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78 2019 =========================================================================
#378
길음 재개발 지역.
지난 2006년 부지 매입 이후, 한동안 대형 골프연습장으로 운영되었지만 현재까지 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거대 부지이다.
그런데 10년이 넘게 방치된 이 부지가 대학생 기숙사로 이용된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은 작년 10월. 한국장학재단과 전국은행연합회가 관련 협약을 맺고 600억 원에 달하는 재원을 마련해 기숙사를 짓기로 한 것이다.
따라서 대중들은 물론이고 지역 주민들은 일제히 이 같은 기숙사 건립 건에 찬성의사를 표하며 환호했다.
대학 등록금이 한해 1천만 원. 그리고 각종 생활비가 달에 적게 잡아도 6, 70만원을 웃도는 현실에서 기숙사는 청년들의 부담을 그나마 줄여줄 수 있는 대안이자 지역 주민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낙후된 지역의 활력을 되살리는 절묘한 방편이었으니 말이다.
더욱이 대지면적 21,060㎡, 6370평의 거대 부지에 4호선 길음 역에서 도보로 10분 이내의 자리라는 점 그리고 혜화, 안암, 회기 근처의 대학들과 충무로 근처 동국대 등 10여개가 넘는 대학들과의 접근성까지 좋았으니 오죽할까.
하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기숙사 건립 건은 무산이 되고 말았다.
해당 부지가 청소년시설 건립을 목적으로 서울시로부터 특별교부금을 받아 매입되었기에 이를 위해서는 장학재단 측에서 당초 계획안으로 세웠던 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기숙사 건립 건에 비해 1백억의 추가예산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국 재단 측과 성북구청 측의 의견차는 좁혀지지 않았고 대학생들에게는 기대에 찬 시선과 바람을, 지역 주민들에게는 지역 경제 활성화에 대한 기대를 받았던 기숙사건은 없던 일이 되어버린 듯 했다.
방금 전 어느 노년 신사의 방문이 있기 전까지 말이다.
*
“정말?”
성준 녀석이 인터뷰를 하러 간 사이 주훈 삼촌이 찾아와 자연스레 맥주를 마시게 되었다. 내가 인터뷰 마지막 차례인지라, 인터뷰 전에 술을 마신다는 게 조금 걸릴 수도 있겠지만, 뭐, 맥주 한 캔쯤이야.
그러다가 갑작스런 촬영 돌입 때문에 미처 나누지 못했던 근황을 얘기하다보니 자연스레 최근에 기획하고 있던 것들을 털어놓게 되었다.
“네? 아... 지금은 아직 구상중이고요. 부지를 알아보고 있는데... 사실 원래 목적은 그게 아닌데 예전에 하루세끼 찍을 때 삼촌들이랑 나눴던 얘기가 살짝 떠오르더라고요. 그래서 일을 조금 크게 하기로 했어요.”
저번 건준이와의 짧은 만남은 많은 것을 나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들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삼촌이 내게 건넨 정신적, 물질적인 지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새삼 다시금 깨달았고 말이다.
그래서 큰 결심을 하게 됐다. 그다지 부담가지 않은 선에서 기부 아닌 기부를 하기로. 그런데 일을 진행하려다보니 수년전 주훈 삼촌, 현중 삼촌과의 대화가 떠올랐었다.
[그럼 뭐, 배우 후배들은 이런 거 없어?]
[네?]
[장난이야. 장난.]
[그럼 배우 지망생들한테 가장 필요한 건 뭔데요?]
[응?]
그때 당시 별자리, 탄생석 라이브 카페를 통해 후배 가수들을 위한 사업을 하고 있다는 내 말에 두 삼촌들은 굉장히 대견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었다. ‘그런 혜택이 배우지망생 후배들에게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면서 말이다.
물론 그때 삼촌들은 내게 부담을 주려는 의미로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 또한 그다지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으며 그래서인지,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별다른 관련 활동을 하지 않았으니까.
