무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겠지만, 대화를 나눠본 그녀들은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가볍게 털어놓을 것 같지 않았고 또한 미녀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남자로서의 본능을 한껏 충족시켜줄 만큼 매력적이었으니까.
[앨리스나 크리스탈은 당신의 팬이어서 저렇게 좋아죽고 있지만, 난 뭐... 번호 줬을 때부터 당신이 꽤 마음에 들었었거든요. 그쪽이 강지혁이라는 거 알기 전부터.]
[에?]
[오늘이 코룬 섬 마지막 날이라는 게 조금 아쉽네요. 후훗. 뉴욕에 올 일 있을 때 그 전화번호로 연락해요. 당신 전화는 언제든 환영이니까? 아! 그리고 내 이름은 스테파니에요. 다음에 만날 땐 스테파니로 불러줘요.]
그렇게 가게 부근 해변에 도착했을 때가 되어서야 그녀들과의 갑작스러운 산책은 마무리될 수 있었다. 얼굴에 나름의 아쉬움을 드러낸 그녀들처럼 나 또한 아쉬움이 느껴져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어쨌든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것이니까.
그나저나 아까부터 줄곧 느낀 건데, 저 여자 묘하게 낯이 익었다. 단순히 몸매가 좋고 얼굴이 예뻐서가 아니라, 저번에 선착장에서 내게 번호를 건넸을 때부터 느꼈는데 어디서 분명히 본적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가만 보니 자신을 스테파니라고 부르라는 저 여자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들 또한 낯이 익었다. 흐음.
물론 절대로 내가 뉴욕에 갔을 때 따로 연락을 하려고 그런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니다. 진짜다. 진짜 본 적이 있다. 크흠.
*
[지혁아,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다들 걱정하고... 그런데 그 여자들은 누구?]
[뭔데, 뭔데? 저 여자들 뭔데? 아! 대박! 그때 그 여자들이지! 맞지! 그렇지!]
분명 가게 앞 비치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서 그녀들을 떠나보낸 것 같은데, 막상 가게에 도착해보니 아주 난리가 나있었다.
제작진들과 주훈 삼촌 그리고 성준 녀석 거기다 서린까지. 하나같이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내게 뜨거운 눈빛을 보냈으니 말이다.
[야! 따로 만날 거면 같이 가야지! 너 근데 번호는 어떻게 알고 연락한 거야? 그때 나한테 쪽지 줬었... 야! 너 번호 외우고 나한테 관심 없다는 듯 쪽지 던진 거였냐? 와... 이런 고단수 새끼... 치사하다. 치사해.]
그런 시선들을 애써 외면한 채,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으로 상황을 종료시켰지만 그 후로도 아니, 방금 전까지 성준 녀석에게 꽤나 시달려야만 했다.
아니 저 자식은 무슨 말을 해도. 뭐? 치사해? 고단수? 너 서린한테 작업 걸고 있는 거 아니였냐?
도대체 점수를 따겠다는 건지 아니면 작업을 말아먹겠다는 건지 모를 녀석의 행동을 애써 무시한 채 방으로 먼저 올라와 버렸다. 그게 나나 녀석에게도 오히려 도움이 될 행동일 테니까.
뭐, 아무 일도 아니라고, 단지 정체를 들켜서 입을 막기 위해 사진도 찍어주고 잠시 대화를 나눈 것일 뿐이라는 말에 제작진들과 주훈 삼촌 그리고 서린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으니 해명은 이 정도면 되겠지. 암,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거지.
*
위기라면 위기라 볼 수 있는 사태를 맞이했지만, 그녀들은 끝내 약속을 지킨 듯 했다. 섬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는 지금까지, 이곳 섬 어느 곳에서도 나와 관련된 얘기가 흘러나오지 않는 듯 했으니까.
후우. 어쨌든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근 10일 동안 정신적인 피로감을 상당부분 덜어낼 수 있었다. 물론 식당일을 하는 동안 육체적으로는 꽤나 힘들었지만, 그 순간마저도 일상의 복잡한 문제들을 떠올리지 않아서인지 그저 좋았다.
뭐, 그 외적인 시간들은 말해 입 아플 정도로 좋았고 말이다.
그렇게 한동안 침대에 누워 지난 10일 동안의 여정 하나, 하나를 훑어보았다. 샤워를 해서인지 몸은 노곤했지만 이곳에서의 마지막 밤이라는 아쉬움과 지난 추억들 때문에 정신만큼은 말짱했다.
그래서였을까. 적다 볼 수 없는 피로감에 몸이 무거웠지만 테라스에 있는 의자에 앉아 끝내 맥주 한 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이내 볼 수 있었다.
숙소 정원 한 편에 나란히 서있는 남녀를.
“성준? 서린?”
너무나도 익숙한 이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소매로 절로 눈을 훔치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이곳 숙소에 출연자가 아닌 외부 인이 있을 리가 없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참 좋을 때다 싶었다. 두 사람 다 아이 돌인 만큼 겉모습부터가 주변 사람들에게서 부러움을 받을 만큼 완벽했고 무엇보다 웃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이 매우 행복해보였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모습들이 꽤나 부러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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