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84 2017 =========================================================================
#284
정장을 입은 사내가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아빠!”
“우리 딸들 왔어?”
“응! 아빠 많이 기다렸어?”
“아니. 아빠도 방금 전에 왔어. 어이구 우리 막내딸. 얼굴이 반쪽이 됐네. 반쪽이.”
그리고 이내 들려오는 목소리에 한눈에 봐도 중후해 보이는 사내의 얼굴은 어느새 바보 같은 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 아무리 회사 내에서 그리고 그 밖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꽤나 높은 위치에 있는 사내라 할지라도 가족 내에서 그는 그저 딸 바보일 뿐이었으니까.
“배고프지? 엄마는 친구들이랑 있다니까 오늘은 아빠랑 데이트하자. 자! 춥다. 얼른 들어가자.”
하지만 오랜만에 본 딸들의 얼굴이 핼쑥해서일까.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들을 보는 사내의 웃음에는 걱정과 같은 복잡한 감정들 또한 담겨있었다.
사회생활을 적지 않게 했고 또 지금도 하고 있는 사내로서도 감히 어림잡기 힘든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딸들이 안쓰럽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대견하기도 했으니까.
“오랜만이시네요. 유 사장님. 저번에 남 사장님 따님 분 결혼 턱 내실 때 이후로 처음이시죠?”
“허허. 벌써 그렇게 됐나?”
“그럼요. 호호. 그런데 예전에 몇 번 따님들이 학교 다닌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벌써 이렇게 컸나요? 어머? 혹시?”
“안녕하세요. 유재연입니다.”
“안녕하세요. 유지연입니다.”
“어머나! 사장님이 딸 자랑을 그렇게 하시더니...”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랜만에 만난 딸들을 양옆에 둔 사내의 발걸음은 한결 산뜻했고 가벼웠다.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그래서였을까.
이 집의 단골메뉴를 시킨 뒤 딸들과 근황 얘기를 나누던 그의 뜻밖의 말을 입에 담게 되었다.
“우리 딸들은 언제 결혼해서 아빠한테 손주들 안겨다줄까?”
비록 최근 1, 2년 사이에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딸들과 더불어 자신 또한 사업 때문에 바쁜 나날들을 보내야 하는 바람에 서로 얼굴을 마주보기가 힘들어졌지만, 그걸 고려하고서라도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그를 잘 아는 주변 지인들이 본다면 꽤나 놀랄 만한 내용을 담고 있었으니까.
“어?”
“아빠?”
그 덕에 밑반찬들을 살짝살짝 집어먹던 딸들, 유지연, 유재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딸들은 아무 놈한테도 못 줘.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못 줘!]
[우리 딸들 데려가려면 적어도 나같이 성실하고 똑똑하고 잘생기고 또 돈도 잘 벌고 몸도 좋고 우리 딸들만 바라보고 아니, 그래도 못 줘! 우리 딸들이 얼마나 예쁘고 착하고...... 내가 평생......]
결혼은커녕 연애도 못하게끔 딸 바보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것이 바로 그녀들의 아빠였으니까.
*
“어디 마음에 드는 남자들은 있고? 아니, 남자친구는 있고?”
오늘의 주제는 딸들의 연애사업인 것일까.
“치... 남자친구 생겼다고 하면 난리칠 거면서. 그리고 나 아이돌인데 무슨 연애야? 아빠 바보.”
“우리 딸들이 너무 예쁘니까, 남자 놈들이 가만 안 둘 것 같아서 그렇지. 그런데 진짜 없어? 우리 딸이 이렇게 예쁜데?”
“치...”
오랜만에 만난 아빠가, 아빠답지 않은 말들을 꺼내자 유지연의 입에 미세한 미소를 맺혔다. 손자, 손녀 얘기를 하며 딸들의 연애사업에 대한 것들을 끄집어내려는 아빠의 모습이 꽤나 귀여웠고 그런 아빠의 속셈에 빠져든 동생의 모습 또한 귀여웠으니까.
