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14 2017 =========================================================================
#314
“아 개덥네. 날씨 왜 이러냐? 이제 4월 끝나 가는데?”
봄 날씨답지 않게 후덥지근한 기온 탓에 무대를 끝마치고 대기실로 들어온 이들의 얼굴엔 땀이 흠뻑 묻어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얼굴은 마냥 지치고 피로한 기색만을 드러내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쁜 기색이 도드라졌다.
“오늘 BOQ말고 모텔에서 잔답니다!”
“유후! 그럼 오늘은 종연 형이 쏘는 거지?”
“야 인마. 이 자식이 뭐만 하면 나한테 쏘래?”
지방 공연을 할 때면 으레 그래왔듯 그들의 옷차림은 이미 평범한 일반인의 그것이었다. 규정상 BOQ 숙소에서 지휘관의 통제를 받아야 할 테지만, 그들을 통솔해야할 이는 존재하지 않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선임은 이종연이었으니까.
“오늘 갈 거지?”
“흠...”
“크크... 회식 끝나자마자 가자. 어차피 부대장도 부대에 있을 거고 현장 책임자도 없으니까.”
그렇게 그들은 파주 시내의 삼겹살집에서 하루 동안의 노고를 풀기 시작했다. 소주병과 맥주 병 그리고 갖가지 음식들을 먹는 그들이 유명인이고 군인이라는 것을 삼겹살집 주인 또한 모르지 않았지만, 으레 매장의 매출을 올려주는 이들의 방문을 그저 반길 뿐이었다.
어쨌든 그들은 친절하게 룸을 따로 잡아준 주인의 배려에 주변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TV화면 속 연예뉴스는 좋은 안주거리가 되었다.
“프로젝트 데뷔 시즌 2가 엄청난 화제를 불러 모으고 있는 가운데, 최근 있었던 3차 경연의......”
“죽이네. 죽여.”
때마침 TV화면을 가득 메운 일련의 소녀들 모습에 룸 안에 있는 이들의 얼굴이 오묘한 감정들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때만큼은 수준 낮은 저급한 대화도 어느 정도 통용되는 군인인 마냥 온갖 음담패설이 장내를 가득 메웠으니까.
“요즘 애들은 발육이 좋다. 좋아.”
“난 김여정이 좋던데.”
“야, 김여정이 뭐가 좋냐? 최지영, 김지현이 딱이지 않냐?”
“에이...”
“야! 저런 애들이 쫄깃한 거야. 원래. 키도 크고 다리 봐라. 쭉쭉.”
하지만 그들의 질펀한 대화는 오래가질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가운데 분위기 메이커를 담당하고 있는 이종연의 얼굴이 이내 들려온 소식에 급격히 찌푸려졌기 때문이다.
“가수이자 배우로서 월드스타의 반열에 오른 강지혁 씨가 한남동 외인부지라는, 덕수궁 면적과 비슷한 대형 부지를 낙찰 받았다는 소식 저희가 전해 드렸었는데요. 그 대형 부지에 대한 시행사로서 우리에게 버즈 두바이, 가칭 강지혁 아레나로 유명한 씨마르사가...... 대형 부지가 주거용으로 사용될 예정이라는 점에서 건축업계와 관련 대기업들의 반응이 경악에......”
“아씨, 재수 없게.”
시가 8천억이 넘는, 경매 낙찰가가 1조 이상이 될 거라는 한남동 외인부지는 알만 한 사람들에게는 꽤나 널리 알려진 사업 건이었다. 그래서 이 경매가 생각 외로 너무 낮은 가격에 낙찰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낙찰자가 대기업이 아닌 일개 개인인 강지혁이라는 점은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동안 강지혁을 과소평가하던, 저들 딴에는 월드스타라 생각했겠지만 어쨌든 강지혁이 지닌 재력이 상상 초월이라는 점과 더불어 강지혁이 언론과 대중들의 폭격을 맞아 한국을 떠난 상태에서 이 일이 벌어졌다는 점은 대중들 모두를 달아오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모든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종연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상태였고 그는 모두의 시선을 흡수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어? 형. 강지혁이 왜?”
“왜긴 왜야, 인마. 저 새끼 좆같은 새낀데.”
“그, 그래?”
“아무튼 갈 거지? 태섭이 넌 갈거고. 김영진 너도? 재수 없는 새끼 얼굴 봐서 난 무조건 가야겠다. 가서 기분 안 풀면 일주일동안 재수 없을 것 같아.”
이종연은 별다른 부연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저 당초 계획 삼았던 것을 다시금 확언했다는 점에서 그 불쾌감이 어디가질 않았다는 점을 드러냈을 뿐.
“가야지. 으드득.”
“어?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이는 왜 갈어? 아무튼 오케이! 배나 든든히 채워라. 밤새 흔들어대야 하니까.”
다만, 그 불쾌감이 누군가의 망설임까지 완전히 없애버렸다는 점이 이종연에게 꽤나 호재로 다가왔는지라 그의 얼굴은 이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강지혁에 대한 불쾌한 감정들이 일순간 떠오른 강렬한 쾌락들에 대부분 상쇄되었으니까.
