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93 2017 =========================================================================
#293
[만약 내가 그랬으면 어땠을 것 같아?]
[어?]
LA 저택에 도착한 후 오두막 앞 선 베드에 누워 한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녀석에게 털어놓았다. 너무나도 사적인, 재성 삼촌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지금은 오로지 단 한명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는 얘기들을 말이다.
그런데 녀석이 내 얘기들을 다 듣고 나서 한다는 소리가 답변이 아닌 질문이었는지라 일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누가 질문을 받고 싶다했나? 안 그래도 머리 아파 죽겠는데.
[거기서 네가 왜 나와?]
[뭐, 대답하기 싫으면 됐어. 어쨌든 그 여자 의도는 뻔하잖아.]
[뭐?]
[그 여자는 더 이상 너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은 거야. 예전 그 여자처럼. 너도 알면서 그냥 물어본 거잖아?]
뭐, 이어진 녀석의 촌철살인에 답변보다 질문이 더 낫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아버렸지만.
녀석의 말마따나,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다만 쉽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내 연락을 받지 않은 유지연을 생각하면 가슴이 조금 먹먹했다. 물론 테일러 녀석의 말처럼 이런 경우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연지와 달리 유지연은 보다 많은 것들을 털어놓을 수 있는 이였고 따라서 내게 보다 깊은 의미를 지닌 사람이었으니까.
[전화 일부러 안 받는 것 같아서 더 이상 안 할게. 그동안 고마웠다. 진짜 너무 많이. 그리고... 많이 미안했어.]
그래서 잡을 수가 없었다. 애당초 유지연과 나의 사이가 서로를 구속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님을 모르지 않았고 그녀가 나와의 관계를 그만하고 싶어 한다면 이를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다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이가 떠나갔다는 점에서 씁쓸함과 허무함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인기 많네? 한명이 떠나니까, 한명이 다가오고? 워낙 매력이 넘쳐서 그러나? 자꾸 탐을 내는 사람이 많아지네? 너를?]
하아.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뭐가 뭔지, 내가 뭘 해야 할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 그냥 마음 같아선 유지연을 찾아가 나를 떠난 이유가 혹시나 유재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캐묻고 싶기도 했고 내가 왜 이렇게 유지연에게 미련 아닌 미련을 가지고 있는지도 의아했으니까.
뭐, 유진의 갑작스런 고백 또한 큰 몫을 하긴 했지만.
그나저나 저 녀석은 지금 나를 위로해주는 거야, 아님 약 올리는 거야?
아까부터 녀석의 말들이 묘하게 나를 비꼬는 듯 했는지라 가볍게 꿀밤이라도 날려주려 했다.
[나 밤에 하고 싶은 거 많았는데... 여긴 밤이 아니어도 상관없겠지?]
때마침 내 숨을 턱하니 막아버린 녀석의 갑작스런 행동에 이 같은 의도를 실천으로 옮기지 못했지만.
*
[어때? 나 예뻐?]
지금 이 순간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가늠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드레스를 차려입은 녀석의 모습은 마치,
“안 춥냐? 보는 내가 다 추운데?”
[한국말로 하지 말고! 뭐라 했어? 방금?]
옷감이 너무 비싸서 인지 뭔지는 모르겠으나, 옷을 만들다 만 드레스를 입은 소위 말해 옷을 입다 만 모습이었으니까.
[진짜 그거 입고 가게?]
[왜? 이거 엄청 유명한 디자이너가 1년 전부터 수제로 만든 건데?]
아니, 그 디자이너 양반 좀 데려와라. 이거 무슨 사심 있는 거 아니야?
비치 타월만도 못한 드레스 상태에 순간 어처구니없어졌는지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막말로 저런 드레스를 만드는 데 어떤 대단한 기술과 영감이 필요할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저 드레스 가격이 2천만 원에 달한다는 점에서 절로 쌍욕이 흘러나왔으니까.
[차라리 저번에 피플스 갔을 때 그거 입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왜?]
[안 춥겠냐? 아무리 겨울 끝나가고 LA가 따뜻한 곳이라 해도 2월인데?]
[지금 그게 중요해? 예쁜 게 중요하지. 왜? 내가 노출 드레스 입어서 조금 꺼려지나?]
[어휴, 나는 모르겠다. 나중에 나 원망하지 말아라.]
