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35 2018 =========================================================================
#335
“이렇게 아무것도 안하고 있어도 되겠어? 아쉽지 않아?”
“괜찮아. 이렇게 있는 게 더 좋으니까.”
하루 종일 같이 있어달라는 말을 녀석은 곧이곧대로 실천에 옮겼다. 잠에서 깨자마자 본 것이 녀석의 얼굴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 하고 싶길래, 이렇게 적극적인지 조금 걱정이었는데 막상 녀석이 나를 데려간 곳은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래도 오빠가 우리 지수 오랜만에 만났는데, 맛있는 것도 사주고 그러고 싶은데...”
오두막 앞 선 베드에 드러누워 생각나는 대로 대화를 나누는 것. 그것이 녀석이 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조금 먹먹했다. 물론 일 때문에 도저히 시간을 내기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녀석이 원하는 일이 이다지도 간단하고 대단할 리 없는 일 인진데 오빠로서 미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오빠랑 이렇게 있는 게 좋아. 경치도 좋고 맛있는 거는 여기서도 먹을 수 있는 거니까.”
“그럼 점심은 오빠가 맛있는 거 만들어줄까? 여기에 그릴 있어서 바비큐 먹으면 맛있는 데.”
“아니, 오늘은 내가 만들어줄게. 오빠.”
“응? 지수 네가?”
“샌드위치 만들어줄게. 괜찮지?”
더욱이 나를 위해 직접 샌드위치까지 만들어 준다하니 오죽할까.
어휴, 이렇게 예쁜 지수 누가 데려갈진 몰라도 참.
그렇게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마치 포이보스 뮤직 휴게실 소파에 누워있는 것처럼 편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주변의 시선 신경 쓸 필요 없이 오로지 휴식다운 휴식을 취하면서 말이다.
“작곡을 배우고 있다고?”
“응. 왜? 안 어울려?”
그런데 뜻밖의 의아한 소리를 듣게 되어 자연스레 반문하고 말았다.
지수가 만들어준 샌드위치를 먹으며 따뜻한 햇살을 맞을 그때 들려온, 작곡을 배우고 있다는 녀석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기엔 내 기억속의 녀석은 작곡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까.
“안 어울리고 어울리고가 어디 있어. 오빠는 그냥 지수가 갑자기 왜 작곡을 배우고 있는지가 궁금한 거지.”
가수로서 자신의 감정, 기억, 속내를 직접 노래로 만들어 부르는 것은 꽤나 뜻 깊은 행위였다. 하지만 그런 뜻 깊음을 위해 결코 가볍지 않은 창작의 고통을 느껴야 된다는 점에서 갑자기 녀석이 그런 결정을 내릴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냥... 나도 곡 만들어보고 싶어서. 만들고 싶은 곡이 있거든. 그리고... 다른 애들은 연기도 배우고 예능 프로그램에도 나가는데, 나는 그런 거 자신 없어서. 그냥 노래하는 게 좋으니까, 언제까지 아이돌일 수는 없으니까 나도 준비해야지.”
“아...”
그런데 그 이유라고 할 만한 것들을 듣고 나니 절로 수긍하게 되었다. 더불어 녀석이 이제는 햇수로 6년차에 해당하는, 아이 돌 세계에서는 충분히 선배대접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고 말이다.
이제 막 데뷔를 했던 녀석이 이제는 음악방송에 나갈 때면 후배 가수들의 인사를 받을 정도가 됐다니. 도대체 시간이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하아.
어쨌든 녀석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이해가 되어버렸다. 냉정히 말해 이제는 아이 돌 가수로서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를 맞이했기에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이고 그래서 녀석이 선택한 것이 바로 뮤지션임을.
“오빠가 옛날에 작곡 수업 받을 때 나도 받을 걸 그랬다. 그랬으면 오빠랑 같이 배울 수도 있고 오빠한테 모르는 거 물어봤을 텐데...”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하면 돼지. 우리 지수는 잘할 수 있을 거야.”
“정말? 오빠가 그렇다니까, 그런 거겠지? 나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 그럼 지금 곡 만들고 있는데 완성되면 오빠한테 제일 처음으로 들려줄게.”
그래서 뭐라도 도와주고 싶었다. 이제는 그동안 익숙했던 것들에서 벗어나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할 녀석에게 오빠로서 무엇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으니까.
“이미 만들고 있어? 지금 들어보면 안 될까? 오빠가 도와줄 수도 있으,”
“아니. 내 손으로 만들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안 돼.”
“어, 어? 그래...”
뭐, 꽤나 단호하게 내 도움을 거절하는 녀석 덕에 조금 상처받게 되어버렸지만.
지수야. 오빠가 그래도 나름 뮤지션인데, 오빠 못 믿니? 그런 거니?
*
“요즘 오빠 보는 대본, 그거 다음 작품 대본이야?”
“어? 아! 응. 미스터 지 촬영 중에 제안 받았는데, 조금 관심이 생겨서 챙겨보고 있어.”
