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92 2017 =========================================================================
#292
KTBS. 개국한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신생 방송사이다. 하지만 기존 방송사들에서 날고 긴다는 제작진들을 대폭 캐스팅해와 시사, 보도, 교양, 예능, 드라마 부문을 구성하면서 명실상부한 종합편성채널로 발돋움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그런 KTBS라 할지라도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손중근이라는 걸출한 언론인을 보도국 사장으로 임명한 뒤부터 줄곧 지상파 방송사들을 제치고 신뢰도 1위의 뉴스 타이틀을 유지해온 보도국.
국내외에서 다큐, 교양 프로그램으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지한태 CP를 국장으로 임명한 뒤 각종 국내외 다큐 시상식에서 최고의 성과를 뽐내고 있는 교양국.
문화사절단, 밥 같이 먹어요, 내 마음의 노래, 범죄 현장 등 동시간대 시청률 1위 예능을 뽐내며 TBS 방송사와 함께 KTBS를 대세 예능 방송사로 떠오르게 만든 예능국.
금토 드라마, 월화 드라마 이 두 시간대만을 운용하고 있지만 해당 시간대에서만큼은 훌륭한 성과를 드러내고 있는 드라마국.
이렇게 신생 방송사라고는 믿을 수 없는 성과를 달성하고 있는 각 분야들과 다르게 시사 관련 프로그램들은 연신 지상파 방송사들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다들 뭐야. 아이템 생각해오라고 했는데 다들 왜 말이 없어?”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사국 연출진들이 태업을 하거나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또한 다른 부문과 마찬가지로 업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이들로서 KTBS에 스카웃 된 것이니까.
“지금 우리 프로그램 폐지 소리나오는 거 알지?”
그래서 그동안 주옥같은 시사 프로그램들을 이끌어왔던 최진충 또한 지난 반 년 동안 최선을 다했었다. 어떻게 보면 시사국과 라이벌 관계라 할 수 있는 보도국이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기에 더욱.
하지만 반년이 지난 지금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더욱 상황이 나빠져 버렸다. 정말로 열심히 발 벗고 다녔음에도 시청률은 반년 전에 비해 오르기는커녕 낮아지고 말았으니까.
“하나밖에 없는 공익시사 프로그램이어서 지금까지 버틴 거야. 다들 알잖아. 그래서 일주일동안 휴가 줘서 아이템 생각해오란 거였고.”
그래도 ‘정의는 살아있다’의 메인 CP인 최진충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 자신의 명성을 담보삼아 지난 6개월을 버틴 것도 용한 일이라는 듯, 상부에서 시사 국의 잠정 휴식기를 들먹이기 시작했음에도 끝까지 연출진들을 믿고 대책을 마련해보려 했으니까.
“6월까지가 한계야. 2분기까지는 어떻게든 버텨보겠는데, 그 이상은 나도 무리야. 종편에서 공익시사 프로그램은 시기상조다고 하는 거 지금까지 막아온 것만으로도 내 능력 밖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떻게든 프로그램을 살려보려 제작진들 모두에게 일주일 유급휴가라는 파격 대우를 주면서까지 아이템을 생각해보려던 최진충의 의도는 벌써부터 어긋나는 듯 했다. 업계에서 내로라하는 연출진들이 모였음에도 시사 프로그램의 특성상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해내기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점, 이미 지상파 방송사들의 시사 프로그램들이 너무나도 확고한 시청자 층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돌파구가 좀처럼 보이지 않았으니까.
“저기 CP님...”
그런데 그때였다. 촬영 아이템을 떠올리지 못한 듯한 연출진들의 한숨 사이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
“언니! 얼른 와요! 여기, 여기!”
언제나처럼 활기찬 막내 선우희의 목소리에 여정 또한 최지영의 팔짱을 낀 채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너도 참. 아직 다른 연습생들은 오지도 않았는데 왜 그렇게 서둘러?”
“에이, 그러면 좋은 자리 못 잡잖아요. 그리고 다른 등급 연습생들이 우리들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지난 몇 주간 200명에 달하는 연습생들은 등급에 따른 철저한 차별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알게 모르게 연습생들 간에 알력 싸움이라 할 만한 일들이 몇몇 있었는지라, 막내 선우희의 이런 우려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걱정일 수밖에 없었다. 언니들인 김여정, 최지영 또한 이러한 알력 싸움에 흠칫했을 진데, 막내인 그녀로서는 이런 분위기에 좀처럼 적응하기 힘들었을 테니까.
더욱이 그녀들과 같은 개별 등급 갑 연습생들이 다른 연습생들의 집중 견제를 받을 동안, 시크릿 심사위원의 특혜를 받아 갑 등급 혜택을 받게 된 김여정은 보다 집중된 시샘의 대상이 되었으니 오죽할까.