“어?”
“응? 왜 그래?”
“아니. 그냥 뭔가 좀 반짝인 것 같아서.”
“자식이. 얼른 가자. 미리 예약해뒀으니까.”
그렇게 서둘러 회식 자리를 마무리하고 나머지 후임들에게 모텔비를 건넨 이종연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김태섭과 식당 입구에서 멈칫한 김영진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익숙한 곳을 떠올리는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밝았으니까.
*
그동안 좀처럼 얻어내지 못한 성과를 거둔 그들의 얼굴은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방금 전 있었던 일을 그르칠 실수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너 인마!”
“죄. 죄송합니다.”
막내 VJ로서 이번 작전에 투입된 녀석의 실수에 식겁한 것은 최진충 뿐만이 아니었다. 차에 타고 두 명의 작가들의 얼굴 또한 일순간 하얗게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하아... 됐다. 찍은 건? 제대로 찍었지?”
하지만 누가 봐도 크게 질책한 말한 상황임에도 최진충은 이를 크게 집고 넘어가지 않았다.
“예, PD님. 전부 찍었습니다.”
어쨌든 실수는 무사히 넘어갔고 그들은 원하던 성과를 일부분 얻었으며, 지금부터가 중요한 때임을 모르지 않았고 따라서 현장에 있는 이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일단 주철이 너는 VJ 2명이랑 쟤들 따라가서 찍어. 절대 들키지 말고. 알겠지?”
“네, PD님.”
“오늘... 오늘은 안전 빵이야. 일단 오늘은 찍을 수 있을 만큼 다 찍고 얻을 만큼 얻은 뒤부터 다시 한 번 오늘처럼 잡아내면... 알지? 대박인거?”
처음 한번이 어렵다는 것을, 지금껏 겪었던 수차례 실패와 더불어 그동안의 방송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는지라 무전기를 앞에 둔 최진충의 얼굴과 목소리에는 결연한 의지를 담겨 있었다.
“나머지는 나랑 여기 남아서 계속해서 회식하는 장면 찍고.”
“예.”
“됐어. 오늘 뭐라도 건질 것 같으니까. 조금만 힘내자. 알겠지?”
“예.”
그렇게 누군가는 곧 있을 강렬한 쾌감에 대한 흥분으로, 누군가는 기필코 성과를 얻어내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에 대한 적대감과 열등감으로 마음을 가득 채운 채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
[로케 촬영 보름 후면 완전히 끝난다고 했지? 그럼 LA 집에 있겠네? 어차피 세트장 LA에 있다며.]
[LA집 지금 공사 중이야. 촬영장 인근에 호텔 잡아놨어.]
고생한 만큼 두바이에서의 휴식이 꽤나 꿀맛 같았다. 그리고 이런 꿀맛에 먼 곳에서 와준 테일러의 몫이 컸음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뭐? 우리 집에 오면 되지. 뭐하러 호텔에 있어?]
그래서 고마웠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는 지, 한없이 큰 공허함을 안겨다 준 이의 빈자리를 훌륭히 메워주는 테일러의 존재감이 더욱 커져 괜스레 녀석에게 부담이 될까 걱정이 됐지만.
[아, 자존심 상해. 나랑 사귄다고 열애설 나면 오히려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야? 영광스러워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이렇게 미인인데!]
[미인?]
[아이 씨! 내가 더러워서 근사한 남자친구 사귄다.]
[호오... 그러셔?]
[내, 내가 이런다고 흐응... 너 반칙이야. 이러는 거.]
어쨌든 동안, 미인과 같은 단어가 역린에 해당하는 녀석에게 오랫동안 기억날 만한 밤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내 품 속에서 잠을 잘 때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숙면에 빠질 수 있다는 녀석의 말마따나, 내가 지금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그런 것뿐이었으니까.
그렇게 하루를 꼬박 세워 관계를 나누고 저녁때가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난 녀석을 배웅해준 뒤, 나 또한 두바이를 떠나게 되었다.
조금은 아쉬운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지금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기회를 마주하고 있었고 이를 놓칠 생각은 결단코 없었으니까.
[휴가 잘 보내고 왔어?]
[어? 어. 나야 뭐 잘 지냈지. 프란카 너는?]
[나야, 집에서 가족들이랑 지냈지. 이럴 때 아니면 집에 가기 힘드니까.]
물론 이는 나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닌 듯 했다. 예전 크리스, 파밀라도 그렇고 프란카 그리고 나아가서 어느 정도 비중 있는 배역을 맡은 배우들 모두가 나와 다르지 않은 마음으로 이번 작품에 임하고 있는 듯 했으니까.
[열심히 하네?]
[당연한거 아니야?]
[응?]
그런데 열심히 대본을 훑어보고 있던 프란카로부터 들려온 그 이유라는 게 나를 꽤나 낯 뜨겁게 만드는 것이었는지라, 일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너 로케 촬영할 때 나 잠깐 미국 쪽 촬영 갔던 거 알지? 그때 너 액션 찍은 거 편집 본 살짝 봤어. 나랑 있었을 때 찍었던 액션연기들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부끄럽더라. 그래서 나도 분발하기로 했어. 너가 그렇게 열심히 하는 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아니, 도대체 그 액션 연기 편집본이라는 게 뭔지. 크리스도 그렇고 이제는 프란카까지 편집본, 편집본 하니 너무 궁금해졌다. 편집을 얼마나 잘했길래, 본 사람마다 저런 얘기를 하는 지, 뭘 알아야 당황을 해도 억울하진 않을 테니까.