너무나도 단호하게 내 도움을 거절한 녀석 때문에 상처받은 마음을 추스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어떤 내용인데? 아! 아니다. 그거 말하면 안 되는 거지?”
“괜찮아. 어디 가서 얘기할 거 아니면.”
누구 동생인지는 몰라도 예쁘디예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지수를 보고 있자니, 그런 상처받은 마음쯤이야 씻은 듯이 날라 가버렸기 때문이다.
“판타지 영화야.”
“응? 판타지 영화?”
그런 녀석이 궁금해 하는 사안이 다음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는 영화라는 점에서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뭐, 복잡한 얘기보다는 내가 편하게 답변해줄 수 있는 얘깃거리가 방금 전 조금은 무거워졌던 분위기를 회복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으니까.
“주인공은 아니고 그냥 주조연이야. 뭐, 나중가면 모르겠지만.”
“주조연?”
그런데 녀석은 그게 아닌가 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차기작의 장르가 판타지 영화인데다가 주연이 아닌 주연 급 조연을 맡게 될 것이라는 내 말에 지수가 꽤나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물론 녀석의 그런 표정과 행동들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모르지 않았다. 주연 급 배우가 주연을 맡지 않고 주연 급 조연 역을 맡는 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그 배우의 연기자로서의 인생이 조금씩 하락세를 타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했으니까.
“운이 좋아서 첫 주연 작이 사랑받고 있는 거니까, 오빠는 그냥 작품 안 가리고 오빠가 하고 싶은 작품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려고. 그리고 말이 주조연이지 그래도 분량 꽤 되니까, 걱정하지 마셔요. 아가씨.”
“그렇지만!”
“평판은 주연만 맡는 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야. 결국 자기 연기력으로 증명해내는 거고 만들어지는 거지. 그러니까, 여러 경험을 해보고 싶다. 오빠는.”
하지만 지수의 그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나는 상관이 없었다. 애당초 그런 인식들을 몰랐던 것도 아니고 이 모든 것들을 고려했음에도 이 작품이 지닌 매력 자체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뭐, 액션 연기 해봤으니까, 판타지 영화도 해보고 싶고 스릴러도 해보고 싶고 멜로도,”
“안 돼!”
“응?”
“아, 아니야...”
어쨌든 중간에 갑작스러운 지수의 외침에 대화가 살짝 끊기긴 했어도 내가 지니고 있는 속내들을 솔직하게 녀석에게 말해주었던 것 같다.
“어쨌든 정말 좋은 기회인 것 같아. 주연이 한 명인데, 그 주연이랑 주연 급 조연이랑 분량 차이도 얼마 안나. 오히려 영화의 스토리를 이끌어간다던가, 작품이 담고 싶은 메시지 같은 것들은 주연 급 조연들이 품고 있어서 실질적으로 주연이 여러 명이라고 봐야 정확할 거야.”
“흠...”
“그리고 무엇보다 대본 보니까, 줄거리도 굉장하고 하게 된다면 내가 맡을 배역도 너무 마음에 들고... 뭐, 제작비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장르나 주연이 아니라는 점들을 고려하고서라도 정말 좋은 작품이라는 것 그리고 이 작품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좋다는 점 등을 말이다.
“제작비?”
“판타지 영화이기도 하고 스토리가 담고 있는 배경이 너무... 방대해서. 제작비가 꽤 많이 들것 같아.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어중간한 영화가 될 것 같기도 하고. 음... 제작비를 엄청 쏟아 부으면 정말 매력적인 영화가 될 것 같은데, 그게 힘들지. 특히나 상업 영화에서는.”
어쨌든 녀석 또한 끝에 가서는 내 뜻을 이해하는 듯 해 절로 지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내 선택에 반대의 의견을 내민 것 자체가 나를 걱정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고 이내 오빠의 뜻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대견스럽기도 하고 잘 컸다는 생각도 들었으니까.
“오빠는 한국 활동 이제 안 할거야?”
“응?”
“아니... 그냥 사람들이 자꾸 뭐라 하고 이상한 걸로 트집 잡으니까... 오빠가 한국 활동 아예 안 할 것 같아서...”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녀석에게 신경을 좀 더 써야 될 것 같았다.
나와 관련된 문제에 내가 피해를 입거나 신경이 쓰이면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상관없는데 주변 사람들이 나 때문에 피해를 입거나 마치 자신의 일인마냥 나를 걱정해주는 게 전부터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는지라 방금 전 지수의 말을 가볍게 여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냥... 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하는 거지.”
그래서 확실하게 말해주었다.
“지수가 듣기에는 음... 오빠가 너무 자랑하는 것 같아서 듣기 싫을 수도 있겠지만. 오빠는 이제 뭐,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뭐, 예전에도 그랬긴 했지만.”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오빠는 이제 오빠가 하고 싶은 일들만 하고 살아도 충분할 정도가 됐다고 말이다.
“한국에서 했던 하루세끼나 아름다운 누나 같은 거는 오빠도 뭔가 정신적으로 힐링을 받는 기분? 그런 걸 많이 느꼈거든.”
