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74 2019 =========================================================================
#374
[제작발표회 일정을 최대한 빨리 잡는 것으로 하자. 촬영 끝나고 귀국하는 주에 바로. 그리고 예고편에도 너랑 서린이 이번 스캔들을 깜짝 에피소드 형식으로 비중 있게 다루고.]
“제작발표회 때 되면 자연스레 풀릴 오해니까, 너무 많이 신경 쓰지 마. 지금은 촬영에 집중하자. 오케이?”
“네? 네... 고마워요. 오빠. 신경써줘서.”
“신경은 무슨... 괜히 그때 내가 잠실 쇼핑몰에서 장 보자고 해서 그런 거지. 생각해보면 공항에서도 구하려면 구할 수 있는 건데.”
ANC 측의 선택이 그녀 입장에서는 도리어 좋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애써 찝찝함을 덜어 버리려했다. 이 정도까지 신경 썼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녀가 촬영에 지장만 주지 않는다면 그 이상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김치전이랑 해물파전 한다는데? 거기다 불고기까지 하려면... 너 어쩌냐? 쪄 죽겠네. 쪄 죽겠어.”
“그게 남 일이냐? 남 일? 어휴... 그래, 옷은 언제 갈아입었냐?”
“아까 바로 갈아입었지. 넌 안 덥냐? 얼른 갈아입어. 서린이 너도.”
“네, 오빠.”
어느새 민소매 티로 갈아입은 채 나타난 녀석의 말마따나, 나 또한 당장 옷을 갈아입어야 할 것 같았다. 일 년 내내 따뜻한 날씨를 자랑하는 지역인 만큼 지금 때가 봄이니 뭐니 하는 말 따윈 통용되지 않은 상식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운동 좀 했나보다?”
“야! 당연하지, 인마! 이 정도는 요즘 배우들한테 필수라고! 어휴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운동해놓길 잘했네. 이거라도 안했으면 너랑 주훈 선배님 사이에서 무슨 망신을 당했을까? 하아...”
그렇게 나 또한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아 휴양지에 어울리는 옷으로 갈아입은 뒤 그저 벤치에 앉아 있게 되었다. 굳이 움직이며 이 더위에 체력을 소모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을 뿐더러 선글라스와 파나마 햇으로 혹시 나를 알아챌 관광객들의 시선을 피하는 데 전념해야했으니까.
“나도 칼리 아르니스? 그거나 배워볼까?”
“뭐?”
“그거 맞지? 너가 영화에서 슝슝하던거? 볼펜 가지고 아주 그냥, 어? 그거? 어?”
“하아...”
“그거 배우면 이렇게 몸도 좋아지냐? 이런 건 피트니스해서 키울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어? 나 배워볼까? 너 따라서?”
“됐고 지금 하고 있는 운동이나 열심히 하셔요. 아저씨.”
그나저나 이 자식은 아까부터 옆에서 왜 이렇게 생생한 건지 모르겠다. 주훈 삼촌이라도 있었으면 이를 명분삼아 그 입을 강제로 닫게 만들었을 텐데 말이다. 어휴, 넌 주훈 삼촌이 딸 바보인 걸 감사해라. 진심.
“치사한 놈... 야, 근데 너랑 서린이랑 벌써부터 열애설 날 정도면 이번 프로그램 대박 나겠지?”
“뭐?”
“아니, 바로 반박보도 내보내면 사람들이 우리 프로그램 다 알 것 아니야. 제작발표회도 하기 전에. 아닌가? 아니다. 생각해보니까, 뭐, 너 출연한다고 하면 이미 흥행은 보장됐으니까, 그런 것 상관없이 잘 되겠네.”
“어휴... 됐다. 더우니까, 좀 떨어져. 넌 안 지치냐?”
“음... 야, 우리 날도 더운데 저거 코코넛 음료 사먹을까? 엄청 싸던데.”
“뭐? 코코넛?”
“사먹자. 덥잖아.”
그래도 녀석이 하는 말들이 전부 의미 없는, 귀찮은 파리 같은 것은 아니었다. 나 또한 코코넛 음료라는 말에 일순간 혹했던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래, 열대지방에 왔으면 코코넛에 빨대 정도는 꼽아줘야 제 맛이지.
“뭐?”
“야, 당연히 네가 사야 되는 거 아님? 벌어도 네가 나보다 몇 십 배는 더 벌 텐데. 아니 몇 백배인가?”
자연스레 내 지갑을 노리는 녀석의 행동에 대꾸할 가치를 못 느낀 나머지, 10달러짜리 지폐를 녀석의 손에 쥐어줬다. 차라리 이 돈을 가지고 얼른 코코넛을 사오게 만드는 것이, 녀석과 입씨름을 하는 것보다 훨씬 날 편하게 만들 테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여객터미널 구석 벤치에 앉아있던 우리들에게 낯선 이들이 다가온 것은.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낯선 이들은 다가온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들의 시선을 순식간에 사로잡아버렸다.
