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85 2017 =========================================================================
#285
[너무 귀여워.]
녀석에게 저런 모습이 있는 줄 몰랐다. 당당하고 자기감정에 솔직한, 때로는 촌철살인으로 나를 일깨워주던 녀석이지만 아기들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러면서도 좋아 죽는 모습들은 내게 꽤나 색다르게 다가왔으니까.
“누우나!”
[지혁! 뭐라고 하는 거야? 응? 누우나? 이게 무슨 뜻이야?]
그래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테일러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버렸다. 정작 녀석은 그런 내 행동보다는 사랑이의 누나 소리에 관심을 더 가지는 듯 했지만.
[까르르]
“누우나!”
어쨌든 녀석이 한국에 온지도 벌써 3일이 지났다. 본가에 온지는 이틀이나 되었고.
뭐, 여전히 어째서 녀석이 한국에 왔고, 어째서 다른 곳이 아닌 이곳에서 벗어날 생각도 없이 머무는 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이들을 돌보며 너무나도 좋아하는 녀석과 더불어 어느새 녀석을 귀한 손님처럼 대하던 가족들 또한 제법 편한 태도로 녀석을 대하기 시작했으니까. 뭐, 나도 녀석이 저렇게 우리 집에서 세상 편하게 삼선 슬리퍼를 신고 다닐 줄은 몰랐지만.
[그런데 오늘 무슨 날이야? 아침부터 분주하네?]
그나저나 녀석과 함께 설날을 보내게 되다니, 참.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광경인지라 감회가 새로웠다. 내 운동복에 삼선 슬리퍼를 신고 있는 녀석이 세계적인 팝스타라니. 하하.
*
[한국 명절이야. 새해를 기념하는.]
[새해? 오늘이?]
[음력으로 설이거든. 오늘이.]
[아하!]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 인기척조차 느끼기 힘들었던 집이 더욱 달라보였다. 걷는 것과 말하는 것에 재미가 붙인 듯 연신 소리를 지르며 집 곳곳을 쏘다니는 예쁜 동생들과 더불어 아침부터 분주하게 설 준비를 하고 있는 우리 가족들 그리고 이를 흥미롭다는 듯 보더니 어느새 두 손 걷고 옆에서 서툴게나마 도우고 있는 테일러까지.
이런 게 가족인 것일까. 사람 사는 것이 이런 것일까.
숨 막힐 듯한 적막만이 가득하던 집안에서 사람 냄새 그리고 웃음소리와 분주함이 가득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는지라 순간적으로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 나이 스물일곱, 결코 적지 않은 나이이지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눈동자에 고일 정도로.
[이건 뭐 만들려고 그러는 거야?]
때마침 테일러 녀석이 식탁위에 올려 진 만두소를 보고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면 끝내 눈물을 흘릴 뻔했다.
하아. 강지혁, 네 나이가 몇 살인데 이렇게 눈물이 헤프냐. 자식아.
[만두야. 한국에서는 설날 때 떡국이라는 스프를 해먹는데, 거기에 만두를 넣어서 먹기도 해. 우리 가족은 만두를 좋아해서 무조건 넣지만.]
[만두? 만두면 딤섬?]
[응? 음... 맞아. 그거라고 보면 돼.]
[그럼 저건 언제 만드는 건데?]
[어? 아마 작은 엄마랑 누나가 장 보고 오면 만들지 않을까? 뭐, 방앗간 간 삼촌은 금방 올 테고 형은 일 때문에 저녁에 온다고 했으니까.]
그래도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은지,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것들이 보일 때면 곧잘 이에 대해 물어오는 테일러 녀석 덕에 감정을 정리하는 게 한결 쉬워졌다. 정작 녀석은 만두소를 보며 이제는 아예 만두까지 만들어볼 참인 지, 계속해서 꽤나 관심 깊게 부엌 쪽을 살펴보는 듯 했지만.
“오빠! 옵빠! 사낭이 아나줘! 아나줘!”
“나도! 나도! 히망히 안나줘!”
“아냐, 소망이! 소망히!”
어쨌든 테일러 녀석에게만 신경을 쓸 처지가 아니었는지라 이내 귀여운 여동생들을 한 아름 안아들고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장작도 다 패놨겠다, 전과 각종 요리를 만들어 먹을 재료가 오기 전까지 내가 할 일은 귀여운 동생들과 놀아주는 것 외에는 없었으니까.
하아. 좋다. 좋아.
*
“그래서 왜 온 거라니?”
“어?”
하루 종일 설음식이다 뭐다 준비를 했더니 하루가 금세 지나가버렸다. 그 덕에 가족들 모두가 배도 부르고 하다 보니 꽤나 이른 저녁인데도 전부 골아 떨어졌고 말이다.
그렇게 삼촌과 뒷정리를 끝내고 나란히 정원 벤치에 앉아서 차 한 잔을 하게 되다보니 얘기의 주제가 자연스럽게 테일러 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꽤나 활기찬 명절 모습과 더불어 다른 할 얘기도 많을 테지만 아무래도 지난 며칠 동안 우리 집에서 지내고 있는 테일러만큼 화제가 될 만한 얘기도 없을 테니까.
