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81 2019 =========================================================================
#381
“저번에 말씀하신대로 마이켈 독일 총리 측에 외교부에서 정식으로 초청 의사를 보냈다고 합니다. 다만...”
‘보냈습니다.’라는 말만 꺼낼 수 있었다면 적어도 오늘 만큼은 그나마 편하게 보고를 마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게 문제였다.
“‘보냈습니다.’면 ‘보냈습니다.’지. 다만?”
“그것이... 중국, 일본 국빈 방문을 끝으로 공식 일정은 종료이며, 이번 한국행은 개인 휴가일정으로 부부내외가 오랜만에 함께하는 개인 시간인지라 한국 측의 양해를 부탁한다는 답신이...”
[쾅]
자신의 뜻대로 상황이 흐르지 않았을 때, 중년인의 보여줬던 행동은 오늘도 여지없이 그의 집무실에서 벌어졌다. 그리고 그런 중년인의 분노를 보고하던 사내는 오롯이 혼자 견뎌내야만 했다.
“숙소 및 방문지 통제에 관해서도 이미 모두 결정된 상태라며 외교부 측의 제안을 정중이 거절했다고 합니다. 일단 외교부 측에서 주한 독일 대사관 측에 추가적으로 요청을 했지만 그쪽에서 공식적인 자리는 계속해서 거절을...”
“으드득... 머무르기로 한 호텔은?”
“예?”
“호텔에서 머무를 거 아니야! 씹 새끼야!”
“죄, 죄송합니다.”
물질적으로는 너무나도 풍족했다. 자신의 인생에서 이런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상상도 하지 못했을 정도로.
“머무르는 호텔이 어디인지 확인해. 그리고 어떻게든 접점을 만들어. 이번 기회 아니면 따로 끈을 만들기 힘드니까. 알겠어? 도대체 몇 번을 쳐 말해야 알아듣는지. 하아. 이래서 개돼지들은...”
부모님은 정기 건강 검진 그리고 동생의 자취방과 대학 장학금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의 가족은 크고 작은 혜택을 그 덕에 누릴 수 있었고 그 또한 번듯한 오피스텔에서 살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의 괴리감은 그를 항상 괴롭혔다. 기뻐하며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부모님과 고마움에 눈물과 기쁨의 웃음을 보이던 여동생이 아니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정도로.
“저, 저기...”
“뭐, 이 새끼야! 아직까지 거기 서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얼른 가서 죽이든 밥이든,”
“대표님 그것이... 예전 한남동 외인 아파트에 자리 잡은...”
“뭐?”
“저번 리우 올림픽 때의 접점을 계기로, 이번 마이켈 총리 내외의 한국 방문은 강지혁의 초청에 의한 것이고 따라서 숙식은 강지혁의 새로운 저택으로 알려진 구 한남동 외인아파트 부지에서, 휴가 기간 동안의 안내는 강지혁의 주가 되어 주한 독일 대사관 측이 보조,”
[퍽]
“윽!”
“이 개새끼가!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일처리를 무슨 이따위로!”
[퍽퍽]
“죄, 죄송 윽! 하, 합니다. 죄, 죄송합니다. 윽!”
그렇게 가족들의 행복과 기쁨에서 오는 감정들을 양분삼아 심심치 않게 얼굴과 온 몸에 상처를 입는, 눈앞 중년인의 폭력성을 사내는 감내해왔다. 지금처럼. 또한 꾸준히.
그리고 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만 같았다.
*
“오빠 피부 엄청 좋네요. 부러워요.”
“그, 그래? 하하... 서린이 너도 피부 좋은 것 같은데 뭘.”
“아니에요. 저는 조금만 피곤해도 뭐가 자꾸 나서... 어?”
“응?”
“오빠 잠시 만요. 오빠 괜찮아요? 여기 목 쪽에 두드러기 같은 거 올라온 것 같은데... 어떡해...”
“어, 어?”
오늘도 어제처럼 광대 분장을 위해 서린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게 나를 꽤나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서린이 분장을 해주는 것이 날 곤혹스럽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다만, 얼굴을 가까이 마주보는 것이 자꾸만 몇 시간 전의 꿈을 되새기게 한다는 게 문제였을 뿐. 아니, 얘는 갑자기 얼굴을 왜 이렇게 들이대는 거야? 부담스럽게.
다시금 뇌쇄적인 눈빛과 손과 혀 놀림이 떠올랐는지라 가까이 다가와 있는 서린을 밀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서른을 코앞에 두고 민망하기 그지없는 꿈을 꿨다는 점이 약간의 죄책감과 함께 나를 당황케 했기에 지금은 조금의 거리라도 서린을 더 멀리 두는 게 좋을 것 같았으니까.
“서, 서린아?”
“네?”
