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68 2019 =========================================================================
#368
촬영하는 내내 자신이 부여받은 역할에 몰입하여 연기를 해야 한다는 점이 이 프로그램의 신선한 점들 중 하나이자, 지금 나를 가장 미치게 만드는 점이었다.
“여정 찡... 아이시테루요? 하아...”
증거를 수집할 수 있는 방들을 돌아다니며, 중간, 중간 내가 부여받은 캐릭터의 특징을 드러내줘야만 했기에 처음엔 좀처럼 추리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내 모습에 무슨 표정인지 모를 얼굴을 하는 주변 스태프들의 시선 또한 이에 큰 몫을 했고 말이다.
“다메다요! 여정 찡은 내꺼다능! 나랑 결혼할 거라능!”
그래도 추리 현장에 있다는 급박함과 연기자라는 나름의 자의식을 방패삼다보니, 이런 상상도 못해본, 상상도 하기 싫은 말투가 어느새 익숙해져버렸다. 더불어 손안에 꼭 품고 있는 대형 베개 또한 같이.
“여정 찡 이런 거는 보지 말라능! 내가 지켜주겠다능!”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음으로 다른 출연진들을 마주하게 될 중간 타임 때가 마냥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내가 맡은 역할은 전형적인 오타쿠이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자면 이번 화에서 살해된 이의 스토커로서 사건의 중요한 실마리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는 캐릭터이다.
물론 단순히 이런 캐릭터를 부여받게 되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이번 명탐정 K가 세트부터 소품까지 모두 세밀하고 준비하고 기획한 초대형 예능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이었다.
“안녕하세요. 선, 아니 이게 아니지... 앗!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능! 실수했다능!”
발랄하고 예쁘장한 여자 연예인이 그려진 베갯잇이 빛을 발하는 그런 키만 한 베개를 항시 껴안고 다니는 데서 그치지 않고 곳곳에 해당 연예인이 그려진 상, 하의 옷들까지.
내 자신의 자존감을 한없이 무너뜨리는 소품들의 도움 덕에 나는 나를 보며 말을 잇지 못하는 다른 출연진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푸하하하하! 지혁아, 아니 강덕후 씨. 하하하하하!”
이번 화에서 살해된 연예인의 매니저 역할로 분한 연무 선배의 밉살스런 웃음은 그나마 양반이었다. 나름 안면도 있고 친분도 어느 정도 나눠가진 연무 선배는 그렇다 쳐도 다른 사람들은 지금 이 자리가 초면인만큼 그들의 기억 속에 나란 사람의 첫인상은 영영 이런 모습으로 남게 될 테니까.
“30분 동안의 중간 타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시간동안 출연자분들께서는 각자의 알리바이 증언시간과 추리증거 교환시간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내 들려온, 중간 타임 세트장에 울려 퍼진 성우분의 말이 아니었다면 그 상황을 좀처럼 타개하지 못했을 것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오타쿠로 분해있는 내 역할이 바뀐 것은 아니었지만.
하아. 세상은 썩었어.
*
“우리 여정찡에 손대지 말라능! 하아...”
“하하하! 그런데 강덕후씨 그 베갯잇에 그려진 연예인 여기 있는 김사장 씨랑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어요?”
“우리 여정찡이랑 하나도 안 닮았다능! 그렇게 비교하지 말라능! 자꾸 그러면 나 얘기 안 할거라능!”
내가 부여받은 캐릭터 자체가 이번 화에서 거의 독보적인 외양을 지녔다고는 하나, 제작진들과 다른 출연자들 또한 이 정도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 아무리 역할 추리 서바이벌이라고는 하지만, 연기는 어디까지나 추리에 뒤이은 서브 역할인 만큼 어느 정도 프로그램의 재미와 몰입 감을 더해주는 장치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런데 나름 배우라고, 이런 역할마저도 최선을 다하는 나로 인해 강덕후라는 캐릭터가 상상 이상의 조명을 받고 있는 듯 했다. 정작 나 자신은 좀처럼 맞춰지지 않는 추리 퍼즐에 골치를 썩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거 강덕후씨. 당신방을 살펴보니까, 당신 그냥 덕후가 아니던데?”
“그, 그게 무슨 소리냐능! 난 우리 여정찡과 함께라면 어디든 갈수 있다능!”
“당신 이번에 살해된 김오만양 스토커잖아! 아니야?”
“그, 그런!”
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나를 바라보는 출연자들의 눈빛을 모두 태연스레 맞받아 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살해된 유명 연예인의 동료 연예인이자, 남자친구인 장늑대 역할을 부여받은 장현성 감독님의 날카로운 추궁은 그나마 양반이었다.
“크흠... 일단 그 베갯잇에 그려진 연예인을 평소 많이 좋아하나봐요? 아니 좋아하나보오?”
“우리 여정... 찡에 관심 갖지 말라능! 느, 늙은이주제에!”
“크흠...”
