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76 2019 =========================================================================
#376
정오가 되자 그래도 가게 앞에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우리 가게의 입구에 서 있는 메뉴 간판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아쉽게도 그 관심이 직접적인 매상이 돼주진 못했지만 그래도 오전 때보다는 나았다.
텅 비어있는 식당 안에서 손님인척 앉아있는 게 조금은 굴욕적으로 다가왔지만.
“좋냐?”
“어?”
“손님 없으니까, 좋냐고.”
저 녀석은 속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기도 하거니와, 속도 제법 깊은 놈이지만 평소 겉모습은 지금처럼 누가 봐도 생각 없는 철딱서니 없는 이미지였는지라 한숨이 절로 나왔다.
“뭐 덕분에, 이 더위에 요리 안 할 수 있는 너도 좋은 거 아니냐?”
“속없는 소리 그만하고 주스나 만들어서 주훈 삼촌이랑 해서 한잔씩 돌려, 더워죽겠으니까.”
“야! 먹고 싶으면 네가 만들어 먹으면 되잖아. 이 자식아.”
사놓은 고기랑 채소가 얼만데, 손님 없어서 속 편해하는 걸 더 보다간 화병이 날 것 같아 손으로 녀석을 카운터로 떠밀었다. 재료들을 버릴 바에는 차라리 우리가 먹어치우는 게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주스 담당이 누구였더라?”
“아씨... 더워죽겠는데.”
“난 파인애플주스.”
어차피 만들어올 거 무얼 그리 투덜댔는지. 그래도 슬쩍 한 입 머금어본 파인애플 주스가 꽤나 맛있어 순간 몸에 활력이 돋았다.
“서린아 이거 마시고 있어. 많이 덥지?”
“어? 아, 감사해요. 오빠.”
주훈 삼촌에 이어 나 그리고 서린의 것을 만든 뒤 이제는 자신의 것을 만드느라 분주한 녀석을 뒤로 한 채, 한쪽 구석 테이블에 앉아 팔을 베개 삼아 고개를 묻고 있는 서린에게도 차가운 주스 잔을 건네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잠시 만요! 오빠!”
“응?”
“거기서 주세요. 거기서.”
그런데 서린에게 주스 잔을 건네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려던 나의 발걸음은 이내 멈춰지고 말았다.
“여기서? 어떻게?”
아니 내 팔이 무슨 기린 목도 아니고 사오 미터는 떨어져있는 곳까지 어떻게 주스를 달라는 건지.
갑작스레 이상한 행동을 하는 서린의 의도를 몰라 두 눈만 깜빡이길 잠시. 이내 서린의 입에서 그 의도가 흘러나오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흘러나와버렸다.
“땀 많이 흘렸거든요. 냄새 날까봐...”
“에?”
“거기 내려놔주세요.”
땀이 안 나는 게 이상한 날씨이고 또 근처에 가까이 가자마자 느껴지는 시원한 향수 냄새에 저런 걱정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듯 했지만 장난을 칠 정도로 기운이 남아나는 게 아니었는지라 서린이 원하는 대로 탁자에 내려놓고 다시금 자리로 되돌아왔다.
아니 혹시 나한테서 냄새가 나서 그런가? 설마?
*
[찰칵 찰칵]
“좋아요. 좀더 도도하게! 그렇지!”
경기도 일산의 한 스튜디오. 아침 꼭두새벽부터 시작된 여름 의상 화보 작업이지만, 스태프들의 얼굴은 밝기 그지없었다.
물론 그런 스태프들의 모습은 단순히 이 스튜디오가 무더운 바깥 날씨와는 다르게 빵빵히 틀어진 에어컨으로 인해 너무나도 쾌적하고 시원해서는 아니었다.
“지연씨! 나이스! 작업이 빨리 진행됐으니까,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갈게요!”
각종 CF들에서 두각을 드러내더니, 드라마 천손을 통해 단숨에 톱의 지위에 등극한 여배우 유지연이 바로 스태프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남성들의 이목을 주목 시켰던 것이다.
“역시 지연씨랑 작업하면, 사진 찍을 맛이 난다니까?”
“감사해요. 작가님.”
그렇게 아침 일찍부터 지금까지 2시간가량 연속해서 진행된 작업은 잠시나마 휴식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제 아무리 화보 촬영 경험이 많은 유지연이라 그녀일지라도 무척이나 달콤하게 느껴질 시간이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를 겉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낼 정도로 유지연 자신이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얼마 전에 드라마 잘 봤어요. 너무 예쁘게 나오던데? 연기도 잘 하고.”
“아직 멀었죠. 그래도 봐주셔서 감사해요.”
“우리 지연씨는 톱 여배우인데 다른 여배우들이랑 달라서 너무 좋다니까? 아무튼 Are You Marry Me 화보집 후로 실제로는 진짜 오랜만에 봤는데, 지연씨는 여전히 예쁘네요?”
