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77 2019 =========================================================================
#377
“프리 패스는?”
다시금 서있던 자리로 되돌아온 사내이지만, 중년인의 질문에 입을 떼는 것이 생각 외로 쉽지만은 않았다.
프리패스라는 말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르지 않았고 또한 지금껏 숱하게 그 말을 들어왔음에도 이는 좀처럼 적응하기 어려운 ‘무엇인가’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머뭇거림도 이내 사그라들고 말았다. 그런 주저함보다는 당장 지금 눈앞에 있는 재떨이가 사내에게 더욱 더 큰 행동요인이었기 때문이다.
“평소 때와 다를 바 없다고 합니다. 다만...”
“다만?”
“연이은 해외일정으로 꽤나 지쳐 이제는 해외보다는 국내에서 지내겠다는 전언이 들어왔습니다. 더욱이 슬슬 국정회의며 각 부처 장관들의 면담 요청을 거절하기가 힘들,”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그래.”
“예?”
일개 개인이 가졌다고 보기 힘든 재력 그리고 지위. 그 모든 것이 일명 ‘프리 패스’와 관련된 얘기를 할 때면 극대화되어 젊은 사내에게 다가왔는지라, 사내는 불안함 감정을 안고 있으면서도 이 늪을 빠져나갈 생각을 갖지 못했다.
“국정회의? 장관 면담? 하! 그럴 주제나 되고?”
“대, 대표님...”
“그냥 좋아하는 꽃꽂이나 개밥이나 주라 그래. 괜히 사고 치지 말고.”
너무나도 스케일이 큰 그리고 위험해 보이는 수렁에서 얻은 것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었던,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왔던 자신의 세계와는 너무나도 상이하고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은 중년인의 행보가 조금씩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빠 고마워. 오빠 회사에서 온 사람이 나 자취하는 방도 구해주고 장학금도 지원해준데. 오빠 덕분에...... 친구들이 다 부러워하더라고. 오빠 회사에서 학비랑 자취방도 구해줬다고 하니까... 괜히 내가 다 자랑스러운 거 있지?]
[우리가 아들 덕에 이렇게 호강하는 구나. 고맙다. 너희 엄마 무릎 안 좋다고 했는데, 이번에 너 회사에서 나온 사람이 병원도 데려다주고...... 어디 회사길래 이렇게 복지 혜택이 좋은지, 우리 아들이 너무 자랑스럽다.]
마치 올가미처럼 자신의 주변에 스며들기 시작하는 중년인의 영향력이 이제는 너무나도 깊고, 짙었으니까.
“마이켈 총리 쪽 하고는?”
“일단 외교부 쪽에 넌지시 일러두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다며 난색을 표했습니다.”
그렇게 다시금 마음을 되잡은 사내는 눈앞 중년인의 심기에 거슬리지 않게 최선을 다했다.
“개인 휴가를 써서 한국에 온다라...”
“우리 쪽에 있어서 독일은 꽤나 중요해. 알고 있지?”
“네, 네? 아, 네. 알고 있습니다.”
언제나 준비된 자세를 원하는 중년인의 손 안에 든 것이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 전부라는 것을 이제는 모르지 않았으니까.
“바이에른 주 정부에 끈을 만들어 놓는 것으로는 부족해. 그러니까, 무조건 자리를 만들어.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다시 외교부 측에 접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개인 휴가를 한국에서 보낼 때 어디서 지낼 건지도 알아와. 무엇을 할 예정인지 구체적 계획도 알 수 있음 알아오고.”
“예, 알겠습니다.”
“아! 6월 달에 일본, 중국 들른다는 미국 대통령 일정에 무조건 한국도 포함시켜야 된다고 그래. 하루, 아니 반나절이라도 좋으니까. 무조건.”
“예, 그것도 외교부 측에 하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내는 중년인의 입이 열리지 않는 것을 다시금 확인한 뒤, 발걸음을 놀려 집무실을 나왔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를 판단하려는 본능을 애써 외면한 채, 그저 오늘 하루도 무사히 끝났음에 감사하면서.