내가 입고 있는 상, 하의 그리고 베게에 큼지막하게 그려진 이의 실제 주인공이 내 앞에서 내게 눈빛을 보내고 질문을 던질 때 보다는 훨씬. 아니 훨씬, 훨씬, 훨씬.
“범인은 살해당한 유명 연예인 김오만 양의 남자친구인 장늑대 씨입니다!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와 더불어 자신을 멀리하기 위해 소속사까지 옮기려 한다는 점을 우연히 알게 된 장늑대는...... 그녀와 매니저와의 대화에서 자신을 그저 뜨기 위한 노이즈 마케팅 수단으로 여겼다는 김오만 양의 대화를 듣게 되자 살해를 결심하게 되었고......”
그래도 출연자들이 함께 모여 무엇인가를 하는 타임이 단 두 번, 중간 타임 때 한번 그리고 범인을 선택할 때 한번이라는 점이 나를 그나마 살려줬던 것 같다.
“아쉽게도 범인 역을 맡아주셨던 장현성 씨를 제외한 모든 출연진들이 범인 추리에 실패하셨습니다.”
“야호!”
이 프로그램의 본 목적인 추리에 있어서는 빵 점이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성적을 거두고 말았지만 말이다.
“모든 출연진들이 범인 추리에 실패하셨으므로 장현성 씨는 범인을 못 맞춘 출연자 수 당 50만원의 상금을 획득하셨으며, 따라서 총 상금 250만원을...”
“와... 범인 한 번 맞출 때마다 100만원인데, 지금 1화만에 250만원을 번거야? 와...”
“이제 감 잡았어. 진짜. 다음 주에 두고 봐요. 나 진짜 범인 잡을 테니까.”
아무래도 첫 번째 촬영이기도 하고 6시간에 가까운 시간동안 주구장창 돌아다니며 추리를 해서인지, 범인 역을 맡은 장현성 감독님들을 제외한 모든 출연진들이 범인 검거에 실패하게 됐다. 뭐, 첫 촬영이라서 서로 추리 증거를 교환하거나 연합, 합동과 같은 제작진들이 요구한 심리 싸움 같은 게 조금은 활성화되지 않은 측면도 있긴 하겠지만.
그래도 프로그램 자체가 꽤나 재밌었고 흥미로워 다음 주가 절로 기대됐다. 그리고 자꾸 욕심이 생기기도 했다.
이거, 추리소설이라도 읽어봐야 하나?
*
“반가워요. 영화감독하고 있는 장현성이라고 해요. 이렇게 영화가 아니라 예능프로그램에서 인사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예, 안녕하십니까. 배우 강지혁입니다.”
촬영 자체가 새벽부터 시작되는 프로그램인지라, 6시간 넘게 촬영을 했음에도 채 오전이 다 지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다 같이 첫 방송 뒤풀이를 하기도 애매하여 근처 식당에서 간단히 아침 겸 저녁을 먹게 되었다.
“편하게 해요. 어차피 우리 앞으로 계속 볼텐데.”
“네? 아, 네.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내가 배우이기도 하고 본인이 영화감독이기도 해서 그런지, 장현성 감독님은 나를 보며 꽤나 살갑게 대해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출연진들이 나를 꺼려한다는 건 아니었지만.
“오늘 그 캐릭터로 용케 녹화했네? 어휴, 나 같았으면 끔찍했겠다야.”
“하하... 그렇죠. 뭐...”
“그래도 엄청 익숙하던데? 뭐. 뭐 하다능? 난 또 그런 말투는 처음 들어보네.”
그래도 뭔가 내게 다가오지 못하는 다른 출연진들의 기미가 보였기에, 나 또한 덩달아 어색해질 뻔했다. 이내 화장실에 다녀온 연무 선배가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아니, 뭘 그렇게 멀뚱이 보기만 하고 있어?”
“어, 어?”
“안녕하세요. 선배님. 가수 겸 연기자 강지혁이라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그런 연무 선배의 도움에 편승해 서둘러 주변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프로그램 자체에서는 자신이 부여받은 역할에 따라 움직여야하고 같이 있을 시간조차도 얼마 되지 않았기에 실질적으로 인사를 나눌 자리는 이곳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반가워요. 박시윤이에요. 정말 팬이에요. 명탐정 K에서 볼 줄은... 저번에 공연했을 때 우리 남편이랑 같이 가서 봤었어요. 호호!”
박시윤.
연무 선배와 마찬가지로 아나운서 출신으로 예능부분에서 활약하고 있는 프리랜서였기에 낯이 있었다. 더욱이 나의 팬이라며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반갑게 맞이해주는 그녀였기에 나 또한 웃는 얼굴로 그녀를 대할 수 있었다.
“개그맨 조수호에요. 정말 팬입니다. 이렇게 직접 만날 줄은 꿈에 몰랐네요.”
“안녕하세요. 가수 겸 연기자 강지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뒤이어 서로 인사를 나눈 개그맨 조수호 씨 또한 웃는 얼굴로 나를 맞이해줘 자리의 분위기는 한층 밝아져있었다. 조금은 껄끄럽게 여겨질 수 있는 이와의 인사가 남아있다는 점이 나를 알게 모르게 옥죄지만 않았다면 더욱 좋아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안녕하세요. 선배님. 피쉬앤칩스 소속 나인테일 김여정입니다!”