“애도 참.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냥 다들 마주치기가 힘드니까, 서먹서먹한 거지. 그래도 난 댄스 수업 같이 듣는 애들이랑 제법 친해졌는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여정은 밝고 활기찼다. 방금 전 그녀의 말마따나, 그녀는 자신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인 싹싹함과 털털함을 무기로, 최고 높은 개별 등급이라고 해봤자, 을 등급에 불과한 병 등급 댄스 교실에서 무리 없이 녹아들 수 있었으니까.
“치... 언니는 속도 좋아. 그나저나 어떻게 나올까요? 첫 방송인데, 우리 분량 많았으면 좋겠다.”
어쨌든 김여정과 선우희, 최지영은 언제나처럼 수다 삼매경에 빠지기 시작했다. 오늘 첫 방송을 앞둔 프로젝트 데뷔 시즌 2를 다 같이 시청하기 위해 이곳에 모인만큼 각종 호기심과 설렘이 그녀들을 걱정과 우려 속에 가둬두길 원치 않았으니까.
“궁금하긴 하다. 어디까지 나올지. 오늘은 등급 평가까지 나올까나?”
“아! 맞다! 오늘 그거 시크릿 심사위원이 등수 매긴 것도 발표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어? 그러네?”
그렇게 그녀들의 수다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다른 연습생들이 저마다 트레이닝 수업과 개인 연습 등을 마치고 실내 홀로 모일 때까지 줄곧.
*
자신들이 출연한 방송을 보는 연습생들의 표정은 그 숫자만큼이나 다양했다.
[대박! 저거 찍는 건 줄 몰랐는데!]
[나 아직까지 한 번도 안 나왔는데, 끝날 때까지 안 나오면 어떡하지?]
[나오긴 나왔는데... 10초도 못 나왔네. 어떡하지. 조금 더 튀게 행동해야 되나?]
이는 어떻게 보면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방송시간 자체가 1시간 남짓이었기에 200명에 달하는 연습생 모두를 균등하게 조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으니까.
뭐, 그런 점에서 피쉬앤칩스 연습생들은 축복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와, 사람들 비주얼이 장난 아닌데요? 언니?]
[그러게, 다들 너무 예쁘네. 에휴.]
[에이, 언니 왜 그래요. 언니가 한숨 쉬면 안돼져. 언니 키도 크고 얼굴도 예쁘면서. 허허.]
언니인 지영의 팔짱을 끼며 소속사 연습생들이 세트장으로 들어설 때마다 감탄사와 털털함을 드러내는 김여정의 모습부터,
[안녕하세요 저희는 피쉬앤칩스의 최지영!]
[선우희!]
[김여정입니다!”
[Can't you see the likes of me ooh ah.]
심사위원을 맡은 트레이너들의 극찬을 받았던 무대까지 전부 방송에서 다뤄졌는지라 그녀들의 첫 화 분량은 전체 연습생들 가운데서 능히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볼 수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화제성만큼은 JS출신 연습생과 더불어 능히 첫 손가락 안에 들었으니 오죽할까.
[잠시 만요.]
[방금 시크릿 심사위원께서 김여정 양에게 그 3장의 혜택권 중 하나를 쓰셨습니다. 따라서 김여정 양은 선우희 양, 최지영 양과 마찬가지로 개별 등급 갑 등급을 확정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트레이닝은 각 부분 등급에 맞게 받게 되겠지만요. 어쨌든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시크릿 심사위원은 추후 트레이닝에는 일절 관여를 하지 않으실 것이고 프로젝트 데뷔 시즌 2가 종영되어 최종 10명의 멤버들이 선발되었을 때, 그때 시크릿 심사위원 본인의 의사에 따라 정체가 밝혀지게 될 것이며 이를 원치 않을 경우 끝까지 밝혀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잠시 쉬었다가 촬영 재개하겠습니다.]
따라서 피쉬앤칩스 소속 연습생들의 얼굴은 너무나도 밝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첫 화에서 거의 드라마 주인공처럼 조명된 김여정은 평소보다 더욱 큰 눈웃음을 한 채 커다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말이다.
하지만 그녀들의 그러한 밝음은 아직 이른 것에 불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첫 화 방송의 말미에 나타난 화면은 그녀들을 기쁘게 하다못해 놀라게까지 하였으니까.
[보컬 심사 순위 - 시크릿 심사위원]
1. 김여정, 피쉬앤칩스, 보컬등급 갑
2. 유지나, 스타라이트, 보컬등급 을
3. 정시아, 플레져, 보컬등급 을
4. 유정아, M&A, 보컬등급 을
5. 강세라, 뮤직윅스, 보컬등급 을
......
