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85 2019 =========================================================================
#385
“물 진짜 맑네.”
“그러게.”
이제 매출에 얽매일 필요가 없어졌는지라, 장사를 일찍 접고 본격적인 관광에 나섰다. 그리고 그 첫 번째 관광은 당연하게도 물놀이였다. 아무래도 이곳이 섬이기도 하고 해양 스포츠와 아름다운 해변으로 유명한 만큼 이곳에 도착한 이래 줄곧 물놀이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삼촌 이리 주세요. 제가 자를게요.”
“어? 아니, 됐다. 지혁아. 뭐, 어려운 일도 아닌데. 그나저나 더 놀지 왜 먼저 들어왔어?”
어쨌든 가게에 비치된 선 베드에 드러누워 보니 그제야 바깥 풍경을 온전히 두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내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일진데, 지금까지 식당일로 신경 쓸 것들이 많아 구경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탄마저 나왔다.
“많이 놀았어요. 삼촌은 안 들어가세요? 물 안이 엄청 깨끗해서 훤히 보이더라고요. 물고기들도 많고.”
“그래, 그럼 삼촌도 한번 가볼까?”
“네, 다녀오세요. 제가 수박이랑 과일들 깎고 있을게요.”
주훈 삼촌이 다른 일행들처럼 스노클링 장비를 가지고 바다 속으로 떠나자, 고즈넉한 주변 풍광을 홀로 감상하게 되었다. 과일과 가벼운 알코올이 주는 약간의 흥분이 기분 좋은 바람과 만나니 절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Fly to the moon......”
그래서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됐고 말이다.
휴양. 말 그대로 내가 좋아하는 여유와 편안함을 즐길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비록 카메라들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고 스태프들 또한 우리들의 물놀이에 어느 정도 동참한 상태이지만 그래도 누구하나 나를 귀찮게 하거나 시선으로 하여금 따갑게 만들지 않았으니까.
“물놀이 하러 가게?”
과일도 다 깎았겠다, 환상적인 풍경을 가만히 앉아 바라만 보기엔 좀이 쑤셨는지라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했다. 어느새 옆에 와 깎아놓은 과일을 집어먹는 형식 삼촌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잠깐 해변 좀 걸어보려고. 금방 올게.”
“혼자 다녀 올 거야?”
아무도 모르게 움직였다면 모를까, 프로그램 PD의 눈에 포착된 이상 홀로 무엇인가를 한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휴식 시간이라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은 명백히 ‘촬영 중’이었으니까.
“아니, 가까이서 촬영하는 것만 아니면 상관없어. 그냥 걷는 것뿐이니까. 뭐, 정 안되면,”
“혼자 가고 싶으면 혼자 다녀와도 돼. 그 대신 너무 오래 사라지진 말고.”
“됐어. 그냥 멀리서만 찍으면 돼. 어차피 살짝 걷다 올 생각이었어.”
그래도 그런 내 속내를 짐작한 탓인지, 형식 삼촌이 짐짓 혼자 다녀오라며 나를 떠밀었지만 고개를 내저었다. 뭐, 어차피 거창한 걸 하려고 했던 게 아닌 그저 걸으면서 주변 풍경을 바라보고 싶었을 뿐이었으니까.
“오빠! 나 거북이 봤어요! 거북이!”
“응? 어디, 어디?”
“여기요. 여기로 와 봐요!”
그렇게 해변을 따라 걷다가 문득 일행을 살펴보니, 저마다 잘 놀고 있는 듯 했다. 주훈 삼촌은 발군의 수영 솜씨를 뽐낸 듯 꽤나 깊은 곳으로 갔는지 육안으로 볼 수 없었지만, 서린과 성준 녀석은 서로 근거리에서 머물며 바다를 즐기고 있는 듯 했으니까.
“어, 어?”
“조심해야지.”
“고마워요. 오빠.”
그나저나 성준 녀석의 연애 사업이 꽤나 잘 되어가고 있는 듯 해 조금은 뿌듯해졌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배경 때문인지 대충 보아도 절로 선남선녀 같았는지라 나도 모르게 부러워졌고 말이다.
뭐, 서린이 입고 있는 게 래쉬가드가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였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쨌든. 참 좋을 때다. 좋을 때야.
“서린아 저쪽으로 더 가보자. 저기가 물고기가 더 많다더라고. 아까 스태프 형이 그러는데.”
“그래볼까요?”
그 순간 좋은 풍경이 주는 풍부한 감성이 조금은 빛바래져버린 듯 해 고개를 녀석들에게서 다시금 바닷가로 돌려버렸다. 이제는 친구의 연애 사업에 흐뭇해하기보단, 지금 이 순간, 이 공간에 머물고 있는 내 자신에게 신경을 쓰고 싶었다. 어떻게 얻은 휴식 시간인데, 남만 부럽게 바라보다 끝나버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렇게 십여 분 가까이 해변을 거닐다보니, 피서객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리 가게 앞 비치처럼 외곽의 한산한 해변이 아닌, 이곳 코룬 섬의 메인 비치에 접어든 것이다.
