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25 2018 =========================================================================
#325
“야경 너무 좋다. 그치?”
“맞아요. 언니. 히히.”
집안 어디서든 한눈에 보이는 한강변 야경은 언제 봐도 질리지 않았다. 이곳 숙소에서 함께 지낸지 벌써 몇 주가 지났지만 볼 때마다 새롭게 느껴졌고 감탄만 흘러나왔으니까.
“4월에 여의도 쪽에서 불꽃축제 하잖아요. 여기서도 그거 보일까요?”
“보이겠지. 우와, 그러고 보니까, 진짜 기대된다. 그땐 스케줄 없겠지? 없었으면 좋겠다. 그날 하루만이라도.”
“그러게요. 그런데, 요즘 같아선... 너무 바빠요. 오늘 휴식 아니었으면 진짜 쓰러졌을 거에요. 힝...”
소녀들은 행복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아 왕성하게 활동하느라, 잠이라곤 차에서 자는 쪽잠이 전부일 때가 많았지만 오늘처럼 숙소에 들어와 휴식을 취할 때면 그 모든 게 자신의 꿈이었고 그걸 이뤄냈다는 점이 실감났기 때문이다.
“언니 그런데 그거 알아요?”
“응? 뭐가?”
“여기에 강지혁 살잖아요. 강지혁!”
“응? 어, 그렇네. 여기에 산다고 했지? 방송에서도 몇 번 나오고.”
“그러면 혹시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요? 몇 층인지는 몰라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수도...”
“강지혁 한국에 없잖아. 미국에서 영화 찍는 다며. 그리고 강지혁 사는 곳은 여기보다 더 넓어서 전용 엘리베이터 쓴다잖아.”
“뭐,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마주쳐보고 싶다. 헤헤...”
그렇게 거실 스파 풀에 몸을 누인 소녀들의 입은 따뜻한 물 덕에 노곤해진 몸과 달리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1분기 활동을 오늘로서 마무리한 지금, 그동안 바쁜 스케줄 때문에 나누지 못한 말들이 생각 이상이라 많았으니까.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소녀들의 수다에는 무엇인가가 묻어있었다. 좀처럼 꺼내기 힘든, 아니 꺼내고 싶지 않지만 지금 이 순간 무엇보다 소녀들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머뭇거림과 주저함이.
“내일이면 우리... 6명 되네요?”
그런 머뭇거림을 털어놓은 것은 바로 지영이었다.
“그래... 여정이도 그렇고 우희도 그리고 지연이랑 지나까지 따로 활동해야 되니까.”
함께 프로젝트 데뷔에 출연했고 수많은 땀과 노력을 통해 프로젝트 그룹에 합류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소녀들의 앞날을 밝게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10월부터는 같이 활동할 수 있으니까, 그걸로 위안 삼자.”
비록 1년뿐이지만, 소녀들 모두가 함께 활동할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10명이 아닌 6명으로서 6개월가량의 기간 동안 활동해야만 했으니까.
“그리고 우리도 유닛으로 활동해야 돼서 준비할 것도 많잖아?”
순식간에 무거워져버린 분위기를 되살려보고자, 리더이자 맏언니인 임수진이 소녀들을 바라보며 짐짓 쾌활하게 웃어보였다.
지금은 비록 갈라지지만 처음이자 마지막 정규 앨범이 될 4분기 활동에서 다시금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과 6인조 유닛 그룹 활동의 준비가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으로 화제를 돌리면서 말이다.
“맞아. 당장 이번 주에 예능 프로그램도 나가고 유닛 활동곡도 알려주신다고 했잖아.”
때마침 스케줄을 마치고 거실로 들어선 주민지로 인해 이런 임수진의 의도는 짐짓 성공하듯 했다. 모두의 시선이 일순간 분위기 메이커 주민지의 등장으로 인해 벌써부터 밝아지는 듯 했으니까.
“어? 민지 왔네? 오늘 학교문제는 잘 해결하고 왔어?”
“응, 언니.”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주민지가 모습을 보이자마자 도리어 임수진이 바뀌어버린 분위기를 다시금 무거운 쪽으로 되돌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스케줄도 스케줄이거니와, 요 며칠 학교 전학 문제로 얼굴을 통 보지 못한 주민지에게 리더로서 부탁한 사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지야. 그때 이후로 애들한테 사과는 했어?”
아직 어리고 혼혈이어서인지, 자기감정에 솔직한 주민지이기에 알게 모르게 이러한 성향이 지나칠 때면 주변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줄 때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면이 이곳 숙소에 처음 들어왔을 때 현실이 됐다는 점을 들어 그녀는 리더로서 요구했다.