“그래도 이제 슬슬 연애도 해보고 그래야 나중에 결혼도 잘하고 좋은 신랑감도 데려와서 아빠한테도 아들한명 만들어주지. 안 그래?”
그런데 막상 음식들이 하나, 둘 테이블 위에 올라오고 본격적으로 식사를 할 때까지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예상과 달리 이 화제를 좀처럼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지연 그녀로서는 꽤나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중후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가족 내에서는 딸 바보에 유머러스한 남자인데다가 속칭 ‘낄끼빠빠’를 잘 아는 남자였으니까.
“재연이는 아이돌이니까 그렇다 쳐도. 우리 예쁜 장녀는 어떻게 된 게 지금껏 아빠한테 남자친구 한번 소개 안 시켜주네? 설마하니, 지금까지 남자친구 한 명 안 사귀어 봤을 리는 없을 테고?”
더군다나, 딸들의 연애사업에 대한 얘기들을 끄집어내려는 속셈의 한 부분일 줄 알았던 아빠의 떠보기가 단순 떠보기가 아닌 것 같은 예감까지 들었으니 오죽할까.
“뭐래. 왜 그러는데 아빠. 그것도 갑자기.”
때마침 평소 애교도 많고 그래서 집안의 분위기 메이커인 동생을 향하고 있던 화제의 상대자가 갑작스럽게 자신이 되자, 더욱 당황할 수밖에.
그 덕에 졸지에 큰 딸의 타박을 받게 된 아빠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유지연 또한 아차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런 경우는 흔치 않지만 그래도 더 이상 이런 쪽으로 화제를 유지시켜서는 꽤나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할 테니까.
하지만 그날따라 그녀의 아빠는 집요했고 또 용감했다. 평소 자신에게 살갑게 다가오지 않는, 타고난 성격이 차갑고 애교라고는 단 1도 없는 큰딸의 답을 기어코 듣고 말겠다는 듯 또다시 돌 직구를 던졌으니까.
“아빠는 그 강지혁인가 그 가수? 배우? 너 상대역으로 나왔던 그 사람 정도면 아빠도 한번 생각은 해볼 수도 있는,”
“아빠!”
다만 그 돌 직구가 변화구가 되어 애먼 데에 꽂혀버렸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 순간 방심하고 있다 돌 직구에 그대로 맞아버린 동생의 표정이 시꺼멓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그녀이기에 서둘러 그녀의 아빠를 말리려했다.
“아빠가 그 사람 팬인데 사인 한 장을 안받아주더니 우리 딸 이제 아빠한테 큰 소리까지? 정말 뭐 있는 거 아니야? 뭐, 사람 됨됨이는 아빠가 주변 지인들 통해서 살짝 알아보니까, 꽤 괜찮은 것 같다만. 그래도 우리 딸이랑 만나려면 일단 나를 거쳐야,”
“아빠! 무슨 소리야, 갑자기?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와? 그리고 강지혁이랑 나 아무사이 아니야. 그러니까, 그런 얘기 하지 마.”
“정말? 혹시 숨기려는,”
“아빠!”
정작 그녀의 아빠는 이런 그녀의 행동에서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과 같은 쓸데없는 말들을 맹신한 듯 본인 스스로의 추측을 확신으로 바꿔가는 듯 했지만.
따라서 더 이상 이런 분위기가 지속되었다가는 간신히 동생의 마음을 풀어낸 지난 며칠간의 노력들이, 아니 지난 수개월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린다는 생각에 그녀는 그때부터 아빠의 질문 아닌 질문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제발 이 상황이 지금 이 순간을 기점으로 마무리되길 바라면서.
*
“하아. 졸라 심심하네. 어이, 거기 누구 없냐?”
대한민국 남자라면 피해갈 수 없는 의무인 군대.
