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마음을 노래로-311화 (311/502)

00311  2017  =========================================================================

#311

“나를 잊었더라도.”

[뭐야, 왜 이렇게 불안한거야. 저거 네가 의도한 거 맞아?]

흥미롭게 화면을 보다, 의아함을 드러내는 테일러 녀석의 말마따나 확실히 불안했다. 이러한 불안감과 달리 소녀는 자신의 파트를 위태롭게나마 정상적으로 소화해내고 있었지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혹시 발생할 수 있는 실수와 이를 염려하는 마음이 빚어낼 상황이었으니까.

“이제는...”

지금 끼어들면 클라이맥스 파트를 소화할 만한 호흡을 유지하기가 힘들 수밖에 없다.

지금 이 부분과 클라이맥스 사이엔 별다른 호흡점이 없기에, 끼어드는 순간 클라이맥스 뒷부분의 애드리브는 없다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이를 다르게 말하면 클라이맥스조차 김빠진 콜라가 된다는, 최악의 경우를 만든다는 뜻이기에 부르르 떨려오는 다리를 애써 부여잡았다.

“다른 사람을...”

부디 저 소녀가 자신의 파트를 무사히 마무리하길, 그리고 저 소녀를 믿고 끼어들지 않길, 끼어들더라도 클라이맥스 부분을 맡은 소녀는 자신의 파트에 전념해주길 바라면서.

*

“Girlish Pop 댄스 팀의 무대, ‘나를 잊었더라도 내 노래가 들릴 때면’ 지금 바로 시작합니다.”

“나를 잊었더라도 거리를 걷다보면 생각나겠죠.”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소녀들의 무대는 순조롭게 이어져 나가고 있었다.

팀의 마스코트이자 센터 포지션인 지현의 안정적인 보컬에 시작부터 몽환적이면서도 밝은 멜로디 그리고 아련함 가득한 가사들을 관객들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카페에서 문득 생각나겠죠. 내 노래가 들릴 때면.”

물론 불안한 면도 없지는 않았다. 수십, 수백 번씩 연습을 했다하더라도 관객들이 주는 긴장감과 설렘 그리고 부담감이 한데 어우러진 무대에서 실수 없이 완벽한 무대를 펼치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나를 잊었더라도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아도”

하지만 소녀들의 얼굴은 사소한 실수에 일희일비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맡은 부분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일념하나로 밝고 몽환적인 멜로디에 둘러 쌓여있음에도 가사가 담긴 아련함에 흠뻑 취해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도 생각날 거 에요. 내 노래가 들릴 때면.”

그렇게 클라이맥스를 향해 그동안의 구슬땀을 흩뿌리는 소녀들의 안무와 목소리는 모두를 눈부시게 만들었다. 관객들은 아련함과 밝음 그리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주는 가지각색의 매력에 시선을 빼앗겨버렸다.

“나를 잊었더라도”

그래서일까. 관객들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클라이맥스 파트의 지나가 그 누구보다 간절한 눈빛으로 지영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다른 사람을”

물론 그다지 높지 않은 음에 많은 파트를 맡은 것도 아니지만 지영에게는 충분히 벅찬 도전이고 과제라는 것을 모르는 Girlish Pop 팀 멤버들은 없었기에 그 순간만큼은 모두의 얼굴에 일말의 불안함이 서려있었다.

“바라보아도”

조금만. 조금만 더. 이제 다 왔어. 조금만 더.

하지만 대중들은 이런 소녀들의 간절함에서 비롯된 불안감을 아련함으로 여긴 듯 더한 몰입으로 그녀들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모두의 관심을 받게 된 지영을 더욱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그 순간 지나가 참지 못하고 마이크를 입에 가져다 대려했다. 여기서 지영이 실수한다면 그들의 무대가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불을 보듯 뻔했으니까.

하지만 상황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못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지영의 눈빛은 그런 지나의 행동을 멈추기에 충분한 것들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안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와 달리 지영의 얼굴엔 불안함이 아닌 오기와 반드시 해내겠다는 의지만이 담겨 있었다. 따라서 지나는 클라이맥스 부분을 위한 밑거름에 자신 또한 한 몫을 해내보이겠다는 지영의 눈빛에 차마 자신의 뜻대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저 지영이 돋보일 수 있게 안무에 최선을 다할 뿐.