아이스크림, 각종 과일 주스 그리고 해변 가를 흥겹게 만드는 음악까지.
우리 가게 앞 풍경과는 전혀 다른, 어떻게 보면 보다 익숙한, 시끌벅적한 해변 풍경에 나 또한 절로 어깨를 으쓱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순조롭게 이어지던 해변 산책길을 누군가가 시샘해서일까. 순간 느껴지는 인기척과 함께 가슴을 강타하는 누군가의 신체에 발걸음이 자연스레 멈춰지고 말았다.
“Oops!”
나 또한 해변을 보며 걸어가고 있었는지라, 딱히 잘잘못을 가릴 생각은 없었지만, 지금 상의와 머리카락에 느껴지는 불쾌감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아. 옷 이거 하나 밖에 없는데. 아 씨.
무슨 음료인지는 모르겠으나,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액체의 찐득찐득함에 순간 머리가 하얗게 변해버렸다.
“I'm really sorry... Are you okay?”
옆에서 내게 음료를 쏟아 부은 이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의 눈은 오로지 샤워 부스만을 찾을 뿐이었다.
머리카락과 상의에 묻은 찝찝한 액체를 가만히 두다간 하의까지 같은 꼴이 날 것 같아, 서둘러 상의를 탈의했다. 그리고 이내 발견한 샤워 부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Blah, Blah, Blah......
옆에서 뭐라, 뭐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미 그쪽은 나의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쏴아아아]
그렇게 흘러내리는 샤워부스에 찝찝함을 말끔히 털어내고 보니, 그나마 솟구쳤던 짜증을 다스릴 수 있었다.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과 몸 또한 따사로운 햇살과 더위에 이내 금방 뽀송뽀송해졌는지라, 그제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수건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니에요.”
아까 들었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제 갈 길을 갔는지 주변은 내게 수건을 건네준 배우 식당 스태프 2명을 제외하고는 꽤나 한가했다. 그것도 이내 샤워 부스를 이용하기 위해 다가온 일련의 무리들로 인해 옛말이 되어버렸지만.
어쨌든 어차피 미안하다는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도 마주치지 않고 이곳으로 곧장 발걸음을 옮겼는지라, 딱히 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따질 마음은 없었다. 뽀송뽀송해진 머리와 몸에 짜증스러움이 이내 사라져버렸기에 그런 것도 있겠지만 말이다.
“저기 바에서 시원한 음료라도 드실래요?”
“네?”
“저, 저희요?”
“저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따라오셨을 텐데, 제가 죄송해서 그래요. 수건도 구해다주셨고요. 그러니까, 잠깐이라도 저기서 쉬다가죠. 여기까지 왔는데.”
다만 옷이 아직 마르지 않아 카메라를 치워버릴 필요성이 느껴졌다. 내가 유학자도 아니고 영화나 드라마에서 상반신 노출을 한 적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굳이 사서 노출을 감행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사비 못 쓰게 하는 거 의미 없지 않나요? 더 이상 장사 안 해도 오늘 번 것까지 해서 충분히 놀고먹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래서 카메라를 들고 온 두 명의 스태프들에게 미끼 아닌 미끼를 던졌다. 나도 좋고 그쪽도 좋을 제안과 함께 말이다.
“사비 사용 문제도 있고 저희는 지금 일을 하고 있는 거라서요...”
“감사한데, 지혁 씨 혼자서 드시고 저희는 촬영을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 생각 이상으로 스태프 2명의 촬영에 대한 마음이 굳건했는지라, 조금 곤란하게 되어버렸다.
“두 분만 아무 말 안 해주시면 별 상관없을 것 같은데...”
“그게...”
“비싼 것도 아니고 주스 한 잔씩인데요. 뭘. 같이 가요. 제가 사드릴게요. 여기까지 오셨는데, 일만 하시는 건 조금 아쉽잖아요?”
아니, 뭐가 이렇게 직업의식이 투철해? 나 원 참.
*
[여기 있었네요. 한참동안 찾았어요.]
상황이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이렇게 되어버려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을 지경이니까.
[그냥 같이... 앉으시죠?]
[아니에요. 그... 저희 없다 생각하시고 편하게 쉬세요. 촬영은 안 할 테니까요.]
[네?]
[그게... 이렇게라도 해야 양심의 가책을 안 느낄 것 같아서요.]
두 스태프들을 꼬드겨 해변의 바로 데려온 것 까지는 내 계획대로였다. 다만, 스태프들은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앉게 됐다는 점이 계획 밖의 일이라면 일이겠지만 그것까지는 어느 정도 이해되는 행위의 범주 안에 들어있었다.