[핸드 핼드부터 시작해서 숏 컷... 아니다. 어쨌든 편집을 잘한 것뿐만 아니라 네 액션 연기가 대단했어. 스미스가 왜 너만 보면 독종이니, 독하다고 하는 지 절실히 깨달을 정도로.]
[핸드 핼드?]
[촬영 기법 중 하나인데. 그냥 간단하게 말하면 너 액션 할 때 찍는 방식이야. 직접 들고 찍는 거.]
어쨌든 더욱 오기가 생겼다. 원래부터 설렁설렁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동료 배우들에게 저런 극찬을 받고나니 아예 완벽한, 내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라도 내 역할을 완벽히 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파밀라 뻥하고 찼다며?]
[콜록콜록... 뭐?]
[꽤 의외네? 솔직히 깊은 사이는 아니어도 하룻밤 정도는 통할 줄 알았는데.]
[그걸 어떻게...?]
[나랑 내기했거든. 너가 넘어오나, 안 넘어오나. 뭐, 덕분에 꽤 벌었으니까, 나중에 한턱 쏠게. 그럼 난 메이크업 받으러 가야해서 이만.]
물론 그 얘기라는 게 칭찬만, 아니 어떻게 보면 칭찬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연기에 관한 것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아니, 이 사람들이. 내가 무슨 동네북이야? 하아. 한턱 쏜다는 말 후회하게 해준다. 피눈물 흘리게 해준다. 진심.
*
“그래서 뭐래? 방송에서 나온 게 진짜래?”
“그, 그게.”
“야이 씨. 빨리 말 안 해?”
“예! 모두 사실이라고 합니다!”
모두의 기대 섞인 시선이 부담되어서 일까. 신입사원으로서 쟁쟁한 회사 내 인력들이 죄다 모인 팀에 합류한 탓인지, 사내의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내의 얼굴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장내 다른 이들의 얼굴은 침울하기 그지 없었다.
자신들이 몇 년간 쏟아 부었던 시간, 비용, 땀들이 한순간에 날라 갔다는 점에서 좀처럼 마음을 다잡지 못하던 그들을 일으켜 세운 건 아이러니하게도 한남동 외인아파트 부지 경매 결과였다.
[한남동 외인 아파트 부지! 가수 겸 배우 강지혁에게로 낙찰되다! 시가 8천억, 예상 낙찰가 1조 이상으로...... 다른 대기업들이 일제히 2천억 이하의 금액을 써내어 강지혁은 비교적 저가로......]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가 벌어졌음에 사성물산 상무 이진후와 팀원들은 희망을 얻게 되었다. 건설사나 대기업이 아닌 일개 개인이 한남동 외인 아파트 부지를 낙찰 받았다면 이는 그들에게 다시금 기회가 생겼음을 의미하는 것일 테니까.
“씨마르사에서 시행사로서 해당 부지를 강지혁 본인을 위한 주거용으로...”
“하아...”
하지만 좀 전 신입사원의 말이 이 모든 것을 무너뜨려버렸다. 그 큰 부지를, 그것도 황금 노른자 땅이라 불릴 정도로 교통의 요지에 서울의 한가운데에 있기까지 한 부지를 상업적인 용도가 아닌 주거용으로 쓰겠다는 강지혁의 말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상황은 또다시 반전되고 말았다.
“8천억?”
“헉...”
“8, 8천억...”
시행사로서 시공사를 모집한다는 씨마르사의 공고문이 이진후와 그의 팀원들 모두에게 놀람을 넘어선 경악을 안겨다주었으니까.
주거지역으로 해당 부지를 사용하겠다는 발표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규모인 공사비에, 아니 본디 자신들이 생각했던 상업시설의 공사비를 훌쩍 뛰어넘는 공사비에 모두의 두 눈이 일순간 초롱초롱해졌다.
“그래서 조건이 뭐야. 우선 계약 조건 같은 게 있을 거 아니야?”
“조건은 없습니다만...”
“뭐?”
“조건이 없어?”
하지만 우선 계약 조건 자체가 없다는 신입사원의 말을 시작으로 그들은 지금껏 그들이 느꼈던 배 이상의 놀람을 겪어야만 했다.
“이런 식으로 지어줬으면 좋겠다고 사진이 몇 장 첨부되었는데...”
“첨부되었는데?”
“그게...”
“야 이 씨!”
“여, 여기 스크린 봐주십시오!”
그도 그럴 것이, 시행사인 씨마르사가 공고했다는 사진 몇 장이라는 것이, 그들로서도 꽤나 익숙한 건물이었다는 점,
“뭐, 뭔데, 저건?”
“저거 설마... 그... 내가 알고 있던 그거?”
그리고 그 건물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나도 명확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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