군대는 수많은 대한민국 남성들의 영원한 안주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불합리한 대우와 말도 안 되는 시급은 일단 제쳐두고서라도 자유를 박탈당한 채 누군가의 지시로서 움직여야하는 2년간의 생활은 결코 가볍지 않았으니까.
“일병 김태섭! 여기 있습니다! 뭐, 필요하신 것 있으십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 소파에 누워있는 남자의 모습은 이와 달리 꽤나 가벼워보였다. 군인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풀어져있는 모습 심지어 핸드폰까지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은 현역보다는 차라리 예비군과 유사했으니까.
“아! 태섭이냐? 야, 말 편하게 하라니까. 왜 그러냐 자꾸? 왜 나 나쁜 사람 만들어? 여기가 군대도 아니고. 너도 이제 일병 꺾였잖아. 이병 때만 바짝 하면 됐지. 안 그래? 그리고 너 이제 핸드폰도 있잖아?”
“아! 예... 형.”
심지어 관등성명이 아닌 형, 동생으로 서로를 칭하기까지 했으니 오죽할까.
“여기서는 그냥 다 형, 동생이야. 가끔가다 본부에서 꼰대들 내려왔을 때만 잘하면 돼. 어차피 다들 사회 나가서 안 볼 사이도 아니고 너 방송작가, 나 가수해먹다보면 적어도 몇 번은 마주 칠 텐데 뭐 하러 서로 불편해지냐. 뭐, 네가 방송작가하면서 나 한 번도 안 볼 생각이면 모르겠지만. 왜? 혹시 너 방송작가 복귀했을 때 나 안 쓰려고?”
“아, 아닙니다. 아니, 아니요.”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편한 생활을, 군인답지 않은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들의 생활은 사회에서의 관계대로 변해갔으며 이는 일종의 대세와도 같았다.
“내일 파주 공연 끝나고 뒤풀이 거하게 할 것 같으니까. 아침만 단단히 먹어둬라. 휴가 나갔던 사람들도 오늘 들어와서 모레 휴가 나간다니까, 같이 마실 거야. 무슨 뜻인지 알지?”
“예?”
“자식이, 눈치 없긴. 내일 아주 들이부을 것 같으니까 아침 제대로 챙겨먹으라고 인마. 어차피 공연 준비하느라 점심도 제대로 못 먹을 텐데 아침까지 안 먹어두면 버티겠냐? 그 사람들이 누군데? 뭐, 휴가 나갔다온 사람들이 술이며 안주까지 제대로 비싼 거 살 테지만.”
“예. 형...”
각종 홍보 공연과 더불어 그들을 통솔해야 될 지휘관 자체가 민간인인 상황 그리고 그들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 자체를 떠올리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어때? 내일 파주 공연 끝나고 한판?”
“예?”
“아! 너 여자 친구 있다했지? 이야. 좋겠네. 김태섭이. 휴가도 이미 50일 정도 모아놨지? 그 정도 모아놨으면 상병 꺾이면 전역 때까지 스트레이트로 휴가 쓸 것이고... 음... 이제 핸드폰도 있으니까 매주 외박 나갈 때마다 아주 후끈, 후끈 어? 하하!”
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선임인 이종연의 이와 같은 갑작스러운 제안은 여전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상병 계급이 꺾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전역할 때까지의 모든 일수를 전부 휴가로만 채울 수 있는 보직 특성상, 이제 막 상병이 된 이종연은 부대 내 실질적인 왕고였으니까. 그리고 지금 그가 자신에게 제안한 한판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모르지 않았으니까.
“너 목도 아프고 어깨도 뻐근하다며.”
“예? 그렇긴 한데...”
“같이 가자. 내가 파주에서 기가 막히게 하는 데 알어. 넌 마사지 받으면서 몸 좀 풀고 나는 재미 좀 보고. 어때? 에이, 걱정하지 말라니까? 소문 절대 안나. 거기 우리 부대 형들한테서 소개받은 데라서, 비밀 보장 무조건 되니까. 야! 형 잘나가는 연예인인데 가는 거 보면 모르냐? 진짜 안전하다니까?”
