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21 2017 =========================================================================
#321
[벌써 12월이 되었군 그래.]
[12월? 아... 벌써 12월이네요... 그렇네요. 12월.]
오늘 마지막 신, 마지막 구도의 촬영이 끝나자 다이그 감독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이제 곧 있으면 슬슬 관련 보도를 시작할 거야. 6월이 되면 촬영 마무리와 동시에 제작발표회를 가질 거고.]
정신없이 촬영에 임하다보니, 어느새 여름과 가을이 지나가버렸고 정신을 차려보니 12월이라는 점에서 새삼 놀라게 되었다. 아직까지 나의 계절은 봄에 머물러있었으니까.
[아직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지! 난 지를 존경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너무 그러지 마요.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잖아요.]
[아니야 연기에 대한 열정, 끈기, 노력. 모든 것들이 날 감탄시켰어. 그래서 촬영하는 데 막힘이 없었고 나 또한 이 작품에 대한 애착을 더욱 가진 것 같아. 이건 진심이야. 지!]
단지 무엇인가 몰입할 것이 필요했고 그것이 촬영이었을 뿐인데, 내게 극찬을 건네는 다이그 감독의 말에 부끄러워졌다. 나는 그저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리 했을 뿐인데 다이그 감독은 이를 작품에 대한 애착과 열정으로만 여기는 듯 했기 때문이다.
[다음 작품에서도 지와 함께하고 싶군.]
[저도 마찬가지에요. 절 선택해줘서 고마워요. 다이그.]
[한국에서 12월 24, 25일을 평일로 여기는 건 아닐 테지? 자네 나라에도 크리스마스라는 게 있다면 그때 맞춰서 조금 쉬다 오게. 길게는 못주지만 일주일 정도면 충분하겠지?]
봄의 끝자락에 벌어진 일로 인해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마음은 변하지 못했다. 빛바랜 복수심과 분노를 뒤로하고 이제는 그저 아쉬움과 안타까움만 남은 과거의 추억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를 마음 편히 여기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중얼중얼, 중얼중얼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날 설레게 만들었던 너와의 모든 순간들을 이제는 꿈속에서만 바라볼 수 있겠지. 네가 날 얼마나 떨리게 만들었는지, 내가 널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너와 함께했던 모든 시간들이 엉켜버린 것 같아.”
돌이켜보면 그 시간들은 그저 대충대충 봉해버렸던 과거의 상처들을 도리어 더욱 파냈던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상처 주위를 깨끗이 도려내어 어설프게 덮어버렸던 것들을 다시금 하나, 하나 아물게 만들 시간 말이다.
“그저 중얼거리는 거야. 넌 내 모든 것이었어. 처음 본 그 순간 내게 건넨 미소, 그때부터 널 세상 무엇보다 사랑해왔어.”
그렇게 하나, 둘 감정들을 정리하다보니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 더욱 와 닿았고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너와 함께했던 거리들이 내게는 꿈과도 같았어. 그렇게 꿈꿔왔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꿈속에서만 바라볼 수 있는 풍경이 되어버렸어. 그래 많이 어렸고 서툴렀던 거야. 서로를 사랑한 만큼 사랑에 익숙하지 못했기에.”
조금 더 그녀를 우선했다면, 힘들어도 그녀를 더욱 바라보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아쉬움 섞인 생각들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올랐으니까.
“한때 내 모든 것이었던 네게 줄 수 있는 말. 많이 사랑했어. 행복해야 돼. 부디.”
[똑똑똑]
“오빠!”
“오빠! 소망이 왔어!”
“희망이도!”
그렇게 피아노 건반에서 손을 떼는 순간, 유리창 두드리는 소리와 나를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오빠 노래는 듣는 사람 마음을 움직여요. 내 마음을 그대로 가사에, 멜로디에 녹여낸 것처럼.]
그래서 그 순간 어째서 유진이 내게 건넨 말들이 떠올랐는지를 계속해서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두 눈가를 지나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을 숨기기에 바빴으니까.
*
“오빠! 사랑이! 사랑이!”
“희망이 오빠 보고 싶었어! 오빠! 오빠!”
“소망이 동생들 보고 있었어! 잘했지? 오빠! 오빠!”
설을 맞아 LA로 직접 찾아온 가족들의 모습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던 미소가 입가에 자리 잡았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하셨어요. 작은 엄마. 그리고 삼촌도.”
이제는 11식구,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건 나를 포함해 9명뿐이지만 어쨌든 고요와 침묵과는 거리가 꽤 멀어 보이는 가족구성은 한곳에만 쏠려있던 내 마음을 조금씩, 조금씩 끌어당기기 시작했으니까.