10. 최지영, 피쉬앤칩스, 보컬등급 을
화면에 나타난 것은 시크릿 심사위원의 보컬 순위표와 그 순위에 랭크된 연습생들의 개인 활약상을 편집한 듯한 영상이었다.
“대박 이렇게 나오는 거였어? 딱 10위 까지만 매겨놨네?”
“이러면 완전 주목 받는 거잖아. 안 그래도 개인 분량이 적은데, 저렇게 10등까지만 순위를 매겨주면... 거기다 저렇게 개인 활약상까지 따로 편집해서 내보내주면...”
“뭐야... 김여정은 그렇다 쳐도 다른 애들은 전부 하위 등급 애들이잖아?”
“저기 10등에 갑 등급 최지영 있잖아. 아니, 그런데 나머지 애들은 뭐야? 저기 있는 애들 다른 심사위원들은 거의 병 등급이나 정 등급 줬던 것 같은데...”
따라서 장내는 또다시 시끌벅적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크릿 심사위원이 가진 혜택권들 가운데 유일하게 빛을 보았던, 바로 그 혜택권의 대상자였던 김여정이 역시나 보컬 등급 순위에서 1등을 차지했다는 점과 더불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들이 보컬 순위에서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는 점 그리고 해당 연습생들의 개인 활약상이 방송에서 꽤나 크게 다뤄졌다는 점은 매우 큰 혜택임이 분명했으니까.
“저기 봐! 쟤는 방송에서 얼마 나오지도 않았는데!”
“이거 너무 큰 거 아니야? 홈페이지 봐봐. 홈페이지 메인에도 떠있어. 보컬 순위라고....”
“이상해. 다른 심사위원들이 매긴 보컬 순위표도 아니고 시크릿 심사위원 한 명이 매긴 보컬 순위표가 홈페이지 메인에 떠있는 게... 이거 생각보다 영향이 너무 큰 것 같아. 우리 고작해야 10초? 많아봐야 1분 정도 나왔는데, 이렇게 개인 활약 동영상이 방송에서 공개되고 홈페이지에까지 언급되는 건 너무......”
심지어 첫 화 방송에서의 분량이 10초도 되지 않았던 연습생이 당당히 등수에 이름을 올렸는지라 방송이 끝난 뒤에도 연습생들은 좀처럼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생각보다 방송에서 자신을 노출시키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 그리고 이렇게 공개적으로 등수가 매겨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 효과를 불러 모으는 지에 대해 지금까지 그녀들 모두는 간과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아직 전부 알지 못했다. 시크릿 심사위원이, 그가 만든 등수표가 앞으로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지를.
*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순간까지도 아무런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오빠가... 제가 싫다면 포기할게요... 그런데 제가 동생처럼 여겨져서... 제가 아이돌이라서 머뭇거리는 거라면 이젠 동생하기 싫어요. 오빠한테 이제... 여자이고 싶어요.]
내가 알고 있던 녀석이 아닌 듯 행동해버린 유진으로 인해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내 마냥 사색에 빠져 입술을 매만질 수만은 없었다.
떠나기 전 마음에 걸릴 만한 일을 모두 처리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것이 나의 착각이었음을 이내 깨닫고 말았으니까.
“예, 죄송하게 됐네요. 사정이 이렇다 보니...”
프로젝트 데뷔 측과 내가 당초 노렸던, 시크릿 심사위원으로서의 나를 이용해 프로그램의 화제성을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이 사실상 수포로 돌아감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시크릿 심사 위원이었다고 밝히는 것보다 밝히지 않는 편이 나도 그렇고 프로젝트 데뷔측도 그렇고 보다 나은 선택이라 생각할 테니까.
“프로그램을 위한 2곡, 그리고 프로젝트 그룹을 위한 2곡은 최선을 다해서 완성시켜서 보내드릴게요. 네, 네. 첫 번째 곡은 안무까지 해서 보내드리도록 할게요. 네, 네. 저 때문에 계획에 차질이 빚어져서 죄송합니다.”
그래서 당초 계획했던 것보다 더욱 많은 곡들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비록 시크릿 심사위원 자체가 저쪽에서 내게 추가로 부탁한 사안이긴 하지만, 나 또한 흥미가 돋아 수락했던 것이기에 어디까지나 직접적인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볼 수 있었으니까.
“제 이름값이 없어도 충분히 먹힐 만한 곡들일 겁니다. 예, 예. 저도 제 이름이 밝혀지길 원하지 않아서요. 한국 갈 일은 없을 겁니다. 예비군 훈련 때문에 잠깐 가긴 하겠지만... 감사합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곡에 대한 걱정은 하지마시고요.”
뭐, 그 연습생들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더불어 내 활동의 흔적이 밝혀지지 않는 게 보다 내가 원하는 결과라는 점에서 그런 것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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