“지혁아!”
“네, 네?”
어쨌든 내가 후원하는 고아 아이들의 후원 규모를 늘리려던 찰나에, 건준이를 통해 대학생들의 현실 아닌 현실을 마주하게 된 것이 지금처럼 일을 크게 만들어버렸다. 즉흥적인 성격답게 바로 관리사님에게 관련된 사안을 부탁드렸으니 말이다.
“장하다. 장해.”
“에이, 뭘요. 그런데... 음... 삼촌이 도움 좀 주셨으면 좋겠어요. 학교 측이랑 연계해서 했으면 좋겠기도 하고 배우 지망생들이나 연극하는 청년들 쪽이랑은 연관이 없어서요. 뭐, 관리사님 통해서 따로 알아볼 수는 있지만 그래도...”
“그래, 그래 그건 내가 삼촌이기 전에 당연히 해줘야하는 일이지. 그래, 그래.”
그런데 단순히 어느 정도의 조언과 도움을 얻으려고 주훈 삼촌에게 이를 꺼낸 나의 의도가 본의 아니게 규모를 더해가는 듯 했다.
“그럴게 아니라 삼촌도 지혁이 네가 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발을 담그고 싶은데, 가능할까?”
“네?”
“삼촌이 조금이라도 금전적으로...”
안 그래도 몇 십 명 규모의 계획에서 수백 명이 넘는 규모로 스케일이 커졌는데, 주훈 삼촌이 나보다 더 이 일에 흥미와 관심을 가진 듯 했으니까.
“아니에요. 삼촌. 굳이 그럴 필요까진...”
“모두가 그렇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삼촌 주변에는 그런 생각하고 있는 동료, 선, 후배 배우들이 많아. 다만 구심점이 없어서 자기 나름대로 제각기 관련활동을 하고 있었을 뿐이지만.”
“삼촌...”
“예술을 하는 사람은 배고프기 마련이야. 물론 어려웠던 시절이 자기를 조금 더 채찍질하게 만들고 보다 높은 곳을 향해 꿈꾸게 만들긴 하지. 하지만 일정한 기준만 있다면 사는 곳 정도는 그런 자극제보다 더 월등하게 후배들을 채찍질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드네. 지혁이 네 말 들어보니까.”
주훈 삼촌이 하는 말에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공사비에 투자를 하겠다는 삼촌의 말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음... 그래도 제 계획 자체가 수익을 얻고자하는 것도 아니고 자금이 부족한 것도 아니어서요. 일단 한국 가서 조금 더 얘기 나눠요. 굳이 돈을 투자하는 것보다는 다른 일이 더 나을 것 같지만요.”
일단 내 자신이 이번 계획에 있어 부족한 점이 없다는 점은 제쳐두고서라도 굳이 돈이 아니더라도 주훈 삼촌의 마음을 실행에 옮길만한 일거리는 지금 당장 생각해봐도 꽤나 많았으니까.
*
“아, 진짜 너무 억울해! 촬영 끝나고 그래도 다 같이 맛있는 것 먹으면서 구경은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 환전도 엄청 많이 해왔단 말이야!”
인터뷰를 끝마치고 돌아온 성준 녀석과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서린이 합류하자마자 부엌 겸 마당은 한순간에 시끌벅적하게 되었다. 물론 서린은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지만 성준 녀석이 워낙에 입을 털어댔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성준의 불평 아닌 불평에 평소 때라면 그만 좀 징징거리라며 녀석을 말렸을 테지만, 이번에는 그럴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았다. 나와 한창 대화를 나누던 주훈 삼촌과 아무 말도 안하고 있던 서린 마저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기색이 역력할 정도로 약이 잔뜩 올라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당하고만 있으면 조금 그렇잖아요?”
“그렇긴 한데... 뭐 어떻게 할 수가 없지 않나?”