“조금만 떨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
“아, 아! 죄, 죄송해요...”
하아. 동생 같은 애한테 무슨 짓이냐. 어휴.
“목에 있는 건, 화장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더워서 땀띠가 났나보네.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별 거 아니니까.”
“네? 네...”
“나 원래 여름에 목에 땀띠 같은 거 자주 났었거든. 예전에는.”
“그렇구나...”
“그래도 고마워. 신경 써줘서. 자! 그럼 얼른 끝내버리자. 오빠는 오늘 사온 재료 손질해야 되고 서린이 너도 테이블 정리해야 되니까.”
“네!”
화제를 돌려버리려 했다. 민망한 상상을 떠올리기엔 죄책감이 들었고 또한 가게 오픈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할 일이 꽤나 많았으니까.
그런데 그걸 불청객이 방해해버렸다.
“야, 이불 빨래할 거면 같이 하지. 너 혼자만 하냐? 나도 땀 많이 흘려서 이불 찝찝한데.”
[콜록콜록]
“뭐?”
이 자식이 다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니, 도대체 내가 이불 빨래를 한 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할 때 같이 하지. 정 없게.”
괴상망측한 꿈에서 벗어나자마자 뒷수습을 해야만 했다. 팬티는 그렇다 쳐도 침대시트와 이불커버까지 꿈의 흔적이 남아있었는지라, 서두르지 않는다면 큰 일이 일어남은 너무나도 자명했으니까.
“하하... 그건 어떻게 알았냐?”
“자다가 잠깐 깼는데, 문이 열려있더라고. 그래서 닫으러 가다가 봤지. 아직 해도 안 떴는데, 이불이며 침대 시트 들고 세탁실 가는 거. 어? 그거 너 아니야?”
“하하... 자다가 물을 쏟아버려서. 찝찝하기도 하고 잠도 깨버려서. 하하...”
몸이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 건강해도 문제는 문제인 것 같다. 이제 서른을 앞두고 있는 나이에 중, 고교생들이나 꿀 법한 꿈을 겪었으니 말이다.
하아. 외롭긴 외롭구나. 강지혁.
*
“I'm an ordinary person. To tell the truth, I'm a bit of a bore.(나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사실, 나는 좀 지루한 사람이죠.) When joking, even it makes you sad.(농담을 할 때면, 심지어 그 농담은 당신을 슬프게 만들 테니까요.) However, I have a wonderful talent.(하지만, 나는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요.) Because people who listen my song will be happy.(그 이유는 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때문이죠.)”
어제와 마찬가지로 공연의 시작은 정규 4집에 수록된 “Thank You For The Singing”이었다. 날이 더운데서 그치지 않고 습도까지 높은 이곳 날씨에서 꽤나 신이 나는 노래를 부르기보다는 적당히 잔잔한 노래가 그나마 시원한 실내에서는 보다 어울릴 수 있겠지만 말이다.
“So, I'm pleasant.(그래서 나는 너무 즐거워요.) Thanks to that people, I also be happy.(그 사람들 덕에 나 또한 행복해질 테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는 충분한 메리트가 있었다. 가사 내용 말마따나 이 노래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그런 마력을 지녔고 이는 드문, 드문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나, 둘 식당 안으로 끌어들였다.
“Now, I want to say Thank You For The Singing.(지금 이 순간 음악에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Nobody can live without singing.(아무도 음악이 없인 살 수 없어요.) Now, I want to say Thank You For The Singing. For giving it to me(지금 이 순간 음악에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것들을 내게 주셔서요.)”
겨우 노래 한 곡을 끝냈을 뿐인데 놀랍게도 식당 안은 네다섯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Ladies & Gentleman. Welcome to our restaurant! I'm a mr. joker, and work here as a assistant cook & clown singer. (신사숙녀 여러분. 저희 식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보조 요리사이자, 광대 가수인 조커입니다.)”
물론 어제에 비한다면 이는 적은 숫자였다. 하지만 어제는 시식회를 병행하여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7명의 손님들을 끌어당길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꽤나 괜찮은 숫자임이 틀림없었다.
[아름다운 금발의 레이디. 어느 나라에서 오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푸훗. 나는 스페인에서 왔어요.]
[열정의 나라 스페인에서 오셨군요. 올라!]
어쨌든 첫 시작이 좋았는지라, 오늘 계획했던 것들을 보다 활기차게 이어나갈 수 있었다. 보다 소통에 신경을 쓴 덕인지 서린이 분주히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손님들 또한 지갑을 거리낌 없이 연 것 같았고 말이다.
[똑]
[똑]
[쏴아아]
그런데 그때였다. 호재와 함께 시작된 공연의 두 번째 노래를 부르려던 찰나, 한없이 맑던 하늘이 갑작스레 어두워진 것은.
