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02 2017 =========================================================================
#302
고된 촬영을 마치고 나면 저녁 시간대를 훌쩍 넘기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몸은 고될지라도 마음만은 결코 지치지 않았다. 아니 지치지 못했다.
다른 작품도 아니고 내가 너무나도 하고 싶었던 일이기도 하거니와, 이 기회자체가 당초 나의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나의 오기와 자존심을 자극시켰기 때문이다.
[스티븐?]
그런데 오늘은 평소처럼 숙소에 들어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대본을 읽을 수가 없었다. 호텔 방으로 올라가는 길에 우연히 보게 된 익숙한 이의 얼굴이 내 발걸음을 붙잡아버렸으니까.
[어? 지? 여긴 웬일?]
[뭐, 저도 한잔쯤은 하고 싶어서요.]
오늘만큼은 나 또한 한잔 정도 하고 싶어서 스티븐의 옆자리에 앉아 주문을 하였다.
[지, 네가?]
뭐, 그런 내 행동에 스티븐이 꽤나 놀란 듯 나를 바라본 것은 당연했다. 계약서상 일정 체중과 근육 량을 유지해야하는 만큼 계약하는 순간부터 술을 입에 대지 않았고 심지어 식단까지 정해진 대로만 먹는 나를 보며 혀를 내두르던 제작진들 가운데 스티븐 또한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지, 너를 보고 아시안들은 죄다 독종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독종까지는 아닌 것 같군. 뭐, 그렇다고 해서 지처럼 인내할 줄 아는 스타들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지만. 아! 물론 이건 인종차별 뭐 그런 더러운 게 아니야. 알지?]
[뭐, 칭찬으로 들을게요. 크흐... 역시 맥주는 유럽이네요. 프랑스는 맥주 별로 맛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맛있는 걸 보면요.]
[하하! 술을 안 먹은 게 꽤나 크긴 컸나보군. 프랑스 맥주를 맛있다고 하는 걸 보니 말이야.]
사실 최근 들어 스티븐이 조금 신경 쓰이긴 쓰였다. 물론 스티븐이 액션 연기를 지도와 촬영에 소홀히 한다는 말은 아니다. 할리우드에서도 이름 높은 베테랑답게 그는 액션 연기 씬이 있는 부분마다 최선을 다했고 이에 나 또한 스티븐에게 의지를 많이 했으니까.
하지만 내가 조금 힘들어하는 기색을 내보일 때면 스티븐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다는 점 그리고 무술 감독으로서의 재량으로 내 대신 감독에게 휴식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걱정이 되었다. 나로서는 나를 걱정해준다는 점에서 딱히 기분이 나쁘거나 그러진 않았지만, 그의 이러한 행동이 어떤 이유에서 비롯된 것임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여러모로 신경써줘서 고마워요. 솔직히 액션 연기 많이 해보지 않아서 걱정 많이 했거든요. 영화출연이 이번이 처음이고 갑작스럽게 합류하게 된 거라 더욱요.]
[그건 당연히 내가 해야 되는 일이야. 그리고 ‘지’같이 열정적으로 액션 연기에 임하는 사람은 흔치않아. 그래서 내가 더욱 일 할 맛이 났던 것이고.]
그러나 대놓고 그 이유를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부분에서 주연이자, 유일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배우가 꽤나 큰 부상을 당했다는 점을 쉽게 떨쳐내지 못하는 그에게 위로를 한답시고 성급히 이를 언급하는 것은 꽤나 무모한 짓일 테니까.
[뭐, 그리고 남자한테 이런 말 꺼내긴 좀 그렇지만, 마음도 참 따뜻한 사람인 것 같네. 눈치 챘겠지?]
[네? 아, 네...]
하지만 그는 이미 나의 평소 같지 않은 행동에서 눈치를 챘나보다. 어째서 내가 자신의 옆에 앉아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는지 말이다.
[참 쉽지 않아. 이 일을 20년 가까이 해왔는데 말이야.]
하긴, 식단관리 때문에 점심, 저녁조차 따로 정해진 음식만 먹던 내가 갑작스럽게 술을 마셔대니 이상할 수밖에.
뭐, 이미 속내를 들켜버렸는지라 부정한다고 된 일이 아니었기에 말없이 어깨를 으쓱하며 맥주를 목구멍으로 들이켰다.
자리를 벗어날 생각은 전혀 없다는 듯이 말이다.