“Good Bye.”

그리고 끝내 개인 파트를 스스로 마무리한 지영의 의지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보답해야 됐을 뿐.

“나와의 사랑을 어린 시절의 치기로 여겨도”

이내 모두의 눈빛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느낀 지나의 입이 폭발적인 성량을 뽐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가성에 가려져있던 감정의 폭발이 지나의 진성을 발판삼아 무대 곳곳에 뻗어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행복을 빌어줄게요.”

때마침 터지는 화려한 폭죽과 꽃비에 관객들의 환호성이 그녀의 목소리와 어울려 무대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고 멤버들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클라이맥스 부분에 당황하지 않고 지나를 돋보이게 하기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를 잊었더라도 이제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아도 Good Bye.”

그렇게 동작 하나, 하나에 밝음을, 얼굴 표정 하나, 하나에 아련함을 표현해내는 소녀들의 안무는 무대를 넘어서 장내를 장악하기 시작한 지나의 폭발적인 보컬에 스며들어 어마어마한 시너지를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나와의 사랑을 어린 시절의 치기로 여겨도 행복을 빌어줄게요.”

“이젠 안녕.”

“이젠 안녕.”

마치 이 모든 게 사전에 기획된 것인 듯, 폭발적인 클라이맥스 뒤에 자연스럽게 이어진 핵심 안무 파트 그리고 아련함과 안타까움이 물씬 풍겨져오는 마무리에 관객석에서 엄청난 환호성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

[최고다!]

[앙코르! 앙코르!]

[앙코르! 앙코르!]

[지나! 지나! 지나!]

[앙코르! 앙코르!]

심지어 지금껏 나온 적 없는 대규모의 앙코르 요청까지 나왔으니 오죽할까. 그런 관중들의 열화와도 같은 성원에, 이 모든 것을 이뤄낸 소녀들의 눈동자가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그간의 모든 노력들과 마음고생을 녹여내듯이.

*

[왕자님께서 미스터 강님을 정중하게 모셔오라 지시하셨습니다.]

3차 경연의 결과발표를 보지 못했다. 내가 두바이에 오게 된 이유인 5왕자가 드디어 짬을 낸 듯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과가 궁금하다거나 아쉽지는 않았다.

[나와의 사랑을 어린 시절의 치기로 여겨도 행복을 빌어줄게요.]

[이젠 안녕.]

[이젠 안녕.]

물론 소녀들의 이러한 무대가 노력과 퍼포먼스에 상응하는 결실을 얻었으면 하는 마음은 들었다. 하지만 이미 Girlish Pop팀의 무대를 지켜본 나로서는, 결과와는 상관없이 충분한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머뭇거림 없이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뭐, 어차피 결과는 이미 정해졌다는 생각이 커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부르릉]

그나저나 도대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전에 왕자를 만났을 때 자신이 여분의 생명이라느니, 방패라느니 했던 양반이 나를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면 납치를 의심했을 정도로 주변의 풍광은 온통 사막의 황금 모래알뿐이었다.

내가 두바이의 지리를 꿰뚫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예전 왕자의 궁전으로 가는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이 차의 행선지가 궁금하긴 했지만 이내 걸려온 전화에 의아함을 잠시 머리 한 편으로 제쳐둬야만 했다.

“네, 관리사님. 오랜만이네요.”

로케 촬영에 전념하기 위해 관리사님에게 나와 관련된 모든 일을 위임했는지라, 안 그래도 연락을 하려 했었다. 제 아무리 관리사님에게 내 일을 위임했다 할지라도 당장 내 앞에 산재한 일의 경중을 따져봤을 때 아예 신경을 끌 수가 없었으니까.

뭐, 당초 관리사님에게도 두바이에 도착했을 때 연락하기로 했었기에 그런 것도 있지만.

“지금 만나러 가는 중이에요. 예, 예.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겠는데, 어떻게든 해봐야죠.”

어쨌든 관리사님의 목소리에는 반가움과 걱정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그래서 조금 걱정이 되긴 했다.

관리사님의 목소리에 담긴 걱정이 타지에서 영화 촬영에 힘쓰고 있는 것에 대한 것이라면 그다지 걱정은 안했을 테지만, 이것이 두바이 왕자를 만나러 온 이유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는 나를 둘러싼 일들이 결코 순조롭게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테니까.

