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16 2017 =========================================================================
#316
“뭐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라면뿐이네. 집을 조금 오래 비워서... 미국까지 왔는데, 첫 끼부터 라면 먹게 했네?”
“괜찮아요.”
“그래도 아쉽지 않아? 라면은 한국에서도 먹을 수 있는 건데.”
“아니에요. 여기 있는 일주일동안 많이 먹으면 돼요. 그리고 경치도 좋고 다 좋은데요. 뭘.”
산타모니카 해변을 바라보며 먹게 된 늦은 저녁 메뉴가 라면이라는 점에서 미안했다. 뭔가 지금은 오묘한 감정들이 뒤섞인 사이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오빠 된 입장에서 멀리서 찾아온 동생에게 대접할 음식으로서 라면은 영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답답했었는데 뭔가 뻥 뚫린 것 같아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오빠가 이래서 여기에 자주 있나 봐요. 이런 곳에서 있다 보면 한국은 너무 답답할 테니까.”
그래도 꽤나 어색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주변 경치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 모습의 녀석에 힘입어 분위기 자체가 걱정한대로 흘러가진 않아 다행이었다.
“많이 답답했어?”
“그냥 뭐... 오빠처럼 팍 터트릴 수 없는 입장이니까요.”
“어, 어? 어... 그건 그렇지.”
솔직히 녀석과 이런 대화를 나눌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는데, 처음 봤을 때의 앳된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공감대를 가질 만한 화제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게 되었다. 내가 수많은 이들을 겪어왔고 변한만큼 녀석 또한 수많은 것들을 겪었을 테고 바뀐 것 같았으니까.
“엄청 오래된 것 같아요. 연습생 때 홍대에서 본 지도 벌써 7년째네요. 뭐, 얼굴을 자주 본 건 아니지만요.”
“벌써 그렇게 지났나? 7년이라...”
갓 데뷔했던 걸 그룹이 산전수전 다 겪은 5년차 아이돌이 되었고 이제 막 정규 1집으로 데뷔했던 솔로 가수가 이제는 할리우드 영화의 주연으로서 새롭게 발돋움하고 있는 배우가 될 정도로 녀석을 알게 된 지 꽤 되었다는 사실에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녀석 또한 그런 내 웃음에서 속내를 짐작한 탓인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고 말이다.
“활동 잘 마무리 했다는 소식은 들었어. 1위도 하고 그랬다며.”
“정말요?”
“응? 당연한거 아니야?”
“전 오빠가 아예 관심 없는 줄 알았거든요.”
“에이 설마. 내가 만든 곡이고 너희한테 준 곡인데, 그 정도는 확인해야지.”
“잘하고 있나, 못하고 있나 감시하려고요?”
“뭐, 그런 것도 있지 않을까?”
“치...”
그렇게 복잡한 생각들은 잠시 마음 한편으로 제쳐두고 한동안 밤하늘의 달빛과 해변을 배경삼아 대화를 나누었다. 오랜 세월을 ‘아는 사이’로 지내온, 그것도 가수라는 공통의 분모를 가진 사이로서 할 얘기가 생각 외로 많다는 점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
“잘 다녀왔어?”
“네, 오빠가 경호원 분 붙여주셨잖아요. 덕분에 마음 놓고 놀다 온 것 같아요. 수영도 하고요.”
“그래, 그럼 다행이다.”
LA에 도착한 후의 일상이란 건 크게 별다를 게 없었다. 유진이 녀석은 내가 그랬었던 것처럼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일광욕을 한 뒤, LA시가지를 둘러보다가 저녁때쯤이면 저택으로 돌아오는 등, 말 그대로 휴가를 보냈지만 나는 로케 촬영 때와 마찬가지로 하루 종일 대본과 씨름을 해야 했으니까.
아마 그래서였던 것 같다.
“오늘 저녁은 클라라 특별 식이야. 너 내일 귀국한다는 말 듣고 만들었다더라.”
“어머! 진짜요? 어떻게요. 난 그것도 모르고 인사도 못했는데...”
“내일 가기 전에 볼 수 있을 거야. 어차피 점심 비행기니까.”
“그럼 다행이고요. 우와 진짜 맛있겠다!”
클라라가 아니었다면 녀석의 내일 귀국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정도로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이것이 그만큼 녀석이 이곳 생활에 잘 녹아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너무나도 바빠 시간 개념을 잃어버렸는지 와 같은 구체적인 이유까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찍는 줄은 전혀 몰랐어요. 그것도 할리우드 영화.”
“뭐, 굳이 떠벌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녀석의 미국여행 마지막 날 밤에 어울릴 만한 요리들을 앞에 두고 꽤나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물론 그 얘기라는 것이, 어제 무심코 흘렸던 나의 영화 출연 소식에 관한 녀석의 질문과 나의 대답으로 이뤄졌음은 명약관화였고 말이다.
“개봉은 언제에요? 그러면?”
“내년 하반기 쯤 일거야. 촬영이 내년 6월 말 때까지로 잡혀 있으니까. 빠르면 9월? 10월?”
“한국에서도 개봉하겠죠?”