[크고 작은 부상을 항상 수반할 수밖에 없어. 액션 연기라는 게... 제 아무리 잘 맞춰진 합과 숙달된 배우들일지라도 실수는 하기 마련이니까.]
비록 배우와 무술 감독의 관계에서, 그것도 할리우드의 영화판에서는 압도적으로 배우에게 무게의 추가 쏠릴 관계이지만 액션 연기가 태반인 이번 작품에서 나와 그의 관계는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었는지라 위로는 못해줄지언정 스티븐의 얘기를 들어주고 싶었다.
[그동안은 데이비드 같은 경우가 없었나요?]
[하하! 지, 방금 그 소리 농담이지? 무려 20년이라구. 20년. 내가 이쪽에 발을 담근 게 말이야. 뭐, 데이비드처럼 내가 담당한 배우가 액션 연기로 큰 부상을 입은 건 20년 동안 다섯 손가락 정도에 꼽히겠지만.]
갑작스럽게 합류하게 된 배우, 영화에 처음 도전하는 초짜 배우, 그것도 주인공 비중이 너무나도 높은 작품의 주인공 배역을 맡게 된 배우.
애당초 내 자리가 아니었기에 제대로 된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촬영에 합류하게 되어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더욱 내게 신경을 써준 제작진들이었고 그 중에서 스티븐은 특히 돋보이는 존재였다.
물론 이렇게 풀어진 모습까지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런데 어째서,]
[왜? 그렇게 많은 경험이 있는데도 어째서 이렇게 데이비드 일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나? 하긴 꽤나 주책맞게 보이겠지.]
[스티븐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아니 그럴 수 있어. 지난 20년간의 세월동안 이런 경우가 수십, 수백 번이나 있었을 진데 석 달이나 지난 일 가지고 아직까지 이런 꼴이니 말이야.]
조금 이해가 안 되는 점은 있었다. 마크 데이비드가 꽤나 큰 부상을 당했다는 사실을 폄하하거나 간과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스티븐의 이런 행동은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들긴 들었으니까. 뭐, 그의 경험과 능력까지 고려한다면 더욱.
[나도 처음엔 액션 스타를 꿈꿨었지.]
[액션 스타요?]
[그땐 뭘 하든지 간에 다 될 줄 알았어. 자신감이 하늘까지 치솟을 때였고 내 능력 또한 그 자신감에 걸맞다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점점 세상을 알게 되고 사회를 알게 되면서 나 또한 변하게 되더라고.]
하지만 갑작스럽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이런 나의 생각들이 단순히 나의 입장만을 고려한, 꽤나 편향된 견해임을 깨닫게 되었다.
[처음 3년간은 정말 힘들었지. 잠 한번 자기 힘들 정도로 촬영장을 전전했었으니까. 하지만 그 후부터 경력이 쌓이고 업계에 입소문이 쌓이면서 조금씩 내 자신의 위치가 달라져 갔어. 허드렛일 스태프에서 스턴트 맨 그리고 무술 감독까지 순탄하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위로 쭉쭉 뻗어갔지. 그래서 다시금 고개를 들게 된 거야. 자신감이 하늘을 치솟을 때의 내 모습이.]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경험을 해왔던 그이기에, 대화의 중간에 끼어들어 무엇인가를 말하기가 어려웠지만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에 대해 차츰 알게 되었다.
[여느 때처럼 배우들의 액션 연기 합을 보면서 수정 사항들을 체크해야 했어. 그런데, 하지 않았어. 그때의 나는.]
[네?]
[하하. 놀랍지?]
[그게... 지금 스티븐이라면 상상도 못 할...]
액션 연기 한 컷, 한 컷마다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꼼꼼하게, 되도록 거의 모든 사항들을 손수 체크하는 지금의 그가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당시 배우 2명이 워낙 베테랑이었어. 무술 감독을 해도 괜찮겠다 싶을 정도로 능력도 있고 경험도 풍부한. 그래서 굳이 내가 더 신경써줄 필요가 없다 생각했어. 어차피 합이야, 내가 짠 것이니 만큼 완벽하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배우들까지 완벽하다 생각했으니까. 물론 그게 오만이었다는 것을 곧 깨닫게 돼버렸지만.]
[그럼?]
[한명이 죽었어. 다른 한 명은 경상이었고. 물론 그 나머지 한명도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그 후로 배우 일은 접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아...]