그때의 말과 행동에 대해 사과하라고.
물론 그녀 자신 또한 개별 활동을 하게 된 소녀들에게 서운하고 원망하는 마음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원해서 그런 활동을 하게 된 것이 아님을 알기에 이를 애써 삭혀왔고 앞으로의 활동을 위해서라면 이는 꼭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했기에 임수진의 요구는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를 확인하려는 그녀의 말로 인해 주민지의 얼굴에는 머뭇거림이 가득했다.
“치...”
“안 했구나?”
“그치만!”
“원하지 않는대도 그렇게 해야 되는 애들 입장도 생각해주자. 우리.”
사실 임수진은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할 땐, 그 누구보다 빠르게 사과를 건네는 주민지이지만,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땐 좀처럼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고집을 가졌기에 이번 경우에도 주민지가 사과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큼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우리 같은 팀이잖아. 그렇지?”
“응.”
그래서 그녀는 나름의 시간을 준 것이었다. 주민지가 개인이 아닌 팀을 위해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를 깨닫길 바라면서.
“그럼 내일 일어나서 애들 숙소 나갈 때 말하는 거다? 알겠지?”
하지만 당장 내일이면 숙소를 나갈 4명의 소녀들이기에 이제는 더 이상 이를 미룰 수 없어 그녀의 말은 전에 비해 더욱 단호했다.
“응...”
“꼭 하는 거야? 알겠지?”
“응...”
그런 임수진의 말에 주민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이와 관련된 대화는 끝을 맺었다. 물론 이것이 소녀들을 하나로 만들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
“이번 설에 집중했던 영화가 흥행 실패하는 바람에 1분기 수익이 대폭...”
“그런 뻔한 얘기 듣자고 취임 첫날부터 이사님을 이곳으로 오라고 한 게 아니라는 것. 설마 모르시는 건 아닐 텐데요?”
“죄송합니다.”
누가 같은 핏줄 아니랄까봐, 말하는 어투나 행동까지 비슷한 신임 사장의 말에 보고를 하던 사내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 원인 그리고 대책 그 둘만 말씀하시면 됩니다.”
“예, 예!”
“그리고 이어서 2분기, 3분기 보고도 시작하세요. 물론 추석 시즌은 별도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혼란스러워할 수는 없었다. 그룹의 적자로서 JJ E&M의 위기를 무사히 돌파한 이진호 전 사장이 그룹의 부회장으로 이직함에 따라, 앞으로 그가 모셔야할 이는 눈앞의 중년여인이 되어버렸으니까.
“설 시즌에 아쉽게도 흥행에는 실패하게 되었지만, 손익 분기는 간신히 넘겼는지라 손실을 최소화 시킬 수 있었습니다. 해당 감독의 명성으로 인해 작품의 기대치가 상당부분 높아졌는지라, 이번 실패는 꽤나 운이 안 좋은 편에...”
“흥행은 그렇다 쳐도 작품성부분은요? 그 감독이 연출한 작품들은 대게 국내외 영화제에서 노미네이트되는 경우가 많다 알고 있는데?”
“그 점이 저희에게는 또 다른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작품성 부분에서 해외 영화제 위원회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아 추후 재개봉 여지가 남아있다는 점은......”
그래도 사내는 새롭게 JJ E&M의 사장으로 임명된 여인이 마음에 들었다.
비록 이진호 전임 사장과 같이 다소 냉소적이고 까칠한 면이 없지 않는 듯 했지만, 무능한 상사보다는 까다로워도 유능한 상사가 그의 직위를 보다 편하게, 그의 앞날을 보다 밝게 만들어 줄 테니까.
그렇게 처음의 삐걱거림을 발판삼아 사내는 그동안 준비한 보고 내용을 신임 사장에게 성심성의껏 전달했다. 신임사장의 성향이 어떤지 처음의 실수로 알게 된 만큼, 사내가 가진 역량과 경험이 즉시 이에 적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고와 질문 그리고 대답.
그렇게 이 모든 것들이 물 흐르듯 이어져가던 그때였다.
“추석 시즌에는 저희 측에서 100억이 넘는 대규모 투자를 강행했던 차진수 감독의 라이터 팔이 소년을 전략적으로 배급시킬 예정입니다.”
“차진수 감독이라면...?”
“예?”
신임사장이 의아해할 줄 몰랐던 사안에 대해 질문을 받게 되자, 지금껏 능숙하게 보고를 진행하던 사내에게서 다소 당황한 듯 한 기색이 드러났다.
