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08 2017 =========================================================================
#308
“아아아아아아아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참을 수 없는 감정의 홍수에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와 버렸다.
“미친놈. 미친놈. 미친놈. 나가 죽어!”
고작해야 맥주 한 잔에 영혼을 팔아버린 내 행태에 한심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라는 네 글자를 보내서는 안 될 ‘이들’에게 보냈다는 점 그리고 왜 이런 톡을 그녀들에게 보냈는지 나조차도 잘 모르겠다는 점으로 볼 때, 이는 한심한 행동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치... 촬영한다고 전화도 안하고 톡도 안하더니, 보고는 싶었나보네? 뭐, 나도 요즘 꽤 보고 싶었으니까, 특별히 직접 가줄게. 지금 어디야? 파리? 러시아?]
그래도 테일러 녀석에게 보고 싶다고 보낸 것은 그나마 넘어갈만한 행동이었다. 녀석 다운 행동력과 추진력이 귀찮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속내를 마음껏 터놓을 수 있는 녀석이란 존재가 무척이나 소중함을 최근 들어 절실히 느끼고 있었으니까.
바로 나의 ‘보고 싶다’라는 톡을 받았을 다른 한 녀석 덕분에.
하아. 어제 술을 마시면 안 됐었다. 아니 그냥 술을 마시고 바로 잤어야만 했다.
“아, 예. 예. 지금 도착하셨다고요? 네, 그럼 개인 활동 알아서 하시고요. 승무원분들은 10시 50분쯤에 게이트에서 뵙는 걸로 할게요. 네, 네 알겠어요. 그럼 이만.”
그랬더라면 이른 아침부터 이렇게 머리를 쥐어짜며 고통스러워하진 않았을 테니까. 젠장.
*
“나를 잊었더라도 거리를 걷다보면 생각나겠죠. 카페에서 문득 생각나겠죠. 내 노래가 들릴 때면.”
비록 며칠 전 그녀들이 녹음한 AR을 바탕으로 안무만 펼쳐지고 있는 무대였지만, 지켜보는 모두의 시선이 일순간 Girlish Pop 팀에게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Girlish Pop.
소녀들의 안무는 단순한 춤사위가 아니었다. 손짓, 발짓 그리고 표정에는 Girlish Pop과 어울리는 소녀다운 감성들이 물씬 풍겨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잊었더라도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아도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도 생각날 거 에요. 내 노래가 들릴 때면.”
밝은 멜로디와 슬픈 가사의 양면성으로 인한 불협화음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3차 경연에 앞서 각 팀들의 리허설을 점검 중이던 트레이너들뿐만 아니라,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이를 지켜보던 연습생들 또한 놀람을 감추지 못한 채 Girlish Pop 팀의 무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으니까.
“나를 잊었더라도 이제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아도 나와의 사랑을 어린 시절의 치기로 여겨도
행복을 빌어줄게요. 이젠 안녕.”
이젠 안녕이라는 노래 가사를 끝으로 Girlish Pop 팀의 리허설은 끝을 맺었다. 비록 리허설답지 않게 멋진 무대를 펼친 소녀들의 눈동자는 무척이나 촉촉해져있었지만 말이다.
“뭐야? Girlish?”
“꽤 괜찮잖아? Girlish?”
“아... 연습 진짜 많이 했네. 저 정도면 그래도 평타는 치겠는데?”
“흠... 지나에 지현 그리고 지영까지 해서 고정표가 있으니까... 꽤 하겠는데?”
“이거 그때 그 곡 맞아? 완전 다른 곡 같은데? 뭔데 이거?”
그렇게 다른 팀 연습생들의 놀람 섞인 탄성이 무대를 끝마치고 대기실로 들어선 Girlish Pop팀을 향해 쏟아졌다. 하지만 Girlish Pop팀 소녀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심각한 표정을 한 채 끼리끼리 모이기 시작했다.
트레이너들과 타 팀 연습생들의 칭찬과 탄성의 이유 가운데 애당초 Girlish Pop팀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최 하위권이었다는 점도 있음을 모르지 않았고 방금 전 무대에서 군데군데 실수한 부분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영아, 왜 울어?”
“울지 마, 지영아. 왜 그래?”
심지어 그 실수로 인해 눈물을 보이는 지영으로 인해 Girlish Pop 연습생들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내, 내가 너무... 흑흑... 너무... 민폐...”
알게 모르게 자신들을 경쟁 상대에서 배제시키는 다른 팀들의 행동들에 이를 악물고 열심히 연습했고 그 결과 어느 정도의 성과는 거뒀다고 자평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1등을 확실히 담보해준다는 의미는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확실한 것은 있었다.
“아니야. 지영아. 너 충분히 잘해왔고 무대도 잘해낼 거야.”
