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13 2017 =========================================================================
#313
“거품도 그렇고 온도도... 너무 좋아요. 언니.”
“그렇네... 야경도 좋고 전부.”
“이런데서 이렇게 스파 할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는데. 히히.”
마사지, 룸서비스, 수영장 등 하루 종일 호사란 호사는 죄다 누린 탓인지 스파를 하며 서울의 야경을 보는 소녀들의 얼굴은 노곤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있잖아요. 언니.”
“응?”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소녀들의 눈동자는 초롱초롱한 상태에서 한 아름의 궁금증을 담고 있었다.
“도대체 시크릿 심사위원 아니 작곡가님 누굴까요?”
“흠... 글쎄...”
“엄청 유명한 작곡가인가 봐요. 저번 홍삼스틱이랑 프로폴리스, 마카롱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스위트룸까지 해준 걸 보면요.”
시크릿 심사위원이자 작곡가로서 소녀들의 팀에게 곡을 선물해준 이에 대한 궁금증은 지나와 지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지금 한창 룸서비스를 시켜 배를 불리고 있을 멤버들과 더불어 다른 팀 연습생들까지 전부 3차 경연을 계기로 시크릿 심사위원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짜 너무해요. 영영 안 알려준다는 게... 제작진들도 모르는 것 같던데요? 우리 팀 매일 찍어주는 VJ 언니랑 작가 언니 있죠? 그 언니들도 모른데요. 엄청 졸랐는데... 아는 사람은 안석준 PD님 뿐이라서 자기들도 궁금해 죽겠다나 뭐라나.”
“뭐... 사정이 있겠지.”
“그래도... 너무 궁금한 걸요? 제작진들도 모르는... 안석준 PD님 만 아는? 어쨌든 너무 꽁꽁 숨겨놨잖아요. 치... 이러면 고맙다고 직접 말하지도 못하잖아요. 너무해.”
아마 답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소녀들 본인이 아무리 추론하고 추론 해봐도 시크릿 심사위원의 정체를 알 길은 요원했고 심지어 제작진들마저도 아는 이가 없는 듯 했으니까.
그래서 항상 그렇듯 소녀들의 추리 쇼는 막을 올린 지 오래지 않아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시크릿 심사위원에 대한 추리 쇼가 기약 없이 영영 사라질 것이라는 얘기는 아닐 테지만.
“언니 나 엄청 소름 돋아요. 진짜.”
“맞아, 나도 그랬어. 진성으로 질렀을 때 그렇게 임팩트 있을 줄 몰랐거든. 작곡가님은 그런 것까지 다 고려했던 걸까?”
“에? 아! 그건 그런데... 언니 나는 그거 때문에 방금 소름 돋은 거 아닌데...”
“응? 그럼 뭔, 앗! 지, 지현아!”
“언니 이거 뭐에요? 치... 패배감 들어... 색깔도 너무 예쁘고! 감촉도...”
“뭐, 뭐야. 지현아. 거긴...”
“그동안 용케 숨기고 다녔네요? 너무해! 언니 완전... 글래머... 언니 남자친구 사겨봤어요? 남자친구 엄청 좋아했겠다.”
그렇게 소녀들의 그간 피로를 씻은 듯이 날려버릴 3일간의 달콤한 휴식, 그 첫 번째 날이 저물어 갔다. 비명 섞인 물장구와 함께.
*
“응... 앨범 준비 잘하고. 응, 나는 괜찮아. 이제 조금밖에 안 남았는걸 뭐. 아무튼 휴가 나갈 때 봐... 그래, 안녕...”
꽤나 애틋함이 느껴지는 통화를 평범한 사람들이 보았다면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여겨 넋을 놓고 바라봤을 테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이들이었다.
“이야... 영진이 뜨겁네? 사귄지 꽤 되지 않았냐? 아직도 그렇게 애틋하면 이 솔로는 어떻게 살라고 이 자식아! 하아... 부럽다. 부러워. TWINKLE 슬희라니!”
“우와... 부럽다. 형... 하긴 여친이 아이돌이니까, 그럴 만도 하지.”
물론 주변의 부러움을 느낀다는 점에서 바깥이나 이곳이나 다를 건 없었다. 다만, 그 부러움이라는 게 꽤나 녹진했다는 점이 차이였지만.
“근데 네 여친은 면회 한번 안 오냐? 어차피 공개 연애라 들켜도 상관은 없잖아?”
“맞아. 형. 그럴게 아니라 멤버들 데리고 면회 한번 오라고 그래. 먹을 건 내가 쏠게.”
“이 자식! 너무 속보인다. 인마!”
“에이, 내가 뭘! 그럼 형은 면회 왔을 때, 안 오는 거지?”
“뭐, 뭐? 이게! 안 되겠다! 너가 어떤 짓 할지 모르니까, 내가 가서 감독을...”