“그것이... 혹시 전임 사장님께 관련된 사안에 대해 얘기를 나누신 적 없으십니까?”
이런 사내의 반응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다. 사실상 방금 전 신임사장의 의아해했던 사안은 실질적인 업무의 결과물이 아닌 ‘대응책’의 일환이었기에 그의 보고 전에 오너 일가인 그녀가 모르는 게 이상한 점이었으니까.
“흠... 인수인계 준비 때문에 아직 부회장님을 단둘이 만나 뵙지는 못한 듯 하군요. 가족 모임에서는 귀국했을 때 한번 봤지만요. 어쨌든 이게 중요한 사안인가요? 이진호 부회장님 얘기가 나온 걸 보면요.”
하지만 이내 신임사장이 오랜 기간 동안 해외 지부에서 일 해왔다는 점 그리고 한국에 귀국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다는 점이 떠올랐는지라 사내는 당황한 기색을 서둘러 지운 채 관련 사안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현 그룹 부회장님이신 이진호 전 사장님께서 그리하라 지시하셨던...... 와 연관된 사안으로 사실상 배급이 이미 거의 확정되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오늘 보고 가운데 오너가 알아야할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흥행 확률은요?”
“그것이...”
그런데 사내의 당황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또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전임 사장도 결국 뜻을 굽힌 사안에 대해서 신임 사장이 의아함을 풀지 않고 계속해서 추가적으로 그에게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무엇인가 상황이 잘못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눈앞 신임사장이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있는 것 같아 사내는 머뭇거리게 되었다. 도대체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그 자신도 감이 오질 않았으니까.
“솔직하게 말하세요. 내가 직접 확인하기 전에.”
그러나 이내 처음 실수 때 느꼈던 단호함과 냉정함이 담긴 신임사장의 눈동자와 마주치게 되자 그의 입은 자연스럽게 사실 관계를 담기 시작했다.
“아니, 차진수 감독이라는 사람 얘기부터 들어보죠. 어떤 감독이죠? 이름 자체만으로는 그다지 들어본 적 없는 감독인 것 같은데. 국내에서만 활동한 감독인가요? 아니면 유럽 쪽에서?”
“아닙니다.”
“그럼?”
“차진수 감독은 이번 영화 이전에 국내 포르노 영화에서 명성을 떨치던,”
[탁!]
일순간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거칠게 책상에 내려놓는 신임사장의 행동으로 인해 사내의 보고는 멈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계... 속하세요.”
오히려 전임사장에 비해 행동의 강단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추측과 함께 사내의 눈은 분주히 그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맺고 끊음을 가늠하기 힘든 상황에서 자신의 발언 수위를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오로지 눈치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차진수 감독과 그가 만들고 있다는 영화 ‘라이터 팔이 소년’에 대한 보고는 계속되었다.
“제작비를 요청한대로 쏟아 붓긴 했지만, 주기적으로 보고되고 있는 제작 현장 상황과 전체적인 스토리로 볼 때... 손익분기점을 넘기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보고의 끝에 덧붙여진 사내의 결론에 신임사장은 두 눈을 감아버렸다. 마치 속 안에 끓어오르는 무엇인가를 삭히려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사내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하려로 눈을 뜬 그녀의 시선에 또 다른 보고서가 눈에 들어온 것은.
“이건 뭡니까.”
“그것은 추석 시즌 배급 제안서입니다만, 이미 추석 시즌 때는 배급 계획이 어느 정도 확정되었다고 생각해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미스터 지? 이건 뭐죠? 할리우드 영화인가요? 해당 시즌에 별다른 블록버스터 외화가 없다하지 않았나요? 소규모 예산 영화인가요?”
그런 그녀의 갑작스러운 관심에 사내의 등은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신임사장이 취임 첫날부터 각 사업부 이사들의 보고를 받기 시작할 정도로 일에 대한 열정이 뛰어나고 문화사업과 관련된 폭넓은 경영 경험을 가지고 있다지만 이곳은 한국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녀의 이런 행동은 그녀 자신에게도, 기업에게도 결코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것임을 그녀는 모르는 듯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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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오는 날이네요. 모두 남은 하루 마무리 잘하시길.
P.S 오늘 표지 관련해서 시안을 받아보았습니다. 전에 러프 스케치 받은 것에 비해 조금 허전하고 그래서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아직 채색 그리고 디테일 묘사가 안되어서 그런 거라니 믿고 기다려보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