“에이, 뭘요... 부끄러우니까, 비행기 너무 태워주지 마세요.”
“거기다 몸매도 좋고 남자친구가 엄청 좋아하겠어요.”
“남자친구 없어요. 작가님.”
“어머! 거짓말.”
도도한 얼굴 그리고 이와 어울리는 목소리로 인해 차가운 오라를 뿜어내는 유지연이지만 오늘 작업을 함께하는 사진작가 앞에서 만큼은 그러한 기미를 약간이마나 절제하는 듯 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물론 본인이 톱스타라는 점을 이용해 보다 거리를 둘 수 있겠지만, 지금의 자리에 있기 전부터 인연을 이어오던 이이기도 하거니와 본인 스스로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이러는 편이 보다 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유지연일지라도 이내 들려온, 들려올 거라 기대하지 않았던 이의 이름에 일순간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그때 그 사람 누구였지? 그...”
“네? 아! 종연... 오빠 말씀이시죠?”
금세 안색을 되돌린 그녀가 조금은 어색하게, 힘겹게 오빠라는 말을 내뱉었다.
“아! 맞다! 그 사람 소식 들었어요. 어휴... 지연씨랑 진짜 잘 어울려서 연예계에 선남선녀 커플 나오나 싶었는데... 글쎄 그 사람이 그럴 줄은... 마음고생 심했겠어요?”
“네?”
“그때 보니까, 엄청 잘 어울려서 진짜 사귀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요?”
이 바닥에서 파다하게 퍼진 소문들을 증명하듯, 그는 무례했고 또한 저돌적이었다. 처음의 다정한 모습과 배려 심 깊은 행동들에 조금이나마 가상 결혼을 진심으로 대했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질 정도로.
그래서 그를 떠올리자마자 안색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사귀는 줄 알았다는 사진작가의 말에 더욱더 안색을 관리할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아! 어머, 어머 내 정신 좀 봐. 미안해요. 나이가 드니까, 자꾸 말이 많아지더라고요. 호호.”
그런 그녀의 얼굴 표정에서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사진작가가 그녀의 눈치를 보며 사과를 건네 왔다.
하지만 그 실수라는 게 ‘실제로 사귀다 지금은 헤어져서 그 사람의 얘기를 꺼내자 유지연 그녀가 표정이 어두워졌다’를 의미하는 지 아니면 실제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는 것 때문에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의 유지연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뭐, 사진작가의 행동을 보자니 아무래도 전자를 의식해 사과를 건넨 듯 했지만.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자, 사진작가가 화제를 전환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유로 유지연 그녀를 얼어붙게 만들어버렸다.
“그나저나 지혁 씨는 정말 잘 나가네요. 그렇죠?”
“네? 아...”
다만, 앞선 이종연 때와는 달리 부정적인 영향은 아니었는지라 비슷한 충격파를 가진 이의 이름임에도 유지연의 표정은 좀 전과는 달리 굳어있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당혹스러움만이 담겨져 있었을 뿐.
“그때도 잘 나갔고 진짜 멋진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완전 월드스타가 되어서... 언제 한번 작업 같이 하고 싶은데 기회가 없네요. 에휴...”
그녀 자신과 전혀 연관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떤 사이인지를 명확히 형용할 수 없는 사람의 이름을 꽤나 오랜만에 듣는 것이지만 낯설지가 않았다.
사소한 행보 하나, 하나가 기사화되는 스타들 가운데서도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더군다나 요즘 들어 한국에서의 활동을 그답지 않게 꽤나 활발히 해나가고 있는 터라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볼 때면 그의 이름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으니까.
“서린이랑 지혁 씨랑 엄청 잘 어울리는 것 같네요. 서린도 몸매랑 얼굴하면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편이고 그래서 남자들이 엄청 좋아하잖아요. 뭐, 다들 지혁씨가 아깝다고 생각하겠지만 누가 안 아깝겠어요? 지혁 씨 연인이었을 때 말이죠.”
게다가 어제 아침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해외까지도 들썩이게 만든 열애설의 주인공이기까지 했으니 오죽할까.
“아, 그래요? 핸드폰을 잘 보지 않아서 몰랐네요... 잘 어울리네요. 두 사람.”
“지연씨는 몰랐어요? 어머! 어제 진짜 바빴나 봐요?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데.”
열애설이라는 단어에 그리고 그 기사가 담고 있던 빼도 박도 못할 사진들이 떠오르자 유지연의 두 주먹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다는 것을 호들갑을 떨고 있는 사진작가는 발견하지 못했다. 뭐, 정작 그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유지연 그녀 자신조차도 인지하고 있지 못했지만.