상황이 이렇다보니, 괜히 녀석과 같이 레드카펫을 밟겠다고 한 것 같아 후회가 되었다. 녀석과 나 사이가 꽤나 친한 사이로 알려졌고 피플스 초이스 시상식에서도 같이 입장했었기에 주최 측에서 자연스럽게 나와 녀석을 파트너로 정해준 듯 한데, 정작 녀석의 드레스를 보니 레드카펫에 신경을 쓰기보단 녀석의 복장에 신경을 써야 될 것만 같았으니까.
어이구 내 팔자야.
*
이번이 처음이 아니면서 처음이었다. 지난 정규 3집 앨범 활동 당시, 수많은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고 4개의 주요부문 중 하나인 신인상을 수상하게 됐음에도 건강상의 이유로, 정확히 말하자면 이별의 뒷수습 때문에 참석을 하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감회가 새로웠다.
음악적 역량, 예술성, 연주, 녹음, 역사성 등 다양한 요소를 반영해 수상자로 결정하기 때문에 음반업계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그래미 시상식에서, 그것도 나와의 인연이 없다할 수 없는 LA Staples Center에서 개최된 그래미 시상식에 참석하게 되었다는 것이.
물론 한국에서 참석했던 골든 디스크 시상식에서의 야유와 비난은 이미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래미 시상식 직전에 참석했던 피플스 초이스 시상식에서 나를 보며 환호해주는 수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았기에 오늘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더욱 긴장되고 설레는 마음에 온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정작 내 옆에서 입장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테일러 녀석의 드레스를 내가 입어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뭐야, 나보고 추울 것 같다느니 그랬으면서 정작 네가 추워하는 것 같은데?]
어휴, 얄미워.
오늘따라 유난히도 얄밉게 구는 녀석에게 평소의 나라면 꿀밤이라도 살짝 건네주었을 테지만 그마저도 할 수 없는 게 지금 내 상태인지라 그냥 두 눈을 감아버렸다.
[걱정 하지 마. 오늘 엄청 멋있으니까.]
아니, 내가 지금 멋있게 보이지 못할까봐 이러는 줄 알아? 뭐, 멋있게 나오고 싶긴 하지만.
어쨌든 주요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고 또한 유력한 수상후보자라는 점에서 좀처럼 긴장감이 풀리지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기다리지 않고 바로 레드카펫을 밟았더라면, 실전에 강한 나인만큼 이 정도까지 긴장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와우!]
[캉! 캉! 캉!]
[휘이익!]
그렇게 30분 정도 근처에서 대기하다가 나와 테일러를 태운 리무진이 레드카펫 코앞에 정차하자, 서둘러 차에서 나갔다. 그런 나를 향해 쏟아지는 수많은 환호성을 받으며 테일러 녀석을 에스코트해야만 했으니까.
[뭐야, 나보고 추워도 알아서 하라고 했으면서?]
[날씨 추우니까,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손이나 잡으시죠. 아가씨.]
제법 날씨가 쌀쌀했는지라 정장 재킷을 벗어 녀석의 어깨에 덮어주고 한 걸음, 한 걸음 시상식 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뭐, 그런 나와 테일러를 향해 수많은 환호성이 울려 퍼졌음은 당연했고 말이다.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그래미 시상식에, 그것도 주요부문을 포함한 8개 부문에서 노미네이트되셨는데 기분이 어떻습니까?]
[영광스러운 자리에 참석할 수 있어서 기분이 굉장히 좋습니다. 저번에 몸 상태가 좋지 못해 대리 수상을 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직접 상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노우웰 양과 같이 있는 모습들이 언론을 통해서 꽤나 빈번히 공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혹시 두 분 사이가 연인관계가 아님을 의심하는 팬들이 많은데, 이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죠.]
[테일러와는 처음 미국 진출을 했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왔고요. 앞으로도 친하게 지낼 생각입니다. 다만, 그 친함이라는 게 연인간의 사랑을 의미하지는 않겠지만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고국에서 미스터 강을 지켜보고 있을 팬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그쪽에서 저는 이미 쓰레기인기지라... 딱히 할 말이 없군요. 수고하세요.]
[예?]
그렇게 제법 능숙히 레드카펫을 걸어 포토 존에서의 인터뷰와 사진 촬영을 ‘깔끔하게’ 마무리한 뒤, LA Staples Center 내부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날씨가 제법 쌀쌀해, 테일러에게 정장 재킷을 벗어준 나도 그렇고, 워낙 입은 게 없어서인지 정장 재킷을 걸쳤음에도 추워 보이는 테일러도 더 이상 야외에 있는 건 꽤나 무리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뭐, 마음만은 설레고 ‘후련해서’ 그곳에서 더 있다한들 상관은 없을 것 같았지만.