[그 후로 매번 최선을 다했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부분에 한 해서. 그런데도 이렇게 일이 생기더군... 그래서 이런 일이 생길 때면 좀처럼 떨쳐내기가 힘들어. 혹시라도 내가 더 신경을 썼다면 이런 일을 예방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과거의 생각들과 합쳐져서 나를 괴롭히거든. 하하...]
어째서 마크 데이비드 일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는 지에 대해서 말이다.
[지! 제 아무리 완벽한 무술 실력에 합을 소화해 낼 능력까지 갖추고 있어도 실수가 발생할 수 있는 게 액션 연기야. 자신이 잘한다 해도 상대방이 실수를 할 수 있고 둘 다 잘한다고 해도 합이라는 게 개인의 행동 습관에 따라 결함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아...]
[마크 데이비드도 그리고 예전의 그 배우들도 모두 출중한 배우들이었어.]
그래서 그의 진심어린 눈빛과 말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액션 배우로서 가장 조심해야 될 것은 방심이야. 방심.]
[방심?]
[자신의 연기에 자신감을 가지는 게 좋지만 그게 오만이 되어 방심까지 가게 해선 안 돼. 무슨 말인지 알지? 그 누구보다 노력하는 사람이 지라는 걸 알기 때문에 이런 얘기를 하는 거야.]
[스티븐 나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 에요. 애당초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아니까요.]
[물론 지금은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내 말을 꼭 명심해줬으면 좋겠어. 애당초 자신이 부족하다고 아는 사람일지라도 노력의 대가를 아는 사람에게는 이 함정이 보다 달콤하게 다가갈 테니까 말이야.]
그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은, 이번 작품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내 연기 인생에 있어서 항상 마음에 담고 있어야 할, 그의 무술 감독으로서의 경험이 진득하게 농축된, 말 그대로 엑기스 그 자체였으니까.
*
[그럼 저는 적어도 이번 작품에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어? 무슨 소리야. 지.]
[스티븐이 제가 그렇게 되도록 가만히 안둘 거잖아요.]
[뭐?]
이번 작품에만 전념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정작 그럴 수가 없었다. 프로젝트 데뷔, 아레나 사업, 한남동 외인 아파트 부지, LA저택 등 수많은 일들이 줄줄이 비엔나처럼 쏟아져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일이 이 작품에 출연하게 되기 이전에 이미 결정된 사안이거나 확정된 사안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에 변명할 거리는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마음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현실 속에서 내 자신이 오롯이 배우로서만, 오롯이 가수로서만, 오롯이 강지혁으로서만 존재할 수 없기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것에는 어쩔 수 없겠지만 말이다.
[나 열심히 할 거 에요. 이번 작품 너무 욕심나고 내가 무조건 해내고 싶으니까. 버거워도 끝까지 내 영화로 만들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스티븐이 도와줘요. 엇나가지 않게. 알겠죠? 뭐, 그러려면 요즘처럼 그렇게 있으면...]
[하하! 이거 ‘지’가 이런 재주도 있었나? 하하! 내일 당장이라고는 말하기 힘들지만, 걱정하지 말게. 곧 있으면 훌훌 털어버릴 테니. 그러니까, ‘지’는 지금처럼만 해. 그럼 이 영화. 적어도 액션 씬에 있어서만큼은 최고라고 평가받을 테니!]
그래도 스티븐과의 간단한 술자리 후 침대에 누운 지금, 그나마 마음 상태가 조금은 괜찮아졌다. 이미 결정된 일로부터 비롯될, 새롭게 생길 일들까지는 어쩔 수 없겠지만 오늘 스티븐의 말마따나, 그의 도움과 나의 의지, 열정이라면 이 모든 장애 조건들은 충분히 극복 가능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한남동 외인 아파트 부지는 살 집으로 쓰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관리사님이 계획대로 진행해주세요. 그리고 아레나 관련돼서는 로케 일정 끝나고 두바이 잠깐 들러서 도움 요청해볼게요.”
[예, 알겠습니다. 내일부터 관련 계획과 더불어 설계, 시공, 시행을 담당할 건설사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보고는 어떻게 할까요?]
“일단 제가 다른 일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서요. 별도로 두바이 일 결과로 전화드릴 때까지 되도록 이일로 연락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정말 중대한 일이면 꼭 연락해주시고요.”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한남동 외인 아파트 부지 그리고 LA 저택, 아레나 사업과 관련된 1차적인 보고는 재성 씨에게 하도록 하고 중대한 사안일 경우에만 지혁 씨에게 바로 연락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과분하게도 그 믿음을 뒷받침해줄 이들이 내 주변에는 꽤나 많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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