“그나저나 그 프로젝트 데뷔에 관련돼서 따로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다만, 아직 두바이 왕자를 만나보지도 못했고 이와 관련된 얘기를 나누는 것이 짧은 시간을 요구할 것이 아니기에 화제를 돌려버렸다. 이기적일 수도 있겠지만, 골치 아픈 얘기는 잠시나마 미뤄두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네, 그럼 그렇게 해주시고요. 내일쯤으로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비용은 상관하지 마시고요. 네, 네. 아! 그리고 일단 지분에 관한 것부터 정보에 관한 걸 최우선적으로 물어볼게요. 네, 그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괜히 돌려 말하는 것보다 그냥 솔직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훨씬 나아요. 네, 네.”

물론 두바이 왕자와의 만남에서 내가 요청할 것들에 대한 피드백을 받긴 했다. 애당초 두바이에 들른 이유가 두바이 왕자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함이었으니까.

“프로젝트 데뷔 건은 바로 해주시고요. 네, 항상 신경써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두바이 왕자 분이랑 얘기 끝나고 나서 다시 연락드릴게요. 네, 지금 도착한 것 같아요. 네. 다른 건들에 대해서 보고하실 게 있으시면 그때 얘기해요. 네, 그럼 이만 끊을게요.”

그런데 관리사님과의 대화 도중에 두 눈을 사로잡는 광경의 등장에 서둘러 전화를 끊어야만 했다.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정말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보는군요.]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말문이 막힌 것도 잠시, 이내 내 눈앞에 등장한 두바이 왕자의 모습에 인사를 건네야만 했다.

아니, 이게 도대체.

말이 안 됐다. 사막도 그냥 사막이 아닌, 사막 언덕 위에서 주변을 바라봤을 때 황금 모래를 제외한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깊은 사막에 이런 광경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정작 놀랄 일은 따로 있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네, 네?”

“많이 놀라셨나보군요.”

“그게 무슨... 어?”

‘마음에 드십니까.’라는 말에 도대체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것인지 몰라 의아하던 찰나에 들려오는 익숙한 언어에 잠시나마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듣고 있는 게,

“하하! 한 번 더 놀라셨나보군요.”

“하, 한국말을 하시네요... 그것도 능숙하게...”

한국어?

누가 보면 한국인 관광객인 것처럼 한국말을 건네는 두바이 왕자로 인해 내 귀가 잘못된 것 인줄 알았다. 저 사람 지금 나한테 한국어를 하는 거야? 아니, 도대체 저 발음은 뭔데?

“미스터 강 노래의 가사를 하나, 하나 해석하다보니, 어느새 이렇게 되더군요. 뭐, 나름대로 노력은 했습니다. 다만, 구사할 수 있는 단어가 아직 10대 초반 정도라더군요.”

“10대 초반이요?”

“그렇습니다만... 역시 그 정도 수준까지는 되지 않는가봅니다. 아마 수하들이 본인 기분을 띄워주기 위해 그렇게 말하라 강요했나봅니다. 이거, 본의 아니게 제게 한국어를 가르쳐준 한국인 스승에게 실례를...”

“하하... 10대 초반이라...”

설상가상으로 구사하는 단어나 발음이 누가 봐도 한국인일진데 10대 초반이니 뭐니 자신의 수준 탓을 해대는 왕자의 모습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이 사람 분명 전에는 기본 인사만 간신히 했던 사람인데, 뭐야 이거. 이건 누가 봐도 한국인이잖아.

사막에 있을 거라 생각지 못했던 광경에 한국어를 한국인처럼 하는 두바이 왕자의 모습까지 더해지자 좀처럼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그런 나의 속내를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두바이 왕자는 한국어에 맛 들린 듯 신들린 프리토킹 실력을 계속해서 뽐냈지만 말이다.

“قصر الذهبي”

“네, 네?”

“Golden Palace라 명명된, 미스터 강의 조언이 결실을 맺은 두바이 민족의 자부심이 담긴......”

하아.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도 놀랄만한 것 일진데 Golden Palace는 또 무엇이고 내 아이디어는 또 무엇인지. 그리고 저 왕자는 왜 또 저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인지.

세상은 썩었어.

============================ 작품 후기 ============================

추천 선작 코멘트 해주신분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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