*
“와... 진짜 화보 아니냐? 화보?”
“그러게요. 헤헤... 이번에 무조건 따라오길 잘했다.”
아무래도 동양인이라고는 인도네시아 현지 사람들 그리고 소수의 일본 사람들이 전부였는지라, 첫날 장사를 접는 그 순간까지 가칭 배우식당은 단 한 명의 손님도 맞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작진들의 얼굴은 그다지 어둡지가 않았다. 조금은 시무룩하게, 꽤나 진지한 얼굴로 식당 구석에서 회의를 하고 있는 출연진들과는 다르게 말이다.
“강지혁 팔뚝 봐봐. 하아... 진짜 대박.”
“얼굴 진짜 주먹만 한데 키도 엄청 크고 다리도 길고...”
“양성준도 귀엽지 않아? 난 강지혁도 좋은데 양성준도 좋더라.”
“양성준도 운동 꽤나 하나봐. 팔 근육부터가...”
“복근도 있을까?”
“차주훈은 나이가 몇인데 아직까지 저런 몸이야? 진짜 모델출신 배우답다.”
이번 인도네시아 코룬 섬에서의 촬영에 유난히도 여자 스태프들이 많이 편성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휴양지라고는 하지만, 덥고 힘들어 체력적인 면이 강조되는 해외 촬영인 만큼 보통 때라면 아무래도 남자 스태프들이 원정 인원의 주를 이뤘을 테지만 그 모든 것을 훈훈한 출연진들이 바꿔버린 것이다.
“날씨 더 더워졌으면 좋겠다.”
“어?”
“그래야 벗을 거 아니야. 다른 식당은 종업원이니 뭐니 위통은 기본으로 벗고 다니는데.”
“대박!”
그래서일까. 고되고 힘든, 너무나도 덥고 거기에 습도까지 높은 촬영현장이지만 그녀들은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자유 시간은 무슨. 여기서 안구정화 하는 게 자유정화고 휴양이지. 하아... 너무 행복하다.”
“진짜 너무 멋있다.”
프로그램 자체가 출연진들의 자유도를 최대한 높인 콘셉트인지라, 고정카메라를 설치한 후라면 일부 스태프들을 제외한 나머지 스태프들은 각자 자유시간을 가지거나 밤새 찍은 영상들을 서울로 보내는 등의 간단히 실내에서 할 만한 일들을 하면 되건만 눈앞에 보이는 황홀한 광경들이 그녀들을 가만두지 않았던 것이다.
“사진 못 찍는 게 너무 아쉽네...”
“그래도 촬영 끝나고서는 찍어주던데요? 그것도 김PD 님이 출연자들 피곤하다고 되도록 자제하라고 했지만...”
물론 이 같은 반응들은 소수의 남자 스태프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 또한 여자 스태프들의 등살에 짓눌러 부각되지 않아서 그렇지 연신 서린의 얼굴 그리고 몸매, 행동들 하나, 하나에 열광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손님 한 명 맞이하지 못한 채 CLOSE 팻말을 내걸은 식당에는 두 부류의 동상이몽이 존재했다. 출연자들의 행동, 겉모습 하나, 하나에 열광하는 스태프들 그리고,
“내일은 메뉴별로 미리 음식을 조금씩 만들어서 가게 앞에서 나눠주는 거 어때요?”
“시제품 행사하자는 거지?”
어떻게든 손님들을 끌어 모으려는, 오늘 하루 단 한 명의 손님도 맞이하지 못해 약간은 의기소침해져 있는 출연자들 이렇게 두 부류로 말이다.
“일단 사람들이 김치전이라든지 해물파전이라든지 그런 걸 전혀 모르니까, 안 오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불고기도 조금 곁들여서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조금씩 나눠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 이렇게 재료 버리는 것보다 차라리 그게 낫겠다. 그나저나 오늘 가게 앞으로 사람들은 많이 왔다, 갔다했어?”