이종연과 김태섭의 반응은 뜨거웠다.
일행 중 유일하게 여자 친구가 있는 김영진이기에, 그리고 그 여자 친구가 젊은 층들 사이에선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라는 점에서 이와 상응하는 콩고물이 어마어마할 것을 그들은 모르지 않았으니까.
“나도 이제 곧 150일 휴가 나가고 너희들도 상병 됐으니까, 얼마 안 남았잖아. 영진이 너 휴가 이미 150일 정도 있지 않냐? 태섭이 너도 그 정도일 테고.”
“뭐... 그건 그렇지.”
그래서였을까.
“그나저나, 너 용케 참는다?”
“어?”
“너 여기 와서는 한 번도 휴가 쓴 적 없잖냐. 쌓일 대로 쌓였을 텐데 여친은 면회도 안 오고... 도대체 어떻게 버티냐? 그런다고 해서 한 번씩 풀러 가자 할 때마다 따라가는 것도 아니고.”
“뭐, 그냥...”
이종연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은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욱 노골적이었다. TWINKLE의 슬희라는, 쌍꺼풀 없는 두 눈에 매끈한 몸매로 수많은 남성 팬들을 거느린 이에 대한 얘기들을 털어놓으라는 암묵적인 압박이 가득 담겨 있었으니까.
“아, 이 새끼는 재미가 없어. 여친 얘기만 하면 합죽이네. 합죽이.”
“진짜, 너무하네. 영진 형. 솔로 너무 서럽다. 서러워.”
하지만 김영진은 그런 이종연의 압박 아닌 압박에도 불구하고 TWINKLE 슬희와 연관된 얘기를 털어놓지 않았다. 말이 없는 편이 아님에도 김태섭과 이종연이 원하는 얘기가 무엇임을 모르지 않았기에 늘 상 그랬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김영진이 평소와 달리 입을 연 것은.
“근데... 여자들은 원래... 아니다.”
“야, 뭔데. 뭔데.”
“어? 아니야. 그냥 자. 별 얘기 아니니까.”
이런 김영진의 모습은 지금껏 본 적 없었기에, 고지를 코앞에 둔 이 마냥 이종연의 음성에 다급함이 서렸다.
“야, 연애 상담하면 또 나 이종연 아니냐. 얼른 말해봐. 너 고민 있지?”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이종연은 잠시나마 망설이는 기색을 내보인 김영진을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너무 무감각... 한 것 같아.”
그런 이종연의 모습에서 무엇인가를 느낀 것일까. 김영진의 목소리가 다시금 생활관에 들려왔다.
그렇게 한동안 김영진은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얘기들을 이종연과 김태섭에게 건네기 시작했다. 연애와 관련되어 제법 경험이 많고 능숙할 것 같은 이종연과 마찬가지로 연애를 꽤 해본 김태섭이라면 지금 자신의 고민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을 안고서.
“잠자리를 피한다고?”
“피한 건 아닌데... 그냥 그래. 별 반응도 없고 그렇게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고.”
“야, 네 여친 스타일이 어떤데? 뭐, 방송 상으로 보면 꽤 발랄했던 것 같은데? 최근엔 방송에 잘 안 나와서 잘 모르겠다만.”
“그건 쫌...”
“어휴, 이 선비새끼. 그래, 네가 느끼기에 그런 것 같다고? 그래서 면회도 안 오고 연락도 뜸한 것 같다고?”
연인간의 은밀한 얘기를 듣는 것이 주는 기쁨에 도취된 것일까. 무슨 상상을 하는 것인지 이종연과 김태섭의 얼굴은 어느새 잔뜩 붉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고민이라는 게 그다지 간단치 않음을 절실히 느꼈고 지금도 느끼고 있는 김영진으로서는 그런 이종연과 김태섭의 얼굴을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그냥 너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냐? 네가 휴가도 안 나오고 그러니까.”
“그건...”
“어휴, 이 답답한 놈.”
하지만 이내 자신에게 던져진 이종연의 해법이라는 것이 주는 충격에 김영진 또한 놀란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이종연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야! 며칠 뒤에 있는 파주 공연 있지? 그때 공연 끝나고 한판 치자.”
“뭐?”
“그때 파주 가잖냐. 공연하러.”
“근데?”
“거기 좋은데 있다. 가서 시원하게 풀고 휴가 한번 가. 어차피 포상 휴가 또 받을 텐데 너무 아끼다 똥 되지 말고 인마.”
물론 이종연과 김태섭을 비롯한 부대의 선, 후임들이 종종 은밀한 일들을 저지른 다는 것을 김영진 또한 모르지 않았다. 그 또한 이곳에 전입한 후로 숱한 기회들을 권유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김영진의 입은 한 아름의 의문을 내뱉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과 은밀한 행위가 어떤 관계이기에 이종연이 이를 입에 담는지, 좀처럼 이해가 되질 않았으니까.