뭐, 그럼에도 녀석의 걱정 어린 눈동자는 여전했지만, 그래도 이 모든 게 사실이고 나의 솔직한 심정인 만큼 녀석도 이내 이해하는 듯 했다.
“출연료나 그런 것도 그냥 오빠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딱히 중요한 건 아니야. 그냥 내가 재밌을 것 같고 마음이 끌리면 하는 거지. 그러니까, 한국에서 사람들이 오빠한테 자꾸 뭐라 하고 욕하고 그래도 지수는 신경 쓰지 마. 오빠는 진짜 괜찮으니까. 알겠지?”
“그래도... 어떻게 그래?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걸로 오빠한테,”
“으이구! 우리 지수 이렇게 착해서 오빠가 지수 시집 갈 때 어떻게 참고 있나? 진짜 오빠가 그 놈 다리 분질러버릴 것 같은데?”
“치... 진짜 바보 멍청이. 답답하다. 답답해.”
“응?”
“에휴...”
그나저나, 지수 시집 볼 때 울면 어떡하나. 사람들 다 볼 텐데. 어휴.
*
“절대 안 됩니다. 절대!”
사내의 단호한 음성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고풍스러운 집무실 안에서 사내는 눈앞에 앉아있는 이의 싸늘한 눈초리를 결코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자리가 껄끄럽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제 아무리 그가 이 회사를 포함한 JJ 그룹의 적장자이자 부회장이라고 할지라도 눈앞에 있는 그의 친 고모였으니까. 그것도 그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의 자리에 올랐을 때까지 자신의 뒤에서 항상 큰 힘이 돼주었던 확실한 아군.
“JJ E&M 사장님. 아니, 고모. 이번 한번만 참아요. 내가 이렇게 부탁해도,”
지금껏 존댓말과 격식있는 호칭으로 그녀를 불렀던 이진호 부회장의 입에서 사적인 호칭이 흘러나올 정도로 그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지금 회사가 엉망이야. 이대로라면 내년 주총 때 언론이고 주주들이고 얼마나 떠들어댈지... 너도 알잖아?”
“언론이야 한철이고 주주들도 웬만한 대주주들은 모두 알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 누구도 고모한테 책임을 물으려 하지 않을 거야. 설사 물으려 한다 해도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고.”
그리고 이런 이진호의 심정을 모르지 않을 이미진 사장이기에 그녀의 얼굴 또한 마냥 밝지는 않았다.
“나도 강지혁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아레나 사업과 연계된 한류월드 내 JJ E&M 본사 이전 건도 그렇고 강지혁이 지닌 문화 파워가 엄청나다는 거, 그게 우리 사업에 엄청난 도움이 될 거라는 거 모르지 않으니까.”
지금은 적장자이자 유일한 후계자로서 부회장의 자리에 올라, 확고한 지위를 차지한 이진호이지만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한 과정자체가 마냥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현 회장이자 최대주주가 그의 아버지였고 그는 외동아들로서 적장자임이 분명했지만, 그의 할아버지는 수많은 자식들을 가졌었고 결과적으로 그는 수많은 경쟁자이자 사촌들의 견제를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할아버지의 늦둥이 막내딸이자 유일한 딸인 고모의 적극적인 지지가 그에게는 엄청난 도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딸을 사랑했던 할아버지가 그의 고모에게 한 손가락에 드는 JJ 그룹의 지분을 상속했고 이는 고스란히 그의 강력한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걸 고려하고서라도 이건 아니야. 이미 한류월드 내에 강지혁 아레나와 연계돼서 투자한 기업들 모두 몸 사리는데 정신없어. 이건 고모도 알잖아.”
“하아... 이러려고 나 여기로 데려왔니?”
“고모!”
그래서 그는 방금 전 고모의 말을 쉽게 넘길 수 없었다.
그를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해외 곳곳을 누볐던 고모를, 보은하기 위해 후계자 자리를 확고히 하자마자 불러들였건만 정작 상황이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아버렸으니까. 그리고 이로 인해 그의 확고한 아군이자 믿을 수 있는 이의 입에서 후회 섞인 감정들이 물씬 담겨 있었으니까.
“태풍은 피해가라고 있는 거야. 맞서 싸우다간... 나라고 왜 고모처럼 하고 싶지 않겠어? 하지만 고모도 알잖아.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거. 한번 트집 잡히길 벼르고 있는데 굳이 우리가 목을 들이밀어야 해?”
“진호야...”
“이제 4년도 안 남았어. 어차피 끝까지 살아남는 건 항상 우리들이었고 저쪽은 계속해서 바뀌어왔지. 그러니까, 고모... 이번 건만. 알지? 이번 건만.”
그래서 그는 다시 한 번 간절히 부탁했다. 이번 상황만 지나가면, 그 보은이라는 것을 제대로 해주겠다고. 제발 힘들 때마다 도움이 돼주었던 이를 자신의 손으로 떨쳐내지 않게 해달라고.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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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제 저녁 먹어야 겠습니다. 남은 하루 마무리 잘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