그래도 출연자들은 자신들을 스태프들이 어떻게 보든지와 관계없이, 오늘 하루 의기소침해져 있었던 것과 상관없이 내일 장사를 위해 머리를 모으고 있었다. 어떻게든 프로그램의 내용을 살리기 위해, 혹시 이러다 이 프로그램이 제작발표회를 하기도 전에 망하는 것 아닌가 라는 불안함을 없애보기 위해.
뭐, 출연자들의 그런 마음과 상관없이 스태프들은 그저 태평한 마음으로 그들을 보며 침을 다시고 있었지만.
“오전에는 조금 사람이 없는데, 저기 끝 쪽에 스킨스쿠버 할 수 있는 데랑 시끌벅적한 곳 싫어하는 관광객들이 정오 지나서는 꽤 지나가더라고요. 그 중에서 몇몇은 우리 식당에 관심 보이는 사람도 있었는데, 메뉴에 모르는 음식들이 있어서 그런지 다른 데로......”
“첫날 장사니까, 너무 기죽어 있지 말고. 우리 오늘 맛있는 거나 사먹으러 가자. 휴양지니까, 맛있는 식당도 많을 거고 잘되는 식당 가보면 우리 식당이 뭐가 부족한지 알 수 있을 테니까. 다들 괜찮지?”
“네, 삼촌.”
“네. 선배님.”
“넵!”
그런데 내일 장사를 위해 포기하지 않고 방안을 강구해보려던 지혁, 성준, 서린의 모습에서 채 사라지지 않은 의기소침함을 발견한 탓인지, 주훈이 회식 아닌 회식을 제안하며 모두의 등을 떠밀 때였다.
“저기 잠시 만요.”
지금껏 방관하고 있던, 그래서인지 더 뜬금없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여기 장사하시는 동안에는 개인 경비는 일체 사용금지입니다.”
“네?”
“어?”
“뭐라고? 김 PD?”
프로그램을 어떻게든 살려보고자 가게를 잘 이끌어가기 위해 애를 썼건만, 제작진들은 단 한마디의 개입 없이 출연진들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저희가 재료비 및 가게 임대료를 모두 드리는 만큼, 회식을 하시든, 다른 가게 벤치마킹을 하러 가시든 식당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모두 해결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순간 들려온 김형식 PD의 목소리가 그리고 그 목소리가 담고 있는 내용에 출연진들 모두의 얼굴에 당혹감과 어처구니없음이 담겨져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헐, 말도 안 돼. 너무해요. PD님. 저희 오늘 손님 한명도 없었는데...”
“꼭 장사를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명한 휴양지인 만큼 스노클링을 하셔도 되고 패들링을 하셔도 됩니다. 단, 쓰실 수 있는 돈은 오로지 식당에서 벌어들이셔야 되지만요.”
“김PD. 그거 너무 하잖아. 오늘 손님 하나 없어서 가뜩이나 애들 기도 죽어있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 자신을 바라보는 출연진들 모두의 눈초리에 원망스러움까지 느껴졌지만 김형식 PD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철회할 생각이 없는 듯 했다.
“그럼 저희 오늘 하루 종일 쫄쫄 굶다시피 했는데, 그건 어떻게 해요?”
“재료도 있겠다. 요리사 분도 있겠다. 직접 만들어 드시면 되죠?”
“와...”
“숙소에 마당도 있고 요리 해먹기 딱 좋지 않습니까? 하하!”
상황에 가장 먼저 체념한 것은 서린이었다. 그런 그녀의 질문에 대한 김형식의 답변은 서린 뿐만 아니라 출연진들 모두에게 한숨을 안겨다 주었지만 말이다.
“PD님 아니 삼촌. 진짜 이러기?”
“왜? 나름 합리적이지 않아? 제작진 측에서 재료비도 내주는데? 이거 완전 원가 없는 장사잖아. 팔기만 하면 남는 장사.”