“갑자기 한국에는 왜 온 건데? 알아보니까, 에이전트도 모르는 일이라 하고 그럼 이렇다 할 공식행사도 없다는 말 아닌가? 아니면 그냥 언론에서 말하는 단순 휴가. 뭐 그런 거야?”
“잘 모르겠어.”
다만 정작 녀석을 데려온 나조차도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어?”
“물어본 적은 있는데. 분위기가 조금... 그래서 그냥 캐묻지 않기로 했어.”
그런 나의 대답에 삼촌 또한 순간이나마 당황한 듯 했다. 아마 삼촌 입장에서는 갑작스럽게 녀석을 데려온 나이기에 무엇이라도 이에 관련된 얘기들을 들을 수 있겠다 싶었을 테니까.
뭐, 그래도 마냥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미국에서 적응할 때나, 다른 일로 꽤 힘들었을 때 나한테 힘이 돼준 친구야. 그러니까, 나도 녀석이 힘들 땐 도움이 되고 싶어. 그래서 녀석이 말하기 힘들어하면, 도움을 요청하기 전까지는 물어볼 생각 없어. 궁금하긴 하지만.”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아니면 아무 일도 아닌데 단순히 내가 과도하게 녀석을 걱정을 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들을 떠나서 녀석에게 무엇인가 도움이 되어주고 싶다는 마음은 항상 간직하고 있었으니까.
“누가 뭐라 했냐? 이게 삼촌을 아주 뭐로 보고.”
뭐, 그런 말을 하는 내 얼굴에 이런 심정들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갔나보다. 삼촌이 도리어 무안함을 감춰보려는 듯 곧바로 나를 타박했으니까.
“애들도 그렇고 지혜한테도 사진이나 뭐 그런 걸로 불편하게 하지 말라했으니까, 편히 쉬다가라 해라.”
그래도 삼촌이 테일러가 이곳에서 편하게 있도록 신경써준 바가 적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그저 고마웠다.
“뭐, 아예 여기에 눌러 살면서 지혁이 너랑 그렇고 그런,”
“삼촌!”
아주 틈 만나면 조카바보 모습을 내보여서 문제지만.
“이게 요즘 들어서 틈만 나면 삼촌한테 큰 소리는.”
도대체 이 조카바보 모습은 언제쯤 삼촌에게서 사라지는지 모르겠다. 무슨 말을 하기가 무섭게, 어떤 행동을 보이기가 무섭게 발동되는 저 액티브 스킬이 이제는 놀라움과 귀찮음을 넘어선 두려움까지 내게 선사할 지경이었으니까.
“나랑 테일러는 진짜 친구 사이야. 그런 사이 아니니까 그런 말 좀 하지 마.”
하아.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 조카바보가 내 삼촌인 것을.
삼촌이 내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단순 조카, 삼촌 관계에서 가질 만한 감정으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기에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삼촌일지라도 내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이고 또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자식이 어디서 능청이야? 너 민재한테는 다 말했다면서.”
“뭐, 뭐?”
“그 속옷 화보 찍었던 모델이랑도 테일러랑도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다 들었는데 이게 아주 삼촌을 물로 보고!”
다만 내게는 조카 바보 삼촌뿐만 아니라, 아주 입이 싸도 너무 싼 잇몸 삼촌 또한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이 사람들이 진짜.
하아. 세상은 썩었어.
*
넓디넓은 공간. 그리고 그곳을 가득채운 고풍스러운 각종 가구들은 이 공간의 주인이 어떤 인물인지, 어떤 사회적 지위를 지니고 있는 이인지를 여실히 드러내주었다.
하지만 두바이 5왕자 세이크 함단빈 모하메드 랄 막툼의 이런 공간들은 꽤나 검소한 편이었다. 다른 왕자들의 궁은 그의 궁에 비해 작게는 3배, 크게는 5배에 가까운 크기를 자랑했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황량한 사막이 아닌 잘 꾸며진, 수많은 돈을 쏟아 부어 만든 푸른 숲이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으니까.
그러나 사내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왔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외척관계를 자랑하듯 자금이면 자금, 국제적 정치면 정치, 그 어느 것에서도 소홀함 없이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는 형제들에 비해 터무니없을 정도로 소박한 생활을 누리고 있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 자유로웠으니까. 그리고 왕가의 자제로서 수많은 귀족들과 국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또한 아버지인 국왕으로부터 강력한 신망을 얻고 있었으니까.
[주군, 소신 하무르입니다.]
그렇게 한참동안 흔들의자에 앉아 사색에 빠져있던 그에게 스스로를 주군의 방패, 여벌의 목숨이라 칭하는 가신 하무르가 다가왔다. 그것도 그가 너무나도 기다린 소식과 함께.
[지혜롭고 영명하신 국왕폐하의 강력한 의지가 표결권을 가진 위원회 의원들의 정족수 이상 동의를 이끌어내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주군.]