“이번에 여름 래시가드 화보 지연씨 쪽으로 컨택했는데, 혹시 알고 있어요?”
“네, 얼마 전에 실장님이 작가님한테서 여름 화보 컨택 왔다고 알려주시더라고요.”
그렇게 휴식시간 내내 사진작가는 업계에서 유명한 명성대로 유지연의 곁에 붙어서 수다를 떨어댔다. 평소 때라면 그런 사진작가의 행동이 조금은 부담스럽게 다가왔을지언정, 피하고 싶지는 않았을 테지만 오늘따라 유지연은 홀로 그 휴식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마음 같아선 꼭 같이 하고 싶다고 말하고 싶지만, 부담될 것 같아서... 그래도 최대한 긍정적으로 봐줘요. 남자 모델들도 잘생긴 사람들로 내가 섭외해 올 테니까.”
“제가 오히려 감사하죠. 스케줄 살펴보고 괜찮으면 바로 말씀드릴게요.”
“그럼 나야 고맙죠. 자! 그럼 다시 촬영 시작해볼까요?”
뭐, 그런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사진작가의 수다는 다시금 촬영이 재개될 때까지 지속되었지만.
*
“...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주마다 한 번씩 정례적으로 받는 보고에 테이블에 다리를 올려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중년 사내의 얼굴에는 권태로움이 가득했다.
“따라서 현재,”
“그만!”
저번 주에 그다지 달라질 게 없는 영양가 없는 보고 내용에 중년 사내의 인상이 찌푸려졌고 이는 그의 급한 성격을 겉으로 드러내는 신호탄이 되었다.
“겉다리 말고 알맹이만.”
“아, 알맹이만이라고 하심은...?”
그런 그의 모습에서 지난번 얼굴로 맞이했던 재떨이가 떠오른 탓일까. 보고하고 있던 이의 얼굴에 일견 불안함과 두려움이 맺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남자가 주시하고 있던 재떨이는 여전히 본연의 역할을 담당하며 중년 사내의 재를 머금을 뿐이었다.
“JJ는?”
사내가 평소와는 다르게 곧바로 자신의 화를 보고하던 이에게 풀지 않은 이유는 곧이어 드러났다.
“다, 다음분기내로 인사조정을 통해 물러나도록 조치될 것입니다.”
명확한 분노의 원인, 중년 사내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들었던 이에 대한 징치가 꽤나 순조롭게 이뤄졌다는 점에서 그 화가 격한 행동으로 발전할 연결고리가 중간에 끊겨졌기에 보고하던 젊은 남자의 입에서 작게나마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차진수 감독의 라이터 팔이 소년이 100억 넘는 손실을 입어 조직 내 이사들 및 주주들의 반발이 이번 인사조치로 극대화...”
“그딴 개돼지들 얘기는 그만하고. 확실한 거지?”
“네, 네! 이 부회장에게 직접 전해들은 만큼 확실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해당 PD는 한직으로 좌천 그리고 현 사장은 다시 미국으로 출국할 예정이고 빈자리는 이진호 부회장이 겸할 것이라고...”
하지만 그런 잠깐의 안도도 잠시, 상대의 폭력에 언제 화를 당할까 매일, 매일을 안절부절 해하는 자신에 대한 연민이 가득한 속내와는 달리 젊은 사내의 입은 잠시도 쉴 새 없이 분주히 움직여야만 했다.
“발칙한... 다시 한국으로 못 들어오고 철저히 주지시켜.”
강지혁과 연관되어 눈앞 중년인의 지시를 무시하여 그룹의 혈족이자 JJ 그룹의 대주주 그리고 JJ E&M의 사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이가 속절없이 한국에서 쫓기듯 추방됐다는 점은 자신의 앞에 있는 중년 사내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 지를 여실히 드러내주었고 이는 또 다른 불안감으로 젊은 사내를 압박하기 시작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대표님...”
“왜?”
“이번에 JJ 측에 대한 압박, 아니 지침을 하달하는 과정에서 국민연금 쪽에 손을 댄 만큼 뒤처리를 하려면...”
[탁!]
“여기 차 트렁크 가면... 있을 거야. 이번 주 내로 일 끝내. 알겠어? 괜히 뒤 탈나게 질질 끌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렇게 언제나처럼 보고의 마무리는 중년 사내의 ‘특별 지시’와 그의 ‘특별한 능력’을 겪게 됨으로서 마무리 되는 듯 했다. 매번 바뀌는 차키를 받아들고 집무실을 막 나서려던 그에게 중년 사내의 또 다른 궁금증이 도달하지만 않았다면.
“프리 패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젊은 사내의 발걸음은 다시금 중년 사내의 앞으로 원상 복귀해야만 했다. 그것도 무척이나 신속하게. 그리고 다시금 재떨이를 주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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