“그래 지영아. 방금 전 무대에서 다들 아쉬웠어. 지영이 너만 아쉽고 실수한 게 아니니까, 마음 다잡고 우리 남은 시간동안 부족한 점 채워보자.”
“우리 지금까지 정말 열심히 해왔잖아. 그러니까, 후회 없이 무대에서 잘 해보자. 알겠지?”
누군가의 말마따나, 어느새 소녀들은 구슬땀의 가치와 이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성과에 대한 믿음 그리고 결과가 좋지 못했을 때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의 노력에 대한 중요성을 인지하게 됐고 이 덕에 누군가를 탓하기보다 서로를 북돋아줄 수 있는 팀이 되어 있었다.
“언니... 언니들 고마워요. 열심히 할게요...”
이 같은 소녀들의 행동과 마음은 지난 일주일간의 고된 연습 속에서도 소녀들을 일으켜 세우던 일종의 신앙과도 같았는지라, 눈물을 흘리며 미안함을 토로하던 지영 또한 이내 마음을 굳힌 듯 눈물을 그쳤다.
“자, 그럼 우리 뭐가 부족했는지, 뭐가 아쉬웠는지 하나, 하나 말해보자. 다행히 우리가 마지막 순서이니까, 안무를 맞춰볼 수는 없어도 끊임없이 상기할 수는 있을 거야.”
“오케이!”
“지현이가 아무래도 센터고 키도 크니까, 조금 더 자신 있게 했으면 좋겠어. 아무래도 카메라나 관중들한테 가장 많이 보일 테고 팀의 이미지라고 여겨질 테니까.”
그녀들은 이내 으레 연습할 때처럼 서로의 부족한 점을 지적해주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그녀들의 연습 때 모습을 알지 못한 이들이 보기엔 서로 기분을 상하게 할 만한 언사인지라 그만두길 권유할 테지만 정작 그녀들은 이러한 지적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나는... 음... 지나가 클라이맥스 부분 부를 때, 애드리브를 좀 더 넣어도 될 것 같아. 어차피 그 부분에서 지나는 안무도 없고... 이건 녹음할 때, 담당해주신 분 말씀도 그렇고 우리도 지나 파트는 작곡가님이 대놓고 애드리브 하라고 파트 따로 마련해주신 것 같다고 생각했잖아?”
“맞아 나도 그 부분은 그렇게 생각했어. 그리고 지나 언니 성량이 부족한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그 부분에 이어서 바로 다음 안무까지가 우리 노래의 매력 포인트여서 분명히 카메라도 지나 잡고 지현이 잡을 거니까, 이 부분만 잘 어필하면 충분히 표를 얻을 수 있을 거야.”
“나도 마찬가지로 생각해. 연습 때도 그랬고 방금 무대 리허설 보니까, 확실히 알겠어. 지나 언니 무조건 그때 질러야 되고 애드리브도 해야 돼. 그 부분이 확실히 우리 무대 클라이맥스고 리허설 때처럼 하면 팥 없는 찐빵이야. 우리 무대.”
“우리 전체적으로 기죽어 있는 것 같아. 좀 더 자신 있게 우리가 흘린 땀들을 믿자. 곡, 안무, 노력 충분하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마무리만, 마무리만 잘 해내보자.”
그렇게 자기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알지 못한다면 고치지도 못한다는 점, 남의 부족한 점은 잘 보이지만 정작 자신의 부족한 점은 알아내기 힘들다는 점을 고려한 그녀들만의 연습법은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달콤한 결실을 얻기 위해서.
*
[우와!]
[와와와!]
방금 막 무대를 끝마친 이들에게 쏟아지는 환호성에 대기실에서 이를 지켜보던 연습생들의 얼굴은 마냥 밝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진짜 잘했다.”
“리허설 때보다 훨씬 잘한 것 같아... 에휴...”
방금 전 무대를 통해 수많은 이들의 환호성을 받아낸 Pinpoint팀은 당초 팀 선택 당시 Lucky Star 팀에게 간발의 차이로 1순위를 내준 2순위 팀이었다. 따라서 Pinpoint팀은 성적 좋은 연습생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는데 방금 전 무대가 바로 이를 제대로 드러내주는 무대였는지라 대기실의 분위기는 누가 죽은 듯 침울해지기 시작했다.
“여정이 진짜 잘했다. 어떡해...”
“여정이랑 우희 이렇게 피쉬앤칩스 애들 2명이나 있어서 안 그래도 표 많이 받을 텐데, 무대도 이렇게 잘하면 어떡해?”
“맞아, 거기다 새연 언니까지 엄청 잘한다... 다들 리허설 때보다 훨씬 잘한 것 같아... 에휴...”