“그래도 집 공사가 며칠 전 끝나서 다행이에요. 미뤄졌으면 이렇게 보지도 못했을 텐데.”
“작은 엄마가 LA 집 공사에 신경써주셔서 그런 것 같아요.”
“아니에요. 지혁씨 덕에 제가 꿈꿨던 대로 정원을 꾸밀 수 있어서 좋았는걸요? 태교에도 좋았고요.”
출산한지 4주도 채 되지 않아, 그것도 한명도 아닌 세 명의 동생을 세상에 내보낸 작은 엄마가 오랜 비행을 감수하면서까지 LA로 왔다는 점에서 죄송스러웠다. 괜히 나 때문에 한창 몸을 가눠야할 작은 엄마가 고생을 하게 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가 믿음이구나? 안녕. 오빠... 아니 형 처음보지? 반갑다.”
“우정이, 용기도 형이 많이 반가워. 너희들 태어났을 때 못가서 미안해?”
그래도 유모차에 담겨 새근새근 잠이 들어있는 동생들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절로 포근해졌다. 영화 스케줄을 빙자한 복잡한 마음 상태에 여동생들 때와는 달리, 태어날 때 직접 찾아가지도 못했었는지라 더욱.
그렇게 한동안 빤히 유모차 안 동생들을 바라보았다. 앙증맞은 두 손과 발을 꼼지락거리며 존재감을 뽐내는 동생들의 모습에 그때만큼은 그동안 나를 복잡하게 만들었던 심사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집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자. 네 작은 엄마도 그렇고 애들도 배고플 테니까, 뭐 좀 먹으면서.
아마 때마침 들려온 삼촌의 말이 아니었다면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해서 유모차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지금 느끼는 감정들은 간만에 느껴보는 것들이었으니까.
*
“형이랑 누나는?”
“며칠 뒤에 올 거야. 처남은 회사일 때문에, 처제도 하는 일 때문에.”
음식을 앞에 두고 누군가와 대화를 해본 적이 꽤나 오래전 일임을 새삼 깨달았다. 가족들이 미국에 온다는 소식에 평소보다 더욱 정성을 들여 저녁을 준비한 클라라 덕에 대화도 나누고 맛있는 음식도 먹다보니 말이다.
“정원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날이 좀 따뜻해지면 편하게 누워서 쉴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한 건 없어요. 그냥... 이랬으면 좋겠다 싶어서 작업하시는 분들에게 요구한 걸요. 뭘.”
복잡한 생각들은 머리 저편으로 날려버렸다. 어느 정도 감정들이 수습된 상태에서 맞이한 가족들이었고 그런 가족들의 모습에서 마음의 안식을 얻었으니까.
“아까 노래 부르는 것 같던데...?”
“어, 어? 어. 노래 부르고 있었어.”
“앨범 준비?”
“아니, 그건 아니고.”
그렇게 담소를 나누다 들려온 삼촌의 말에 순간이나마 놀랐다. 창문을 닫은 채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른 것이기도 하고 노래가 끝맺었을 때 등장한 가족들이기에 이를 듣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삼촌 또한 마찬가지인 듯 했다.
“음원으로 내려고.”
“음원? 네가?”
앨범도 아닌 음원으로 발매하기 위해 만든 곡이라는 말에 삼촌의 두 눈이 일순간 휘둥그레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정규 앨범으로만 가수 활동의 시작을 알렸던 나이기도 하거니와 지금의 나는 가수로서의 활동에 전념할 수 없는 처지였으니까.
“한 곡만 낼 거야.”
“한 곡?”
“어. 들려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더 이상 이와 관련된 얘기를 깊게 하고 싶지 않아서 화제를 다른 것으로 돌려버렸다.
“애들은 어디 갔어?”
“정원에서 뛰어놀고 있으니까, 걱정 마라.”
“좋아하네. 많이. 그런데 춥지 않겠어? 너무 밖에서 있으면 감기 들 텐데.”
“뭐, 한창 뛰어놀 때니까. 조금만 더 놀게 하고 데려와야지.”
삼촌 또한 이런 내 속내를 얼핏 짐작한 것인지, 굳이 음원과 관련된 얘기를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그래, 영화 촬영은 잘되고 있고?”
“어, 많이 배우면서 찍고 있어. 예정대로 6월이면 촬영 끝날 거고.”
“개봉은?”
“6월에 제작발표회 하고나서 북미, 남미, 유럽 이렇게 홍보 행사 몇 군데 다닐 거고... 개봉은 9월로 거의 확정됐어. 나라마다 각각 다를 수는 있겠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삼촌이 마냥 내 뜻대로 대화에 호응해 준 것만은 아니었다.