그리고 예기치 못한 호재가 우리들을 찾아온 것은.
*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비에도 더위가 완전히 물러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높은 습도가 빗방울에 힘입어 따사로운 햇살이 없는 자리를 메웠으니까.
하지만 확실히 더위의 기세가 한풀 꺾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가칭 배우식당의 분위기에 큰 변화를 준 것 또한 피할 수 없었다.
[몇 분이세요?]
[일행은 총 8명이에요. 4명은 장비 챙겨서 곧 올 거고요.]
주요 번화가 및 메인 비치와는 거리가 있는, 한쪽 끝에 자리 잡은 식당인 만큼 상대적으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드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광객들의 모습을 그나마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이 주위가 인적이 드물다는 점 이었다.
[여기 테이블 붙여드릴게요. 여기에 앉으시면 될 것 같아요. 괜찮으시죠?]
[스칼렛? 어때?]
[뭐, 여기로 하자. 다른 데 들어갈 데도 없는데. 존! 다른 사람들 보고 여기로 오라고 톡 바로 보내. 날도 더운데 괜히 비 맞다가 감기 걸리면, 그것보다 우스운 꼴은 없을 테니까.]
인적이 드물기 때문에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여유와 고요 속에서 스노클링과 패들보트와 같은 레저 활동을 즐기는 것은 사람들에게 있어 이곳 코룬 섬의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가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오케이. 여기로 바로 오라고 할게. 그나저나 비가 갑자기 오네? 그것도 뜬금없이?]
[저번에도 그랬잖아. 아! 넌 온지 며칠 안 돼서 모르나? 어쨌든 예전에 왔을 때도 이런 적 종종 있었어. 여기 맑았다가 갑자기 비 오는 데거든. 그러다가 갑자기 또 원래대로 더워지고.]
그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비는 가벼운 차림의 관광객들이 감내하기에는 상당부분 무리가 있었는지라, 배우 식당은 때 아닌 호재를 맞이하게 되었다. 근처에서 스노클링을 하고 있던, 8명이나 되는 큰 무리의 관광객들이 비를 피해 그들의 식당을 찾았고,
[이거 무슨 냄새지? 꽤 맛있는 냄새잖아?]
[거기서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들어와. 지금은 그것보다 비 피하는 게 중요하니까.]
[여기 원래 식당이 있었나?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없었던 것 같은데?]
[일단 들어오라니까?]
[한국 식당? 음... 한국 음식은 안 먹어 봤는데... 괜찮으려나?]
[야!]
[알았어. 들어간다. 들어가!]
주방을 시작으로 내부 홀에 퍼져나가던 각종 전들의 맛있는 냄새가 비에 힘입어 새로운 손님들을 계속해서 식당 안으로 유혹했던 것이다.
[일행은 4명뿐이신가요?]
[네, 4명이에요.]
[여기 의외로 나이스 하잖아? 조용하고 음식 냄새도 꽤 훌륭하고. 거기다 공연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저기 광대? 뭐, 어쨌든 마이크 들고 노래도 부르는 것 같고.]
[요 앞 테이블에 앉으시면 됩니다. 메뉴판은 곧바로 가져다 드릴게요.]
도대체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한 시간에 가게 앞을 지나는 사람들을 많아봤자 대여섯 명이 전부였는데 비가오고 10분도 채 되지 않아 배우식당은 10명이 넘는 손님들을 추가로 맞이하게 되었다.
[저기 저 서빙하는 여자 꽤 예쁜데? 꼬셔볼까?]
[그러세요? 그럼 난 저 주스 만들고 있는 귀염둥이 번호나 따볼까?]
[야, 너네 또 왜 그래? 그러다가 부부 싸움 나면 오늘 숙소에 못 들어온다? 난 여기 휴가로 온 거지, 너희 싸움 구경하러 온 거 아니니까. 맞지? 허니?]
그리고 이는 의미했다. 배우식당이 보유한 4개의 테이블이 모두 만석이 되었음을 그리고 대놓고 이를 갈며 어제의 복수를 노리던 출연진들의 마음에 하늘이 응답했다는 것을.
그래서 공연하는 것도 잠시 중단하고 한쪽 구석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이와 눈을 자신감 있게 마주쳤다. 입이 귀에 걸리도록 소리 없는 웃음과 함께 어깨를 으쓱하며.
“저기 지혁아...”
그렇게 이내 들려오는, 눈이 마주친 이의 목소리에 그 순간만큼은 신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부처님, 예수님, 알라신님.
============================ 작품 후기 ============================
예약 아이템 연재분입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셔서 감사합니다.
PS. 네이버에서도 동시연재 시작했는데요. 평가가 안좋아서 시무룩하네요. 더욱 정진해서 칭찬받을 수 있는 작가 되겠습니다. 좋은 꿈 꾸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