“Hi.”
“네?”
그래서 순간적으로 한국말이 튀어나와버렸다. 눈앞에 있는 이들이 한국인일리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말이다.
[무슨 일로...?]
이곳이 세계적인 휴양지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최소한으로 가릴 데만 가린 비키니 차림의 두 여성의 등장에 성준 녀석 또한 당황한 듯 연신 나와 앞에선 여인네들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그저 모든 상황 대처는 내게 맡겨놓았다는 듯이.
[일행이 둘 뿐인가요?]
[네?]
자매인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친구인 것일까.
검은색 비키니를 입은 두 여인네의 모습은 꽤나 매혹적이었다. 구릿빛 피부와 어울리는 볼륨감은 그렇다 쳐도 키와 얼굴 모두 남자라면 한 번씩 되돌아볼 정도의 외양이었으니까.
“너가 영어 더 잘하잖아. 너가 말해. 계속. 얼른, 얼른.”
그렇게 외국의 흔한 비치에서 볼 수 있는, 어느 정도의 군살을 가지고 있는 여인네들이 아닌, 누가 봐도 모델처럼 보이는 여인네들의 접근에 성준 녀석은 절로 들뜬 듯 했다.
어휴, 너 지금 우리 둘 다 카메라에 찍히고 있는 거 알고는 있냐?
[코룬 섬으로 가는 건가요?]
[아, 네... 그런데 무슨 일로?]
[우리 같이 놀래요? 나랑 내 친구도 코룬 섬으로 가거든요. 다음 배로.]
솔직히 해외에서 이런 기회를 얻었다면, 목적이야 어쨌든 함께했을 것 같다. 내 자신이 먼저 나선 것도 아니고 여성이 그것도 훌륭한 외양을 지닌 이가 먼저 함께 놀자는 제안을 건넨 것은 쉽사리 넘길만한 사안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이 같은 생각들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겉으로 보면 나와 성준 녀석만 덩그러니 터미널 구석의 벤치에 앉아있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아쉽지만, 그게 좀 힘들겠는데요?]
우리들을 찍는 카메라가 숫자가 확연히 늘어났음을 확인하자마자 남아있던 일말의 미련을 깨끗이 버려버렸다.
[아시안 남자들은 아시안 여자만 좋아한다는, 뭐 그런 건가요?]
아마 자신의 제안을 내가 거절하리라 생각지 못해서일까. 눈앞 여자의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우리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데 생각보다 눈앞 여자가 끈질겼다. 대충 이 정도만 하더라도 자존감과 자존심이 강한 서양 여자들 같은 경우 미련 없이 자리를 뜨는 경우가 당연한 행동일진데 아직도 내 두 눈엔 매력적인 두 여자가 담겨져 있었으니까.
[그게...]
“오빠?”
지금 나와 성준 녀석이 촬영 중이라는 사실까지 밝혀야하나 싶었을 때 구원 투수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꽤나 번거로울 뻔했다. 덕분에 손쉽게 지금 상황을 넘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행이 우리 둘 뿐이 아니어서.]
[아쉽네요. 뭐, 기회가 된다면 다시 볼 수 있겠죠? 여기 내 번호에요. 마음이 동하면 연락해요. 알겠죠? 그럼.]
어깨를 으쓱하는 내게 눈앞의 비키니 여인들은 끝내 여지를 남겨두고 자리를 벗어났다. 나 또한 남자답게 꽤나 아쉬웠고 말이다.
“야, 뭔데. 뭔데?”
그나저나 방금 온 서린은 그렇다 쳐도 성준 저 자식은 왜 모르쇠인지 모르겠다.
“뭐긴 뭐야. 네가 본 그대로지. 엣다! 가져라. 너.”
“헐, 대박.”
“오빠?”
영어를 못하는 것도 아니고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되는 녀석이 서린의 등장에 갑작스레 태세를 전환했는지라 더 이상 말대꾸를 하기 싫어 건네받은 쪽지를 녀석에게 던지다시피 넘겨버렸다.
“코코넛이나 사와.”
“어, 어?”
“4개 사서 주훈 삼촌 오면서 한 개 드리고.”
“야, 야! 밀지 마! 간다! 가! 이씨.”
어쨌든 나와 성준 녀석을 꽤나 의뭉스럽게 쳐다보는 서린의 눈빛에서 조금의 귀찮음을 느낄 수 있었는지라 몸을 푹 늘어지게 만드는 무더위를 방패삼아 성준 녀석을 벤치 밖으로 떠밀어버렸다.
하아. 참 인기가 많아도 고달프다. 고달 퍼. 뭐, 아쉽기도 오지게 아쉽고.