일행들 가운데 유일하게 나보다 나이가 적은,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나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이의 인사에 나 또한 마냥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반가워요. 우리 앞으로 잘 해봐요.”
“네, 네? 아! 네! 감사합니다!”
[우리 여정찡에 손대지 말라능!]
[여정찡은 내꺼라능! 나만 바라볼 거라능!]
촬영 내내, 장장 6시간 동안 내내 ‘여정찡’, ‘여정찡’을 외치며 다녔는지라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 그 당사자가 눈앞에 있다는 점과 더불어 촬영장에서의 내 모습이 돌이켜보면 볼수록 이성에 힘입어 부끄러움을 더해갔으니까.
“이거 여정 씨 덕후 아니야? 덕후?”
“네, 네? 아...”
“오늘 사실 연기 아니지? 연기 치고는 엄청 리얼하던데?”
“하하... 평소 팬입니다.”
“어? 그럼 진짜?”
“그게... 그냥 평범한 팬입니다. 평, 범, 한.”
이거 벌써부터 주변에서 놀림을 받고 있으니 미치겠다. 오늘 촬영 분이 나가면 도대체 얼마나 놀림을 받을지.
하아. 배우의 혼이 날 울리는 구나. 울려.
*
[6월 되면 바로 출국해서 미스터 지 후속편 촬영할 거고요. 내년 상반기에 새롭게 들어갈 작품이 있어서 그거 신경쓰다보면 몇 년 간은 웬만하면 한국에서 방송 활동 하긴 힘들 것 같아서요... 그래서 이번에 팬들이 좋아할 만한 프로그램들 최대한 나가보려고 명탐정 K에 나오게 됐어요. 프로그램 내용도 꽤 재밌어보여서 그런 것도 있지만요.]
아무래도 자리의 최고 연장자이기도 하고 유명한 영화감독이기도 해서인지 밥을 먹는 동안 장현성 감독님과 주로 얘기를 하게 되었다.
[그게... 내년 상반기에 들어갈 작품은 3부작 작품이라서요. 드문드문 촬영할 거긴 한데, 5년 정도 걸린다고 하더라고요. 3부작 전부 촬영하는 데요...... 개봉이랑 상관없이 계속 이어서 1부작부터 3부작까지 찍는 거기도 하고 제 분량이 1부작에서는 적어서요. 그래서......]
[아쉽네요. 내년쯤에 내가 각본이랑 연출까지 맡을 영화가 있는데, 지혁 씨 여유가 되면 이 기회 빌어서 권유라도 한번 해볼까 싶었는데... 하긴, 지혁 씨 섭외하려면 제작비가 어마어마하겠다. 그렇죠? 하하!]
[아니에요. 저는 작품만 괜찮다면 출연료는 그다지 상관없어서요. 아쉽네요. 저도 감독님 작품 꼭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요...]
[그래요? 그 말 진짜에요? 내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는 말? 내 주 분야는 액션이 아닌데도?]
나 또한 유명한 감독님과 영화와 관련된 얘기를 나누게 되어 기분이 좋았고 말이다.
[제가 사실 그때 미스터 지 촬영 때문에 프로그램을 챙겨볼 여유가 없어서요. 죄송합니다. 그래도 프리티 스타 노래는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어요.]
[가, 감사합니다!]
뭐, 김여정 양과도 대화를 나누긴 했다. 자리가 극과 극인지라 고작해야 한 두 마디 섞은 게 전부였지만.
어쨌든 앞으로 명탐정 K 촬영이 꽤나 기대될 듯 했다.
“그런데 정말 대본 받아볼 거에요? 부담가지라고 한 소리가 아니라 그냥 해본 소리에요. 그러니까,”
“아니에요. 좋은 작품 있고 그 작품 제안해주셨는데, 배우로서 욕심이 안 나면 안 되는 거죠. 작품 제목이... 그러니까...”
“‘Ditto’에요. 아직 가칭이지만 일단 그렇게 정했어요.”
“아! Ditto!”
“욕심 부려서 미안한데, 작품하나 꼭 같이 해봤으면 좋겠네요. 그래도 초면에 이런 제안 꺼내서 부담스러웠을 텐데, 좋게 봐줘서 고마워요. 다음 촬영 때 봐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 확답은 못 드려도,”
“괜찮아요. 꼭 대답을 들으려고 그런 게 아니니까. 봐주기만 해도 고맙죠. 할리우드 스타인데. 하하! 그럼 잘 가요. 나 먼저 갑니다?”
첫 촬영 때부터 명성 있는 감독님의 작품을 제의받았을 뿐만 아니라, 조금이나마 친분을 나눠가진 출연진들과 함께 그려나갈 프로그램의 구도와 진행 그리고 재미까지 모든 것들이 나의 기분을 긍정적으로 만들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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