아무래도 1차, 2차 경연 때 1위를 차지한 김여정 그리고 마찬가지로 10위권 내의 등수를 유지하고 있는 선우희 그리고 댄스 실력으로 한 손가락에 꼽히는 김새연까지 Pinpoint 팀의 멤버였는지라 연습생들은 차마 웃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Pinpoint 팀은 첫 번째 차례임에도 훌륭한 무대를 보여줬고 이는 자신들의 무대를 앞둔 이들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도리어 전화위복이 된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어진 연습생들의 무대는 속된 말로 장난이 아니었고 이는 대기실의 분위기를 한층 웅성거리게 만들었으니까.
“Lucky Star도 장난 아니다. 어떡해...”
“주민지 이번에 칼 갈은 것 같은데? 1차도 그렇고 2차도 여정이한테 1위 밀려서?”
“어? 뭐야, 방금 앙코르 소리 살짝 나지 않았어? 잘못 들었나?”
“나 못 들었는데 진짜? 헐, 대박!”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안 그래도 Lucky Star에 주민지에 최수정, 임수진, 정지연까지 있어서 득표수 많을 텐데...”
당초 1순위 팀으로서 매주 화제를 불러 모으고 있는 JS 출신 연습생 주민지에 최초 무대에서 센터 자리를 차지한 이래 계속해서 10등 안에 등극한 최수정 그리고 길쭉한 키와 춤, 랩 실력으로 10등 내외의 등수에 꾸준히 등극한 임수진 마지막으로 전 걸 그룹 출신으로서 미모 하나 만으로도 대중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정지연까지.
이렇게 수많은 호재들을 지닌 Lucky Star팀의 무대에 이어,
“하루 종일도 진짜 잘했다...”
“최지영, 기주아, 유결희까지 있어서 이조도......”
“그래도 Lucky Star랑 Pinpoint가 임팩트는 약간 더 있는 것 같은데...”
“음... 나도 Lucky Star랑 Pinpoint가 조금 더 잘한 것 같긴 한데, 장르 빨이 있으니까. EDM이고 댄스니까 혹시 모르지...”
피쉬앤칩스 연습생으로 선우희, 김여정과 함께 피쉬앤칩스 돌풍을 이끈 최지영과 전 걸 그룹 출신으로서 랩 실력으로 손꼽히는 기주희 그리고 연습생 및 대중들이 뽑은 프로젝트 데뷔 연습생 외모 1위에 등극한 유결희가 있는 하루 종일 팀의 폭발적인 EDM 무대,
“Nothing Special도 잘했다. 이거 진짜 모르겠다. 누가 1등 할지.”
그리고 유일한 랩 노래로서 수많은 힙합 팬들의 환호를 이끌어낸 Nothing Special팀의 무대까지 어느 팀 하나 못한 무대가 없었는지라 1등을 추측하는 연습생들의 웅성거림은 점점 심해져만 갔다.
다만, 이에 비례해 마지막 순서로서 무대를 코앞에 두고 있는 한 팀만은 그 웅성거림에 끼어들지 못했지만 말이다.
“Girlish 팀 준비할게요! 무대로 나와 주세요!”
그렇게 모두의 웅성거림을 배웅삼아 Girlish Pop팀은 떨어지지 않는, 불안하기 그지없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1등 누가할까? Lucky? Pinpoint?”
“글쎄... 난 Lucky 쪽이 좀 더 괜찮았던 것 같은데? 그리고 멤버들이 사기잖아. 기본적으로 먹히는 표들이 많으니까...”
“그런 식으로 따지면 Pinpoint도 장난 아니지. 여정이 계속 1등에 우희도 10위내로 계속 들고 있고 새연 언니 춤 실력이야 말 하면 입 아프고...”
그 순간, Girlish Pop팀이 무대를 위해 대기실을 나서는 그 순간, 대부분의 연습생들은 Girlish Pop팀의 얘기가 아닌 3차 경연의 1위가 누구일지에 대해서 만을 언급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걸음을 옮기는 Girlish Pop팀 연습생들의 눈동자는 마냥 불안함과 부담감으로만 얼룩져 있지 않았다.
“Girlish 애들도 리허설 보니까, 괜찮긴 하던데... 뭔가 임팩트가 없었어. 그래서 음... 아무래도 Pinpoint나 Lucky Star쪽이 1등하겠지. 아아... 나도 그 둘 중 하나에 어떻게든 들어갔어야 했는데...”
“나도... 걔들은 일단 고정적으로 가져오는 표들이 많으니까...”
긴장감과 부담감으로 떨려오는 손과 다리,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소녀들의 눈동자에는 거의 완벽하다 할 정도로 대단했던 앞선 무대들의 환영을 이미 지운 상태였다. 그리고 그 눈동자에는 그동안의 노력과 땀이 빚어낸 자신감과 오기만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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