수많은 형제들을 제치고 국왕인 아버지의 신임을 얻었을 때 그리고 자신이 하나, 둘 해낸 성과에 국민들의 지지가 그에게로 쏟아졌을 때. 그 모든 순간들과 함께 지금 또한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는 생각에 그의 입가에 미소가 맺히기 시작했다.
[국왕폐하께서는 이번 사막 프로젝트 진행에 대한 일체의 책임과 권한을 신의 이름을 대신해 주군께 하사하시었고 프로젝트에 대한 왕자님의 지분 또한, 왕가, 국영기업, 국가펀드에 이은 4번째......]
작년 9월부터 시작된 지루한 정쟁 끝에 그의 아버지는 끝내 그가 제안한 모든 사안들의 밑바탕을 깔아주었다.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버즈 두바이 사업과 차후 진행될 대규모 프로젝트들을 감안하면 더 이상의 자금소요는 제아무리 왕가라 할지라도 부담이 될 텐데 말이다.
그래서 더욱 감사했고 의지를 단단히 할 수 있었다. 이런 기회 하나, 하나는 나라와 국민에는 도움이 될 테지만 그 밑바닥에는 수많은 이해가 얽혀있다는 것을, 이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복잡하고 지루한 정쟁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그는 모르지 않았고 또한 잊지 않을 테니까.
*
[...... 추가적인 지원은 아무래도 힘들 수 있으나, 총 1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국왕께서...... 다시 한 번 감축 드립니다. 주군.]
15억 달러에 달하는 버즈 두바이 사업. 그리고 지금 한창 계획 중인 140억 달러에 달하는 프로젝트까지.
이것만으로도 그는 형제들 간에서 단연 앞설 수 있었다. 하지만 작년 9월 그는 또다시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것도 무거운 책임감과 부담감에 힘들고 지쳤을 때 힘이 되어주었던 이에게서.
[우리 조상들은 사막을 터전으로 살아왔습니다. 비록 사막의 혹독한 기후를 몸으로 견뎌내는 고단한 삶이지만, 외부인들과 떨어져 사막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는 독특한 생활 방식은 ‘참을성’과 ‘육체적인 지구력’을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만들었고 우리들은 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힘들 때 힘이 되어주었다는 사실 때문이어서 일까. 자신도 모르게 감성적이 되어 속내를 꺼낼 때면 그 스스로도 새삼 놀라곤 했다. 그를 잘 아는 지인들은 흔히들 그를 냉혈의 통치자라 일컫곤 했으니까.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관련된 모든 것들을 스스로 감내하는 인간이었으니까.
[하지만 요즘 들어 백성들뿐만 아니라 우리들 왕가의 자제들마저도 이런 전통을 등진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혹독한 기후로 인해 사막 천지이던, 솔직한 말로 불모지나 다름없던 왕국의 땅들이 검은 보석들로 인해 더 이상 쓸모없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죠.]
어쨌든 어째서 사랑하는 아내들도 아닌, 그렇다고 자신의 충직한 가신들도 아닌, 어떻게 보면 일개 가수에게, 그것도 타국인에게 그런 속내들을 꺼내게 되는지 그는 지금까지도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럼 왕국 음... 그러니까, 왕자님들뿐만 아니라 국민들 그리고 외국 사람들도 두바이 조상님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려주면 되지 않을까요?]
[뭐, 사막에서 일박이일? 이박삼일? 그 정도 지내면서 낙타도 타고...... 손님들이 오면 성대히 접대해줬다는 그... 왕자님 조상 분들이 그러셨다는 전통처럼 밤에는 그런 파티도 하고 하면서 사막의 정기? 호연지기? 음... 여튼 그런 걸 절로 느끼게 하면...]
다만 몇 가지는 확실했다.
[미스터 강은 지금 한국에 있나?]
[예, 그렇습니다. 주군.]
새로운 기회를 얻은 만큼 이제는 그가 은인에게 보답해야 할 때라는 것을, 그리고
[인편을 통해 이 서신을 전달토록 하라. 이는 나의 지엄한 명이니만큼 정중, 또 정중함으로 이를 전달해야할 것이다.]
[예, 주군!]
그를 조금이나마 더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을 숨기질 못하겠다는 것을.
============================ 작품 후기 ============================
17일 00시 07분 예약 아이템 연재분입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신분들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코멘트 퀴즈]
Q. 주인공이 가수 데뷔후 처음으로 선 음악 생방송은 어디일까요? 그리고 그때 부른 곡의 제목은? 두가지 모두를 열거해주세요. (음악 생방송 이름을 적어주세요. 방송사는 적지 않아도 됩니다.)
[코멘트 퀴즈 선착순 정답자]
(1등 : vcnpav님 3점 /// 2등 : 사랑그사람님 2.5점 /// 3등 : 칸르님 2점 /// 4등 : 햇볕님 1.5점 /// 5등 : 또바기다솜님 1점 /// 6등 : evollove 0.5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