“가게 업종을 살짝 바꾸죠. 우리.”
“업종을?”
“두고 봐요. 형식 삼촌한테 본때를 보여줄 테니까요.”
그래서 인터뷰를 하기 위해 자리를 뜨는 그 순간 다른 일행들에게 밝은 미소를 보여줄 수가 있었다. 약이 오를 대로 오른 결과 생각해낸, 지금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들이 일행들 모두의 바람을 이뤄줄 것만 같았으니까.
*
“오늘 손님들이 한명도 없었는데, 소감이 어땠나요?”
이번 촬영에서 얄미운 콘셉트로 쭉 밀고 나갈 생각인 것인지, 인터뷰에 임하는 형식 삼촌의 태도는 나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칠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장사 첫 날이기도 하고 여기 코룬 섬이 현지 인도네시아 분들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서양 분들이어서 한국음식이 낯설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내일은 이런 점들은 조금 고려해서 어떻게든 극복해보려 합니다.”
“저희 제작진 측에서 재료비는 팍팍 지원해드릴 테니까. 장사 잘 하셔서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여기 코룬 섬이 스노클링이랑 패러세일링 같이 각종 해양 레포츠로 유명한 곳이니까요.”
“하하...”
“하하하! 저희는 솔직히 식당 운영은 대충하시고 실컷 놀게 해드리고 싶은데, 부디 꼭 그래주시죠. 하하하하하!”
“으드득...”
아오. 이 사람이 아주 맛 들린 것 같다. 앞서 보았던 일행들의 태도를 보건대 얄미운 행동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될 진데, 마지막 순서로 인터뷰에 임하는 내게도 또다시 이런 행동들을 보이니 말이다.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김, 형, 식 PD님.”
“하하하... 그, 그럼 다행이고요. 어쨌든 절대로 본인의 신분을 드러내거나 그러면 안 됩니다?”
절로 이가 갈린 내 모습에서 순간 움찔하긴 했으나 형식 삼촌은 여전히 자신만만해 했다.
“물론이죠. 으드득. 걱정하지 마시죠. 김형식 PD님.”
그래서 더욱 깨부수고 싶었다. 저 얄미운 얼굴을.
두고 보자 삼촌.
“서린 씨가 그동안 방송에서 이상형을 꼽을 때 항상 본인을 꼽았었는데, 혹시 알고 계셨나요?”
그래도 형식 삼촌의 이런 얄미운 질문들은 10분가량이 지나자마자 어느 정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긴, 얄미운 것도 정도가 있지 그걸로 만 방송에 내보낼 생각이라면 양심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것일 테니까.
“네? 아... 알고는 있었어요. 직접 방송들을 보진 못했지만, 주변 분들이나 기사들을 통해서요.”
“기분은요?”
“기분이요?”
“아이 돌로서 요즘 CF면 CF, 드라마면 드라마에서 맹활약하고 계시는 서린 씨가 이상형이라고 말해줬을 때 기분 나빠할 남자가 몇이나 될까요?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크흠... 더 궁금한 점들이 많지만 이와 관련된 질문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질문의 내용이 간단해졌다는 얘기는 아니었지만.
*
“I'm an ordinary person. To tell the truth, I'm a bit of a bore. (나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사실, 나는 좀 지루한 사람이죠.) When joking, even it makes you sad. (농담을 할 때면, 심지어 그 농담은 당신을 슬프게 만들 테니까요.)”
해변의 끝자락에 위치한 까닭에 좀처럼 관광객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이곳에 꽤나 활기찬 노래가 퍼져나갔다.
“However, I have a wonderful talent. (하지만, 나는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요.) Because people who listen my song will be happy. (그 이유는 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때문이죠.)”
물론 노래 자체가 사람 본연의 육성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핸드폰에서 울려 퍼지는, 최대한 볼륨을 키워봤자 본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미약한 노래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가게 내부와 입구 언저리에서 그치는 그런 노래가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고야 말았다.