“글쎄...”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던진 질문에 확답을 던지지 못하는 내 모습에서 유진의 얼굴이 짐짓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아예 활동 안할 생각이에요?”
솔직히 한국에서도 개봉하지 않겠느냐는 녀석의 질문은, 사실상 질문이 아니었다.
영화산업에서 한국 시장이 결코 작은 시장도 아니거니와, 할리우드 영화에서 주연을 동양인으로 그것도 한국인을 썼는데, 한국에서 개봉을 하지 않을 리가 만무했으니까.
“그냥 음... 딱히 한국에서 활동할 필요가 없어졌다... 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답을 건네지 못하고 녀석의 표정을 어둡게 한 것은, 이렇게 이미 나와 있는 답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음에 기인한 것 같았다.
물론 미국에서의 생활이 오래 지속되고 해외 로케 촬영을 통해서, 다른 나라에서의 생활 또한 한국에 비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언정, 내가 원하는 자유로운 생활, 평범한 생활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깨달음이 지독하리만치 독한 관심을 내보이는 한국 대중들에 대한 두려움과 원망, 거리낌 같은 감정들을 무뎌지게 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오빠가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되겠죠... 그래도 한국에 아예 안 올 것 같진 않아서 다행이에요.”
“응?”
그런데 그런 나의 심정이 담긴 말을 들은 녀석의 반응이 순간 어두워진 얼굴과 다르게 비교적 긍정적이었는지라 의아함을 품게 되었다. 뭐, 가만 보니 얼굴 표정도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았고 말이다.
“뉴스에서 봤어요. 인터넷에서도 봤고요.”
“뭘?”
“오빠, 집 짓는다고 하던데요? 그것 때문에 엄청 떠들썩했어요. 애호박 펠리스라나, 뭐라나.”
[콜록콜록]
“크흠... 뭐라고?”
순간 들려온 단어에 사례가 들려버렸다. 그 정도로 유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내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으니까.
이런 씨.
*
“여기 공사 다 끝나면 얼마나 멋질까요? 지금도 좋은데.”
“글쎄... 조금 많이 바뀔 거라서 잘 모르겠네. 정원 테마도 바뀔 것 같아서.”
“그래요? 그래도 멋질 것 같아요. 저기 밤바다 보이는 것만으로도.”
“그건 나도 인정.”
저녁을 먹다, 산책을 하고 싶다는 녀석을 데리고 저택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아직 공사 중인 저택이지만, 남은 부분이 정원의 세밀한 부분과 아직 바닥 공사도 하지 않은 본채 건물이었는지라 산책할 만한 구색이 조금은 남아있었으니까.
“이 원피스 어때요?”
“응? 어, 예쁘네. 잘 어울려.”
“그래요? 다행이다. 히히...”
다만, 산책을 한다면서 옷까지 갈아입은 녀석의 의도가 너무나도 노골적이어서 오묘한 감정들 때문에 산책에만 집중할 수 없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이제 내일이면 다시 한국으로 가야된다는 게 너무 싫어요.”
어쨌든 그렇게 걷다 보니, 꽤나 많은 얘기를 하게 되었다. 기존의 부지도 꽤나 넓은 편이었지만 새롭게 구입하여 확장한 부지는 이의 몇 배나 될 정도로 큰 부지였기 때문이다.
“그냥... 팬들이 주는 관심이 싫은 건 아니에요. 오히려 너무 고마워요. 그래도 가끔... 숨이 막힐 때가 있긴 있었어요. 뭐, 저만 그런 건 아닐 테지만.”
“음...”
“어쩔 수 없잖아요. 나를 좋아해주는 팬들이 얼마나 많은데, 무대에서 노래를 할 수 있는 것도 모두 팬들 덕이잖아요. 소수 몇 명 때문에 모든 팬들을 외면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데 문득, 문득 건네져오는 녀석의 발언들이 어찌나 내 가슴을 찌르는지, 그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멈칫하게 되었다.
요 일주일간 마냥 어리게만 생각했던 녀석이 생각 이상으로 나와 유사한 고민들을 안고 있다는 점에 꽤나 많이 놀랐었는데, 지금은 조금 다른 의미로 놀라버렸다. 물론 모르는 의미도 아니었고 어떻게 보면 식상한 얘기일 수 있었다. ‘팬들이 아니면 무대에서 노래할 수 없다’라는 얘기가.
“오빠, 왜 그래요? 안색이 안 좋아요. 어디 아파요?”
“어, 어? 아니, 벌레가 붙은 것 같아서. 별거 아니야.”
하아.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강렬한 반발심이 튀어 올랐는지라 더 이상 생각을 잇지 않았다. 굳이 이런 환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걷는 산책을 망치고 싶지 않았고 때마침 녀석 또한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말들을 털어놓기 시작했으니까.
“하아... 오빠 다시 보려면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생각하니까... 더 아쉬워요. 한국 가기 싫고요.”
“유진아.”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어느새 녀석 다운 모습의 하나로 인지되어 버린 당돌함과 노골적인 발언에 강렬했던 반발심이 씻은 듯이 녹아내려버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도대체 내가 어디가 좋아서 이런 용기를 내는 것인지 의아해졌다.