“거긴 쫌...”
“야! 아니, 이 새끼들은 진짜. 김태섭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진짜.”
“아, 형! 나는 왜 또?”
“김태섭 너도 처음엔 안 가다가 한번 가니까, 나보다 더하잖아, 인마.”
“에이... 형! 형 정도는 아니죠. 저는 그냥...”
“얼씨구?”
하지만 이내 들려온 이종연의 말이 주는 충격에 김영진의 의문은 단번에 해소되어 버렸다.
“아무튼 비밀 새어나갈 일 전혀 없어. 그건 내가 장담하고 일단 가서 제대로 배워.”
“어?”
“섹스 피하는 거면 너한테 문제 있는 거 아니냐?”
“뭐가.”
“혹시 네가 못해서 그런 거 아니냐? 해도 별 느낌 없으니까, 네가 너무 미숙해서 그다지 안 하고 싶은,”
“그게 무슨!”
“자식이 맞구만? 너 TWINKLE 슬희가 첫 여자라며. 그래서 그런 것 같은데? 너랑 할 때, 별로 반응도 없지? 어? 근데 이상하긴 하네, 슬희도 모솔이라고 유명한...”
“그러게 슬희 모솔이라고 유명했잖아? 그 얼굴에 잘빠진 몸매까지, 아! 영진 형 미안. 어쨌든 모솔이어서 영진 형이 처음 아니야?”
“아, 몰라. 어쨌든 너도 처음이고 그... 슬희도 처음이어서 그런 것 같은데? 그러니까, 확실하게 배워서 밤에 죽여 버려. 섹스 맛을 알려주란 말이야! 울고불고 하고. 응? 내말 뭔 말 인지 알지?”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그 충격이라는 게 너무나도 엄청났는지라, 김영진의 머릿속은 단숨에 하얗게 변해버렸지만.
“그럼 그게... 내가 못해서 그런 거란 말이야?”
“그렇다니까? 뭐, 전에 남자가 있었으면 그 남자랑 비교돼서 그런 거 일수도 있는데, 네가 첫 남자일 거 아니야? 그러면 아예 네가 못해서 그런 가보지. 혹시 애무할 때도 그렇게 반응이 없는 건,”
“형!”
“아, 알았어. 하여튼 선비새끼. 쯧... 아무튼 거기 장난 아니라니까, 가서 확실히 배우고 휴가 때 나가서 너 아니면 죽고 못 살 정도로 만들어버려. 길을 들이란 말이야. 알겠지?”
“맞아. 거기 진짜 좋다니까? 수질 대박이야.”
“에이, 새끼! 괜히 데려갔어!”
“아 왜!”
“그런 놈이 여자 친구 지겨워졌다고 헤어지냐? 이런 쓰레기!”
“그 얘긴 또 왜! 진짜 너무하네. 걔가 먼저 헤어지자고 한 거라니까?”
“네가 유도했잖아. 이 쓰레기야! 어디서 밑밥을 깔어?”
결국 김영진은 이종연의 위험하지만 제법 달콤한 유혹을 거부하지 못했다. 하얗게 변해버린 머릿속에서 불연 듯 떠오른, 몇 년 전 우연히 장충 체육관 대기실에서 보게 된 괴로운 장면들이 김영진의 열등감을 자극하기 시작했으니까.
*
“주철아. 이번엔 꼭 성공하자.”
“네, 형 아니, PD님.”
차 안에서 장비들을 확인하는 두 사람의 눈빛에는 비장함이 담겨 있었다.
“3일 뒤 확실하지?”
“예, 3일 뒤에 파주 공연이니까, 틀림없을 겁니다.”
그도 그럴 만 했다. 일개 아이템이라고 보기엔 과하다 할 정도로 시간과 노력, 비용을 쏟아 부었지만, 지금까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더는 기회 없는 거 알지? 편집 고려해서 이번에 실패하면 이 아이템 접어야 해. 프로그램은 그냥 폐지되는 거고.”
더군다나, 오늘은 그들의 마지막 기회라 할 수 있는 날이었기에 그들의 간절함은 손길 하나, 하나, 눈빛 하나, 하나에 물씬 풍겨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잘해보자. 우린 오늘 가서 미리 잠복하고 3팀한테는 국방홍보원 쪽에 미리 밑밥 깔아놓으라 하고.”
“네, PD님. 아! 지금 VJ 4명이랑 작가 3명 내려오고 있답니다.”
“그래, 오늘은 누구, 누구지?”
“그게 VJ로는......”
잠시 뒤, 7명의 인원이 합류하자 그들을 태운 두 대의 차량이 KTBS 주차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간절함과 기대감을 가득 담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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