며칠 전 강릉에서 있었던 공연의 뒤풀이에서 실수로 넘어지는 바람에 목과 어깨의 통증이 간간히 느껴진다는 말을 용케 기억하고 있는 듯한 이종연의 말에 김태섭 또한 내키진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부대 자체가 형, 동생 하는 분위기가 되어버렸는지라 섣불리 제안 자체를 대놓고 거부하기가 힘들었으니까. 그리고 그 스스로도 구설수에 오를 만한 ‘직접적인’ 일은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어쨌든 그런 그의 알겠다는 대답에 이종연은 꽤나 만족한 듯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덕에 안 그래도 담배연기로 뿌연 실내가 더욱 뿌옇게 변해버렸지만.
“그나저나 이번에 온다는 애는 언제온데? 올 때 된 것 같은데?”
“누구 말씀하시는 건지... 아! 김영진 일병 말하시는 겁니까? 아니, 말하는 거야? 형?”
“어! 그래그래. 걔 여기로 전출결정 됐다며. 정확히 언제쯤 온다고 소문 들은 거 있냐? 뭐, 잘하면 내일 뒤풀이가 환영 파티 되겠네. 이거 단단히 뽑아먹어야겠다. 그치?”
그렇게 이렇다 할 훈련 일정 자체가 없는 부대 특성과 더불어 그들을 통제할만한 책임권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 힘입어 그들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새롭게 이곳으로 올 신병 아닌 신병 얘기부터,
“걔가 너보다 군번 빠른가?”
“저보다 한 달 정도 느린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뭐 친구네. 아니, 네가 나이는 적으니까 동생이네. 어쨌든 잘 지내라. 너도 여기서 인연 하나, 하나 만들어 나가는 게 사회 나가서도 도움 되면 됐지 해가 되진 않을 테니까.”
“예, 형.”
“어? 근데 걔 여자 친구가 슬희 아니었나? 트윙클?”
“예. 그렇다고 들었어요. 공개열애 발표했을 때 괘나 시끌벅적했으니까요.”
“오호라...”
그 신병과 관련된 콩고물 얘기까지 전부 그들의 관심을 자극할 만한 사안이었으니까.
============================ 작품 후기 ============================
[이번 편은 예약 아이템을 사용하여 16일 00시 07분에 올라갈 연재편입니다.]
쿠로사키쵸님 후원쿠폰 3 장 감사합니다.
gloomysomeday 후원쿠폰 18 장 감사합니다.
햇볕님 후원쿠폰 4 장 감사합니다.
룰리랄라님 후원쿠폰 18 장 감사합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원고료 쿠폰 주신분들 정말 큰 힘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실히 연재하겠습니다.
전에 여러분 모두를 위한 이벤트를 계획하고 있다 언급한 적 있는데요. 그게 바로 잭팟 참가 결정입니다. 솔직히 3단계는 참가 작가에게 별 혜택없는(정산이나 그런 것들 전부 제외여서 도리어 참가 결정이 손해에요.)아니 혜택이 없는 이벤트라서요. 그래도 제가 전체적인 수정 사항이 많은 만큼 독자분들을 위해 참가하는 게 하나의 배려라고 생각해서 참가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료기간동안 정주행 하시면서 바뀐 부분 숙지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작품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코멘트 퀴즈]
Q. 지혁은 LA에 대저택을 소유하고 있는데요. 이 대저택에서 가사와 관련된 일을 하는 도우미 그리고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이들의 관리자 역할을 하고 있는 이의 이름을 열거해주세요. (힌트 : 가사도우미와 경비대장의 이름은 각각 3글자입니다.)
(1등 : 라이몬드님 3점 /// 2등 : evollove님 2.5점 /// 3등 : 성장기님 2점 /// 4등 : Te4Rs님 1.5점 /// 5등 : 千變千雨님 1점)