이게 과연 어떻게 된 일일까.
“So, I'm pleasant. (그래서 나는 너무 즐거워요.) Thanks to that people, I also be happy. (그 사람들 덕에 나 또한 행복해질 테니까요.) Now, I want to say Thank You For The Singing. (지금 이 순간 음악에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Nobody can live without singing. (아무도 음악이 없인 살 수 없어요.)”
좀처럼 이해하기 쉽지 않은 현상이지만 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꽤나 간단했다.
“Now, I want to say Thank You For The Singing. For giving it to me. (지금 이 순간 음악에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것들을 내게 주셔서요.)”
관광객들의 발길이 미약한 곳이긴 하나, 이곳의 주변 풍경이 결코 번화한 곳에 뒤쳐진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좋았다. 사람들로 인해 북적이는 곳보다 한적하다는 점은 여유롭게 휴가를 즐기는 서양 관광객들의 성향에 꽤나 잘 맞아떨어졌으니까.
[저 여자 꽤 귀엽지 않냐? 동양인 치고 몸매도 꽤나 섹시해.]
[저기 남자 직원은 한국사람 인가봐! 동양인 남자들은 왜 이렇게 귀엽지?]
그렇게 주변 가게들과는 달리 음악이 미약하게나마 들려온다는 점 및 한국 음식이라는 이 섬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음식을 팔고 있고 이를 조금이나마 입구에서 나눠주고 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서빙과 주문을 받고 있는 남녀가 꽤나 귀엽고 예뻤다는 점 등이 관광객들의 발길을 잠시 붙잡았고 이것이 생각 이상의 효과를 불러일으킴에 따라 가게는 어제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거 진짜 맛있네요. 이거 이름이 뭐라고요? 존? 존이라고 했나요?]
[전 이라는 음식으로 한국의 전통 요리이고요. 방금 드신 전은 전 요리 가운데 김치를 이용해 만든 김치전입니다. 한국식 팬케이크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맛있네요. 흠... 케이트 어떻게 할까? 오늘 점심 여기서 할까? 바비큐 같은 거 이제 조금 질렸잖아?]
많지는 않았지만 몇 몇 이들이 가게 입구에 대기 중이던 직원에게 모여 무엇인가를 물어봤고 또 다른 몇몇 이들은 가게 내부로 발걸음을 옮겼으니 말이다.
[글쎄... 흠... 여기 써져있는 라이브 공연은 언제 하는 건가요?]
[라이브 공연은 정오에서 1시간 그리고 오후 3시부터 1시간으로 계획되어 있습니다.]
[어머! 그럼 지금 들어가서 밥 먹고 있으면 딱 맞겠네요? 케이트 들어가자. 음식도 맛있을 것 같고 공연도 한다잖아? 그리고 여기 가만 보니까, 꽤 좋은 것 같아. 사람도 별로 없고 풍경도 너무 좋아. 저기 선 베드도 있고. 어? 저기 패들 보트는 여기서 대여해주는 건가요?]
[여기서 음식을 드신다면 저기 패들 보트는 무료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손님.]
[우와! 좋네요! 가자 케이트! 오늘은 여기야!]
[네, 손님. 안으로 들어오세요. 시원한 맥주와 어울리는 한국 전통 요리까지 그리고 과일 음료까지 모두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더욱이 그런 관광객들의 발길을 가게 입구에서 머뭇거리게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내부까지 들어오게 만들 비장의 무기까지 떡하니 홍보하고 있었는지라 가게 직원들의 입가에는 더위에 지쳤을지언정 미소가 가득했다.
고작해야 대여섯 명에 불과한 손님일지라도 그들이 준비한 비장의 무기가 효용을 보인다는 점에서 오늘이 영업을 시작한 지 두 번째 날이라는 것이 앞으로의 나날들을 더욱 기대하게 만들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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