*
배 위에서 보는 주변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일행과 잠시 떨어져있었다. 일행들을 포함해 다른 승객들 또한 선수 부분에서 주변을 바라보았기에 선미에는 좀처럼 인적을 찾을 수 없다는 점 또한 그런 행동의 이유가 되었지만.
그런데 우연인지 아니면 의도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선착장에서 내게 번호를 건넸던 이와 그 동료가 나와 같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는지라 순간이나마 움찔하게 되었다. 내게 손을 흔드는 그녀들에게 고개를 까닥하는 것으로 대충 그 상황을 모면하려 했지만, 언제 내게 다시 그녀들이 접근할지 몰랐으니까.
뭐, 그녀들이 먼저 후미에 자리를 잡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의심을 했을 것이다. 그녀들이 나의 정체를 알아챈 나머지 접근하려는, 그런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아닌지를 말이다.
“앗!”
“인기 많으시네요. 선배님.”
“어?”
그래도 때마침 등장한 서린 덕에 굳이 비키니 여인네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다. 다만, 조금 과하게 친근히 나를 대하는 그녀의 행동에 조금은 당황하고 말았지만. 말 놓은지 얼마나 됐다고 꼬집기까지 해? 허허.
“넌 괜찮아?”
“네? 아... 뭐, 어쩔 수 없죠. 회사에서 그렇게 하겠다는데.”
“오빠는요?”
“뭐, 나는 딱히 상관없지. 어차피 제작발표회 때까지 미루는 게 프로그램 입장에서는 더 좋다니까... 프로그램 잘 되면 나도 좋고. 솔직히... 나는 별 타격이 없거든. 반박 보도 하겠다고 한 것도 너 곤란해질 까봐 그런 거고.”
“그렇구나...”
표정이 꽤나 밝은 것이 주변의 이국적인 정취가 복잡한 얘기를 머릿속에서 잠시 지워버린 듯 했다. 다소 냉정하게 들릴 수 있는 내 말에 움찔하긴 했으나 이내 원래의 표정으로 되돌아온 그녀의 모습에서 어렵지 않게 이를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조금 냉정하게 들렸나?”
“아니에요. 오빠 말이 맞는데요. 뭘.”
“이렇게 아리따운 아가씨랑 스캔들 나는 것도 남자한테는 복이지. 안 그래?”
“풋. 그게 뭐에요. 치...”
“복잡한 생각은 일단 날려버려. 어차피 고민하고 괴로워해봤자, 바뀌는 건 없을 테니까. 아니야?”
“네? 뭐, 그렇죠.”
그나저나 나를 멀리서 찍고 있는 한 대의 카메라 스태프를 제외하고 남은 일행 전부가 선수에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째서 혼자 이곳에 왔는지 모르겠다.
[스타 토크쇼에서 서린이가 이상형 너라고 했었잖아. 그 뒤로 잡지나 다른 예능에서도 계속 이상형은 너라고 했었고. 뭐, 너 이상형으로 꼽은 여자들이 한 둘이겠냐 마는...]
굳이 이렇게까지 내게 접근할 이유라 한다면, 아까 성준 녀석이 말해준 것들이 바로 떠올랐으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 때문에 지금 곤란을 겪고 있는 게 그녀 자신일 테니까.
“성준이는?”
“주훈 선배님 멀미 때문에 주무신다고 같이 앞 쪽에서 경치 구경하고 있었거든요. 뭐라도 사간다고 오빠 있는 선미 쪽에 가있으라고 했는데...”
“아...”
이 자식이 조심하라고 할 땐 언제고 자꾸 내게 짐을 떠넘기는지 모르겠다. 물론 성준 녀석의 사견과 녀석의 입에서 나온 소문들을 전적으로 믿는 것은 아니었으나, 굳이 옥의 티를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다.
자식, 이거 진짜 사심 있는 거 아니야? 설마 견제한 거?
“야! 이것 좀 들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때마침 등장한 성준 녀석을 향해 한껏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려 했다. 녀석의 두 손에 위태롭게 들린 쟁반들이 아니었다면.
“뭘, 이렇게 사왔냐? 점심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배고픈데 어떡하냐? 그리고 이런데서 파는 것도 먹어봐야지.”
“한 시간? 그쯤 되면 섬에 도착하는데?”
“그럼 그때 가서도 또 사먹으면 되고.”
음식 못 먹어 죽은 귀신이 씌웠는지, 원래부터 잘 먹는 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녀석은 아주 물 만난 제비처럼 음식을 입에 쓸어 담고 있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도, 터미널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도 그리고 코룬 섬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먹은 점심때도 결코 입을 쉬지 않았으니까.
어떤 의미에선 대단하다. 대단해. 너 촬영하러 온 거냐, 아니면 그냥 놀러 온 거냐? 나 원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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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 패턴이 오후 4시 ~ 오후 11시 이 쯤인데. 요즘들어서 일어나질 못하네요. 날이 더워져서 그런가? ㅠㅠ
추천 선작 코멘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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