유진의 성향 상 그 이유에 나의 돈이나 명성, 지위, 외모가 한 요소는 될 수 있을지 언정, 주된 요소는 될 수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더욱.
“오빠 영화 촬영 때문에 계속 미국에 있을 거고 한국 활동에도 별로 미련 없으신 것 같으니까, 오빠 보려면 또 열심히 활동해야겠네요.”
“올해 내로 두 세 번은 시간 내서 갈 것 같으니까, 그때 시간되면 보자.”
“정말요?”
“응, 너 시간되면.”
“우와...”
어쨌든 그 이유가 무엇이 됐든 이제는 마냥 무시하고 타이르는 방식으로 녀석을 대할 수가 없게 돼버렸다. 녀석이 진심이고 내가 녀석에 대해 궁금한 점이 생긴 만큼, 나 또한 진심으로 녀석을 대하는 것이 옳다고, 그게 맞는 것이라고 머리가 가슴이 느끼기 시작했으니까.
*
“오늘은 너무 격렬했어... 뭐, 좋았지만.”
땀으로 범벅인 두 남녀의 몸이 포개진 순간, 거친 숨을 내쉬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사내와 달리 여인은 흥분을 말로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를 껴안은 채 마주보던 남녀의 사이에 사내가 입을 연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서였다.
“바보 같네. 네 여자친구.”
“그만해. 그 얘긴.”
사내의 목소리에는 짜증과 더불어 조금의 분노마저도 느껴지는 매서움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일순간 인상을 찌푸리는 사내의 얼굴에서 거리낌이 물씬 묻어나왔음에도 여인은 오히려 웃는 얼굴로 사내를 마주볼 뿐이었다.
“이제는 화도 안내네? 하긴... 널 이렇게 방치하는데 그럴 만도 하지.”
그도 그럴 만 했다. 이런 얘기를 처음 꺼내는 것이 아닐 진데, 사내의 반응은 비록 짜증이 담겨 있었지만 처음 이 얘기를 꺼냈을 때와는 천지차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달랐으니까.
하지만 여인은 이를 표정으로 드러냈을지 언정, 정도를 넘어서까지 사내의 한계를 시험할 깜냥을 지니지는 못했다. 그러기엔 사내가 지닌 매력이 너무나도 대단했고 이를 가질 기회는 사내가 지금 지닌 직업적 특성이 아니었다면 그녀가 평생을 살아도 가져보지 못할 귀중한 것이었으니까.
“풋... 생각나면 언제든 와. 난 오프, 온 가리지 않고 환영이니까. 물론 지금도 환영이지만. 한 번 더? 어머! 하앙.”
그렇게 사내와 여인은 다시금 몸을 뒤섞으며 격렬하게 움직였다.
“으윽. 하앙...”
사내가 자신을 통해서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여인은 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는 자신의 남자였고 격렬한 움직임 속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쾌감이 여인의 이성을 모조리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동안 격렬히 움직였던 두 사람은 자정이 다가옴에 따라 방을 나서는 사내의 움직임을 통해 갈라지게 되었다.
“또 와. 기다리고 있을게.”
그리고 언제나처럼 여인은 사내에게 다음을 기약했다. 물론 사내는 언제나처럼 여인의 말에 이렇다 할 답변을 건네지 않았고 여인 또한 이를 모르지 않았지만 말이다.
“또 올 거면서 대답 좀 해주지. 아무튼 조심히 가! 올 때 미리 연락해주면 더 좋고!”
하지만 이런 여인의 기약은 마냥 여인만의 기약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인해.
“김영진씨! 김영진씨 맞으시죠?”
“KTBS 정의는 살아있다입니다! 김영진씨! 오늘 군인 신분으로 파주 위문공연에 참가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해당 부대 또는 BOQ에서 머물러야 되는 것 아닙니까!”
“지금 나오신 게 퇴폐업소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지금 옆에 있는 여인은 누구입니까!”
순간적으로 달려드는 세 명의 사람들로 인해 여인은 차마 얼굴을 숨길 생각도, 자리를 피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미는 이들로 인해 머리가 하얗게 변해버린 탓인지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버렸으니까.
그리고 이는 여인과 함께 있던 사내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사내는,
“김영진씨! 김영진씨! 야! 도망가려고 한다. 따라붙어! 얼른!”
“도망치시는 겁니까! 이거 전부 찍고 있습니다. 김영진씨가 퇴폐업소로 들어간 것부터, 어, 어? 카메라. 지금 뭐하는 겁니까!”
[우지직]
“야! 이거 찍어! 지금 카메라 파손 하는 겁니까! 주철아 찍어! 무조건 찍어라!”
자리에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는 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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뀨뀨꺄까님 후원쿠폰 18 장 감사합니다.
邪美男님 후원쿠폰 20 장 감사합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주신분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원고료 쿠폰 주신분들, 후원쿠폰 주신분들 정말 큰힘 주셔서 감사합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다음편은 오전중 또는 점심 때쯤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테블릿이 고장나서 말썽이네요 ㅠㅠ
컴퓨터를 새로 주문했는데, 빨라도 화요일 쯤에 올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