보다 못한 지혁이 앞장서 김형식에게 다가갔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그를 놀리려는 듯 김형식은 꽤나 얄밉게 대꾸를 하였다. 그게 강지혁을 얼마나 자극시켰는지 깨닫지 못한 채.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어, 어?”
“두고 봐.”
“지혁아?”
그렇게 가칭 배우식당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됐다. 뭐, 아직까지는 출연진들도 제작진들도 그 새로운 국면의 태동을 좀처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
“촬영 첫날 출국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의 일이 일부 언론에 유출되는 바람에 열애설까지 났는데, 지금 그 열애설이 국내외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거 아시나요?”
관찰예능답게 제작진들이 프로그램 자체에 개입하는 경우가 없다 봐도 무방했지만 그렇다고 그 역할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바로 지금 하루를 마무리하는 인터뷰 촬영처럼 프로그램의 재미를 더해줄 감초역할을 톡톡히 해낼 영상은 고정카메라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네... 비행기에서 내리고 소속사에서 전화가 와서 그때 알게 됐어요.”
“바로 반박대응을 할 수도 있지만 프로그램의 당초 계획을 위해 그렇게 하지 않아주셔서 제작진 측을 대표해 감사하다고 전해드리고 싶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서린 씨.”
“네? 아, 아니에요. 저도 여기 출연자인데, 당연히 도와드릴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죠. 어차피 제작발표회 하면 바로 풀릴 오해니까요.”
더욱이 지금 출연진들 가운데 가장 먼저 인터뷰를 하게 된 서린 같은 경우 특히 신경 쓸 이유가 존재했는지라 촬영에 임하는 제작진들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을 수밖에 없었다.
“귀국하고 일주일 내로 제작발표회가 있을 예정인 만큼, 저희 제작진들도 최선을 다할게요.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촬영에 임해 주시길 부탁드릴게요. 서린 씨.”
“네, 물론이죠.”
그런 제작진들의 마음이 통해서일까. 서린의 인터뷰는 꽤나 흥미롭게 진행되었고 이는 제작진들이 이번 인터뷰 촬영에서 얻고자 하는 재미를 순조롭게 얻어가기 시작했다.
“데뷔 이래 이상형을 묻는 질문에 항상 강지혁씨를 꼽았는데요. 이번에 실제로 같이 프로그램을 하게 됐는데, 소감을 물어봐도 될까요?”
“너무 좋죠. 얼굴도 잘생기시고 키도 크시고... 그리고 엄청 친절하세요.”
“그런데 계속해서 강지혁 시를 이상형으로 꼽아 왔는데, 정작 이곳에 와서는 좀처럼 말을 걸지도 않고 쳐다보지도 않더라고요. 혹시 마음이 바뀌어서 그런 건가요? 아니면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크고 친절한데 실제로 보니까, 뭔가 깨는,”
“아니에요! 그, 그게... 너무 떨려서 잘 못 마주치겠어서... 너, 너무 멋지셔서...”
그렇게 열애설의 해명과 관련해 이 프로그램이 무척이나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될 것이고 이는 어떠한 홍보 수단보다 강력한 마케팅 활동이 될 것임이 명확해진 가운데, 서린은 그들 제작진이 원하는 대답 그 이상을 카메라를 향해 풀어놓았다.
그리고 이는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너무나도 훌륭한 답변이었는지라 이를 카메라에 담고 있는 제작진들의 얼굴은 꽤나 밝아져 있었다.
뭐, 정작 그런 답변을 카메라 앞에서 한 서린은 얼굴이 빨개진 채 부끄러워하고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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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 아이템을 사용하여 00시 07분에 올라갈 연재분입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신분들 감사합니다.
잼잼za님 감사합니다.
ps. 오늘 29일 동시연재 시작일까지의 원고를 조아라 측으로 넘겼습니다. 감회가 새롭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