문제는 그 후였다. 내게 온 칵테일 한 잔에 다시금 환상적인 주변 풍경에 젖으려던 그때, 불청객이 나를 찾아왔다. 그것도 매우 상기된 얼굴을 한 채로.
[여기 있었네요. 한참동안 찾았어요.]
처음엔 갑작스럽게 다가와서는 나를 한참동안 찾았다와 같은 말을 하는 여인이 조금 이상하게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말이라는 게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을 한 여자가 수건을 들고 내게 할 말이라고는 좀처럼 생각하기 힘든 내용이었으니 말이다.
[누구?]
[아까 급하게 움직이다가 음료를 쏟았어요. 미안해요. 씻으러 가는 것 같길래, 수건을 가지러 갔었는데... 가보니까, 없어서...]
[아...]
하지만 이어진 낯선 여인의 말과 함께 자초지종이 이해되자 그런 의아함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 여자가 그 여자였다. 아까 내게 몸통 박치기를 시전한 후, 음료를 머리와 상의에 쏟아 부은.
이제 보니 목소리 또한 제법 익숙했다.
[미안해요. 수건 가져왔는데... 이젠 필요 없겠네요. 보니까.]
하아. 아까는 더운 날도 날이거니와 찐득찐득한 액체 때문에 짜증이 꽤 났었는지라, 얼굴도 마주보지 않고 그 자리를 벗어났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눈이라도 마주볼 걸 그랬다.
자신의 검은색 머리카락 색과 같은 비키니를 입은 여성의 얼굴은 꽤나 예뻤다. 지나가는 누구라도 돌아볼 정도로. 더욱이 쭉 뻗은 다리와 몸매는 군살하나 볼 수 없었으니 오죽할까.
그 순간만큼은 나와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곳에 스태프 2명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말았다. 뭐, 이내 이를 깨닫고는 표정관리를 해야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마음이 꽤나 풀어져 버렸나보다. 아니, 주변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여느 여행객과 다르지 않을 모습으로 보이기 위해 준비했던 파나마 햇과 선글라스는 여전히 착용 중이었다. 다만, 이 아이템이 소용없는 사람이 나타났고 바로 그 사람이 눈앞 사람이라는 게 문제였을 뿐.
“Oh, my gosh!”
미안한 표정을 한 그녀에게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을 뿐인데, 그 답변이라고 보기엔 꽤나 안 어울리는 대답이 들려와 처음엔 의아했다.
“Wow!”
이내 이어진 탄성과 함께 놀란 기색이 역력한 눈앞 여인의 얼굴을 본 순간 아차 싶었고 말이다.
하아.
그녀의 얼굴과 표정 그리고 몸짓은 내게 너무 익숙한 것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 여인의 모습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나를 알아본 이’의 모습이었으니까.
*
[독일 마이켈 총리의 목적지가 한국? 그런데 이걸 강지혁이? 주한 독일 대사관 측의 발표에 따르면, 이번 독일 마이켈 총리 내외의 한국 방문은 개인 휴가일정에 의한 것이며 이는 가수이자 배우로서 월드스타의 반열에 오른 강지혁 군의 초청에 의한 것이...... 당초 독일 마이켈 총리 내외의 방한이 현재 FTA와 관련해 유럽 연합 측과 갈등을 빚고 있는 상황을 타개해보고자 박아진 대통령이 마이켈 총리 내외를 특별히 국빈으로 초청함으로써 성사되었다는 예측이 주를 이뤘으나 이 같은 주한 독일 대사관 측의 발표에 따라 갑작스런 마이켈 총리 내외의 방한에 대한 이유가 상세히 드러나......]
-헐... 이거 레알임? 팩트?
-지렸다... 지금 한창 한국이랑 FTA 재협상해야 한다고 시끄러워서 당연히 박아진이 초청한 건 줄 알았는데... 클라스 후덜덜 하네...
-듣기로는 박아진 대통령이 마이켈 총리랑 프랑스 대통령, 영국 수상까지 한국에 초청한다고 보냈다 함. 그래서 이번에 마이켈 총리 내외 왔을 때 박아진 대통령이 초청한 거라고 언론에서 그랬던 거고. 그런데 아니었네. 와... 강지혁 가수 맞냐?
-강지혁은 이미 가수 급에서 벗어났지... 말 그대로 월드 스타임. 월드 스타. 와... 서린도 따먹고... 하긴 그냥 잡숴달라고 달라들 여자가 태산일 텐데 서린이 대수냐.
-저번에 마이켈 총리랑 리우 올림픽 개막식도 같이 보지 않았음? 그걸로 친해졌나보네. 한국으로 초대도 하고.
-크크... 근데 웃기지 않냐? 대통령이 초청했을 땐 바쁘다고 거절했는데, 강지혁이 초대하니까, 개인 휴가내서 오는 거? 지렸다... 와... 팬티 또 갈아입어야 겠네. 후아...
-박아진 무시 잼. 강지혁 초대 꿀 잼. 개인 휴가까지 써서 와 버리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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