*
경직적인 한국의 시상식과 달리 해외 유수의 시상식들은 꽤나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곤 했다. 그래서 시상식 진행 전 또는 진행 중과 상관없이 피자를 시켜서 먹는다거나 꽤나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도 됐고 말이다. 뭐, 물론 수상소감을 말할 때나, 후보자와 수상자가 발표될 때는 시상식에 대한 예의로 입을 다물긴 했지만.
[아까 왜 그랬어?]
[어?]
그래서 때마침 테일러의 매니저가 가져온 피자 한 조각을 먹고 있었는데, 채 한 입을 베어 물기도 전에 들려오는 테일러의 말에 피자를 접시에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괜히 또 난리칠 것 같은데? 한국인들 특성상? 아! 뭐, 모든 한국인들이 그렇다는 얘긴 아니야. 그냥,]
[됐어. 사실인데 뭘.]
녀석도 참. 포토 존에서 서로 인터뷰를 제각기 하고 있어 못 들었을 줄 알았는데 다 듣고 있었나보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고국에서 미스터 강을 지켜보고 있을 팬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그쪽에서 저는 이미 쓰레기인기지라... 딱히 할 말이 없군요. 수고하세요.]
[예?]
내 인터뷰 내용들을 말이다.
사실 어디까지나 즉흥적으로, 나도 모르게 흘려버린 멘트였는지라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이제 이런 멘트 정도는 상관없다는 것을 어느 정도쯤은 드러내고 싶었을 뿐.
[이젠 상관없어.]
그런데 정작 테일러 녀석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자 왠지 모르게 웃겼고 또 씁쓸해졌다.
[진짜 한국인들 왜 이래? 무례한 건 그쪽이었는데!]
[지긋지긋해!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난 진짜 이해 안 돼!]
녀석이 한국에서 줄곧 했던 말마따나, 테일러가 뭘 보고 느껴서 저러는지 모르지 않았을 뿐더러, 외국인인 녀석이 진저리칠 정도로 그 보고 느낀 것이 상상 이상의 충격을 녀석에게 가져다 준 것 같았으니까.
[날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굳이 그런 진흙탕에 몸을 담그고 싶지 않아. 뭐,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꼭 한국에서 이뤄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 복잡하게 생각했었나봐. 내가 태어난 곳이고 또 가족들이 있는 곳이라서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야.]
[지혁...]
그래서 더욱 태연하게 이에 대한 나의 결론을 털어놓게 되었다. 괜히 녀석에게 못 볼꼴을 보여 준 것 같아 한국에서부터 줄곧 미안했었고 오늘같이 기분 좋은 날 녀석에게 내 걱정을 하게해서 더욱 미안했으니까.
*
[한국인 최초로 그래미 시상식에 참가한 강지혁! 주요 4개 부문을 포함한 9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던...... 올해의 노래(SONG OF THE YEAR), 올해의 레코드(RECORD OF THE YEAR), 올해의 앨범(ALBUM OF THE YEAR)을 수상하며 15년도에 대리 수상하였던 신인상까지 합쳐 동양인 최초로 그래미 시상식 주요 4개 부문 상을 모두 수상하는 쾌거를...... 주요 4개 부문 상과 더불어 베스트 R&B SONG, 베스트 POP SOLO PERFORMANCE, 베스트 POP VOCAL ALBUM 상을 수상하며 총 6관왕이라는 대역사를......]
[한국의 자랑이자, 그래미 어워드 6관왕의 강지혁, 한국 활동을 하지 않는다? 그래미 시상식 전 레드카펫 포토 존에서의 인터뷰 내용과 수상 소감이 화제를...... 정통한 소식통에 의하면 강지혁은 제대로 된 사실관계와 상관없이 기사를 올리는 기자들과 더불어 이에 대해서 부화뇌동하는 이들의 행태에 싫증을...... 해외보다 연예인들을 향한 집착과 공격이 심한 한국 팬 문화에 대한......]
[골든 디스크 음반대상 수상 소감과 똑같은 내용 하지만 반응은 천차만별? 팬들의 과도한 관심과 집착은 스타들을 병들게 만든다는 강지혁의 수상소감에 기립 박수를 쳤던 그래미 시상식 관중들과 스타들! 하지만 한국에서는 야유와 비난?...... 한국의 자랑 강지혁이 한국 활동을 하지 않는다? 강지혁의 소속사인 포이보스 뮤직 측에서 이렇다 할 공식 발표를 하지 않고 있는 가운데...... 강지혁이 게스트로 출연한 KTBS의 인기예능프로그램 문화사절단의 다음 주 예고편이 화제를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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