“네가 얼마나 하고 싶어 했는지 몰랐으면 무조건 말렸을 거야. 무조건.”
“삼촌. 걱정 하지 마.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애야? 이제 나도 곧 있으면 스물여덟이야. 스물여덟.”
내가 하기로 한 영화가, 기존 주인공이 꽤나 큰 부상을 당해 하차한 그런 영화라는 것을 뒤늦게 안 삼촌의 반대는 생각 이상으로 거셌었다. 그보다 더 큰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면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해약금을 지불했을 정도로.
“네가 스물여덟이든 여든둘이든 내가 살아있는 한 나한테는 애야. 그런데, 나한테 말도 안하고 그렇게 위험한...”
“알았어. 알았어. 다음부터는 그런 위험한 일이면 먼저 말할게. 봐봐. 삼촌이 이럴 거 알고 말 안 한거야. 걱정할까봐.”
물론 삼촌이 어째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모르지 않았기에 다소 과하다싶은 삼촌의 간섭을 귀찮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저 고마웠을 뿐.
“며칠 쯤 있을 거야?”
“응? 왜? 바빠?”
“아니, 나도 일주일정도 시간 있어서.”
“두 달 좀 넘게 있을 거야. 여기서 설까지 보내다 갈 생각이니까.”
“설 때까지 여기 있는 다고?”
“처남은 일주일 정도만 있다가 회사일 때문에 가봐야 될 거야. 그리고 처제도 마찬가지고.”
“음... 그런데 나 촬영 들어가면 시간 없어서 여기로 거의 못 올 텐데, 괜찮겠어?”
“지혜가, 아니 네 작은 엄마가 여기 경치 보는 걸 좋아해. 그러니까 우리들 걱정은 말고 너는 네 일에만 신경 써. 또 다치지 말고.”
“알았어. 아! 그리고 작은 엄마. 존하고 클라라한테 미리 말해둘 테니까, 필요한 거 있으시면 그 둘한테 말하시면 돼요.”
“그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돼요. 오빠도 있고 태현이랑 소담이도 있는 걸요 뭘.”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거에요. 편히 쉬다가세요.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어쨌든 가족들이 온 만큼 최대한 편하게 쉬다 갔으면 했다. 비록 내게 주어진 휴식이 일주일 뿐이라 얼굴을 마주볼 기간도 그 정도이겠지만 말이다.
*
“안 그래도 지들 때문에 늦게 데뷔했는데 이제 와서!”
연습생신분으로 프로그램에 합류했을 때 소속사측과 작성했던 계약서가 생각 이상으로 빈틈이 많았다는 점 그리고 이 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일부 소속사들의 행태에 안석준 CP의 얼굴에 분노가 서리기 시작했다.
“진짜 골치 아프네요. 골치가.”
대중들의 엄청난 관심을 이끌어내며 성공적으로 프로그램이 종영되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10명의 소녀들로 구성된 프로젝트 그룹의 앞날 또한 밝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프로젝트 그룹으로서의 활동과 관련된 이해관계가 복잡해짐에 따라 소녀들의 데뷔는 차츰, 차츰 미뤄져갔고 결국 해당 프로젝트 그룹은 프로그램이 종영된 지 석 달이 지난, 9월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활동 준비에 돌입할 수 있었다.
물론 고맙게도 대중들은 석 달이 지나서야 결성된 프로젝트 그룹을 잊지 않았고 도리어 더한 응원으로 소녀들을 응원해주었다. 그 덕에 프로젝트 그룹 결성에 장애가 되었던 소속사들 또한 대중들의 싸늘한 눈초리에 꼬랑지를 말아야 했고 말이다.
“그 그룹 활동하게 애들을 빼 달라 이건가? 이제 첫 데뷔 무대를 치룬 애들을?”
“첫 데뷔무대 기준으로 1년동안 프리티스타 공식 활동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우리 측에 관리 권한이 있다고만 규정한 게 잘못이었죠. 그런 빈틈을 찾아낼 줄이야. 설마하니, 휴식기 때 자기들이......”
“정규 1번, 싱글 3번씩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애들 스케줄은 빡빡해요. 광고촬영부터 각종 프로그램 출연까지 합치면 더욱요. 그런데, 애들이 그나마 쉴 수 있게 겨우 마련한 휴식기간에 자기들 그룹 일원으로 활동하게끔 한다니......”
하지만 결과적으로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치룬 프로젝트 그룹 프리티 스타의 앞날은 그다지 밝지만은 않아보였다. 그것도 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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